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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출간되자마자 읽었는데, 최근 1년 사이에 읽은 책 중 가장 울림이 강했다. 감동적인 메타포가 빈틈이 많은 듯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 뭔가 뭉클한 감정이 온몸을 한껏 채운다. 그 여운으로 쉽게 책을 내려놓질 못했다. 읽은 후기를 적으려니 그 혼돈과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쓰고 싶은 말이 입속에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섞이고 충돌하였고, 그런 압박감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 간단치 않음에 그냥 독후기를 포기해 버렸다. 1980년 전후의 이란과 대한민국은 정치·사회적 환경이 상당히 비슷하다. 1979년 2월 이란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붕괴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한다. 이어 1980년 9월에 이라크 전투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폭격하면서 이란·이라크전쟁이 8년간 이어진다. 어수선한 분위기…. 우리 또한 그랬다. 1979년 10월, 대통령이 최측근에 의해 살해되고 정치의 봄이 오는가 했더니 이듬해 5월의 핏빛 진혼곡이 온 나라를 얼어붙게 하였다. 폐를 찌르는 듯한 최루탄에 눈물 흘리고 이리저리 쫓기던 80년 전후의 대학가…. 그 시절이 그랬다…. 내 젊음이 그 속에 있었다. 뱃속에 여아를 품은 여인이 있다. “안 돼, 넌 여자니까 시위하러 가지 마. 위험하다고.” 오빠가 인정사정없이 따귀를 철썩 갈긴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고집스러운 검은 눈으로 오빠를 노려보다가 굳게 쥔 주먹을 쳐들고 거리로 나선다. 여자의 목소리가 분노에 찬 군중의 함성에 뒤섞인다. 또다시 수많은 따귀를 맞고 욕설을 듣는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스무 살의 그녀를 멈출 수 없다. 오빠의 따귀도, 임신도, 죽음의 공포도. 1980년. 테헤란 대학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총성과 비명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나는 위험을 느끼고 뱃속 한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다. 이 배는 억제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죽음으로 나아간다. 젊은 어머니가 교내 복도를 힘껏 달린다. 피 웅덩이에 닿은 발이 미끄러져 몸이 기우뚱한다. 핏자국은 소름끼치는 비명이 흘러나오는 강의실까지 이어져 있다. 다가가 안을 엿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책상 위에 누운 여자와 강간하려는 남자가 보인다. 여자 옆에 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으스러진 청년이 바닥에 엎어져 있다. 젊은 어머니는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게 손으로 입을 막는다. 공포에 사로잡혀 다리가 후들거린다. 종이들이 사방에 흩날린다. 강의 노트들, 등록신청서, 서류들이. 책들은 찢어졌고 책장은 모두 쓰러져 있다. 서랍을 뒤지는 손, 울부짖는 입, 발에 밟히는 여자들의 베일, 머리를 쥐어뜯는 손. 바닥에 쓰러진 여자들이 질질 끌려간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남자들은 더러운 창녀라 욕하며 끌고 간다. 핏발 선 눈으로 못이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며 외친다.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 신은 위대하다)!” (14-15쪽) 책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며, '세 번의 탄생'으로 구분하여 풀어내고 있다. 저자 마리암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과 이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여섯 살의 나이에 부모와 함께 망명한 파리에 정착하여 프랑스어를 배우던 시기, 그리고 2003년 고국인 이란을 방문하여 그동안 억눌려 있던 자신의 '언어'와 만남으로써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로 나뉜다. 소소한 듯한 망명자의 일상을 섬세한 감성으로 엮어 깊은 내면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모국어)에 대한 회귀이다. 이를 통해 불안스레 방치된 이방인(망명자)으로서의 ' 프랑스라는 이국의 땅에서 화자에게 페르시아어는 잃어버린 언어이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소심하게 몇 마디 단어와 소리를 내보기도 했으나 단어들은 무지와 불신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때로는 쓰디쓴 조롱의 웅덩이에 처박히기도 한다. 이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 세 사람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새로운 나라의 공식 언어라는 강력한 경쟁자에 치이며 생기와 활력을 잃어간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톨러런스(tolerances)의 프랑스 사회지만 언어로 인한 차별에 그들은 힘들어한다. 두 언어가 다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뛰어난 언어지. 뤼미에르 형제와 몰리에르가 사용한 언어라고." "페르시아어는 바이올린 활처럼 네 몸을 켜서 떨리게 만들어." "그저 망명과 축출의 언어, 트라우마의 언어일 뿐이야." "나는 네 어머니의 언어가 아니라, 네 언어의 어머니야." "내 얘기 잘 들어. 저건 말장난에 불과해. 그저 횡설수설하는 것뿐이라고." "넌 내게로 돌아올 거야. 나의 물결치는 글자와 부드럽고 구슬픈 음악으로, 페르시아 시로 말이지." "저 노친네는 도대체 자기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넌 아무 데로도 돌아가지 않아. 앞만 보며 곧장 가면 돼." "넌 돌아올 거야. 난 알아. 지금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도록 널 놔줄게." 그녀의 언어가 떠나 버렸다. 소녀는 눈을 감고 모국어를 꿀꺽 삼켰고, 언어는 소녀의 뱃속으로, 그녀 안에 가장 깊숙이 위치한 동굴 같은 은신처로 떨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딸에게 자신의 언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려 했지만, 소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에 거부감이 들었고 눈에 어린 슬픔은 더욱 싫었다. 겁이 난 소녀는 배우기를 거부했고 입에는 자물쇠를 채웠다. 아버지는 딸의 두려움과 거부를 이해하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 없이 다시 땅을 일구러 갔다. 소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후회한다. "가끔은 그때 아버지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버지도 이곳 학교의 언어를 배우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208쪽)." "소녀는 예전에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들판으로 돌아가 차분히 주의 깊게 응시한다. 한참 동안 땅을 본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는 격렬한 충동에 이끌려 밀밭의 황금색 땅을 손으로 파헤친다. 기적처럼, 소녀는 땅속에서 아버지의 글자들과 알파벳을 찾아낸다. 딸을 위해 보물처럼 소중하게 땅에 묻어둔 글자들을(208쪽)." 화해의 장이다. "낯선 소리가 들린다. 보도를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늙은 여인을 본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지만 익숙한 냄새에 그리움이 밀려온다. 노부인이 옆에 앉는다." "내가 말했잖니. 내게로 돌아올 거라고. 이제 드디어 돌아왔구나." "누구세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나는 너의 모국어야. 줄곧 너를 기다렸단다…. (214쪽)." 우리에게 '언어'는 뭘까? 언어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결정체이며 생명체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했다. "우리의 얼굴에는 흉터가 있었다. 조국을 떠남으로써 두 동강 나버린 흉터다. 나는 그 흉터를 감쪽같이 붙여서 남들과 똑같아지고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내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었다(164쪽)."라는 의미가 그런 거겠지?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가 살짝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언어는 사고의 틀이다…. "나는 나무의 화환 / 아이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킨다" 처음 읽었을 때 할머니와 늙은 여인의 관계가 헷갈렸다. 언제나 포근하고 든든했던 할머니는 소녀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소녀의 내면에서 나와 다독거린다. 그리고 짙은 고독으로 둘러싸인 노부인은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의인화된 페르시아어였다. 2017년 공쿠르 최우수 신인상과 우에스트 프랑스 문학상을 받은 이면엔 이런 은유의 기법이 인정받은 면도 있으리라…. 의사의 꿈을 접고 아이와 함께 남편이 있는 프랑스로 떠나는 작가의 어머니 모습에서 가부장 제도에 매여 담장을 넘지 못했던 우리네 여성의 모습이 겹쳐진다. 자유(프랑스)와 구속(이란)의 대비되는 문화를 보면서 이란이 여러모로 우리와 비슷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세 번 읽었다. 그렇게 했던 원동력은 책의 전개가 나의 대학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쫓겨본 그 경험…. 잊고 있었던 그 날의 절박함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치에서 책을 평가할 수밖에 없기에 이 책이 2018년에 읽은 최고의 책은 아닐지라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매김 한다. 책의 원제는 '마르크스와 인형 Marx et la poupee"'인데 (작가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이 제목은 '첫 번째 탄생'의 한 부분을 강조했을 뿐이고 그렇게 와 닿지도 않는다. 이보다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이 작가가 의도하는 전체 주제를 잘 살릴뿐만 아니라 더 심오하게 느껴진다. 어느 분이 바꿨는지 몰라도 대단한 감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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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소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자전 소설이다 1980년 테헤란 대학에서 혁명에 가담했던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을 뻔한 태아의 언어로 시작해서. 2012년 테헤란의 택시 안에서 하피즈의 시를 듣는 32세 마리암 마지디의 행복한 모습으로 끝나는 자전 소설.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어린 아이의 상상인지 실제 경험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작가의 이야기꾼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 같다. 진지한 태도와 가벼운 유머가 적절하게 섞여 있다. “어머니는 뛰어내리고 나는 떨어진다. 당신은 허공에 매달려 있다. 떨어지는 것은 나다. 나는 떨어지고 당신의 배는 움푹 꺼진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웅크린다.” (16쪽) 자신의 풍부한 감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한 독백을 하기도 하고. 인형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쉼없이 교차하며 보여 준다. 독특한 방식의 자전 소설임에 분명한 것 같다. 때론 소설이 시적이기도 하다. “환한 달빛이 밤의 치마폭을 가른다. 마셔라, 그대는 이다지도 자비로운 순간을 찾지 못하리. 아무 근심없이 행복하라. 그대가 보는 이 달이 무수한 밤을 지새우는 우리 무덤에 창백한 빛을 보내리니.” (95쪽) 이것은 프랑스어와 페르시아어를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유혹의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정당의 아이로 자라다 “옷 속에 찬 기저귀에 부모님이 활동하는 정당의 회의 보고서가 숨겨져 있다... 아주 기똥찬 생각이었다... 사실 이 생각은 너무나 괜찮아서 보고서를 다른 지부에 전달해야 하는 동료들이 나를 빌리기까지 했다. 나는 이렇게 정당의 아이가 됐고, 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물건처럼 빌려주고 정치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낙심하여 머리를 쥐어 뜯었다.” (41쪽) 이렇게 기똥찬 일화를 겪으며 자라서 그런지, 정당의 아이로 자란 작가 마리암은 꽤나 재기발랄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1986년 7월, 파리 망명 “숱한 난관과 시련 끝에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는데 나는 오로지 공용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115쪽) 겨우 둥지를 틀었는데 공용화장실을 쓴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 두려움은 내 공간이 없다는 상징적인 은유라 할 수 있다. 그것만큼 불안한 이방인의 공포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2009년 6월, 테헤란 선거 반대 “그들이 우리 혁명을 훔쳐갔다. 그들이 우리 민주주의를 훔쳐갔다. 그들이 우리 선거권을 훔쳐갔다.” (72쪽) 조국에 다녀오고 싶어하는 아버지. 반복되는 역사. 이 역사의 반복은 꼭 이란의 상황만은 아닌 것 같다. 세계 어디에서고 일어나는 일이며,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것 같다. ▶두 언어의 싸움/ 나는 페르시아어를 배우지 않겠다 (172쪽 ~ 178쪽) 이 부분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작가가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 두 언어 사이에서 겪었던 심리적, 실제적 갈등이 농축된 부분이다. 두 언어의 싸움에서 ‘나’는 페르시아어, 그리고 또 다른 ‘나’는 프랑스어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뛰어난 언어지. 뤼미에르와 몰리에르가 사용한 언어라고.” “나는 네 유년기의 언어야” ... “페르시아어는 바이올린 활처럼 네 몸을 켜서 떨리게 만들어.” “그저 망명과 축출의 언어, 트라우마의 언어일 뿐이야. ... “승리하는 쪽에 서야지. 유령들 이야기에서 벗어나라고.” “나는 네 어머니의 언어가 아니라, 네 언어의 어머니야.” ... “넌 내게로 돌아올 거야. 나의 물결치는 글자와 부드럽고 구슬픈 음악으로, 페르시아 시로 말이지.” “저 노친네는 도대체 자기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넌 아무 데로도 돌아가지 않아. 앞만 보며 곧장 가면 돼.” “넌 돌아올 거야. 난 알아. 지금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도록 널 놔줄게.” ... 어머니는 한숨 쉬는 아버지에게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면 안 돼. 여기는 내 집이니까 페르시아어로만 말해라.” 당신의 침묵과 내 저항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었을까 ... 몇 주 후 나는 포기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내 자신이 싫었다. 페르시아어를 읽고 쓰는 것은 이미 거부했지만 적어도 집에서 말하는 것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178쪽)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도 이와 같은 아픔과 갈등을 겪었던 이민 세대들이 많았으리라. 일제 강점기 하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민족들도 많았으리라. 책을 읽는 동안 종달새처럼 이야기를 지어내는 마리암 마지디에게 감탄하면서도, 나는 내내 우리 민족의 상처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택시 안에서 만난 하피즈 2012년, 테헤란 택시 안에서. 작가 마리암 마지디는 택시 운전사로부터 하피즈의 시를 듣는다. 시를 좋아했던 작가는 다 알아듣진 못해도 중요한 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손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란이 제대로 보존한 유일한 것, 그리고 이란에서 건져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시라는 거죠.” (240쪽) 이 택시 운전사의 말에 나는 결국 울컥, 울 뻔 했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시인들이 떠올라서.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반면 작가는 테헤란의 끔찍한 혼잡 속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생전 처음으로 택시 운전사가 낭송해주는 시를 들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며, 옛날 옛적부터 있던 한 단어,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등의 단어들로 만들어낸 향연 속에서 행복해 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는 나무에 걸린 단어의 화환 아이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킨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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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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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라는 말은 신비하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기기묘묘한 이야기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매력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단어다. 마리암 마지디는 2017년에 첫 소설로 이 책을 출간하고 데뷔소설 분야에서 프랑스17년 공쿠르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란에서 프랑스로 탈출한다. 자신의 신념을 말하지 못하는 나라로부터 제대로 말하기 위해 살기 위한 탈출을, 그러나 도착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못해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딸 마리암은 진정한 자기를 찾기까지, 자기의 뿌리를 찾기 위해 현재와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들을 부유한다. 그녀는 떠다니면서 생각나는 단편들, 유령들, 가족들, 친구들, 그녀의 엄마와 아빠의 동지들에 대해 기억하고 말하고 그들을 소환한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이다. 고향을 떠난 자가 갖게 마련인 이산의 슬픔, 디아스포라! 프랑스에서는 낯선 곳에서 도착한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이란에서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버린 다른 나라 사람인 것이다. 그녀가 디아스포라로써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이 제대로 뿌리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시적인 언어로 기술한다. 이야기 중심이라기보다는 회상과 시적인 언어가 결합하여 그녀를 설명한다. 그래서 그녀의 시적인 문장을 가져와서 그대로 다시 쓰는 것으로 이미 충분할 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육체와 이미지를 물려받았다. 아니 훔쳐왔을 지도 모른다. "판타지와 불안으로 제조한 용액에 당신을 적신 후, 깨끗하고 숭고하게 변한 당신을 꺼낸다. 그 용액에서 끝없이 당신을 꺼내고 싶다. 당신이 영원히 죽지 않도록. 책상 위에 당신을 펼치고 해부한다. 당신의 팔과 다리를 가르고 가슴을 들어내고 내 탄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뱃속을 세밀히 관찰한다."(p23)
이란에서 그녀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익명의 사람들 중 압바스를 좋아한다. 그의 생기로 가득찬 검은 눈에서 그녀는 이 모든 걸 읽어낸다. "그의 눈은 웃을 때도, 웃지 않을 때도 반짝였다. 환하게 빛나는 시선을 지닌 사람. 압바스는 별똥별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긴 생애를 갖지 못할 것이다. 모든 걸 주고자 하는 사랑을, 심장이 감당 못 할 날이 올테니까. 심장은 언젠가 터져버릴 것이다. 그 속에서 분출된 사랑이 세상을 온통 물들였으면 좋겠다"(p37)
그녀는 프랑스에서 온통 낯선 것들과 싸워야 한다. 페르시아어를 쓰지 못한 채, 말 수가 줄어든 부모님들은 그녀가 조금 자라자 온전히 그녀에게 의존한다. "검은 곱슬머리 소녀는 상상 속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소녀는 외국어의 감옥에 갇힌 여왕이다. 여왕은 모국어로 쓴 비밀서한을 용맹한 기사에게 보내고, 기사가 달려와 여왕을 이 야만적인 언어의 감옥에서 풀어준다....소녀는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며 운동장을 돌아다닌다. 위안 가득한 상상속 이야기들이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 기다란 꼬리처럼 이어진다. 나는 이미 그 나이에 고통을 없애거나 아름답게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p138)
결국에 그녀는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한다. 뿌리가 어디 있는 지 잊으면 안되니까, "어린 소녀는 페르시아 알파벳을 잔뜩 그린 공책을 본다. 한 줄에 한 글자씩 연달아 써놓았다. 정성스레 베껴 쓴 서른 두개의 글자들이 줄마다 빽빽하다. 소녀는 가위로 한 줄 한 줄 오리고 글자도 한 자 한 자 오려낸다. 공책에서 벗어난 글자들이 잠시 허공에서 춤을 추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글자가 한 무더기 쌓인다. 양탄자와 그 밑의 카펫을 들어 올리고 바닥에 구머을 판다. 작은 손으로 글자들을 모아 구멍 속에 넣는다. 다시 흙을 덮고 카펫을 덮고 양탄자를 덮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고 페르시아 글자의 무덤 위에서 묵념을 한다"(p187)
이 책은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어떤 전형성을 깨트린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일들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상념에 따라 먼 과거와 조금 덜 오래된 과거들이 엇갈려 서술된다. 과거를 부유하는 나와 유령과 가족과 그리고 동지들의 이야기다. 어디에서든 이방인인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결국은 페르시아어를 배우게 된다. 페르시아 사람인 그녀는 다른 모국어를 가졌던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생소한 방식의 소설이지만, 모국의 시를 소환한 소설, 시적인 표현이 많아 읽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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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쓴다. 당신에 대해 쓰거나 당신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쓴다’라고 말해야 옳다. (p. 22)
‘당신’은 저자의 어머니나 아버지, 할머니, 혹은 다른 누군가다. 저자의 수업이 페르시아어가 되기도 하고, 프랑스어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세 번의 탄생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란 혁명을 겪어야만 했던 첫 번째 탄생,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프랑스어를 익혀야만 했던 두 번째 탄생, 자신의 뿌리를 찾아 페르시아어를 익혔던 세 번째 탄생이다. 모든 탄생은 고통을 동반한다. 세 번의 탄생은 저자에게 아픔과 혼란을 준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이야기 속으로 도피한다.
맞다. 황홀하다는 당신의 말은 옳다. 혁명, 감옥에 갇힌 두 삼촌, 기저귀 속에 감춘 유인물, 아슬아슬했던 출발, 망명, 아버지의 아편. 나는 이 모든 걸 의식하고 소설 같은 이야기를 자주 무대에 올린다. (p. 92)
나는 이국적인 이야기에 굶주린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일화에 살을 붙이고 내 목소리에 가락을 싣는다. 집중하는 작은 눈들이 보인다. 침묵이 홀을 덮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겼다. (p. 93)
맞다, 저자가 이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승리가 ‘허깨비’라는 것을 인지한다. 그제야 억눌려 있던 고통의 가면을 내려놓고, 자신에게는 전혀 이국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배우기를 거부했던 페르시아어 수업도 듣는다. 아버지에게 배웠으면 좋았을 테지만,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딸은 몰랐고, 아버지는 알았기에, 그는 떠나기 전 자신의 글자들과 알파벳을 땅에 소중히 묻는다. 딸이 나중에라도 잘 찾을 수 있도록..(이 책에서 땅은 상징적인데, 뿌리가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잘 들어라, 딸아. 언어를 배우려면 많은 수고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단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려는 언어는, 네가 언젠가 잊어버리면 영영 사라지게 돼. 그러니 절대 잊지 마라. 너도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면 입에서 입으로, 머리와 가슴으로 전해져서 계속 지켜질 게다.” (p. 206)
아이러니라면 저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란은 아직도 여자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자가 뱃속에서부터 겪었던 혁명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뱃속에 있는 아이보다 혁명을 생각했던 저자의 어머니의 마음을 들어 보자.
생각들이 시장의 소음과 뒤엉킨다. 그녀는 지금 일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밀려오는 슬픔 속으로 가라앉는다. 다른 사람처럼 평온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 전부 관두고 싶다. 다른 이들처럼 되기 위해. 그러나 너무 늦었다. 어떻게 뒤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다독인다. 나는 이들을 위해 싸운다.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그렇다. 그녀들이 자유로워지고 강해지도록, 나는 이 여자들을 위해, 그녀들의 일상을 위해 투쟁한다. 내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하긴 내가 뭐라고. 더는 생각하지 말자.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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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출신 작가의 작품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간결하고 짧은 호흡의 이야기로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마리암 마지디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하는데 에세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시나 우화 같은 이야기도 들어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엮어나가는데, 화자는 태아의 시선에서부터 한 살짜리 유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배와 눈, 할머니의 목소리를 테마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면은 좀 독특하게 느껴지며 천상 이야기꾼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독재자 호메이니에 대항하여 반정부 정치 모임에 참여하며 좀 더 나은 나라를 꿈꾸었으나 나아지지는 않고 형제, 친척, 동료들이 체포되거나 죽어간다. 폭력과 살인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혁명을 겪은 여섯 살의 마리암은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다. 지옥 같은 땅을 빠져나왔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나고 자란 땅에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부모형제, 친척들과 동네 이웃들에 대한 미안함, 그들의 고통이 선하다. 낯선 이방인으로 살면서 정체성의 방황을 겪기도 하고 등지고 떠난 고국의 현실이 여전한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와 의대생이었던 어머니, 나름 풍족한 살림이었지만,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안정적인 울타리를 모두 빼앗기고 가난의 냄새가 풀풀 나는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그렇지만, 낯선 사람들과 함께 공동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문화적 충격에 휩싸인다. 어머니는 점점 말이 줄어들고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전 안 해본 막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목수로 이름을 날릴 정도가 되지만, 고국의 피비린내는 현실이 자꾸만 떠올라 정신은 피폐해져 간다. 마리암은 학교에서 먹지도 않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낯선 아이들 속에 끼지 못해 도망쳤다가 할머니의 환영과 목소리를 듣고 힘을 얻는다.
아직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측은하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아이, 아빠들, 우는 엄마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토해낸다. 악몽을 꾸며 울부짖는 날이 계속된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이 자꾸 먹고 싶고, 고향집 아이들에게 모두 주어버린 장난감이 생각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며 상상하고 그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학교에 간 지 4개월이 되도록 말 한마디를 않는다며 어른들을 걱정을 시키고 벙어리, 외계인이라는 아이들의 놀림을 받던 마리암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과정은 새가 알을 까고 나오는 그것이었다. 어른들의 걱정과 우려를 오히려 즐기듯이 안에서 웅크리며 도약하기 위해 준비한다. 작품이 될 때까지 공을 들였다가 어느 날 폭죽을 터뜨리려고 내밀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런 야심찬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언어를 배우고 다듬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첫 이야기가 공쿠르 상 수상작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난 어딜 가도 내 나라에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프랑스에서는 다들 내가 이란 사람이라고 하고 이란에 가면 나를 프랑스 사람 취급해. 나처럼 두 문화를 가지고 싶어? 내 거 다 줄 테니까 나처럼 살아봐. 그러고 나서 그게 정말 멋지고 풍요로운지 말해주라고.”(P190)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야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이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두 문화를 가져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느냐고 부러워하는 대학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살고 싶어 하는 파리도 이방인에게는 완벽한 안식처는 아닌 모양이다. 두고 온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사촌들과 보내던 추억, 유치원 운동장에 있던 떡갈나무까지, 고향에서 보고 듣던 소리가 희미해져가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간청하던 모국어 페르시아어. 너의 뿌리를 잊지 말라던 아버지의 음성이 떠올라 회한에 잠긴다.
배우기를 거부했던 페르시아어를 17년 만에 다시 배우면서 마리암은 스스로와 화해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아직도 어린이를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싶고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압바스의 눈빛, 플라스틱 샌들 한 짝을 남기고 죽은 동네 젊은이, 감옥에서 만난 삼촌의 웃음, 만화 누샤베를 보며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다던 기자의 이야기 등 기억속의 이미지는 끝없이 맴돈다. 망명자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그 그늘의 안타까움을 보았다. 바꾸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세상이 여전히 공존 한다는 것도.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생각해본다. 글을 쓰는 행위로 고통의 트라우마도 조금은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매혹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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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배우려면 많은 수고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단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려는 언어는, 네가 언젠가 잊어버리면 영영 사라지게 돼. 그러니 절대 잊지 마라. 너도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면 입에서 입으로, 머리와 가슴으로 전해져서 계속 지켜질 게다. (p. 206)
2017년 콩쿠르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1980년에 이란에서 태어나 1986년에 부모와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
첫 장은 이란의 무혈 혁명기의 한 때를 리얼하게 묘사한다. 날 것 그대로의 묘사는 섬뜩하고 참혹하다. 이란의 혁명은 1979년에 있었고 우리에게는 1980년의 한 도시의 학살이 있었다. 그랬기에 공감대를 가지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주인공인 화자 마리암은 그 치열한 현장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열혈 운동가였다. 부모의 동료들은 탄압을 받았고 관련해서 마리암의 삼촌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동지들과 조부모, 친척들이 다 이란에 있었으나 부모는 망명을 결정한다.
마리암은 다섯 살 때까지 테헤란의 아름다운 동네에서 자랐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러다가 갑자기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안위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달린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섯 살, 어린 꼬마 아이가 이런 딜레마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마리암 마지디의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상당히 유려하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문장은 간결함과 만연체를 오가면서 능수능란하다. 글의 스타일과 표현법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들이었다. 덕분에 멀리 떨어진 한국이라는 나라의 독자인 내가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하게 한다.
내용을 이해하는 건 곧 마리암 마지디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정말 뜻밖에 스무살의 ‘나의 프랑스어 수업’이 생각났다. 대학에 들어간 첫 해에 교양으로 프랑스어 초급을 수강할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퐁네프의 연인들』을 홀딱 빠져 본 이후 프랑스어는 내게 동경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한 학기를 수강한 결과는 낭패스러웠다.
영어와 비슷할 줄 알았더만 전혀 다른 구조와 체계의 언어였던 프랑스어. 무척 어려웠지만 좋아서 선택한 수업이었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수업을 빠지지 않았고 과제와 시험에 충실했다. 그런데 성적으로 보고 멘붕이었다. C+인가 C 인가 그랬다. 졸업할 때 다시 보니까 4년 동안 유일한 성적이었다. ^^
알고보니 수강한 학생들이 전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불어였고 그 애들과의 갭은 노력으로도 역부족이었던 거다.
물론 주인공 마리암은 어릴 때인 여섯 살에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녀가 겪은 난감함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모국인 이란과 거리적으로만 먼 것이 아니라 전연 다른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신세계의 사람들은 이란 망명자들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0년생인 마지디의 경험은 이민자 2세대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인식도 개선된 지금 프랑스의 학교 현장과는 차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꼬마숙녀 여섯 살 마리암이 겪은 일은 개척자적인 것이었다. 모든 개척자들에게는 심대한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겪는 온갖 차별과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들. 이는 꼭 이란 출신 사람이어서만 겪는 것은 아니게 다가왔다. 1980년대~1990년대에 중동-아라비아인, 아시아인, 아프리카 인 같은 ‘이방인’들이 프랑스에서 살았다면 대부분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이란 이라는 나라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건 그래서였다.
책은 이념적이거나 종교적, 정치적인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물론 충분히 배경 설명으로 등장하고 있어서 저자가 10대와 20대에 겪은 정체성의 혼란을 뒷받침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책의 분량이 더 깊은 이야기를 하기에는 길지 않았다.
이 작품의 매력은 간단하고 부드러운 문체이다. 자신이 겪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혐오로 점철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식인, 문학가, 여성의 시선으로 차분하게 거리를 두고 프랑스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읽고 1980년대의 이란 출신의 망명자/이민자의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인 ‘자이니치’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내가 왜 자이니치 분들의 투쟁에 끌리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점검할 수 있었다. 일본에 살면서 조국인 우리나라의 얼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시련을 감내한 그분들이 다시금 더 깊이 깊이 존경스러워졌다.
콩쿠르 상이라는 수식어가 이 작품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굉장한 후광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이름값에 걸맞게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임에 분명했다. 이란인 분들이 읽으면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는 2013년까지의 이란의 정치 현실이 등장한다. 그때까지는 혼란스럽다고 나오는데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
밑줄 그은 좋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참 많았다.
마리암 마지디라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_ 책 에서
인생의 첫 조각들 하나하나가 내 감수성을 만들었고, 지금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어린 시절이 되었다. 어느 날 그때의 추억들이 싹둑 잘리고 뿌리 채 뽑혀, 더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심연 속에 버려졌다. (p. 202)
프랑스에서 보낸 첫해의 슬픔이 다시 마음을 저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침내 화해에 이르렀다는 은근한 기쁨에 코끝이 찡해진다. 과거는 전혀 느낄 수 없고 미래만 남은 이 토양에서 결국 자신의 뿌리를 찾아냈다. ( p. 213)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강한 웃음이 한 아름 차올랐다. 지금, 가득 고인 눈물처럼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지닌 아버지의 바닥에 쓸리는 긴 치마를 입고,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허공에 발이 사뿐히 떠 있는 딸의 눈물들 그리고 셋은 손 안에 비밀을 간직했다. 손바닥에 새겨진 글자, 망명 ( p.109)
우리는 함께 서 있으나 나를 지탱하는 건 당신이다. (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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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내리깔거나 감아야 하고, 가는 길을 보지 말고, 아무 것도 확인하지 말고, 귀도 닫고, 어디로 가는지 몰라야 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아무것도 자백할수 없도록. (47p) 한인 1.5세대라는 말이 있었다. 이미 모국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들이 자라온 세계를 떠나 부모에 의해서 다른 나라에서 자라나게 된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미 친구도 있었고 모국어로 말하는 데에 익숙해진 그들은 낯선 남의 땅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부모들은 모두 먹고사는데 바빠서 아이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기회의 땅, 자신들이 떠나온 땅보다는 더 좋은 곳이라 여겼기에 데려다 놓으면 아이들은 저절로 잘 커줄것으로만 생각했다. 아이들은 때로는 엇나갔고 가족들은 어렵고 아픈 시기를 견뎌내야 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리암, 이란에서 태어나 여섯살까지 살았다. 엄마는 정치운동을 하다가 나를 죽일뻔 했다. 요행히도 할머니 덕분에 살아나서 세상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이란에서 사는 것은 위험했다. 스카프 밖으로 머리카락이 한올도 나와서는 아니되었고 남자들은 여러 부인을 거느릴수 있었다. 반항하면 아이도 빼앗기고 이혼을 당했다. 투쟁운동은 계속된다. 친척들이 잡혀 감옥에 갇혔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수 없었던 부모님은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결심했다. 물론 나도 함께. 친했던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던 장난감들은 모두 나눠주어야만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파리에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아빠는 크루아상을 사와서 이것이 파리의 음식이라고, 이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와 나는 구경만 했다. 나는 파리에 와서 이란의 전통빵인 산가크를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은 나중에 내가 프랑스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 이후 베이징에서 크루와상을 그리워 하게 되는 그리움으로 바뀌게 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119p) 이란 사람으로 프랑스에 망명을 한 마리암네 가족. 부모님은 프랑스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겨우 겨우 어느 정도의 말만 할 뿐이다. 아직 어린 마리암은 조금씩 적응해갔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라고 불리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른 마리암만의 적응 기간이었을뿐 말문이 한번 터진 그녀는 프랑스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랐다. 부모는 그런 그녀에게 모국어인 페르시아 말을 잊지 않도록 시켰다. 필요도 없는 말을 왜 배워야 하느냐고 했지만 부모는 강경했다. 결국 이중 구조의 언어가 생겼다. 두가지의 말을 하면서 그녀는 이분화된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모국어를 심어주려고 한 부모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앞서 말한 한인 1.5세대 중에는 한국말을 잊은 친구들도 꽤 많았다. 부모가 바빠서 한국말을 유지시켜 주지 못한 탓이다. 집에서는 페르시아어, 밖에서는 프랑스어. 그때부터 구분이 생겼다.우리의 언어와 그들의 언어. 우리와 그들. 나는 두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 역할에서 저 역할로 넘나들었다.(178p) 한 아이의 성장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개되어 간다. 이란의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어떤 환경에서 그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에 와서의 삶은 어떠했는지, 마리암은 하나씩 파헤치고 자신의 입으로 털어 놓는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며진 소설. 중간중간 그녀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동화와도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해서 결국은 이란의 문학가들을 연구하게 된 그녀. 세계 곳곳을 다니는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어느 곳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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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란 반정부 활동을 하던 부부 사이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1979년 샤 왕조를 무너뜨린 회교 혁명 이후의 일이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먼저, 그리고 엄마와 아이가 프랑스로 떠난다. 자유를 찾아서.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아이의 삼촌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아이는 프랑스에서 망명자의 가족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운다.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써야 한다는 아버지의 원칙에 저항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자라고, 프랑스인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페르시아어를 잊지 못한다.
이 단상 모음 같은 소설을 읽으며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미국에 정착한 인도인의 정체성을 다루었다. 그런 정체성의 혼란, 내지는 고민이 이 소설에도 있다. 그러나 여기의 갈등은 거의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해가 된다. 언어야말로 한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의 정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니.
중동이라고 쓰는 언어가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안 게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다. 이란과 다른 아랍 국가들의 민족이 다르며,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다른 아랍국은 아랍어를 쓴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이 소설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내 조상이 속하고, 내가 속했던 곳의 언어와 내가 새로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곳의 언어 사이의 충돌이니 무척 보편적인 갈등이다. 그런 갈등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망명이라는, 어쩌면 폭력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니 더욱 심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갈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소설에서 그걸 어떻게 해소해가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겠지, 하는 예상을 하면서 읽어서 그런가 그 과정은 자연스럽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미리암(소설에서도 작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다)이 자신의 석사 논문 주제로 비교언어학을 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즉 페르시아어 수업을 다시 찾게 된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내가 놓쳤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궁금증.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놓은 소설을 쓰고, 이 작가가 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쓰게 될까? 궁금증이라기보다는 걱정에 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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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암 마지디의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은 마리암이다. 작가와 작중 인물의 이름이 같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마리암 마지디가 의도한 것이다. 소설이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을 모방할 때 보이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마리암 마지디는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부여했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다. 말장난이 아니다. 마리암 마지디의 살아온 내력이 소설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녀가 어떻게 이란을 빠져나왔는지 프랑스에서 망명자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위 현장으로 달려간 마리암의 엄마는 그곳에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죽임을 당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본다. 마리암은 엄마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자신 또한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은 끈질기고 집요해서 마리암은 엄마 뱃속에서 살아남는다. 엄마의 움직임을 느끼고 엄마의 눈빛을 읽어내는 마리암. 아이는 태어나서 이야기를 마주한다. 책을 펴고 읽는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짓는다. 마리암은 혁명을 이야기하는 자리 한편을 차지한다. 이야기를 수집하며 살고 싶은 마리암. 불심검문에 잡혀간 삼촌. 감옥에서 팔 년을 보낸 삼촌은 마리암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함께 갇힌 기자는 매일 <뉴사베의 모험>을 봤다. 유명하고 사회 운동을 하다 수감된 사람이 같은 만화만 보고 의아해했다는 것. 왜 매일 그 만화를 보냐고 물었다. 그는 만화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자신의 아내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만화를 보는 그 남자. 삼촌은 잊지 않기 위해 '뉴사베'라고 적었다. 엄마와 아빠는 마리암에게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눠 주고 땅에 묻으라고 했다.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서였다. 장난감을 나눠 주고 버리고 마리암은 떠나기 위해 소유할 수 없는 마음을 생각한다. 어렵게 프랑스로 들어간 마리암과 엄마는 허름한 원룸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써야 하고 크루아상을 먹고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 학교에 가도 마리암은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과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이 망명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었다. 페르시아어를 잊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 아버지는 마리암을 다그친다. 마리암은 사실 프랑스어를 잘 배우고 있었다. 잘 듣고 머릿속으로 프랑스어로 말할 준비를 했다. 준비가 되면 그때 말하리라 다짐한다. 학교 아이들이 돼지라고 놀려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가려들을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가제트 형사>를 보면서 마리암은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살아남아 야한다. 이란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다. 이유가 없었다. 불심검문을 당해 끌려가고 차를 타고 가면 두 사람이 가족인지 확인이 돼야 풀려났다. 살아남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난 마리암의 가족.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로 말을 하고 밖에 나가서는 프랑스어로 말을 한다.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 두 개의 세계. 마리암이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쳐도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란에 가면 그녀의 억양을 듣고 이방인이라 규정한다. 두 개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두 개의 세계에서 홀로 떠도는 일이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망명자의 비애가 소설에 절절히 드러나 있다. 태어난 나라를 뒤로하고 희망과 자유를 찾아온 세계에서 마리암은 멸시와 차가운 소외를 받는다.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이란의 우마르 하이얌 시인과 사데크 헤다야트 소설가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는 것으로 마리암은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란을 찾아가 친척을 만나고 그들과 뼛속까지 하나임을 느끼면서 마리암은 자신이 발 디딜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느낀다. 나의 언어는 하나. 망가진 나라에서 마리암은 택시 기사가 페르시아어로 들려주는 시를 듣는다. 사람들이 떠나고 착취 당하고 죽는 나라에서 오랫동안 쓰인 시. 용기를 가진 시인이 쓴 십사 세기의 시. 프랑스로 떠난 마리암들이 잊지 않고 조국을 그리워하며 배운 페르시아어는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조국을 떠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어제』가 감춰진 서글픔을 그렸다면 마리암 마지디의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잃어버린 자유와 언어를 찾아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이야기한다. 시를 읽기 위해 페르시아어 수업을 시작하는 마리암을 통해 우리는 부서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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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한다는 것은 내게는 우주가 바뀌는 일이었다. 처음 낯선 학교에 발을 내딛고, 자기를 소개하고, 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불렸던 경험은 인생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시간이다. 그런데 낯선 땅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어떤 경험일까. 더군다나 고국에서 쫓기듯 도망쳐야 했던 신세라면... 어린 소녀의 눈으로 이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 작가 마리암 마지디가 쓴 자전적 소설인 [나의 페르시아어의 수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