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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인들은 조선시대 군주중에서 선조와 더불어 인조를 가장 못난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못난 군주라는 평가는 조선시대를 거쳐 이 두 군주시대에 각각 일본과 청으로부터 내침을 당했고 덩달아 도성을 버리고 아들인 세자를 버리고 마지막 보루인 백성마저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 몽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나 자신이외에는 그 어떠한 사람도 믿지 못하는 의심병이 깊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지존이라는 자리는 그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들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는 것이다. 선조가 이순신과 광해군을 의심했듯이 인조는 자신의 적자인 소현세자를 권력의 라이벌로 여겼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빌미로 반정을 일으킨 그가 결국 죽어가는 명의 머리채라도 잡을려고 하는 동안 청은 조선을 정복했고 오랑캐라고 폄하했던 그들에게 삼두구두배를 당하는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이것도 모잘라 세자를 비롯한 대군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전쟁에서 패한 댓가라고 위안할 수 있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행보에서 후대인들은 인조라는 군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해버리게 된다. 물론 실록이나 여타의 기록에 자신의 아들을 사사한 군주는 영조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를 믿는 후대인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 하고 머리속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왠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장면들이 있다. 많은 후대인들이 소현이 제명을 살아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면 향후 조선이라는 배는 새로운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잡았을 것이라는 점에선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리학의 본고장인 명보다 더 성릭학에 빠져있던 조선은 청에게 굴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교조주의적 성리학 시스템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정조때 잠시 회생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이마저도 정조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정조와 더불어 조선이라는 배는 사실상 침몰했기 때문이다.
김인숙의 <소현>은 이처럼 온몸을 받쳐 조선을 사랑했던 소현세자가 죽기전까지의 볼모생활을 한 심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팩션이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점은 그동안 소현세자나 세자빈이었던 강빈 그리고 인조등을 소재로 나왔던 작품들과 비교해서 독특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병자호란으로 비롯된 비극의 시작과 그리고 볼모생활 , 환국후 인조와의 갈등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면 작가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일체의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에 그 비중을 두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따. 이는 어찌보면 역사소설이라는 기존의 인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첨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현과 그의 아비 인조 그리고 동생 봉림, 심양에서 자신을 압송한 섭정왕 도로곤등과의 치밀한 심리적 구도를 플롯으로 설정하여 소현자신 그리고 상대역을 맞은 등장인물들의 관점 마지막으로 작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적국에 볼모로 잡혀와서 적국의 감시보다 자국 아버지인 인조의 의심스러운 눈빛속에서 갈등하는 소현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라 할 수 있다. 흔이나 만상의 입을 빌려 소현의 심중을 대신 말하고 있는 장면을 설정하므로서 격양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역사적 소현의 심정을 보는듯 하여 책을 이로 하여금 가슴저리게 한다.
소현이 살아 보위에 올랐다면, 차라리 인조가 좀더 일찍 죽었다면등의 역사적 가정이나 사실들을 바라보게하던 기존의 시각보다 오히려 소현이라는 개인 물론 여기서는 개인이라고 불릴 수 도 없는 공적인 개인이지만 그의 내면상태와 심리적인 변화를 마치 살아있는 소현을 보는듯이 작가의 심리적인 표현들이 생생하게 다가오는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오히려 여성작가라서 세밀한 심리묘사가 뛰어났다는 표현보다는 작가만의 독특한 필치였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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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한때 열독했던 작가였다. 대학생 새내기때 신춘 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니, 조선시대로 치면 하면 소년등과한 셈이라고 할까. 작가 사진으로 만나봤던 김인숙, 언니가 없던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이며 아직 소녀 느낌이 남아있는 해맑은 그녀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언니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반쯤 섞여 있는 호감에 김인숙의 초창기 작품을 읽었다. 하지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시기에 그녀는 외국에 나가 있어서 작품활동이 뜸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그녀와 멀어졌던 것 같다. 재작년인가 예스에다 연재하는 김인숙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로 김인숙을 지켜보는 기분도 과히 나쁠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현'은 좀 뜻밖이었다. 김인숙의 작품 이력에 '소현'세자의 마지막 2년을 담은 작품이라니.. 작품 전체적으로 우울하다고 할까. 패배감이라고 할까. 비장감이라고 할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누르고 있는 듯한, 색깔로 치면 잿빛이나 갈색 느낌이 감도는 그런 작품이었다. 적국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세자 소현, 그리고 봉림 대군과 그리고 함께 끌려왔던 사대부와 민초들, 적국에서 패배자로 굴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을 그들, 하지만 그들은 청의 정치와도 조국의 정치와도 분리될 수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워 양국 정치상황에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권력의 향배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엇갈리게 되는 순간, 침묵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했으니..정복자들의 세계 역시나 권력은 냉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치 차이로 패자의 나락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또 청에 끌려온 민초들은 민초들대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칠 수 밖에 없었다.
'소현'에서는 세자인, 그러면서도 볼모의 소현의 심중을 파고들어가는 듯했다. 아니 세자 뿐 아니라 모든 인물의 심중이 드러나는지라, 그것도 소현이 조선으로 귀환해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을 향해 치달아가는 그의 운명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감지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난 달과 이번달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팩션을 읽었는데, 확실히 팩션과는 달랐다. 우선 역모를 비롯한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소현'에서는 그 사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해결되는지가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생사의 기로에 선 처지와 입장을 말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김인숙은 '소현'을 통해 조선 역사의 가장 굴욕적이었던 순간을 담아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이 아닌 치욕과 죽음의 장면을 던져줌으로써, 그 시대를 환기하려 한 것 같았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선, 그런 조선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누리려는 인물, 반면에 정복자에게 끌려가 인질로 고난의 삶을 삼켜야 했던 세자와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 이 시절에 행복했던 자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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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연재 중인 '미칠 수 있겠니'의 댓글 이벤트로 받은 포인트로 그녀 김인숙님의 작품 '소현'을 만났다. 금색 표지에 슬픈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요즘 후회하고 있는 게 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는 거다. 그저 국사시간에 배운 단어와 숫자의 연결 정도. 숲을 보려고 애썼으나 그게 되지 않아 그저 나무의 모습만 보면서 아 이 가지가 조선이고 이 가지가 고려구나 하는 정도에 그쳤다. 텔레비전에서 역사드라마를 해주면 아 저 사람이 그랬구나 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뭔가 체계적인 것을 담지 못하고 마음만 붕 뜬 채 어찌할까 고민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인물에 눈길이 가게 되었고 인물을 알게 되면서 시대적인 것도 아울러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공부하는 느낌이 싫었지만 지금의 나는, 좀 과하긴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만나고 있다. 가급적 드라마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내가 알아야 할 분들 위주로 읽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비운의 왕자는 영조의 아들이며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정조의 아버지인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이다. 처음에 드라마로 만나긴 했지만 한중록을 읽으며 드라마가 모든 상황을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위주로 강조하긴 했지만 그게 거의 사실이란 걸 알고 역사의 부흥에 힘쓴 영조에게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도세자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죽었다면 이번에 만난 소현 세자는 역사의 희생양이다. 고종의 귀염둥이였으나 일본에 끌려가 쓰시마 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치매에 걸려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외롭게 지낸 덕혜옹주처럼 볼모로 잡혀가 왕이 되지 못하였으나 다행하게도 단순 인질이 아닌 외교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좀 위안을 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을 받들던 인조가 오랑캐인 청의 침략으로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군과 대립하지만 결국 굴욕적인 항복을 당하고 청에게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세자 소현은 볼모가 되어 동생 봉림, 빈궁과 함께 심양으로 간다. 남한산성 수어사 알고 있으되 말하지 않고 상대방의 숨은 뜻을 헤아려야 하고 동생에게조차 속뜻을 말하지 않는 소현. 두 차례 환국을 하지만 인조와는 갈수록 서먹하고 아들과는 역교환이 되는 비극을 당하고 명과의 최종결전에 참전하여 자신을 볼모로 호송하던 적장 도르곤이 황제의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본다. 영구히 환국했지만 명보다 청과 더 가까웠다는 이유로 인조에게 인정받지 못한 소현. ‘내가 보여주고가 한 것은 이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소현 세자를 인질로서의 비운의 모습만이 아닌 그가 왜 갈등하고 있는지 인조에게선 인정받지 못하지만 조선을 굴복시킨 도르곤과는 어떤 관계로 지내는지를 보여준다. 시대적 배경인 병자호란으로 표지는 분홍색의 여린 느낌이지만 내용은 힘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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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오백년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임금과 세자들이 있지만 두 차례 호란을 격으며 볼모로 끌려가 그의 짦은 인생 마지막 10여년을 적의 땅에서 살다가 환국후 죽은 '소현세자'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소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광해군을 내몰고 반정으로 오른 인조의 맏아들이자.. 청에 볼모로 잡혀가 10년 가까이 지내고 환국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임금의 아들..
결국, 역사적 기록대로 소현은 긴 9년간의 볼모 생활끝에 명나라 멸망과 함께 섭정왕 도르곤의 지시로 1645년 2월 볼모의 신분이 풀려 조선으로 영구히 환국하게 된다. 청이 북경을 점령한 후, 약 1년 만의 일이었고.. 이 이야기에서 그려낸 볼모 생활의 마지막 2년의 방점을 찍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런 마지막 방점을 찍기까지 소현은 적국에서 말수가 적은 자중자애하는 모습으로 비록 비루한 삶일지라도 살아남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과 굳은 의지로 관통하고 있다. 이렇게 본 작품은 '소현'의 모든 삶을 다룬 역사소설은 아니다. 청나라에서 볼모로 잡힌 9년의 기록중(1637~1645)중 환국하기까지 마지막 2년.. 특히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는 순간 청나라가 펼쳐낸 야만적인 전장과 혼란스런 정국의 중심에서 때로는 도르곤의 환대속에 때로는 방관자로 지내온 역사 문학의 기록이다. 그런데, 그 기록은 직관적인 모습이 아닌 자신과의 고독과 싸우며 그 고독속에 한없이 아파하며 떨쳐내고자 했던 소현의 마지막 몸부림이자 '울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더군다나 김인숙 작가도 소설을 쓰는 내내 소현의 고독이 내 몸속에 들어와 늘 어딘가가 아팠고, 만약 그가 온전히 허구적인 인물이었다면 나는 그의 고독을 덜어줄 수 있었으리라 말하지만 실재했던 역사의 실존했던 인물이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직관적인 사료가 줄 수 없는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 역사 문학의 방점이자 절정의 순간.. 소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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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하다. 답답하다. 이렇게 역사소설을 읽고 얼굴 가리고 벽에 기대어 어지럼증을 느껴 본 적이 언제 또 있었더라? 아마도 <칼의 노래>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 공통점이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국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의 칼날 사이에 놓인 주인공의 처지 말이다.
아무리 열심히 상황을 타개하려 해보았자 파멸만이 기다리는 상황. 더군다나 그 파멸을 가져올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가장 믿고 비호해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상황. 그러나 자신의 최후가 눈에 선하니 보인다고 손 놓고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
<소현>은 바로 그 상황에 처한 자의 외로움에 대한 소설이다. (병자호란이라는 배경에서 <남한산성>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남한산성>은 지배계층의 대책없는 말 잔치와 패전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서날쇠를 통해 민중의 건강한 삶의 재건을 암시한다) 김인숙 작가는 근래 많이 소개되고 있는 소현태자와 강빈의 심양에서의 활동과 서구문물접촉 부분은 소개하지 않는다. 오직 소현의 내면의 고독에만 초점을 맞춘다. 정밀묘사를 통해 집요하게 그가 보고 생각한 것을 재현해 준다.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정밀한 문체가 읽으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아래와 같은 작가의 특징적 문체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사나운 꿈자리에서는 늘 그러했듯 세자는 꿈속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건너가는 강인지, 아니면 건너오는 강인지 세자는 꿈속에서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 18쪽에서 인용
헌데, 그것은 꿈이었을까. 꿈이었다면 그것은 임금의 꿈이었을까, 세자의 꿈이었을까 - 176쪽
그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의 위험함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봉림이 짐작 못하지 않았다. 세자가 역모에 올랐어도, 오르지 않았어도 이미 임금의 적인 것이다. - 280쪽
상황에 갇힌 소현은 상황을 이용하는 도르곤을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조선에 있는 인조와 조정신하들은 이러한 사정을 모를 수밖에 없다. 재조지은의 명보다 금에 치우친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빌미로 인조반정이 일어났기에, 인조는 청의 도르곤과 친한 듯한, 청의 문물에 빠진 듯한 아들 소현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청의 지원으로 아들이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 것만을 우려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명분은 후에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되는 봉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청의 섭정왕 도르곤 옆에서 청이 베이징에 입경하는 것까지 목격한 소현은 청의 적은 조선이 아니지만 조선의 적은 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소설은 '~할 수밖에'없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소현, 인조, 봉림, 만상, 석경, 도르곤, 대학사, 흔까지,,,,
그래서, 작가의 능력부족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내게 답답했다.
그래도 315쪽, 소현세자가 함락된 명의 수도 베이징에 들어와서 매산(현재 경산)에 올라 마지막 명황제 숭정제가 목 매단 나무 옆을 지나치는 장면은 참 좋았다.
내려다보는 궐의 담장을 둘러싸고 불탄 파편으로 뒤덮인 해자가 보였다. 산은 해자를 판 흙더미로 쌓여진 것이라 했다. 산을 이룰 만큼 흙을 토해낸 해자였다. 버려졌던 흙은 산으로 쌓이고, 풀의 씨앗을 머금고, 나무의 뿌리로 거세지고, 마침내 황제의 목을 매달아도 좋을만큼 튼튼한 나무들을 자라게 했다. 그러니 산이 명의 영욕이었다. 그 영욕의 정상에서 세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낮은 산이어도 오르는 고생이 적지 아니하였던가.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어쩌면 흐리지 못한 눈물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몸이 땀을 줄줄 흘려내고 있는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도 그 땀을 말려주지 못했다. 세자가 깃발을 내려다 보았다. 궐과 성도의 곳곳에 출렁이는 것이 청군의 깃발이다. 청이 깃발로 일어선 나라이니 그 깃발이 어느 때고 내려지지 않았다. 정복된 성도는, 그러나 아름다웠다. - 315쪽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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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의 만남이 이렇게까지 가슴 시릴 줄 몰랐다. 조선실록의 기록대로,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대로 그냥 병약 했던 세자, 병약한 육신보다 더 유약한 마음의 소유자로 은혜와 예의가 지극한 효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소현세자였다. 소설 '소현'을 읽기 전에는 정치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토록 크나큰 고독과 싸웠움을 그리고 그가 품은 뜻을 알지 못했다.
병자호란, 전쟁에 패한 조선의 세자인 소현은 대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간의 세월을 적진에서 보낸다. 이 책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원을 제패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소현 세자가 청의 볼모로 끌려감은 청이 명과 대치상태이기에 명과의 싸움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기위힘이니 비로소 전쟁에서 청이 승리하면서 환국하게 된다.청에서의 생활과 고국에 돌아온 뒤 수개월만에 병이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자의 마지막 2년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쟁은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침이 없다. 세자를 보위하기 위해 함께 볼모로 끌려간 소현의 아우 봉림 대군과 좌의정 심기원의 아들 심석경, 종친의 딸임에도 청의 황제에게 바쳐졌다가 대학사의 작은부인이된 여인 흔, 무녀 막금, 청군에게 어미와 아비, 누이까지 온 가족을 잃은 역관 만상, 수많은 힘없는 백성들. 이들은 아마도 양반, 중인 천민들의 또다른 이름이다. 조선 땅의 사람이면 전쟁의 상흔을 어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좌의정 심기원과 회은군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소현은 아비인 임금에게 자신이 왕위를 위협하는 적일 뿐이라는 사실에 외롭고 외로웠으리라. 거대한 권력 투쟁의 칼날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역사적 사건이나 소현과 봉림대군, 심석경을 비롯한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어 사건속에 빠져있노라면 역사책을 읽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만큼 작가의 이야기속 인물 묘사가 뛰어나고 사건을 생생하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음이다.
적의 땅에서 적국 청나라의 승전을 목격하며 소현은 환국하게 됨을 기뻐하였을까, 아니면 명의 패망을 슬퍼하였을까. 언젠가는 조선이 진실로 강해리라 그래서 복수하리라 다짐을 했을까. 중원을 넘어 천하를 다스리는 주인이된 섭정완 도르곤의 힘 앞에 청나라가 넘을수 없는 높디높은 벽임을 실감했을까.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본문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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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쟁에 길들여진 말들은 소리를 내야 할 때와 내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한다. -9-
첫 문장부터 의미심장했다. 전쟁에 길들여진 말들의 울지 못함 ,병자호란 때에 즉 청에서 강화를 쳤을 때 조선의 왕은 인조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천조의 명을 받잡고 왕권을 거머쥔 인조, 하지만 이미 명의 운은 다해갔고 사그러드는 촛불이었는데, 오랑캐였던 청은 강성했다. '장혁'이 나왔던 '추노'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시대가 인조때였으니 그때는 사도세자가 환국하고 원손을 옹위하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결코 재미있는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야기꺼리이고 주인공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역사적인 사실이므로 사기에는 소현세자가 10년의 세월을 청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환국하고 2달만에 학질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제주도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참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 가족들을 몰살하도록 만들었던건 아비일까?신하일까?병일까? 권력일까 ?명분일까?
그 애뜻함, 비통함, 살고 죽음의 경계에서 작가는 정말 어느곳에도 관여하지 않고 철저히 숨었다. 그 인고의 세월과 그리고 그들이 나라를 세우면서 내세웠던 아버지의 나라 명이 무너지고 청이 융숭하게 발전하는 모습과 그들의 실학문을 받아들이는 이 모든 과정들과 전쟁의 출정들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견뎌내게 했다. 함께 갑갑하고 그 배신감에 쓰리고 버려짐에 구슬펐다.
차라리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말고 조선이란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모욕과 곤욕은 치루지 않았을것을 소현세자가 운명을 달리했을때 나이가 34살이라고 한다. 헉 나와 동갑인것인데 참 모질세월을 살다갔다. 이렇게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헉 소리 내지 못하고 숨죽였던 많은 인물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면서 읽게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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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건, 일상에서건 가장 부질없는 말이 “그 때 이러저러 했더라면...”하는 가정일 것이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 또한 모두 사람의 일이다보니, 그 일에 대한 아쉬움이 클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조선 역사에서도 이처럼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을 들게 하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소현세자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시대에 ‘세자’라는 위치에 있었던, 그래서 볼모로서의 삶까지 살아야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세자로서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목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자신이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볼모로까지 가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둘 중 하나가 아닌, 세자와 대군까지 모두 볼모로 가게 된 것은 그 때의 조선 상황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청에서의 몇 년간의 삶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냉혹함 속에서 현실을 인정하게 된 소현은 청과의 교류에 힘쓰고 아담 샬과의 만남도 갖는 등 앞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봉림은 냉정한 현실을 겪으면 겪을수록 반청의식이 강해지게 되어, 보위에 오른 뒤 재위 내내 ‘북벌론’을 주장하며 청에 대한 반감을 고수한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이 역사를 인식하는 각자의 방법이었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으나,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둘의 방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소현의 방법이 성공하기에는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의식이 소현의 앞서가는 현실 인식에 미치지를 못했고, 봉림의 방법이 성공하기에는 조선의 국력이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불행한 결과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소현세자가 청에서 있었던 시기의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조선의 세자로서 겪어야 했던 굴욕과 냉정한 현실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리고 소현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 변화도 조금씩 그려지고 있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그 스스로가 반정에 의해 등극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더더욱 보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볼모로 보낼 때의 마음과는 달리, 자신과는 역사적 · 정치적으로 달라지는 시각을 갖고 성장하는 아들이 두려웠을 것이고, 아들에 대한 연민은 정치적 라이벌이라는 무게에 짓눌려버린 듯하다. 편협한 한계에 머무른 인조의 현실 인식과 그런 배경 속에서 맞게 된 소현세자의 미심쩍은 죽음은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보니, 그 인물들의 사후에 대한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부족한 자료로는 특정 사건의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들은 후대인으로서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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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후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패전국 세자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의 운명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한 개인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국가의 운명에 좌우되는 수많은 백성들의 비루한 삶을 피해자의 눈을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
소현 세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청나라의 침략전쟁의 결과는 등장인물, 아니 모든 조선인들의 삶을 비참함의 정점으로 몰아넣는다. 소현 세자와 함께 볼모로 끌려간 아우 봉림, 좌의정 심기원의 아들 심석경, 청의 황제에게 바쳐졌다가 대학사의 둘째부인으로 되바쳐진 회은군의 딸 흔과 그녀의 종인 무녀 막금, 청나라 군인들에게 어머니와 누이가 능욕과 도륙을 당한 역관이자 상인이였던 만상,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갔던 50여만에 달하는 환향녀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고독과 불안의 삶을 살았으며 조국을 사랑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 소개된 소현의 삶은 한마디로 막다른 골목에서의 삶으로 내게 다가온다. 청이 승리하면 환국할 수 있지만 조선의 굴욕을 씻어낼 수 없는 소현... 청의 왕족의 신임을 얻으면 귀국의 가능성이 커지지만 친명의 조선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점점 작아지는 소현...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가 청의 볼모로서 기다린 8년의 세월은 조선에 돌아오기 위해 가까와지는 세월이 아니라 점점 더 멀어져가는 세월이였을 것이다. 청이 중원의 패자로 자리잡을 시절 청나라 왕족의 신임을 받고 돌아온 소현의 존재는 조선의 왕(인조)과 권력자들에겐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주인공들의 조국을 향한 가식없는 사랑이 있지만 조국으로부터는 받아들여지지 못한 슬픈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문제의 근원은 나라가 정말로 부강한 자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그런 근본적 문제에 대한 걱정과 고민과 대응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할 따름이다.
소현의 삶은 결국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와 가족과 가문으로부터 배척받았던 환향녀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고 느껴진다.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으로 받들어져 왔던 충의와 지조... 본인의 뜻과 다른 막다른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시대 지배층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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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인가. 사라질 수 없는 것인가. 우리 삶은 예전에도 지금도 동양도 서양도 어쩔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그 안에 있는가. 도대체 누가 전쟁을 만드는가.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그도 역시 전쟁 중인가.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누구와 전쟁을 하는 것인가. 더디게 읽었다. 책을 소개받을 때부터 이러할 줄 짐작하였으며, 짐작한 대로 답답할 줄도 알았으며, 답답한 만큼 절망스러울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읽기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야 하는 책이었으니까. 이제까지 본 무수한 전쟁, 혹은 권력과 관련된 내용들이 떠올랐다. 책이었든지 영화였든지 하다못해 국사 교과서였든지 그 모든 전쟁과 권력에 대한 내 기억들이 이 책을 읽는 내 기분을 참담하게 했다. 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까지 끄집어내도록 하면서. 잘 사는 나라는 잘 사는 대로, 못 사는 나라는 못 사는 대로,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평화는 우리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이렇게 끈질기게 싸워올 수는 없는 노릇일 텐데, 어쩌자고 이 땅 곳곳에서는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수한 소현세자와 그들의 연약한 백성들을 어쩌자고 죽였다가 살렸다가 하는 것인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인지. 좀 회의가 생긴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이 기막히게 다행스럽고 고마운 한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탓이다. 우리가 살아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우리를 살려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작가의 한탄처럼, 그 한탄이 저절로 내 속에서 우러나온다. 전쟁으로 읽으라는 글이 아니었을진대, 나에게는 오로지 전쟁으로만 읽힌다. 내 경험의 편협한 증거일 테지만, 역사 속에서 개인은 너무도 하잘것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아야만 한다니, 살아서 그 삶을 증거로 물려주어야 한다니, 산다는 것이 도무지 처량하기만 할 따름이다. 삶과 죽음이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가깝게 여겨진 적이 없었는데, 사는 일도 고맙고 죽을 일도 두렵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정말, 삶이라는 과정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럴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한 것일까. 누군가 펼쳐놓은 길을 마냥 따라가는 것만 같다. 앞에서 이끌어주는 그 무엇이 보이지 않음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