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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생소한 작품이다. 낭송극 전문배우라는 경희의 직업도, 걸어서 유럽의 낮선 도시(흔히 들어 귀에 익은 도시이기는 하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도시는 여행객들을 위한 도시나,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 이들을 위한 도시와는 다른, 도시의 두가지 측면 사이에 끼인 좁지만 완연히 다른 또렷한 색채를 가진 이방인에게만 열린 도시다)들을 누비며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가는 그녀의 행보도, 그녀를 그토록 방황하게 만드는 그녀 주변 여러 인물들의 캐릭터도 모두 생소하다. 거기에 더해진 배수아의 편하지 않은 화법은 이 작품 「서울의 낮은 언덕들」 을 한층 더 생소하게 만든다. 그래서 긴장감을 유지한 채 그녀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만 비로서 언어가 화학반응을 통해 독특한 필터링을 한 이미지로 승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쉽게 읽을 수 있는 편한 작품은 아니다.
그것이 배수아 작가 특유의 매력이라면, 이 작품은 기한의 어떤 그녀의 작품보다도 더 작가의 매력을 잘 살려낸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부분은 시점의 변화다. 처음에는 '우리'로 표현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유지되다가 경희의 방랑을 묘사한 작가 시점으로 슬쩍 바뀐다. 마지막 장인 「나는 스스로 낮은 언덕의 루핀이 된다」 에서는 '우리' 또는 '나'로 표현되는 1인칭 시점으로 회귀하는데, 이 때의 '나'는 작품의 처음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다. 작품을 읽으며 흐름이 종종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어려운 동행 사이사이에 독자가 나름의 해석과 상상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빈 간극을 메워야하는 불편함은 이 때문이다.
유려하고 함축적인 문장들이 쏟아지지만 전반적인 스토리의 흐름에서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송극 전문배우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직업은 아니라고 한다. 그녀의 직업이 허구여서일까.. 이 작품의 흐름을 구성하는 경희의 에피소드 역시 현실감보다는 상징적이거나 우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샤머니즘 성격이 강한 치유사라는 직업 역시 마찬가지. 작품 중 어느 곳에서도 제목의 '서울'을 연상케 하는 부분은 없다. 어쩌면 그녀가 제목에서 언급한 '서울'은 작품 속에서 묘사된 '이방인의 도시'를 현실에 투사한 우발적 대상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도시'라는 단어에서 익숙한 '서울'의 한 부분 어딘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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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 소설은 제법 도전적이다. 타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서툴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따라 올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에 등장하는‘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의 일화를 통해 “세상에는 사회와 인민 이외의 무언가의 가치가 존재함”을 말하려 했듯이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 보지 않고 외면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 즉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존재하는 것들을 진정 보려면 말이다.
금지된 그림을 인민에게 드러내는 기획, 삶의 방랑자이자 시간의 방랑자인 주인공‘경희’처럼“문제 아닌 모든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고요히 번뜩이는 적막한 별들처럼 생각할 수”있도록 해서, 우리와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을 목격하는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간의 질적 한계에 다다르면” 이미 모든 것들, 산, 강, 도시...들은 더 이상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도시‘우르’에서부터 최후의 도시일 수 있는 베를린, 서울...에서 ‘존재의 중첩’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존재란 어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 혹은 그 소산임의 증거들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도시’라는 현대 사회가 발산하는 의미들, 그것에 포획되어 방황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정이 된다. 도시의 속성, 도시의 자연이 된 익숙한 문화표지들에 대한 단상, 직업과 화폐와 정주(定住)의 주소와 같은 도시의 요소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방랑적 삶의 이야기들이 기억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색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인 우르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도시사이의 그 엄청난 양태적 유사에서 시공의 엷음, 존재적 예시를 보게 한다. 그런데, 방랑자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방이나 집을 회원들끼리 공유하는‘카라코룸’에 가입하면 전 세계에 동시적인 잠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처럼 들려주는 얘기에서 13세기 대제국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몰려든‘세계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옛 영화(榮華)와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 “어메리카나이즈드 코리아”와 같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문명적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사대주의는 카라코룸을 파괴한 러시아와 몽고인들의 어리석음에 가닿고, 이것은 환경주의 게릴라가 자신들의 생활이고 그들 자체여야 했던 사람들의 일화를 빌어 “추상적인 믿음을 위해서 피부색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를 우회한다. 설혹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기계화된 프롤레타리아 종족으로 전락했음을 인지했을지라도 우리가 “정체불명의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실존하지 않는 직업,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직업의 경희라는 여성의 도시 여행에서 마주하는 독일어 선생,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인도인 반치, 익명의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들, 그리고 경희의 실체는 왠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어서 정말 “수많은 뼈와 돌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저 깊숙한 시원의 어느 진실들을 비로소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삶, 죽음, 그 순환의 위대함, 시간을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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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낯설었다. 언젠가 작가 배수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 때 읽었던 내용을 기억하면 좀 편해지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그녀는 너무 낯선 인물이었다. 경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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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는 그 상황을 상상하며 글을 읽게 마련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상상이 잘 되지를 않는다. 머릿속이 꽉 막힌것 처럼.
생소한 분위기의 내용 전개와 어려운 대화의 연속이 나의 상상력을 더 막아섰던 것 같다. 무대낭송배우라는 주인공 경희의 직업은 내 머릿속에 컴컴한 소극장의 무대 위에 작은 철제의자를 놓고 앉아서 낭송하는 공허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만을 연상하게 한다.
무대낭송배우인 경희가 자신의 지구촌 방랑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등장 인물들이 너무나도 글로벌해서인가 내 머릿속에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독립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이다.
서울의 낮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도시인들이고, 여기 나오는 독립적으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도시에 적응하며 도시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는 도시 친화적인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경희는? 도시인일까 아니면 그저 도시를 구경하는 여행객에 불과한 것일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다양한 도시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저 담백하게 그녀의 삶을 도와주는 역할에서만 등장하는 것일까?
어렵게 읽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너무 많은 질문과 의문을 갖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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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거리의 방랑자는 도시인의 영혼을 지닌 고대인이다. 여행자와 관광객을 구분할 수 있듯이 우리는 도시인과 고대인의 영혼을 구분할 수도 있다. 방랑자의 깨어있는 몸이 도시 언덕을 오르는 여행자라면, 잠든 몸은 머나먼 과거를 찾아 오르는 영혼의 여행자이다. 배수아의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한 방랑자의 탐색의 기록이자 지나친 과거에 보내는 엽서다. 작가에게 여행이란 "하나의 작업실에서 다른 작업실로의 이동"이라면 이 소설은 배수아가 걸아간 여로에 있던 사물과 인물들에 대한 문학적 탐색이다. 독자들이 배수아가 마련한 '정신의 공항'에서 경희의 노정을 따라나서며 다소간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여정의 동반자로서 우리 모두가 기쁨과 만족을 느끼지 않을까.
"어느새 나는 땀을 흘리면서 언덕을 오르고 있어. 그리고 그제야 알아차렸어. 이 도시는 화성의 표면처럼 수없이 많은 불그스름한 언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언덕을 올라갈수록 모든 사물들이 둥그스름한 대기의 엷은 층위로 떠오르는 달처럼 지평선 위로 솟구치며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집들과 사원과 고층 건물과 끝없는 계단, 언덕, 자동차, 빌딩과 지하철로 향하는 커다란 문들이."(101쪽)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정체성과 신분에 관해 결코 많은 정보를 제시하지 않는다. 언제나 결핍된 토막난 삶의 단편만을 들려줄 뿐이다. 주인공 경희는 30대의 낭송극 전문 성우다. 성우란 본디 음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목소리 화가 혹은 톤으로 연기하는 목소리 무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이런 특색은 배수아가 이 소설에서 맡은 작가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대변하고 있다. 주인공이 정처없는 방랑을 시작한 이유가 매우 낭만적이고 엉뚱하기까지 하다. 어느날 수년간 연락이 끊긴 자신의 과거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작정 그를 찾아 도보여행을 떠난 것인데 그 독일어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경희의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부러진 사건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걸어서 여행한다'는 육체의 순수하고도 직접적인 진지함에 맹목적인 강박성을 갖게 만든다.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낯선 여정에서 경희는 벨기에 문학 교수, 소설가 미스터 노바디, 비엔나에 사는 마리아, 아마추어 예술가 반치, 동양인 남성 등 여러 인물들과 잠시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며 잠시 머물다 지나간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등장인물을 꼽는다면 반치를 들 수 있다. 반치는 미스터 노바디와 마리아의 아들인데 인도 수트라 경전을 번역하고 그 문구를 적어 넣어 그림엽서를 만드는 일을 한다. 경희가 잠시 묵는 방의 집주인에 대한 소개도 곁들인다면, 여든이 넘었지만 야생적인 기질을 가진 교사 부부나 베를린에서 니체를 공부하는 철학도이자 직업 치유사 등이 등장한다.
문체는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배수아의 문체는 지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활용한다. 하지만 김훈의 남성적 문체와는 완연히 다른 무늬를 드러낸다. 누군가 두 작가의 문체를 비교해주었으면 좋겠다. 저자의 포스트모던한 문체가 추구하는 '스토리를 전달하는 비서사적 진술 방식'이란 다름아닌 감정의 피사체와 정신의 현기증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 문학적 취향이 배수아 문체를 충분히 즐길 줄 아는 마니아급이라서 다행이고 기쁘다.
"감정이나 정신의 현기증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추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구체적인 형체와 냄새가 있어요. 심지어 어떤 특별한 장소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기까지 하죠."(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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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실제처럼 그린다고 했던가요? 기억 속 배수아의 소설 세계는 내가 사는 현실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저 멀리 그곳엔 있을 것 같은 세계였습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아주 독특하고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낯선 세계에 들어선 나는 늘 길을 잃고 헤매다 주저앉기 일쑤였습니다. 가끔은 현기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 세계는 앞으로 걸어갈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그 자리에 멈출 수도 없는 세계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배수아의 소설『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읽었습니다. ‘서울’과 ‘낮은’과 ‘언덕’이란 단어가 아니었다면 읽을 용기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단어들의 조합은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었고 다시 배수아의 소설이 궁금해졌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의 낮은 언덕’이고, 지금 사는 곳은 ‘도시의 낮은 언덕’입니다.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과 ‘도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시, 세련된 고층건물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멉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서울의 양면성을 만나면 새삼 놀라곤 합니다. 아, 여기도 서울이었지,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걸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며, 마음과 육체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묘사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23쪽) 소설은 ‘우리’가 경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경희에게 보내는 편지의 복사본을 들고 서울에 와 그녀를 찾아 헤매는, 방랑하는 이야기이자 경희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차가 막 도착한 직후의 중앙역에서 만난, 고향에서 낭송 배우였다는 경희는 연락이 단절된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연을 듣고 처음 방랑을 시작한, 뚜렷한 목적지 없는 여행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 욕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욕망,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자 하는 이 애처로운 욕망. 그건 형태를 바꾸며 되풀이되는 영원한 성질과 같은 거야. 구름의 아래와 위로 동시에 자리한 다른 하늘과 마찬가지로. 그래, 그것은 허공을 나는 참매들이었어. 그러다가 무심코 머릿속의 떠오름을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형태로 만나지 못할 우리는 지금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떨어지고 있는 참매들인 걸까요?”(56쪽)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내 집을 사는 일에 인생의 전부를 겁니다. 도시엔 하늘과 맞닿을 듯 치솟은 고층건물과 자동차가 붐비는 곳도 있지만 철거직전의 폐허의 마을이 있습니다. 두 장소 모두 집이 존재하기에, 사람이 살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입니다. 미스터 노바디가 당한 것처럼 도시는 공통을 위해서 금지해야 할 것들이 많고, 치유사처럼 도시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을 판단합니다. 경희처럼 같은 집에 살아도 자매가 어떤 것을 잘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도시는 자연스레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이 뒤섞인, 개별성은 사라진 공간. 애초 집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곳에 살고 있으니, 정주하지 말아야 할 곳에 터를 잡고 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도시를 만든 자들 역시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도시인으로 사는 것보단 구경꾼으로, 여행자로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이곳이 싫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반치의 경우처럼 가족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이 도시에서 머물기를 강요합니다. 또한 도시들은 소수자에게, 이방인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별성이 사라졌다면, 독자적인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도 같고 도시는, 그리고 ‘나’는 커다란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로 개별성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같습니다. 경희의 한자는 알 수 없지만 京嬉라고 쓰면 서울여자, 도시여자로 여겨지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경희’라는 이름은 개별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흔한 이름입니다. 소설에선 여행을 아주 작은 분자인 내가 아주 조금 옆으로 이동한 것이라 보고 정착이나 여행이나 이민, 그리고 실향의식은 의미 없는 구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든 그러지 않던, 많은 것을 갖고 떠나든 그러지 않던 삶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경희의 직업 낭독 배우는 끝도 시작도 없는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계야말로 시작도 알 수 없는 곳 같습니다. 소설 역시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 모호합니다. 배수아는 소설에 필요한 것들을 제발트의 책들에서 최초로 발견했다고 했으며 소설에도 제발트의 책들이 등장합니다. 제발트의 책들을 읽고 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스토리가 명확하지 않은 배수아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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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신간 서적이 나왔다. 그녀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에게 그녀의 신간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이해하기 쉽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은 아니었다. 낭송 전문 배우라는 직업도 생소하고 스토리가 주는 이야기가 자꾸만 끊어지듯 이어지고 있는 것이 불투명한 느낌의 소설이라 읽는내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의 저자 배수아씨는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한 독특한 문체를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국어를 싫어하던 그녀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부터 남다르다고 느껴졌으며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주로 쓰는 그녀의 작품에 열광하는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다.
주인공 경희의 직업은 낭송배우라고 한다. 경희는 세계 여러나라 여러 도시들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리.. 경희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와 경희의 첫만남은 기차가 출발하려는 역 앞이였다. 자신과 만남을 가질 사람을 만난적도 연락처를 아는 것도 아닌 비엔나에 살고 있는 친구를 통해서 잠시 머무를 집의 주인인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경희에게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지게 된다.
낭송전문배우 경희가 방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갑작스럽게 헤어져서 그 이후 몇 년 동안 만남을 갖지 못한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게 된다. 그 소식을 접한 경희는 막연하면서도 우울하고 감정이 메말라 가듯 암울한 기분에 휩싸여 독일어 선생을 찾아서 무작정 걸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경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나이든 교사부부의 이야기나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끼리 서로의 집을 공유하며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없이 집을 제공 받을 수 있는 방랑자 포럼 카라코룸을 마리아를 통해서 알게 되고 마리아를 통해서 낯선이와 잠자리를 공유하는 것이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연히 길을 나선 곳에서 보이는 스타벅스 표지판이 주는 안정감에 들어가게 되고 밀크커피 두잔을 시켜 놓고 앉은 자리 옆자리의 동양인 남성에게 별다른 감흥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정작 남자가 보이는 호기심이 경희는 부담스럽다.
자신의 기를 빼앗기면서도 귀에 입술을 대고 흡착하는 치유사, 경제적으로 항상 경희에게 도움을 준 미스터 노바디와 그의 아들 반치, 마리아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들을 수 있다. 찾으려고해도 찾을 수 없었던 경희를 마지막에 우연히 보게 된 포스터를 보고 찾아가며 그녀와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화자의 희미한 영상처럼 인식되는 나란 존재에 대한 부정...
한동안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스토리가 주는 모호한 느낌으로 인해서 겨우겨우 책장을 넘기다 어느순간부터 작가 배수아씨가 주는 언어의 유희를 느끼게 되면서 경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빠지게 된다. 19년을 글을 쓴 배수아씨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 기울리고 싶어진다.
여행에 대한 치유사의 이야기와 반치가 경희를 보며 하는 이야기는 인상에 남는다. 여기에 반치가 한 말을 적어본다.
나는 네가 이 도시를 네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와 쉽사리 겹쳐서 생각 할 수 있는 그 방식이 놀랍고도 두려워. 네가 즐겨 말하는 '동시에'란 어휘가 두려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해한 게 아냐. 반복되는 엉휘는 어휘 이상의 힘을 갖지. 나는 이렇듯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별의 어휘를 쏟아놓고 다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한 네가 놀라워. 놀랍고 두려워. 이 도시에 도착해서 저 도시를 떠날 수 있는 너를 감탄해. 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 그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여. 너는 구분할 수 없는 우주만큼이나 현기증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사흘 밤 낮 동안 계속해서 낭독되던 옛날이야기 같아. 네 입은 늘 뭔가를 낭송하듯이 말하는데, 너는 늘 너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말해지는 것은 너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변형되고 파생되고 비유되고 한없이 희박해져서 성분이 투명해진 너. 네가 이상하고 놀랍지만..... -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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