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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번역, 새로운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작품 중 하나이다. 1990년에 나온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는 대여섯 번을 볼 정도로 ‘노인과 바다’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러하니 이번에 이정서 역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기대 역시 남달랐다. 나는 늘 패배주의자적인 삶에 종속되어 있는데, 노인으로 대변되는 힘없는 한 사람이 거대한 자연과 맞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어찌할 수 없는 투쟁의 끈질긴 삶은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삶의 경지여서 언제나 늘 책 속의 주인공을 존경해왔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111쪽) 바다를 향한 노인의 외침은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승리란, 너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 책은 진정한 “승리문학”이라 부를 만하다. 이 책의 번역자 ‘이정서’는 기존의 고전문학 작품의 번역서들에 대하여 전투적인 자세로 대향해 왔고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 작품들은 원문의 내용을 충실히 번역하지 못했고 지나친 의역으로 인해 작품을 훼손했다는 주장을 하며, 의역이 아닌 자신의 직역이 가장 원문에 충실하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독자 입장에서는 의역이 더 편할 수도 있고, 직역이 더 불편할 수도 있다. 그것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하거나 다양한 환경적 차이에 의한 수용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어느 번역이 더 나을지는 독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물론 명백하게 틀린 번역을 하는 것은 논외의 문제다. 헤밍웨이가 문학적으로 거친 표현을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정서의 문장에는 ‘그것’으로 번역된 문장이 무척 많았다. 가끔은 ‘그것’이 뭘 뜻하는지 읽으면서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가 다소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독자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해야만 해.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게 남은 전부니까. 그것과 야구 말야.” (새움, 111쪽) “하지만 난 생각을 해야 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생각하는 일하고 야구밖에 뭐가 있는가.” (민음사, 105쪽) 개인적으로는 민음사의 이 번역이 훨씬 좋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문장을 읽으면서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움 번역본을 읽으면서는, 사실 그러한 사실(번역에 대한 부분)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자꾸 번역의 수준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책에서는 어떤 식으로 번역했지 하면서 읽다보니 자연스러운 흐름을 놓치는 일이 생겼다. 가지고 있는 다른 두 권의 책과 비교해가며 보았을 때 세밀한 차이는 매우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책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바꿔 놓지는 않는다. 어떤 책을 선택할지는 독자의 몫이지만, 다만, 정치판처럼, 상대를 공격하면서 내 우위를 증명하는 방법은 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은 문학작품으로 세상에 흔적의 존재를 남겼으면 좋겠다. 지나친 공격은 상업적인 의미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힘들게 쌓아올린 문학적 성취가 오히려 가려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작품처럼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으로 승리가 무엇인지를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할 것이다. 다 읽고 책 뒤에 수록된 “노인과 바다”에 관한 깊은 오해, 부록을 읽었다. 이 부분을 읽지 않고서는 기존 책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부록에는 기존 번역서들에게서 발견되는 중요한 오역이 원문과 함께 잘 대비되어 있었다. 어떤 문장은 책 내용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 해당되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번역자라면 모든 문장 하나 하나가 매우 중요했으리라. 다른 번역으로 원전을 좀더 제대로,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특히 ‘소년’으로 번역된 ‘boy’에 대한 고증적 접근은 매우 신선했고 책을 읽는 데 더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제 독자들은 비교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각자 마음에 닿는 범위에서 다르게 평가하며 책 읽는 재미를 증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자에 의한 그 어떤 수준보다 “노인과 바다”는 그 자체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명작임이 분명하다. “길 위쪽, 그의 오두막 안에서, 노인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대고 자고 있었고 소년이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는 중이었다.” (마지막 136쪽, 마지막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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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글을 제대로 읽은 기분입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기본적으로 배려와 존중을 지닌 한 나이 든 어부가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고 보여주는 당당함과 겸허함,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고독한 서사를 읽었습니다. 기존에 나온 『노인과 바다』의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부분부분 의문을 가지거나 문맥이 이상하다고 여겨지던 부분들이 이정서 번역가의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어린 소년과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많았던 부분들은 소년의 나이가 어린 소년이 아닌 청소년이 되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노인이 굽히지 않는 의지를 지닌 고집스럽고 우직한 성격의 노인이라는 기존의 생각은 노인이 보여주는 모습을 따라가는 동안 사람과 자연에 대한 성찰과 존중, 그리고 이해를 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바뀝니다. 바다에 떠있는 동안 노인이 하는 혼잣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이해입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경험과 연륜으로 무장한 노인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길 기도하며 거대한 물고기와 망망대해라는 자연과 부딪히고 싸우면서 직면하게 되는 소멸하는 의미에서의 죽음에 맞서는 모습은 파멸할지언정 자연에 매몰되어 패배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죽음을 넘어서며 커다란 청새치를 잡고 돌아가는 길에 몰려드는 상어에게서 물고기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사투, 결국 부두로 돌아오지만 상어 떼에게 물어뜯긴 물고기의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된 노인의 자신이 물고기를 잡은 것이 잘못이라는 회환은 일견 겸허하기까지 합니다. 노인의 말과 행동에서는 드러나는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과 죽음을 앞에 두고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신을 향한 경건함과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기존에 번역된 책에서 보던 막연하게 멀리 움직이는 물고기 떼가 아닌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 모양을 말하는 부분에서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부추기는 부분은 망망대해의 장면이 눈에 그려집니다. 노인이 오랜 시간 물고기와 연결된 낚싯줄을 잡고 있는 내용을 쓴 부분은 큰 물고기를 낚는다는 결과에 치중했던 튼튼한 낚싯줄이 아닌 낚시꾼의 노련함을 나타내는 ‘한결같은 낚싯줄의 강한 당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당김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고 직관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헤밍웨이의 문체의 특징이라고 하는 심플하고 거칠다고 말하는 부분이 보다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만큼 더 상상을 지나서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때로는 간결하고 건조하게 까지 느껴지는 문장이 어떤 장면에서 오히려 시적인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다시 읽게 된 『노인과 바다』에서는 지금까지『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알 수 없었던 헤밍웨이가 남긴 걸작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면서 원서와 비교해보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글은 몽실북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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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은 패배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는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비록 나는 유감스럽게도 물고기를 죽였지만, 그는 생각했다. - 111p 거친 바다와 잡아 올릴 때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와의 사투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 이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는 듯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인 <노인과 바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금 펼쳐들고 읽는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니 어느 순간에 숨을 쉬어야할 지 몰랐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하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번역에 따라 작품이 주는 감동이 다르다. 그래서 완역판이 아닌 원서를 직접 읽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럴 능력이 안되는 나에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이나 의도를 잘 반영한 번역자의 작품을 골라서 읽는 것이 중요했다. 고전의 경우는 유명한 작품일수록 다양한 번역자에 의한 재출간이 많은데 번역자의 해석의 차이로 인해 같은 문장이라도 번역이 다르고 그것이 독자가 받아들이는 작품의 느낌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이번 작품을 번역한 이정서 역자님의 경우도 이 점을 지적하며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담긴 철학과 보지 못했음에도 직접 보고 있는 것같은 현실감과 긴장감뿐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노인의 마음 등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호라 칭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문장 한 줄 한 줄에 담긴 시적 표현과 거친 바다 위에서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독백을 하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하는부분 등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그의 문학성과 작품성에 감히 평을 내릴 수 없을만큼 감동과 또 한번의 충격을 받았다. 힘겹게 잡아올린 물고기를 자신의 배 옆에 묶어서 돌아가는 길에 피 비린내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로부터 물고기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장면은 노인과 상어의 단순한 싸움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대결로 현실이 아닌 꿈이길 바라는 노인의 마음처럼 나 역시도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하고 무사귀환하길 간절히 바라며 읽어나갔다. 이야기가 끝난 후 뒷부분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깊은 오해편에서는 헤밍웨이가 이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노인이 잡아올린 물고기의 정체, 헤밍웨이의 문체에 대한 오해에 대해 밝히고 있다.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주었다. 바다로 나아가 홀로 물고기와 긴 시간 밀고 당기기를 하며 물고기와 이야기를 하듯 독백을 하는 그에게서 기다림을 배울 수 있었고, 끝없는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에게서 시련마저도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의역이 아닌 작가가 쓴 서술 구조 지키는 번역인 직역의 방법을 통한 '전혀 새로운 번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이정서 역자님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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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고난 후에 맛보는 달콤한 꿈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몇 달 동안, 정확히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있다. 마을에서는 다섯 살때 어린 그의 배에 탔던 소년 하나만 어부의 편일 뿐, '살라오(최악의 불운한 상태)'가 된 그를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소년과 어부는 야구 이야기며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로 대화를 잇고 우정을 쌓는다. 85일째 날이 시작되었다. 늙은 어부는 아직 환히 밝지 않는 새벽녘에소년을 다른 배에 태워 고기잡이를 내보내고 자신도 사랑스럽지만 언제든 잔혹해질 수 있는 바다로 향한다. 오늘은 85일쨰니 오늘 하루는 제대로 낚아야지.
미끼를 모두 채워넣은 갈고리에 태양이 높이 뜬 후에야 무언가 걸려든다. 청새치였다. 굉장한 놈이었다. 아주 큰 놈이었다. 어부는 드디어 물고기와의 기나긴 전쟁에 들어간다. 서두르다가 물고기가 튀어올라 갈고리가 빠지는 일이 생겨선 안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중얼거리며 고독하고 지루하며 몹시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묵묵히 시련을 견딘다. 이틀 밤낮을 보내고서야 그는 드디어 승리한다.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항구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할 리 없다. 청새치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들고 이제 노인은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처지가 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끝없는 바다와 하늘을 무대로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그리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난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늙은 어부. 그는 연약한 듯 불행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강인하고 인내심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읽어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역자의 말을 빌자면, ≪노인과 바다≫는 실상 오히려 자연에게 패배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와중에 오히려 잡아 죽여야 할 적이라 해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헤밍웨이가 시적 문장으로 말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역자는 '올바른 번역'을 내세운다. 헤밍웨이의 문학 인생이 응축된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이 지금까지 번역되어 나온 여타의 책들의 오역으로 인해 잘못된 주제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고전 명작, 역자가 근거로 내세운 오역에 대한 부분을 짚어가며 읽는 것도 한편으로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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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새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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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노인과 바다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생각이 안나는것 보면 그저 학교 숙제를 위해서 읽었던것 같다. 솔직히 난 소설도 내가 좋아하는 장르만을 읽고 명작이라고 하는것들은 잘 안 읽는 편이다. 왠지 어려울것 같고 재미없을것 같은 편견이 있어서 그런것 같다. 노인과 바다도 아마 그런 책들중에 하나였을것 같다. 노인은 넓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가서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고기가 잡히지 않는것에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고기를 잡았지만 그 고기때문에 나타난 상어를 만나기도 하고 상어와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상어에게 물고기를 빼앗기고 남은것이라고는 뼈밖에 없지만 그것 또한 이겨 낸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이 아닌 것들과 이야기도 한다. 그 독백이 왠지 나는 서글프게 느껴졌다. 분명 학창시절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인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때 읽은 느낌과 지금 읽은 느낌은 당연히 다를수 밖에 없는것 같다. 이 책이 이런 느낌의 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누구에게나 너무 잘 알려진 명작을 만났고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나에게 다가온 이책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좋았다. 지루하지 않을까? 어렵지 않을까? 참 많은 생각을 하고 봤는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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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를 처음 읽었던게 고등학생때 였나.. 지금 그는 그것을 다시 입증하고 있는 중이었다. -7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