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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p. 19 ~ 20)
다비드 그로스만이 98년에 발표한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로만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같은 이스라엘 작가인 아모스 오즈가 쓴 '여자를 안다는 것'이 생각난다. 이 소설 역시 서간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아모스'란 이름이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도 나온다. 남자 야이르에게 편지를 받는 미리엄의 남편 이름이 바로 '아모스'인 것이다. 오즈의 소설은 89년에 나왔는데, 그렇다면 '나의 칼이 되어줘'는 '여자를 안다는 것'의 오마쥬일까? 그냥 재미로 떠오른 생각만은 아니다. '나의 칼이 되어줘'의 야이르 역시 파티에서 우연히 한 번 보았을 뿐, 일면식도 없었던 여자에게 장장 6개월에 걸쳐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다름아닌 미리엄을 알기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단순히 연애 소설로 보면 곤란하다. 비록 야이르와 미리엄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고 해도 그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이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정된 정체성'이란 덫에 갇혀버린 자의 비애 혹은 절규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칼이다. 미리엄 보고 칼이 되어 끊어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미리엄에게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칼인 것이다. 인용한 문장에서 우리가 '칼'말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단어들'이란 말이다. 바로 이 말에서 우리는 편지 자체가 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신의 단어, 그건 곧 나를 벗어나 타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니까. 그렇게 이 소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정체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야이르가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도 이와 연관 있을 것이다.
다시 아모스 오즈의 '여자를 안다는 것'을 가져오고자 한다. 여기서 '여자'란 단순히 성별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남자에게 있어 '절대적 타자로서의 여자'이다. 다시 말해, 아모스 오즈의 '여자를 안다는 것'은 그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 다비드 그로스만의 '나의 칼이 되어줘'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이미 신체로 육화되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론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타자의 도움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바로 타자에게 글을 쓰는 것으로 말이다. 야이르도, 미리엄도 상대에게 주는 편지에 자신의 곤경을 지속적으로 기입한다.(이 소설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보낸 편지로만 채워져 있고 2부는 미리엄이 야이르에게 보내는 편지로만 채워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둘이 직접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그 곤경의 원인을 알고보면 대부분 내부에 확정된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특히 야이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싫어한다. 그는 어떻게든 거기서 탈피하려고 하는데, 그런 그를 좌절시키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다. 그는 평생 부모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건만 아들에겐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들 앞에서, 아들에게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사회화를 통해 형성된 그 정체성이 얼마나 완강하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발견한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여전히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있는 정체성을. 이로 인한 그의 절망이 일면식도 없는 미리엄에게 편지를 쓰게 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달아나 타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칼이 되어줘'는 글쓰기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대로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가 문학의 의미를 물었던 것과 이어진다. 문학이 글쓰기의 한 형태인 것을 감안하면 다비드 그로스만이 포착하고자 하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다비드 그로스만이 글쓰기의 의미 가운데 중시해서 불러내는 것은 바로 '타자- 되기'로써의 글쓰기다. 사실 어떤 대상에 대해 글을 쓰면 글을 쓰는 자신은 쓰면서 늘 그 대상에 대해 생각해야 하므로 바로 그 대상, 타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말이다. 그는 단적으로 말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타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들뢰즈는 동물에 대해 글을 쓰면 '동물 되기'이고 여성에 대해 글을 쓰면 '여성 되기'라 말했다. 글쓰기에는 그러한 탈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매혹적이고 지금도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지란 '타자 - 되기'의 가장 대표적인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다른 어떤 글보다 편지를 쓸 때 가장 많이 상대인 타자를 생각하는 까닭이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만 고려하여 편지를 쓰는 사람은 없다. 늘 이 편지를 받은 상대의 기분과 반응을 염두에 두고 쓰게 된다. 편지는 지극히 타자 중심적인 글쓰기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편지의 성격 때문에 다비드 그로스만은 '나의 칼이 되어줘'를 서간체 소설로 만든 것이라 본다. 사실 정체성 탈피에 관해선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것이 다비드 그로스만이다. 그는 현재 가장 활발하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는 작가이니까 말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는 근본적으로 정체성 때문이다. 종교로 더욱 강화된 그들의 고정된 정체성이 타자를 전혀 인정 안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확고한 정체성 앞에서 타자란 공존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저 제거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마음이 얼마전 전 세계에 보도되어 충격을 주었던, 비무장 민간인 팔레스타인을 웃으며 저격하는 이스라엘 병사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스라엘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다비드 그로스만이 고정된 정체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 문제 의식이 바로 '나의 칼이 되어줘'로 만개한 것이다. 비단 이스라엘만이 아니다. 특정한 사회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을 절대시하는 바람에 빚어지는 갈등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갈등과 대립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되는 목숨들을 보노라면 하루빨리 이러한 정체성의 중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정체성은 선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게 바로 수행적 정체성이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이제 우리도 정체성을 너무 무거운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기분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가볍게 여길 때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게 만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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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만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했듯이,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타인에게 그 모습 그대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이 아닐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폭력이 아닐까.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때로는 사랑하는 배우자나 가족에게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감추기 시작하면서부터 병을 들어가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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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 정부의 정책에 열렬히 반대하는 용감한 이스라엘 사람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와 처지를 편드는 이들은 사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이익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 수전 손택
조선 시대의
아녀자들은 ‘은장도’를 노리개처럼 달고 다녔는데, 엄밀히 말해 은장도는 호신용 칼로, 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도구가 칼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칼로 할복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지켰다. 그러니깐 대부분의 경우 칼은 적을 공격하는 도구인데, 역설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도 사용된 셈이다.
‘칼’이 갖는 이러한 역설적 의미와 다중적인 이미지는 작가로서 다비드
그로스만이 처해 있는 복합적인 상황,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그가 직면한 복잡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다비드 그로스만이 선택한 것은 편지를 통한 ‘대화’이고, 그 ‘대화’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엄밀히 말해 소통이라기보다는 자기 이해 내지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이야기처럼 읽히지만, 그의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것, 그리고 그가 지식인으로서 꾸준히 이스라엘과 세계에 전한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상투적으로 누군가가 나를 배신할 때 ‘등에 칼을 꽂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다비드 그로스만은 자발적으로, 타자에게 자신의
칼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타살처럼 보이는 자살같은 매우 극단적인 이러한 행동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기만의 역사와 정체성을 확립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분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노력의 끝에 있는 것이 무언인지는 불투명하며, 작가가 희망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도 요원하다. 이러한 전망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주인공들은 이미 배우자와 자녀들까지 있는 기혼 남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때문에 그들이 지금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건, 결국엔 스스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짐작 가능하다.
다비드
그로스만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과 팔라스타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개개인들은 문제의식을 갖고, 거기에 대해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해도, ‘민족’이나 ‘시온주의’ 등등의
철옹성 같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들이 그들을 옥죄고 있는 한, 이러한 생각이나 시도는 큰 반향을 일으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개인들의 삶은 “마개가 꽉 닫힌 항아리 속에 갇힌 것”(p.227) 같을
따름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을 뿐더러 그마저도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할 때가 많기
때문에, 내부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나 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역사를 겪었으나, 팔레스타인들에게는 가해자가 된 복잡하고 기구한 운명을갖고 있으니 말이다. 유럽에서 그들은 영원히 ‘피해자’이지만
중동에서 그들은 현재진행형의 ‘가해자’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그들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의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방적
피해자도, 일방적 가해자도 아닌 상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
살아가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태인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자혹한 운명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깐
다비드 그로스만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나의 칼이 되어줘』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한 역사 의식과 문제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이 작품을 좋아하고 추천한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존의 이념과 체제가 너무나 완고하기에 누군가는 변화와 이해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향유하는 사고방식과 이념의 편의성에 투항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그러한 행위가 스스로에게 칼이 될 지언정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다비드 그로스만 같은 사람일 것이다.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다비드 그로스만이 제시한 방법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모든
사회적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쳐다보기를 겁내지 않는 것, 현실을 똑바로 보고 제대로
모순을 말하는 것.” 이것이 “사랑은 내가 자신을 깊숙이 찌를 수 있도록
당신이 나의 칼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의 함의라고 한다면, 두
말은 이음동의어처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결국 다비드 그로스만이 누군가에게 나의 칼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것은,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제대로 모순을 말하며 이 상황을 타개하고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의미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타자’인 우리에게 내미는 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수전 손택 식으로 이해하자면, 다비드 그로스만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자기 나라 정부의
정책에 열렬히 반대하는 용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자 이스라엘의 진정한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많은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들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는 결코 용인되기 어렵다.
내부에서의 문제 해결이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비드
그로스만 식으로 접근하자면,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내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도록,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깊숙이
찌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그들의 칼이 되어줘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은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사랑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이 작품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야이르가 누누이 편지에서 말하듯이 “사랑은 내가 자신을 깊숙이 찌를 수 있도록 당신이
나의 칼이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넓게 보자면, 이 소설은 다비드 그로스만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해서 전세계에 내민 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세계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무조건적인 옹호나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오래된 앙금과 결코
풀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의 무게와 숙명을 벗을 수 있도록 그들의 칼이 되어주는 것이다.
독자로서
바라기는, 그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그래서
공명할 수 있기를, 세계인은 우리와 함께 그들의 문제를 풀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 스스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수 있기를, 그들이 바라는 그들의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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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앞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그런데, 첫 문장이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쓴 편지인 것이지요. 이 편지를 쓴 야이르는 동창회에서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한 미리엄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동창회에서 야이르는 미리엄과 함께 그 남편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도 함께 보았죠. 그런데도 편지를 씁니다. 뭐, 그럴 수야 있겠지요.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은, 틀림없이 사랑을 담은 편지입니다. 연애편지라 하면 저도 꽤 써보았는데요, 야이르의 편지는 단순한 연애편지의 수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때로는 광기까지도 보이는 그런 편지입니다.
첫 편지를 보낸 후 미리엄에게 답장이 오자 기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동창회에서 첫눈에 반한 후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아 기뻐서 쓴 두번째 편지인데요, 아직은 알아간다고 할 수도 없는 단계인 것 같은데 편지의 밀도가 이렇습니다. 어마어마하지요. 편지들 위에는 모두 편지를 쓴 날짜가 쓰여 있는데요, 하루에 세 통씩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쓴 건 더 많다고 합니다.
편지든 뭐든 글을 쓴다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낸 것만 세 통이고 실제로 쓴 건 훨씬 많다니. 하루 종일 미리엄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지요? 그리고 이 편지에서, 바로 책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Be My Knife.
그런데 몇 통의 편지를 더 주고받은 후, 야이르의 편지에서 “아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야이르는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던 것입니다. 대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일까요? 야이르의 편지들을 쭉 읽어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밀도가 높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정말 많은 내용과 감정을 담고 있어서 보통 글을 읽는 속도로 읽으면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졌고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상과 현실이 완전히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읽지 않으면 무엇이 야이르의 상상이고 무엇이 그의 현실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야이르와 미리엄은 이러한 편지를 4월 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주고받는데, 10월 13일의 편지로 야이르는 미리엄에게 보내는 편지를 스스로 끝냅니다. 1부에서 독자들은 야이르의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편지만 볼 수 있을 뿐, 미리엄의 편지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이르의 답장과 그 답장에 언급된 몇몇의 문장만으로 미리엄에 대해서 파악할 수가 있죠. 하지만 2부에서는 드디어 미리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미리엄이 쓴 일기가 바로 2부입니다. 1부에서는 알 수 없었던 미리엄의 야이르에 대한 감정과, 미리엄의 상황이 드러납니다. 미리엄은 야이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미리엄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죠. 그렇게 미리엄의 일상과 감정을 담은 일기인 듯 편지인 듯 뒤섞인 글들이 끝난 후, 3부에서는 드디어 둘이 통화를 합니다. 통화 내용과 각자의 감정이 또 뒤섞여서 서술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이 둘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야이르는 처음에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할 때, "우리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우린 파멸하고 말 거예요"라고까지 했었는데 말이죠. 야이르와 미리엄의 사랑, 야이르와 마야의 사랑, 미리엄과 아모스의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하나이지만, 실제로 사랑이란 것은 정말 다양한 형태이지요.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이란 뭔가 하는 질문과 함께,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이 관계가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소설이란 이런 것이겠지요. 읽는 것이 쉬운 책은 아니지만, 읽으면서도 야이르의 다채로운 표현(!)들에 감탄할 수 있고 읽은 후에도 많은 생각을 남길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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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내 이름이 적힌 연애편지를 모두 찾아내 태워버리고 싶다. 사랑에 혹해서, 감정에 취해서, 훗날 그 사랑이 무너지고 감정이 사라질 걸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아서 남겼던 사랑의 흔적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고 싶다. 그래서일까.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소설 <나의 칼이 되어줘>를 읽는 내내 명치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부끄러워서. 아니, 어쩌면 부러워서. 이 작품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동창회에서 단 한 번 스쳤을 뿐인 미리엄에게 연모의 정을 품은 야이르가 거의 매일 미리엄에게 보낸 편지로, 제2부는 미리엄의 일기로, 제3부는 마침내 마주한 두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야이르의 편지는 달콤함을 넘어 화끈하고 격정적이다. "지금 당장 옷을 벗고 껍데기와 모든 것을 떨쳐내고 당신 앞에 벌거숭이로 서서 자기 영혼의 새하얀 알맹이를 드러내고 싶어 해요.", "갑자기 나를 더 세게 끌어당겨 당신의 온 영혼과 온 마음으로 내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같은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하고 있기에 - 혹은 해봤기에 - 야이르의 입을 빌려 이 같은 사랑 고백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야이르의 편지가 격정적이라면 미리엄의 일기는 조심스럽고 차분한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라도 (상대는 내 얼굴을 알지만 나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내가 좋다며 열렬한 구애의 편지를 보내온다면 겁부터 먹을 것 같다. 다행히 야이르의 편지는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잠식하는 권태와 허무, 외로움과 괴로움을 고백하는, 일종의 구조 요청서다. 미리엄은 야이르와 자신이 비슷한 상태인 걸 깨닫고 야이르에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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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물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소설의 매력적인 점은 없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그 소설의 매력적인 점이 극대화된 소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편지지 위에서만큼은 끝없이 솔직해진다. 그리고 구체화된다. <나의 칼이 되어줘>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지목될 정도로 저명한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해온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야이르라는 남자가 미리엄이라는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기한 것은 본래 편지 양방향적인데, 이 책의 전반부는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보내는 편지들만 수록하여, 야이르의 편지를 통해서 미리엄의 감정을 예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 책은 흥미롭다. 야이르의 반응을 보며 미리엄의 답장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나, 실제 미리엄의 감정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쌓여만 간다. 그리고 마침내, 책 뒷부분에선 마리엄의 시점으로 <나의 칼이 되어줘>가 흘러간다.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미리엄의 감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야이르의 편지를 읽으면서 예측했던 미리엄의 감정이 그대로 눈 앞에 드러났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의 혈청을 주사 맞은 사람처럼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게 될 거예요. 난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난 그녀와 함께 진실을 피처럼 흘렸다”라고. 그래요,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거예요.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 --p.19-20 편지만으로도, 478페이지 가까이 되는 장편 소설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사람의 감정만큼 복잡하고, 거대한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면 그만큼 거대한 분량을 필요로 한다.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나의 칼이 되어줘>를 쓸 때만큼은 그로스만이 아닌, 야이르, 혹은 미리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진솔하고 섬세한 감정표현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여기에 앉아 가장 단순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어요. 조금 전에 떨어진 낙엽을 묘사한다든지, 발코니에 쌓아놓은 의자 혹은 전등불에 모여드는 나방, 온전한 하룻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도 해요. 해가 떠오르고 어둠의 색깔이 변할 때까지 말이죠. 며칠 밤낮을 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괜찮을 거예요. 풀잎 하나하나, 꽃, 울타리의 돌멩이, 솔방울까지 묘사하고, 그런 후에 준비가 되면 조심스럽게 나 자신에 관해서도 말하는 거죠. --p.413 편지는 소박하다. 나의 감정, 생각, 느낌이 모두 포함되어있는 '일상'이 글로 표현된 것이니까. 하지만 편지에 담긴 소박하고, 진실된 일상은 누군가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혹은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편지를 쓰는 사람을 흔히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카카오톡 메시지는 이메일을 주고받지, 편지를 손글씨로 꾹꾹 눌러쓰지는 않는다. 손으로 쓰니까 시간이 많이 들어서 일 수도, 편지가 갖고 있는 '오글거림'에 거부반응이 생겨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는 그 어떤 수단보다도 진실되다. 손으로 글을 쓰다 보면 몇 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만큼, 내 감정과 생각이 몇 배는 더 담을 수 있다.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일이 있다면,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면 한 번쯤은 스마트폰 혹은 컴퓨터를 치우고, 마음 냄새나는 손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
![]() 나의 칼이 되어줘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4월에 펼친 책은 <나의 칼이 되어줘> 였다. 2017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 작가이자 이스라엘 현대 문학의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이 선보이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딜레마를 담은 작품이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기도 했다. 최근은 '흰'이라는 작품으로 또 한 번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한국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듯 권위있는 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기에 <나의 칼이 되어줘>를 넘기는 손에 기대가 실렸다. - '칼'이 되어달라 말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때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칼이 되어달라 말을 하는가. 책을 펼치기 전에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나의 칼이 되어줘. 그 절절한 부탁을 끌어안고 나는 책장을 넘긴다. 삶은 불안정하다. 위태롭다. 그렇지 않다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완벽해보이는 이도 한 때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한 사람처럼 처절하게 삶을 갈구했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이름이 그러했고, 트라우마라는 이름이 그러했고, 자신을 향한 혐오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칼'이 되어줄 이를 찾아 헤맨다. 자신은 미처 긋지 못한 나약한 내면을 끌어내주기 위해, 기꺼이 나를 긋고 찌를 수 있는 칼 같은 사람을 말이다.
![]()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 " 주인공 야이르는 사랑에 빠진다. 모임에서 처음 만난 미리엄에게, 그것도 첫눈에 말이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다. 물론 아들도 있다. 마음에 드는 설정은 아니다. 내 성향이 딱히 순애보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정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어떤 계기로든 비밀스럽게 내통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어른 조카들도 다 알만한 사실이니. (작품에서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옳지않다 주장하는 이들이 보면 기함을 토할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치관이 맞지 않는 남자의 인생을 훔쳐보는 느낌에 잠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편지', '일기', '대화'의 순서로 이어지는 책의 구성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구성은 책장을 넘길 힘을 주곤한다.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이와 미리엄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야이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문장 하나 하나에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과 추억을 담는다. 미리엄은 야이르의 문장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을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 온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서툴게 사랑을 써내려간다. 그들의 사랑이 서툴어보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의 기준이 이들에겐 다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아픔을 매개체로 사랑에 빠지는 이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관계는 계속 유지된다. 마치 칼날 위를 걷듯이, 누군가가 밀어내면 아프게 베이고 추락하기라도 할 듯이 아주 위태롭게. 미리암은 야이르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존재였고, 야이르는 미리암에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싶게 만드는 존재였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책장을 넘길 수록 이들의 감정을 짐작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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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삶의 조각을 이어준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한 남자에게서 편지가 온다. 야이르라는 남자가 말한다. 나를 보았고, 단번에 반했다고. 그래서 당신이 괜찮다면, 설사 괜찮지 않더라도 내 비밀 전부를 털어놓고 싶다고 말이다. 고작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를 관찰했다는 남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쓴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나에 대한 찬사도 있지만, 수시로 바뀌는 남자의 감정들과 그의 어린 시절 상처들이 짙게 남아있는 고해성사 그 자체다. 이미 부부의 연일 맺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에게 이 편지를 엄격하게 비밀로 부쳐야 한다. 남편뿐만 아니라 두 사람 외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백할 수 없는 내용이 담긴 이 편지들은 무려 8개월간 이어진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작. 그 시작이 점점 이어지는 방식은 "이해"나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개별적 존재에 대한 "이해"로 본다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난, 『나의 칼이 되어줘』의 야이르와 미리엄.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생(生)에 대한 간절한 "호소"로 보았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의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이 쓴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만으로 쏟아낼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어느 소설보다 섬세하고 열정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이 전해졌다. 아름다운 표현이 깃든 감정들의 높낮이는 인간의 감정의 바닥을 보여준다. 황홀한 행복과 지옥 같은 불행은 이야르는 순간순간 느낀다. 그가 이런 널뛰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녀의 편지가 늦어서, 깊은 밤이라서, 혹은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이유로 바뀐 감정을 글 속에 쏟아낸다. 그중에 그가 모욕적인 언사와 곧바로 미안하다는 사죄가 오가는 편지를 반복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와 깊이 닿아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종류죠?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지나치게 무거운 사랑이 놓여 있잖아요? 그걸 하찮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지난 며칠을 보내면서 난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낱말에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꽁꽁 묶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말이 틀렸으면 고쳐주세요.
만날 수 없고,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가진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야이르에게 미리암은 그런 존재였다.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미리암에게 야이르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움직이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다고, "집착"이라고 보기에 편지 뒤에 나오는 일기가 분명 서로 오가는 감정들이 있었다고 말해주기에 확정적인 단어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감정을 쫓아가는 것이 『나의 칼이 되어줘』의 매력이다. 동창회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인 미리엄에게 느낀 감정. 그녀의 삶의 실체가 있는 존재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 단어로 그녀의 삶 속에 존재하고 싶은 야이르의 감정은 이중적을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던 그는 그녀의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를 느낄 뿐만 아니라, 꽤나 심한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익명성을 담보로 한 야이르는 정말 솔직하게 자신 내면에 있는 욕망을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야이르의 이중적인 욕망에 대한 미리엄의 태도도 수용적이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미리엄이 야이르의 단어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일기"에서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야이르의 편지와 미리엄의 답장으로 두 사람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시작한다.
난 당신이 내 편지에 맨 처음 응답했을 때부터 알았어요. 당신이 내 한계를 넘어선 아주 먼 곳까지 나를 데려갈 거라는 사실을요. 그런데도 난 당신과 동행했어요. 왜 당신과 동행했을까요?
왜 하필 편지였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쓴 편지여야 했을까.
우리가 짤막한 편지를 주고받던 무렵 당신이 물어본 적이 있죠.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제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본 뒤에 비로소 그때의 질문을 이해했어요, 단순히 '이해'한 게 아니에요. 내 몸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조금 움직였고, 깊숙한 곳에서 당신을 향해 뭔가가 울려펴졌어요.
『나의 칼이 되어줘』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왜 "편지"여야 했는지 말이다.
쓴 순간과 읽는 순간이 다른 시공성을 가지고 있고, 다시금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편지를 사용했다. 편지에 남은 단어는 말과 달리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확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달라지는 건 이 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처음 읽을 때와 그다음에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읽는 사람의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편지를 쓸 때 어떤 감정을 느꼈고, 편지를 읽을 때 감정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이르의 해석이 미리암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미리암의 의도를 야이르가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로를 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야이르와 미리암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로에게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만, 그 어려운 이야기는 내밀한 개인의 상처와 깊게 닿아 있다.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이야기하며 두 사람의 내면은 조금씩 달라졌다고 믿고 싶다. 즉, 서로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해주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달려있었다고 난 믿는다. 왜냐하면, 슬픔을 극복하는 건,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때문이 아니라. 그 위로를 듣고 나서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는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야이르는 아버지가 가혹하게 그를 학대했던 기억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깊이를 말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아내 마야와의 갑갑한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보면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까지도, 그는 숨김없이 말한다. 혼자 끓어 안고 있을 때 점점 곪아 터지던 문제들이 미리엄에게 말하는 순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그 비밀을 홀로 간직했을 때 느낀 고독에서 해소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두 사람이 가진 상처에 대한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한시적인 8개월간의 편지가 말해주듯이,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제대로 목도할 수 있는 경험이었을 뿐이다. 그다음 단계는 스스로에게 달려있음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야이르의 심정이나 미리암의 감정을 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난 뒤에 오는 치유의 힘을 알고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비밀을 고백한 적 있다. 한 차례 전공 수업을 만난 교수님이었다. 그 수업이 끝난 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때 난 그 교수님의 기말고사 과제로 난 내가 그 당시에 홀로 감당한다고 믿었던 비밀을 적은 글을 과제로 제출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작은 고민이다.) 그 과제에 대한 성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 과제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때 마음을 억누르던 상처 하나가 떨어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 소설 속에 "딱지에 부는 바람"처럼. 미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위안을 준다.
두 사람은 책에서
발견하지 못한 걸 편지에서 발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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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자리에서 미리엄을 본 야이르는 미리엄에게 무턱대고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책 분량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야이르의 편지를 읽으며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잘 알지 못하는 미리엄에게 이런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일까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야이르의 편지글이 끝나고 이어진 미리엄의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어쩌면 두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연민과 동정을 느끼며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하고자 노력했던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서로에게 이해받기를 원했고 하나로 연결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어지지 못한 두사람. 어쩌면 두사람 모두 그런 결과를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드러난 상황자체는 단순했지만, 야이르와 미리엄의 언어는 너무도 모호하고 난해해서 온전히 책에 빠져들기 힘들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또,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처절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나 이해받을 수 없지만 이해받고 싶어 한다는 존재의 슬픔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작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어서 작가의 작품세계의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다비드 그로스만의 책을 연달아 2권을 읽으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아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의 작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다 읽고 나니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의 작품성이 인정을 받는 건, 인간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든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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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좋건 싫건 간에 마개가 꽉 닫힌 결혼이라는 항아리 속에 갇혀버리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내가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그녀에게서 뭔가를 빼앗게 돼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오고 가는 하찮고 내키지 않는 계산에 따라 말이죠. 결국 모든 건 계산적인 대차대조표로 바뀌고 말잖아요. 그리고 또 어쩌면 어른으로, 부모로 살아가면서 그리고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면서 야이르와 미리엄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당신이 지난번 편지에 썼던 내용이 생각나요. 내가 당신을 드높이는 동시에 나 자신을 추하게 만드려는 이상한 충동을 드러낸다면서 야채 장수가 썩은 토마토를 맨 위에 올려놓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했잖아요. 그들은 이렇듯 끝없이 서로에게 의문을 가지고 또 자신을 끊임 없이 드러낸다. 이 정도까지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끝까지 드러낸다. 자신들의 실제 배우자에게는 오히려 좋은 배우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과도한 감정 때문에 의심은 받았지만.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주인공에 빙의를 해서 읽는 편이다. 때문에 주인공이 나와 도덕적인 생각이 맞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연쇄 살인범이라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이마에 내 천자가 그려지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불륜'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단 한 번도 가정을 저버리거나 실제 만남을 가진 적은 없기 때문에 마냥 비난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편지가 서로의 유일한 돌파구인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이르의 편지만 읽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미리엄의 편지까지 모두 읽고 나니 어느정도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어렵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 나처럼 사랑이 아직 뭔지 모르는 사람도,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끝까지 읽고 싶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초반에 언급했지만, 한강 작가가 맨부커 인터네셔널상을 타지 않았더라면 한국에서 맨부커 상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같은 상을 수상한 다비드 그로스만 작가의 책이, 한국어로 출판될 수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책으로 얻어지는 간접 경험들의 힘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국어로 이스라엘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행운이겠다. 새로운 소설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