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 . 인간의 존재의 의문,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시 된다. 생존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이에게는 나라는 존재의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 신에게 귀의, 방랑, 구도 등을 한다. 이 답 없는 물음에 답을 찾으며 인류는 진보한다. 우리도 대부분의 바쁜 시간에는 이런 것들을 다 잊지만, 가끔 한 박자 쉬면서 생을 돌아볼 때, 우리는 자신에게 공허의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 인생의 길을 걷는 두 가지의 방법 자신에게 의지하거나 신에게 의지한다. 종교라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들은 충실히 따르고 헌신하면 된다. 자신이라는 나침반은 완전하지 못하여, 가리키는 방향이 일정하지 못하다. 답을 알지 못하기에 애써 모름을 감추고 용기라는 동무를 불러내 어깨동무를 하지만, 술 취한 자의 걸음같이 갈지자로 가면서 솟아있는 온갖 돌부리에 채이며 우리는 간다. 그 중의 한 길을 가지만, ‘나는 인간이다.’란 자기존재에 대한 의구심이란 함정이 항상 나를 유혹과 배신에 빠져들게 한다. 회개와 반성은 우리를 이끄는 진정한 나침반인 것 같다. 인간은 어쩌면 믿음과 회의가 공존하는 동물이 아닐까? 살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더욱 초라한 존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인간을 소우주라 부르는 것은 인간의 꿈, 인간의 오만 아닐까? 어떻게 보면 인간은 우주의 아주 작고 미미한 존재일 뿐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큰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나의 가치는 우주적 가치라고, 우리가 이 위대한 우주라고.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장편 소설 같은 길을 가지만, 결국 작고 소소한 삶의 사건들이 모인 단편들이 이루어 내는 것이다. 가끔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지만. 인기작가 파울로 코엔료, 그가 걸어온 길과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 세상 그리고 이 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동행이 있는 외롭지 않은 길,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도 혼자이다. 알레프라는 제목이 낯설게 느껴진다. 처음엔 표지 속 소녀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의 표지는 작가 자신과 삶과 환상을 잘 조합한 글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쓰나미 같은 감동은 아니지만, 그 특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아와 전생을 풀어내면서 우리의 삶에 잔잔히 스며든다고 할까. 그는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전생의 사랑과 용서를 통해 현재의 나를 파악해 나간다. 삶의 미로 속의 길이 아니라, 미로 밖에서 그 길을 관조하고 있는듯하다. 시베리아 철도횡단(순례길)과 자아성찰. 그의 시베리아 여행은 성지 순례길 같다. 비록 이름난 성지는 없지만, 여행을 통한 경험이 그를 성스럽게 만들어 간다. 여행은 자기의 본 모습을 모여주는 내면의 거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기의 또 다른 나로 불리는 또 다른 면, 그 속의 자신,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이다. 여행은 삶이면서도 삶이 아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일상이라는 거대한 장막 속에서 여행은 잠시의 일탈, 나이면서 나 아닌 삶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 여행 속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시베리아 철도횡단기, 그 속의 사람들, 그와 함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랄, 통역자 야오와 사인회 독자들 등은 그를 이끄는 나침반인가. 많은 것들을 이룬 작가, 그에게도 해결하지 못한 많은 의문들이 있다. 이 여행의 시작은 그의 정신적 스승 J.의 말, “당신은 떠나지 않으십니까 ”와 나의 바램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답을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라는 말, 그러나 말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행하라 그러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통치자가 대사에게 묻는다. 대사님이 알고 있는 다도의 비밀을 말해 주십시오. 겨울에는 방을 따뜻하게 준비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마련합니다. 차의 맛을 잘 내기 위해 물을 적절히 끓입니다. 하지만 대사님,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원칙들을 잘 알뿐만 아니라 그대로 실천할 줄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발밑에 앉아 그를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 돌의 정원, 카잔차키스 수많은 장소와 길이 있는데 그는 왜 시베리아 철도를 선택했을까? 서양에서 시작하지만, 동양으로 가까워지는 행로 때문일까? 그의 생각과 표현에서 언뜻언뜻 동양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의 무대는 동양이 아닐까. 그는 되뇌인다. “어쩌면 이번에는 내 머리가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일들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때로는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있다. 기차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도시, 한나라, 하나의 우주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 속의 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결코 길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행자이나, 이방인은 아니고 하나의 인간이다. 현재의 삶과 전생(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현재와 전생을 넘나드는 여행, 과거로의 여행은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할 시간여행이다. 인생은 기차같이 종착지라는 목표를 향해 한 길로 나아간다. 9288km, 시작과 끝 그리고 간이역에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삶의 경험은 우리를 철들게는 하지만, 우리를 삶의 일정한 방향으로 고정시킨다. 오직 앞으로만 달려갈 수 있기에, 하지만, 종착역에서나 변경선로에서는 그 길을 바꿀 수 있지 않는가? 길의 도시들, 그속에서 진정한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그의 열망도 느껴진다. 삶에서의 수많은 비극과 상실, 그 속에서 슬프고, 괴롭지만, 그것 또한 인생이며, 나의 행이 벌인 결과 아닌가. 이 사건들 속에서 인간은 홀로임을 느낀다. 아니 현대인들은 이미 고독에 중독이 된 것이다. 우리는 고독을 즐기고 있다. 자신이 만든 그 교묘한 함정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혼자 있으면 약해지기는 해도 더욱 열린 상태가 된다. 자신을 이기는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원인 없는 인생은 결과도 없는 인생” 이라는 사실, 인도의 현자는 ‘현재는 과거의 결과로 전생의 업보로 지금이 이루어진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주를 떠도는 영혼이고, 동시에 생을 살아가는 영혼이다. 알레프(신성한 에너지 경험, 모든 수를 포함하는 수)에 들어간 순간, 문을 통한 현실 속의 과거, 시간과 공간이 영원한 동시에 언제까지 현재인 평행우주, 우리는 이 속에 존재한다. 우리 눈앞에 있는 풍경은 인간행동의 결과이지만, 우리는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이다. 오직 현재뿐인 세상에서 과거가 인간을 지배하는 모순적인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 그대에게 이 길 말고 업보에 얽매이지 않을 다른 길이 없으리니.
우리의 개념은 우리의 길을 방해한다. “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신을 설명하는 사람은 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들과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낡은 해결책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다. “일상의 불완전한 동작들을 통해 완벽에 이르고자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우리가 하는 단순한 일들을 존중하는데 있다. 전생과 윤회, 우리가 궁금해하는 부분이 아닐까! 나의 전생에는 어떤 일이? 흔히 아름다운 사랑이 가장 처음 떠오를 것이다. 왜 우리는 그 지나간 과거에서도 사랑을 꿈꾸는지? 현실의 사랑에 대한 불만족이 만든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플라세보(placebo) 같은 것이기에.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이들. 전생의 사랑과 종교재판,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만이 단 하나의 힘이며 단 하나의 권능이오. 고백할 것이 없는 이들은 성령에 의해 보호받고 힘을 얻을 것 이다.”, 고백과 경멸, 흉터와 기억으로 상처는 남는다. 언젠가는 죽을 내 육신이 헛되이 죽지 않고 불멸함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야 이 내 육신이 불에 타 재가 되도록 오움-의지를 가진 마음이여!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 이샤 우파니샤드 중에서 현재를 이해하는 방식인 ‘기억’, 어쩌면 기억이라는 철저한 개인적 왜곡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지도, 현재라는 시점과 분리된 과거는 우리가 창조자의 역할을 하기에 나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사실은 기억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시간의 수레바퀴와 갈등은 진화의 발전의 시초가 되지만, 인간이 영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항상 지혜도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머리로만 커나가는 가분수적인 존재로 진화할지도, 우리들이 모두 지혜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올까! 목적이 없는 삶은 결과가 없는 삶이다. 아니 삶은 단지 삶일 뿐이다. 생에서의 굳건한 의지 ‘분명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이번 생을 마감하지는 않을 것이다.’와 “생은 한낱 꿈이다.” 아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어나는 꿈”, 아니면 죽음으로 잠시 막을 내리는 것 아닐까. 용서와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용서는 사랑과 포용이다.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용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사랑하기에 용서할 수 있고,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전생의 그는 비겁했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그를 붙잡아 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이 미움을 이길 거라며 용서한다. 아니 그를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라는 그 거대한 사건조차 굴복시키지 못했다. 아. 이런 것이 사랑일까? 종결의 사랑, 장미 열두송이 “나는 당신을 강물처럼 사랑합니다. 잘가요.” 그의 현명한 선택, 두 사랑(전생의 사랑과 현생의 사랑)을 다 얻은 것이다. 나는 이제 용서와 사랑을 통해 증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아, 그 답은 사랑이었다. 만약 도가 나의 목구멍을 수탉으로 바꾼다면 그것으로 새벽을 노래하리라. 만약 도가 나의 팔을 활로 바꾼다면 그것으로 오랑캐를 쏘아 죽이리라. 만약 도가 내 몸을 수레로, 정신을 말로 바꾼다면 다정한 벗이여, 나는 그것으로 이 행복한 땅, 명예로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 - 돌의 정원, 카잔차키스
그가 알고파 하는 동양의 생각들, 하지만, 동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그가 던지고 싶었던 의문은 종교와 사랑인가? 동양적 도의 개념과 서양적 사고가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인생은 답이 없는 길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말없이 묵묵하게 생을 헤쳐나갈 것이다. 우리 앞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고, 그 길 위에 서서 세상을 말한다. 하지만, 그 위에 서있는 자신조차 그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타인의 길을 보고 말한다. 그 길은 아니라고. 길은 걷는 자만의 것이다. 의문은 더욱 증폭되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삶의 시간은 의문의 연속인 것 같다. 옴. * 글을 쓰려면? 그는 간단히 답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글이란 종이 위에 풀어 놓은 인생이며, 나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삶이 글이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삶을 글로서 펼쳐 놓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을까.
|
|
영원한 물음의 시작 * '문학동네' 알레프 리뷰대회 2등 |
|
깨달음의 바다에 빠지기 위한 준비운동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 속에서는 일관된 주제가 있다. 뭔가를 찾기 위해 주인공은 길을 떠나고, 돌아올 때쯤이면 그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연금술사>에서는 평범한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마음의 속삭임을 따라 길을 떠났고,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인생의 꿈을 잃어버린 베로니카는 삶을 버리는 여행을 떠났으며,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여행이었다면, <알레프>에서는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여행이다. 선문답 같기도 하고 긴 시편과도 같은 이야기의 강물을 타고 흐르다 보면, 주인공과 함께 어느 새 우리는 깨달음의 바다에 다다른다. 그 바다는 철학자의 돌일 수도, 인생의 비밀일수도, 혹은 사랑일수도 용서일 수도, 혹은 독자 고유의 비밀스런 어떤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책은 진정한 깨달음의 바다에 빠지기 위한 ‘준비운동 지침서’ 같은 것이 아닐까. 알레프의 순간 대학 다닐 때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짝을 찾았노라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그녀만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노라고. 그래서 후배인 우리들은, 선배가 찾았다는 그녀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큰 기대 때문일까. 우리는 선배의 그녀를 보고 완전히 실망했다. 별로 예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아가씨였던 것이다. 우리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부부는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선배의 그 순간을 이해해 본다. 빛나던 그녀를 보던 그 순간, 그 지점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알레프였을 거라고. 나는 솔직히 이 이론의 ‘우주가 무한하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에서, 이 ‘무한함’의 개념부터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 난 무지(無知)하다. 그래도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는 생각은 이런 나에게조차 충분히 매력적이다. 꾸준히, 그리고 요즘 들어 유난히, 시간을 이동하거나, 과거 혹은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은 걸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조종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부분인 시간마저 맘대로 조절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용서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사랑하라. 주인공은 여행길에서 운명처럼 만난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힐랄의 도움으로, 알레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본다. 과거에 진실을 외치려는 용기가 부족한 수사였던 그는 자신의 평판과 경력이 망가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 없는 여인들을 옹호할 기회를 외면함으로써 그녀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중 하나인 힐랄에게 용서해달라고 요청하는 그. 힐랄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힐랄은 그를 용서하고, 더불어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자학해 온 자신 또한 진정으로 용서하게 된다. 하지만, 여자로써 사랑한다는 과거 속의 그녀를, 현재의 부인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주인공.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우리 선조들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고 자신의 집에 온 손님을 절대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물론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흔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무는 것처럼 길손들을 난처하게 하는 일도 없었을 터이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과거로의 문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빛의 고리수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나와 인연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현명한 거다. 혹시라도 있을 나와의 인연을 위해 일단 베풀고 보는 것이다. 나에게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면 나쁜 것이 이 베풂에 의해 조금은 희석될 것이고, 혹시 인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복과 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을 기회일 테니 말이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고, 이슬람 권에서도 손님을 왕처럼 대하는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마녀사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인터넷의 연결로 이제 세계는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컴퓨터 클릭 한 번으로 뉴욕의 자유 여신상을 보고, 또 클릭 한 번으로 지중해 바다를 볼 수도 있다. 솔직히 여권이나 비자도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아랫집 할머니 이름은 몰라도 안젤리나 졸리는 알고, 뒷집 부부의 아이들은 잘 모르지만 올랜도 볼룸과 미란다 커의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은 안다. 깨달음을 얻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혹은 자신이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서 얻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깨닫기 위해 9288km의 거리가 필요하기도 하고, 운이 좋다면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평생을 살고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고는 바보처럼 살았음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인생이란 한 편의 교향곡 같은 것 현재 누르고 있는 현(絃)의 자리에서 손가락을 떼어야 다음 현을 누를 수 있고, 이러한 부지런한 손놀림을 통해 하나의 곡이 완성된다. 지금의 음(音)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손가락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용기가 없다면 그 음악은 단지 귀에 거슬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음을 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이러한 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면, 우리는 아름다운 교향곡을 듣게 되리라. 물론 교향곡 전체를 이해하고 음미하며 사랑할 수 있는 여유 또한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한 편의 장대하고 아름다운 교향곡 같은 것이니까.
기차는 주로 달리지만 때로는 멈춤이 필요하다. 코엘료 자신의 실제 경험담인지 소설인지 좀체 명확하지 않은 글을 읽으면서, 그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우리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개의 객차로 이루어진 기차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다. 물론 그의 의미는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내 나름대로 이해해보고 싶다. 기차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려있다. 물론 달릴 때는 문이 닫히지만.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여 열심히 달리는 것 같지만, 정해진 역이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쉬기도 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가끔은 사고를 당해 멈추기도 하고, 연착되기도 한다. |
|
오 자히르보다도 자전 소설적인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신작 알레프.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알레프의 주인공은 상당히 오만하면서도 비겁한 인물이다. 그는 파울로 코엘료 본인을 자처하고 있다. 영적 어둠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나도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독히도 방어적이기 때문에 오만하게 비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얽매임이 없어야겠구나. 끝없는 변화 속에 몸과 마음을 던져서 얻는 일체감, 살아 숨쉬는 평화가 아닌, 박제된 평안과 안전을 추구해봤자 결국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구나. 깨어질 뿐이로구나. 가난한 마음, 낮은 마음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야겠구나. (charaiveti, charaiveti)
스물한살의 여자, 힐랄을 바라보는 쉰아홉 주인공의 시선으로부터 생각해 본다. 내가 누군가를 보며 나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회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 내가 보는 것은 그저 나의 과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구나. 내가 보는 것은 상대가 아니구나. 이제는 기억을 놓아보내 주어야겠다.
성과 속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소설, 알레프. <11분>보다도 오히려 알레프가 더한 것 같았다. 불륜이라는 소재와 소설의 자전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힐랄과 주인공의 관계는 상당히 묘하게 느껴졌지만, 둘 다 상당히 의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통해서만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태도 혹은 가치관이 유익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전생이라는 신비한 소재가 개입되기에 쉽사리 판단내릴 수는 없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힐랄이 전생의 행위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구원해주길 바라며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힐랄이나 상당히 이기적인 인물들 같아 보였다.
주인공을 돕기 위해서 여행에 동반하겠다고 주장하는 힐랄의 경우에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면모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타심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주인공을 위한답시고 주인공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너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내가 알고 있어"라는 말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혹은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용서와 운명에 매달리는 두 사람. 과연 용서는 꼭 피해자가 해 주어야 할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 바 있다. 범죄자가 피해자의 용서 대신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이것 또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하면 그것으로 심리적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 각자가 자기 마음을 책임지는 것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부당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책임이 오롯이 내게 돌아올 때에만 통제력 또한 내게 주어지기도 한다. 내 운명의 방향 혹은 감정의 원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외부에게 책임을 넘기는 순간, 나는 그만큼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알레프는 내 안에 있는 여러가지 불편함을 끄집어 내 주는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보고 부당함과 비겁함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며 남 탓 또한 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용서를 한 뒤 붙잡고 있던 것들을 떠내보내고 싶어졌다. 내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기억들에 대해서는 내 마음을 용서하고, 내 자신이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기억들에 대해서도 내 마음을 용서해보련다. 평화는 내 마음 속에 있으니 다른 누구의 덕을 보지 않더라도 내 마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평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
|
꿈꾸는 이는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욕망의 하녀에 비유한다. 즉, 불안을 생산하는 요체는 마음의 반응이라는 뜻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 선택에서 오는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안은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물질을 잉태한다. 희망은 곧 에너지를 모으고 삶을 고무하는 동력이 된다.
나는 코엘류의 마음을 강물처럼 사랑한다. 안토니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순항하던 그 위대한 여정의 순간의 연금술에서부터 인간의 순수함에 공명하던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무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아로새긴 삶을 대하는 지침은 시대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한다. 굳이 알레프를 신심으로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주는 등대처럼 반짝인다.
이 책 <알레프>는 치유의 소설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에 가슴 벅차 오르고 매몰된 꿈의 원형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코엘류의 손으로부터였으나 끝은 자신이 된다. 비록 빛의 고리를 마주 대 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인생에 펼쳐진 표지를 식별하는 혜안을 얻게 되리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갈 초심자의 그 마음처럼.
실제 알레프는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평행한 차원이다. 알레프를 기의 운행으로 그 기저에는 윤회의 큰 틀이 담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오고 가며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은 기억의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시간의 모래밭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코엘류는 알레프의 차원을 통해 전생의, 아니 다른 차원의 자아를 발견하고 용서 받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사랑의 이름으로 힐랄을 통해 치유한다. 분명 코엘류의 갈등의 극복은 생경하며 이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합리화된 야만의 본성과 그것을 타파하는 용기를 엿본다. 타자가 형상화한 우상의 실체는 자신을 얼마나 옭죄며 그 결박의 사슬을 끊어 내기가 힘든지에 대해 코엘류는 수도사의 눈으로 투영했다. 몽매의 억압은 지금도 풀어야 할 운명의 사슬이다. 과거는 현재를 노래하는 투영의 시간이듯 실체 없는 야만은 두려움이다. 나는 코엘류가 애써 시공을 넘나들며 그 광활한 러시아의 강철의 레일을 덜컹이는 공간을 달리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속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극중 자아인 '나'는 불리지 않는 대상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나'이기 때문이다.
알레프를 경험하기 위해 코엘류는 힐랄이 피워 올린 우정의 불을 매개 삼아 불쏘시개로 이용한다. 활활 타오른 불은 위대한 자아를 낳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왕국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 우주가 모여 우리가 될 테고 산다는 것의 정당성을 획득하리라. 영혼을 정화한다는 그 가치명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산다는 것은 때론 아프고 때론 막막함에 아득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막막함인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임은 안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불안의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테다. 이쯤 되면 나의 전생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묶는 끈은 무엇일까? 나는 해답을 알 수 없다. 오직 불어오는 불안함을 극복할 방법은 나 자신을 믿고 인생의 시간 위에 흩어진 표지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이 또한 꿈꾸는 자의 몫이리라. |
|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들은 언제나 나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
![]()
![]()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소설적 허구의 세계인지 궁금해 질 정도로 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자전적 소설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번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의 영적 경험을 하기도 했고, 튀니지에서는 사밀이라는 청년이 어떤 건물에 대한 설명을 하는 순간 천분의 일초동안 과거로 이끌려 들어가기도 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영적 순간은 힐랄을 만나는 순간부터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힐랄은 브리다와 마찬가지로 스물 한 살의 여인. 힐랄의 첫 등장은 너무도 당돌하고 맹랑한 힐랄의 행동에 황당함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존재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모든 것이 한 시공간에 존재하게 되는 공간, 알레프에 나와 힐랄이 놓이게 되면서 그들은 전생의 어떤 한 시점에서 함께 존재했던 사람들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 열렸다가는 다시 닫히게 되는 그 문 앞에서 그 문 뒤에 숨겨진 자신의 전생을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는 자신이 19세기 프랑스 작가였던 전생을 보기도 했는데, 이번에 그가 보게 되는 전생은 어떤 모습일까. 그와 힐랄은 어떤 관계로 얽혀 있었을까. 그가 본 전생은 마녀사냥이라 일컬어지는 이단자를 심판한다는 종교재판의 모습. 그는 자신의 전생에서 힐랄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했던 사람이기에... ![]()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9288 킬로미터를 여러 날에 걸쳐서 몇 개의 도시를 거쳐야만 하는 긴 여행이건만, 그 기차 안에는 전생에서 아픔을 가진 두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전생에 사랑한 사람이기도 했고, 상처를 준 사람이기도 하고, 배신을 했던 사람이기도 한 사람으로. 코엘료는 <알레프>를 통해서 환생을 이야기한다. ![]() ![]()
![]()
|
|
<연금술사>, <순례자>, <흐르는 강물처럼>을 통해서 파울로 코엘료가 상당히 친숙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알레프>라는 제목에서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현실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환상적 요소가 섞여 있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무엇에 대한 기대 말입니다.
사실 제목이 시사하는 ‘알레프’에 대하여 출판사는, “‘알레프’란 히브리어와 아랍어, 아람어의 첫 글자이자, 수학에서는 ‘모든 수를 포함하는 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 신비철학인 카발라에 의하면, 알레프는 모든 문자의 영적 뿌리이자 인간의 모든 담화를 포함하고 있는 글자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역시 카발라에 심취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역시 ‘알렉스’라는 단편을 남겼습니다. 보르헤스는 단편 ‘알레프’에서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면서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에서 설명하는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코엘료의 <알레프>를 읽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알레프에서 화자는 코엘료 자신임을 알 것 같습니다. 자신이 J라는 인물과 마법을 수련하고 시간을 오가는 경험을 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가하면 예지자라는 사람으로부터 ‘터키의 영혼이 당신 남편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을 바칠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전에 그가 피를 흘리게 할 겁니다.(37쪽)’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이런 맥락의 관계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화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로 합니다. 러시아의 출판사로부터 제안받은 독자와의 만남을 위한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는 것은 저의 버킷리스트의 위쪽에 놓인 희망사항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기로 한 것도 어쩌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기 위한 탐색전일 수도 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는 화자에게 신비로운 여성이 등장해서 막무가내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는데, 화자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측 출판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반발을 했음에도 주변에서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화자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함께 하게 된 야오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터키에서 온 바이올린 연주자인 힐랄이라는 여성과 시베리아열차로 동행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그녀가 자신의 오래전 전생에서 엮인 바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녀재판에서 궁지에 몰린 그녀의 전생에게 도움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승강장에서 열린 알레프에서 확인하게 된다는 설정이고 보면, 코엘료의 <알레프>는 보르헤스의 단편 ‘알레프’에 헌정하는 의미를 담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야오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실은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약간은 분명치 않은 설정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통역으로 함께 한 입장에서 화자를 바이칼 호반에서 주술사를 만나달라고 청한다거나, 자신 역사 죽은 아내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의도를 가지고 화자의 시베리아 횡단여행에 동참하게 된 듯한 느낌인데,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전생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게 된 화자와 힐랄이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도 뜨듯미지근한 느낌이 남습니다.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몰입하던 힐랄을 현실로 되돌려보내게 된 계기가 분명치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환상을 끌어들인 이야기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매끄러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
파울로 코엘료,정말 대단한 작가다. 쉼 없이 쏟아내는 그의 작품들을 어느 순간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책이 나오면 다시 구매를 하게 되는 것은 그의 행보가 궁금해서일까.<브리다>를 읽고는 이제 그만 읽고 그간 밀렸던 그의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던 것이 어제일이었는데 또 다시 <브리다>를 집어 들게 되었다. <순례자>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충은 알고 있고 그의 다른 책인 <연금술사>를 비롯하여 <포르토벨로의 마녀> <브리다>그리고 <알레프>를 보면 그의 책들의 공통점이 있는 듯 하다. 아니 끊임없이 인생의 순례자가 되어 '나' 를 찾아가는 그,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현실에서가 아닌 낯선 곳에서 아니 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서 타인과 만남으로 하여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아' 를 이 책에서도 느껴본다. |
|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담보하는 내 삶의 중심이다 살다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도 있다. 어린 시절 익숙한 길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에 뒷목이 서늘해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거나 처음 가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언젠가 이곳에 와 봤다는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또한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 등 이성적인 생각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그런 일 말이다. ‘데자뷰’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 마련이다. ‘순례자’나 ‘연금술사’로 기억되는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새롭게 선보인 이번 작품 ‘알레프’는 바로 그런 현상을 모티브로 자신이 겪은 환생이라는 경험을 토대로 지향하는 바를 이끌어 내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작가지만 그 자기만의 세계로 세계 많은 독자들과 공감하면서 사랑받고 있다. 독특함이라는 것은 때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끌림의 요소가 된다. 코엘료의 모든 작품의 이야기 전개는 길 위에서 벌어진다. 순례자를 비롯하여 다수의 작품이 여행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았거나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 여행자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그 길 위에서 얻은 동기부여가 자신이 찾아가는 영적인 탐험의 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일상에 묻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흐려지는 것은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새로운 순례길을 나서도록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이번 작품 알레프의 출발도 역시 여행이다. 스승 J의 강압적인 권유에 의해 시작되는 여행길에서 언제나 스스로를 갈 길을 안내하는 표식을 만나고 그에 따라 스스로의 길을 정하며 나선 길이다. 그 길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이어지는 유럽에서 태평양에이 이르는 9288kM에 이르는 대장정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원죄라는 것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역시 자신이 전생에 저질렀던 여인들에 대한 배신으로 인해 자아를 찾아가는 길에서 단절된 무엇을 경험하게 된다. 그 단절된 고리를 찾고 자신의 왕국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 길에서 운명 같은 여인을 만나 알레프를 경험하고 두 사람이 각자의 왕국으로 가는 길에 필요한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때로는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있다”는 말은 결국 익숙해진 일상과 삶의 근거지에 있지만 자신을 가리고 있는 무엇에 의해 발견하지 못하고 한 참을 돌고 돌아 다양한 경험을 하고서야 비로써 찾았는데 그것이 내 이웃에 있었다는 옛사람들의 경험이 진실임을 알게 해주는 말로 다가온다. 코엘료 역시 자신이 찾아가는 영적인 길에서 주춤거리는 시기를 겪게 되면서 내면의 힘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를 극복하고자 9288Km에 달하는 길을 다 하고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지금 이 시간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 말이 또한 삶은 열차가 달리는 레일이 아니라 그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이며 객차의 칸마다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시간은 그렇게 있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한 우주 속을 여행하듯 각자의 생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자아의 신화가 무엇인가를 발견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 생의 이유라는 것”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나왔을 때는 분명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수많은 시행착오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그 여정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사람을 알게 되며 그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삶의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롭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