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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불교 등에서 본 무아론
"근본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불교 등에서 본 무아론" 내용보기
한자경 교수의 ‘불교의 무아론’은 근본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불교의 무아론과, 무아론에 담긴 불교 존재론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고정불변하는 자기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여 그에 집착하는 아집(我執)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관건은 무아론이 자아는 정말 없
"근본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불교 등에서 본 무아론" 내용보기

 

한자경 교수의 ‘불교의 무아론’은 근본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불교의 무아론과, 무아론에 담긴 불교 존재론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고정불변하는 자기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여 그에 집착하는 아집(我執)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관건은 무아론이 자아는 정말 없다는 무아론이라고 주장하는 유파가 있는 반면 오온은 진짜 자아가 아니라는 비아론(非我論)이라는 즉 오온이라는 가짜 자아와 구분되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파가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불교는 오온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참된 자아 또는 진아(眞我)의 존재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저자는 진아론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만일 진아가 있다면 붓다가 왜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고 무아만을 이야기 했느냐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진아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승의 불성이나 여래장 사상까지도 함께 비판한다. 저자는 이 입장을 비판적으로 본다. 마음 본래의 불성과 진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불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란 말이다.



저자는 불교는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의 화합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온(蘊: 구성 요소)에 대해서도 그것이 궁극적 요소 즉 실체가 아니라고 가르친다고 말한다. 저자는 붓다가 무상하지 않은 항상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붓다는 자신이 업을 짓고 자신이 받는 것을 상견(常見)이라 하여 비판했고 한 사람이 업을 짓고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단견(斷見)이라 하여 비판했다.



저자는 상견과 단견의 중도로 설해진 것 즉 행위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정하지 않은 채 인간의 행위와 인과응보와 윤회를 설명하고자 제시된 것이 연기의 원리라 말한다.(무작자 유업보) 저자는 무작자 유업보란 나라는 고정된 주체가 있어서 느낌이나 생각 등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여러 중연(衆緣)이 화합하여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무아의 관점에 서면 “누가?”라는 물음은 “무엇으로 인해?”라는 물음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불교는 존재를 분석할 때는 색수상행식을 오온이라 말하고 안이비설신의를 육근이라 말하지만 연기 과정에서 그것들을 지칭할 때는 오취온과 육입처라 말한다.



오온과 육근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개념이고 오취온과 육입처는 그런 것들이 발생하는 과정이 무명과 집착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붓다는 “누가 느낍니까?“란 물음에 느끼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느낌이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아론이 연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논자에 따라 12연기가 일방향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쌍방향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물론 그렇기에 더욱 주의해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가령 상호연관성을 이야기할 때 눈과 대상이 만나 안식(眼識)을 일으킬 때 눈과 대상은 동시적 상호연관성을 갖지만 알과 닭의 관계는 동시적이 아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와 닭이 되고 그 닭이 알을 낳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이어지며)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주의할 것은 12연기가 일방향적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명색(名色)과 식(識)만은 쌍방향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명색은 오온을 이야기하고 식은 중음신(中陰身)을 이야기한다. 이 말은 식은 능히 미래의 존재를 부르며 상속하여 생하게 한다는 잡아함경의 말씀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기에서 식은 전생에서 오온이 지은 업 중에서 아직 보(報)를 받지 못하여 남아 있는 힘 즉 업력(業力) 덩어리란 말이 가능하다. 저자에 의하면 중음신인 식이 수정란에 부착되어 다음 생의 유<有: 존재>가 가능해지는 상황을 불교는 식으로 인해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인해 식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논의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진아론을 비판하지만 그들이 불성, 여래장 사상까지 비판하는 것도 문제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 판단의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저자는 12연기는 업의 작자를 상정하지 않고 연기의 시작을 설정하지 않은 채 즉 누가 느끼고 누가 사랑하고 누가 집착하고 누가 있는가를 묻지 않은 채 느낌이 사랑으로, 사랑이 집착으로, 집착이 존재로 이어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근본불교는 윤회에 있어 자기 동일적 자아는 없고 단지 연기에 따른 이어짐이 있을 뿐이라 말한다.(識이란 오온을 형성해내는 힘 즉 업력이다.)



설일체유부의 무아론에서 저자는 나란 존재는 인연 화합물인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연기의 산물은 실유가 아니며 그런 연기적 화합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 각각의 법은 실유(實有)라는 주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이를 아공법유라 하는데 이는 설일체유부의 공식 입장이다.) 설일체유부는 자아란 실유(實有)가 아닌 가유(假有)이며 공(空)이라 말한다. 불교의 12지 연기는 과거 업은 현재의 보로 끝나며 미래의 보를 낳을 업은 현재 새롭게 조성하는 업으로 간주된다.(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찰나생멸)



유부(설일체유부)에서는 유근신(有根身: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몸)의 유정세간과 그 유정들이 머물러 사는 세계인 기세간(器世間: 세상)의 차별적 모습들은 모두 유정(有情: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중생을 말하는 불교 용어)이 지은 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129 페이지) 경량부의 무아론에서 저자는 무아를 모르는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는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를 설한 것이라 말한다.(유업보 무작자란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물론 저자가 말했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 자아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아의 존재를 상정하게 만든다. 유식(唯識)의 무아론에서 저자는 삼매나 기도 또는 명상이나 좌망(坐忘: 조용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들어감) 등 정신 집중 상태에서 찬란한 빛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법신의 현현인가, 아니면 아미타불 또는 하느님의 표현인가, 태극의 현현인가?라 묻는다.



세존은 마음이 본 영상은 마음이 그린 것, 마음이 현현한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마음 내지 마음의 영상을 객관 세계와 구분되는 주관적 반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세계 자체를 마음의 영상으로 볼 것인가?를 논한다.(불교 논자들은 識을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으로 본다.) 즉 주관적 상상의 심리 세계만이 마음의 영상인가, 아니면 객관적 물리 세계도 마음의 영상에 속하는가?이다. 유식은 세계 자체를 마음이 그린 영상으로 본다.



이는 수행자들에게 삼매 중에 떠오르는 영상 뿐 아니라 우리 일반 범부들의 실상적인 지각 의식에 떠오르는 현상 세계의 영상까지도 모두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의미이다. 즉 일체가 식이라는 말(유식: 唯識)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범부와 (근根과 경境의 매임을 풀 수 있는 즉 그로부터 자유로운) 수행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수행자는 모든 것이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만 일반 범부는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마음 심층에서 현상 세계의 영상을 산출하는 식인 아뢰야식을 자각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 영상을 객관 세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의 일상 의식을 늘 꿈에 비유한다.(꿈을 만들어내는 의식과 현상 세계를 산출하는 아뢰야식은 공통의 구조를 갖는다.) 필요한 것은 아뢰야식의 자각이다. 그것은 나와 세계의 비실유성과 공성(아공법공)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아공법공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분별과 집착을 넘어설 수 있다. 물론 아뢰야식 자체도 공(空)하다.



저자는 유식은 무아의 완성이라 말한다. 아공과 법공을 깨달아 아집과 법집을 버리고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유식의 목적이다. 유식은 아뢰야식에 심겨지는 종자를 습관적 기운이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 한다. 저자는 유식은 우리의 표층적 의식 활동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 대해 그 배경이 되는 세계는 우리의 식과 독립적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고 말한다. 식을 식으로서 자각하지 못하기에 세계를 식의 변현(變現)으로 알지 못하고 식 바깥의 객관 실재로 아는 것이다.(아뢰야식이 세계를 그려내는 것을 아뢰야식의 변현이라 한다.)



아뢰야식의 변현은 아뢰야식이 주와 객으로 나뉘는 과정이다. 객관 부분을 상분(相分), 주관 부분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견분과 상분으로 전변하는 아뢰야식 자체의 활동성을 아뢰야식의 자증분(自證分)이라 한다. 유식은 유정의 몸을 아뢰야식의 전변(轉變) 결과로 간주한다. 유근신은 중생의 개별적인 특수 업에 따른 보(報)이며 기세간은 모든 중생들이 공통적으로 지은 업에 따른 보(報)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아뢰야식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식전변한 결과인 세계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유식성을 모르고 아뢰야식의 식소변인 견분과 상분을 객관적 존재로 잘못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을 망분별과 망집착이라 한다. 식의 3성이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그것들이다. 타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을 의타기성이라 한다. 변계소집성은 현상 세계가 무자성이고 비실유라는 것을 모르고 치우쳐 분별해 집착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은 변계소집성을 떠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의 무아론은 자아를 포함하는 세계와 우주 전체의 존재를 논하는 존재론이자 형이상학이다. 저자는 오근(五根: 안이비설신)과 오경(五境: 색성향미촉)으로부터 성립하는 식(識)인 감각을 완성된 인식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의(意)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대상에 맛들여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곧 사량(思量)이고 망상(妄想)이며 애탐(愛貪)이라 말한다. 애탐으로 인해 식은 경계에 매여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불교는 경계에 매인 식은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다가 결국 그 경계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한 생애에서 뿐 아니라 생애를 반복하여 계속되는 현상으로 간주한다. 죽어서도 남아 있는 업력은 식으로 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온다. 저자는 자신의 근(根)을 관(觀)하는 위빠사나를 이야기한다. 불교는 이를 사선(四禪)의 단계로 구분한다. 사선의 위빠사나에서 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의 신체의 미세한 움직임과 조직으로 이는 외감으로 직관되던 오경의 거친 색과 달리 수승한 색 즉 정색(淨色)이다.



이처럼 수승한 색만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색계(色界)라고 한다. 위빠사나가 깊어짐에 따라 마음은 욕망으로 맺어진 대상 세계와의 결합으로부터 풀려나 점점 더 가볍고 즐겁고 평온한 느낌으로 나아간다. 주객 무분별의 경지를 사마타(samatha: 止)라 한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등은 다음의 단계이다. 저자는 불교의 연기(緣起)는 유전문(流轉門)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윤회를 벗어 해탈에 이르는 환멸문(還滅門)도 함께 가진다고 말한다.



이러 이러 하면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유전한다)는 생각과 이러 이러 하면 연기에서 벗어난다(환멸한다)는 생각은 합리(合離)의 사유를 연상하게 한다.(자세한 내용은 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31 페이지 참고) 저자는 무아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한 방편설이라고 설명한다. 붓다는 각자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의지해 머무르며, 법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의지해 머무를 것을 가르쳤다.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마음으로 집착해 머무르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경계를 넘어 해탈할 수 있는 마음에 의지하라는 의미이다.

m******1 2015.09.0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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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드물게 잘 정리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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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그대로 불교의 핵심인 무아론을 잘 정리하여 설명한 책입니다. 이 한권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며(근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책값이 다소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를 하기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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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인 무아론을 잘 정리하여 설명한 책입니다.

이 한권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며(근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책값이 다소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를 하기에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