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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 선택한 것인지 헷갈릴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을 읽고서 든 생각이다. 분명 소설이라 쓰여 있는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수필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두껍지 않은 책, 많은 여백, 이어지지 않는 서사, 그러다 보니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강작가의 소설은 두 권을 읽었다. 오래 전에 [소년이 온다]를
읽어보았고, 작년엔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작가는 그 작품들을 쓰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읽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광주의 아픔을
다시금 생각했고, 맨부커 상의 열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읽은 [채식주의자]에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갑자기 작가의 이전
작품에 대해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까닭은 [흰]의 작품해설
때문이다.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곤혹스러운 가운데 읽은 작품해설은, 작가의 사유가 이전 작품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듯이 써있었다. 물론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 전체를 두고서 작가를 이해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다
읽는 나는 오히려 해설을 읽고서 더 헷갈리기만 한다. 갑자기 내가 책을 잘못 읽은듯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지금은 죽은
어머니가 23살에 낳았지만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이, 흰
배내옷이 수의가 되어 묻혀진 아이. 화자에게는 이런 언니가 있다. 죽어가는
언니는 자신을 바라보며 그녀의 어머니가 애타게 되뇌었던 말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화자는
그 말이 낙인이 되어 스스로가 언니의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화자는 언니를 생각하며 ‘흰’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왜 ‘흰’것이어야 했는지는
아마 하얀 배내옷이 바로 흰 수의가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얀’보다는 ‘흰’이 더 비장하고
삶과 죽음의 냄새가 짙게 베어 있기에.. 화자가 소환한 ‘흰’것들의 목록을 읽다 보면 문득 처연한 생각이 든다. 강보, 배내옷, 안개, 젖, 서리, 눈, 만년설, 달, 백목련, 백야, 넋, 수의, 소복, 연기 등등. 그런 ‘흰’것들에 대한 사색은 화자의 머리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의 처지를 보듬는다. 그리고 생각은 그녀의 시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화자와 그녀가 공유하는
지점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목록 하나에 달려있는 짤막한 글. 그 글들을 읽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많이도
헤맸다. 돌아가서 보면 보일까 싶어 되돌아 가보기도 했지만 막연하게 느껴지는 슬픔만을 느끼곤, 다시 새로운 목록으로 눈길을 옮길 뿐이다. 그러다 문득 작가가 ‘죽음’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작가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막연하지만
작가의 작품 속에서 죽음은 어떻게든 연관이 되어 있는 듯 보인다. 아마 세 작품 모두 다시 한번 읽어본다면
막연함이 뚜렷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발표 순으로 읽어보겠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요즘 들어 가능하면 소설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작품들을 많이 찾아 읽지만 최근의 소설들은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지만 이미 단단하게 고착된 머리는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또 다시 신간소설을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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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찍어낸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이건 글로 쓴 그림. 문장이 제시하는 이미지를 직접 본 것만 같다. 손으로 만진 것도 같다. 압도됐다. 열 번씩 다시 읽은 페이지도 있다. 이건 꼭 기억해야지 했던 문장과 이미지는 이미 다음 페이지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더 황홀한 문장과 이미지가 찾아왔으므로. 11월에서 12월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깨끗하고, 겨울 같은 글이 읽고 싶었다. 홀린 듯 이 책을 주문했다. 다 읽은 지금, 왜 친구들이 니가 열광할 책이라고 꼭 읽으라고 여러 번 추천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한글이 도달한 어느 경지를 읽은 기분이다. 덧붙일 말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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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단어 ‘흰’, 작가의 삶속에서 함께 해온 ‘흰’것들에 대해 읽었을 때 난 내게 존재하는 ‘흰’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삶이 위태롭던 순간, 두려움으로 몸부림치던 아득한 청춘의 시간을 건너 지금의 삶을 살게 해준 내게 ‘흰’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유년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일부러 과거를 떠올리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의 방황, 어두운 거리의 기억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삶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고, 이는 가장 아픈 화살이 되어 수시로 내 삶을 관통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갈수록 드러나는 존재의 무가치함은 혹한의 바람처럼 나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내가 원했던 삶과 현실속의 나, 상반되는 두 삶의 온도는 가슴에 결로(結露)를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도,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절망, 눈물이 스친 자리마다 시커먼 곰팡이가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가련한 삶 앞에 나는 어미 잃은 짐승처럼 한없이 떨어야만 했다. 살고 싶었다. 살아내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삶에 대한 집념이 가슴속 작은 불씨가 되어 일렁이기 시작했을 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의 흐름 만 으로는 쇠잔하지 않을 기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간은 소리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조각난 삶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그토록 나를 힘겹게 했던 고통의 시간들은 강물처럼 내게로 흘러왔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아픈 날이 있었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것들을 마주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루하게만 느껴졌던 삶의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쓰디쓴 젖줄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은 ‘만끽’ 이라는 단어 옆에 쓰인 ‘삶’을 바라보며 한참을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 곁에서 잠든 아이가 깰까봐 나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었다. ‘ 아 ... 나는 한 번도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단 말인가?...’ 아픔은 탄식이 되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노트를 펼쳤다. 무얼 쓰려고 했는지, 왜 쓰려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매일매일 흰 종이를 가득 채워 나갔다. 돌아보면 그것은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간을 건너 세상과 마주하고 싶은 간절한 내 소망, 삶에 대한 강한 끌림의 분출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 내었다. '특정한 하나의 자아, 삶에 있어 분명한 선을 그어놓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엾은 일이란 말인가?' 내게 책은 이야기를 넘어 그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었다. 한권을 책을 내려놓을 때 마다 나는 자유와 거칠음, 삶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처럼 놀라 휘둥그레진 눈동자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고 경이로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 내게 예전과 같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내 손끝이 책장의 흰 모서리를 만날 때 마다, 촘촘히 박힌 글씨 옆 귀퉁이의 흰 여백을 채울 때 마다 삶은 뜨겁게 타올랐다. 그렇게 독서가 삶이 되고, 삶이 독서가 된 순간, 나는 삶에 성실하려는 의지와 상황과 선택 이라는 삶의 본질적 요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잠재적 요소와 더불어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작가는 말한다. 깨끗하기 만한 ‘하얀’ 과는 달리 [흰]은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삶과 죽음’ 이라는 모순된 것을 품고 있는 [흰]처럼, 삶이기에 살아가야 하는 당위적 요구와, 동시에 존재를 위협하는 예측 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 싸여 있는 우리의 [삶] 자체가 [흰]것은 아닐까? 삶에 있어 죽음이란 생물학적인 소멸이 아니며, 반대로 삶이란 단순한 목숨의 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누구나 숨을 쉬며 죽음을 경험할 수 있고,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가까이 가지 못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이 지니는 이러한 모순이야 말로 살아 있음에도 더 살고 싶게 만들고, 고통스러운 극한의 상황에서 조차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존재에 대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이 그저 하얗기만 하다면(존재에 대한 위협이 없다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에겐 침묵할 시간도(p130),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일도(p109), 우리의 몸이 부스러져 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는 모래의 집이란 사실도(p89), 하얗게 웃을 일도(p78) 없을 것이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 작가가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것 과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생명)에 대한 강한 끌림은 우리의 [삶]속에 녹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추운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와 허공에 퍼져 나갈 때 (p71)’ 다시 한 번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내쉰 숨을 들이 마시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흰 책장의 모서리를 넘기며 살아간다. 어떤 순간에도 깨어지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은, 어떻게도 훼손되지 않을 삶에 대한 집념, 살아가야 함의 당위에 숨을 불어 넣어주는 흰 것을 붙들고.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p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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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도 따스한 것에 관한 이야기 <흰>을 읽고 ![]() <흰>에 대한 리뷰를 쓰겠다고 결심한 겨울에 내가 처음 한 일은, 소설속 '나'처럼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흰'이라는 글자를 입 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 보니 자음과 모음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입 밖으로 하나씩 내뱉다 이윽고 이 낱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고스란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하지만 거듭 책장을 넘기다 책속 곳곳에서 이것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에 흰 눈을 한 움큼 집어 뭉치듯 한 글자씩 꺼내 놓는다. ㅎㅣㅡㄱ, ㅎ ㅗㄱ, 혹. 이 소설은 '나'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지 두 시간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혹(或) 계속 살아남아 '그녀'로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흰' 것들의 이미지와 물성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생마다 주어진 시간의 총량이 다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히 언니와 같이 못다 핀 어린 생명을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이라고 혹독한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언니의 그 '찰나의 개화'가 '나'가 '그녀'라는 존재를 복원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ㅎㅡㅣㄱ, ㅎㅜㄱ, 훅. 귓가에 계속 맴도는 훅(hook) 송처럼 이 소설에서도 돌고 도는 요소들을 만나게 된다. '눈'이라는 소재와 그것에 관한 단상들이 언니와 '그녀'를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한다. 길을 걸으며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그녀'의 모습 위로 눈꺼풀이 닫힌 채 누워 있는 언니가 겹쳐 보인다. 특히 두 시간 가량 호흡을 반복하던 언니의 마지막 날숨을 '그녀'가 들숨으로 이어받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 순간의 언니와 '그녀'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에 "죽지 마. 죽지마라 제발."이라며 연신 속삭이는 어머니의 말뜻은 물론, 무엇보다 각자가 삶 또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는지도 알지 못했을 터라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진다. ㅎㅡㅣㄴ, ㅎㅜㄴ, 훈. 그 장면을 좀 더 살펴보면, 어머니의 음성이 품은 의미는 모를지언정 생에 대한 본능은 강렬해서 언니와 '그녀' 둘은 훈(薰)훈한 공기가 느껴지는 곳, 바로 어머니의 곁을 필사적으로 찾았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 속에도 따스한 기운이 배어 있음을 감지하여 그 진원지로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공기반 소리반으로 이뤄진 훈기가 불어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ㅎㅣㅡㄴ, ㅎㅏㄴ, 한. 그토록 짧았던 전생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것일까.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에게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처럼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원한(恨)과 원망 사이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사랑할 마음을 추스르는 법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언니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거나 언니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언니와 함께 서로 기대어 일상을 나누며 사는 삶에 대한 바람과 상상으로 '그녀'를 그려내 언니에 대한 '나'만의 사랑과 애도를 나타내는 듯하다. ㅎㅡㅣㄴ, ㅎㅓㄴ, 헌. 무릇 새것은 낡아서 헌것으로 변하게 되는 운명을 가진다. 생명체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음과 죽음을 향한 삶을 살아간다. 어느해 '그녀'는 본가의 이웃집 마당에서 어떤 연유에서인지 짖지를 않아 주인의 눈 밖에 난 흰 개를 만난다. 여기서 잠깐 넌센스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무엇일까? 나도 백지를 낼 순 없기에 흰 눈처럼 온 세상을 덮어 추한 것들을 가려준다는 의미로 '가리개'라고 쓰면서 아무 소리 없이 작게 패인 '보조개'를 지어보인다. 그녀에 따르면 정답은 '안개'이다. 부옇게 떠있는 아주 작은 물방울 때문에 사물이나 사람을 흐리게 때로는 희게 보이도록 만드는 특성에 빗대어 그녀는 흰 개를 안개라 부른다. 그 해 겨울 헌 안개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ㅎㅣㅡㄴ, ㅎㅗㄴ, 혼. 앞서의 안개는 먼 이국땅 바르샤바에도 자욱하게 피어나고, 그곳에서 '그녀'는 또 다른 안개를 마주한다. 멀리서는 마치 흰 눈에 덮인 도시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칠십여 년 전 독일군의 공습으로 일어난 먼지로 뒤덮인 폐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흰 도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한 차례 망가졌다가 회복된 이들답게 상처를 그저 덮어두려는 마음이 아닌 흰 종이 위에 새로이 그림을 그리듯 아픔을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점이 소설을 '그녀'가 흰 도시를 거닐며 거리에서 만난 혼(魂)령들에게, '나'가 '그녀'의 전신인 언니의 혼에게 바치는 진혼곡처럼 여겨지게도 만든다. ㅎㅣㅡㄱ, ㅎㅏㄱ, 학. 어느 여름날 서울에서 '그녀'가 학(鶴), 곧 흰 두루미를 보며 왜 흰 새가 다른 색의 새와 달리 아름답고 기품있으며 심지어 신성하게 느껴지는지 의문을 가진다. 시간이 흘러 흰 도시에서 고뇌에 빠져 걷던 '그녀'의 머리 위에 흰 새가 내려앉아 날개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주고 이내 날아간다. 흰 거즈 같은 흰 새의 날개에 흰 연고라도 발라둔 것일까, 아니면 새가 떠나며 '그녀'의 근심마저 물고 가버린 것일까. 어찌됐든 '나'가 그토록 천착하던 '흰 것'의 효용이 흰 새와 '그녀'의 만남에서도 확인되는 순간이 아닐까. <흰>에 관한 나의 흰소리는 여기까지다. 어느 동화 속 한 오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떨어뜨렸던 빵 부스러기가 사라진 까닭이, 만일 숲속에 동물들이 먹어치워서가 아니라 먹색 어둠이 깔려 보이지 않아서였다면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독자로서 제대로 책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어둠과 불안을 떨쳐내고자 속으로 큰소리라도 치면서 흰 종이에 씌여진 검은 활자와 남은 빈 자리에 한강 작가가 뿌려 놓은 흰 부스러기를 주워나갔다. 책을 덮으며 내 손에 쥐어진 흰 것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서늘하고도 따스한 초 한 자루가 몸을 낮추어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 이제 이 흰 것을 다른 독자에게 건네고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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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결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깨끗함’ 혹은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오염될 수 있으며, 그 본래의 바탕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희다’라는 단어의 관형어인 <흰>이라는 제목의 한강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삶에 비추어, 그 단어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작품의 목차는 크게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흰’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시 각 장에 다양한 단어나 표현들을 제시하고 그에 관한 간략한 서술들로 채워지고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나’는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강보, 배내옷’ 등 그와 관련된 단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자신의 ‘언니’에 대한 사연과 그것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외국의 어느 도시에 머무르면서,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어느새 2장에서 ‘그녀’의 입장이 되어 ‘나’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작가는 작품으로라도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은 자신의 ‘언니’를 이해하고자 시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만약 ‘그녀’가 무사히 성장했더라면 당연히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의 삶을 통해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3장의 ‘모든 흰’을 통해서, ‘나’와 ‘그녀’ 그리고 그들의 부모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그녀’를 영결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하겠다.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초판에서 아무런 말도 쓰지 않았지만. 개정판을 내면서 비로소 그것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의 자녀와 함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초대를 받아 머물면서, ‘한국을 떠나 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자신이 머물던 도시가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였으며, ‘내 삶과 몸을 빌려줌으로써만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 작품을 통해 ‘내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나의 삶을 감히 언니-아기-그녀에게 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여느 소설처럼 명료한 상황이 제시되기보다 그저 누군가의 수필처럼 읽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해설’로 제시된 평론가 권희철의 글은 딱히 이 작품의 해설이라기보다 소설가 한강에 대한 작가론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차지하는 면수는 많지 않지만, 작가 한강을 깊이 있게 분석한 ‘해설’의 분량은 소설 전문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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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한강]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숨지말고 직면해서 겪어내라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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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T야? 너 F야? 난 감정도 잘 느끼고, 드라마를 보며 휴지 없이 힘든데... 왜 검사를 하면 T가 나오지.....?? 딸한테, "엄마는 F 같은데 왜 검사하면 T가 나오는지 이해가 안가. 엄마 F 맞지 않아?" 딸이 대답한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T야! 완전 초초초대문자 T잖아." 그래서 소설책이나 시집을 읽으면서 흥미를 많이 못 느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다고 재밌게 읽은 책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요즘 한강 책을 읽으면 내가 이렇게 감정이 스며드는 사람이 맞다는 확신이 들게 한다. 이 '흰 ' 책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이 책에 대한 한 줄 평이다. 산문시가 이런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문시집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출퇴근 길에 읽기에는 최고의 장점만 모아놨다. 한 페이지만 읽어도 충분하다.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또 같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또 각 페이지마다 그 여백이 주는 느낌까지 있다.
. . . 그 여백도 읽는다. 그 여백도 본다. 그래야 이 책의 느낌을 살릴 수 있다. 한국어의 스펙트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니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언어로도 번역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여백을 한글만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쉬면서 읽는다. 읽고 잠시 책의 여백을 보고, 잠시 덮고 손을 얹는다. 그 감정을 느껴본다. 사람의 삶을 이야기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는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닌가. 오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대화의 끝에, "사람은 죽었을 때, 그 순간에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흰 ' 책이 떠올랐다. 삶이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살다가 먼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다가 다시 금 생각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남아있는 이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안고 떠나면 미련이 없겠구나.... 여운을 주고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책이다. 흰..이외에도...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흰의 뒷편에 수록된 평론가의 글을 읽고 작품의 의미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한다. 아무래도 한강의 책들은 독자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부분이 많은 책인것 같다. 다 다시 읽어야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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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문학동네 #내돈내산 #한국최초노벨문학상수상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던 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던 남편이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 5권 세트를 구입했다. 읽은 책은 양보하고 안 읽은 <흰>을 집어들었다. 흰은 아마도 흰색을 뜻하는것 같은데 책속으로 들어가보겠다. 1장 <나>의 첫 이야기는 흰색 페인트를 칠하는 문으로 시작된다. 이어 출산 직후 하얀 강보에 싸인 아기. 그리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아기에게 입힌 배내옷 이야기. 엄마가 말한 달떡의 의미로 이어진다. 아마도 작가의 탄생 이전에 엄마의 자궁을 차지하던 어린 생명이 태어난지 두어 시간만에 죽었고 달떡마냥 흰 얼굴이었나 보다. 안개와 흰 도시는 아이와 둘이 떠난 폴란드의 바르샤바가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엄마와 아기 이야기를 도시와 연결시켜 회상하는 나의 이야기다. 2장 <그녀>는 소설가 박태원의 첫딸 설영. 눈의 꽃. 태어난 날 눈이 아닌 첫서리가 내리고 흰 입김이 나온다. 함박눈과 하얀 눈송이들. 만년설의 그녀. 눈부시게 흰 파도와 흰 개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다. 내게도 진돗개가 섞인 하얀털의 발바리 개가 있었다.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삼월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고시렸다. 상처난 손에 소금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옛말 틀린말 없다고 누군가의 경험으로 얻어지는 교훈아니겠는가. 레이스 커튼이나 달님의 흰 얼굴, 감동을 주는 흰 새, 하얀 손수건, 백목련과 하얗게 웃는 웃음. 에세이일까 시일까. 아마도 그녀는 시인이 먼저이지 싶다. 그녀가 먹어온 알약 당의정과 각설탕의 추억, 하얗게 얼어붙은 불빛들, 작은 아버지와 함께 떠오르는 수천 개의 은빛 점, 바닷가의 흰 조약돌, 흰 뼈, 모래, 백발, 구름...끝없이 펼쳐지는 하얀색의 추억, 흰 색의 향연, 흰 색이 가진 수많은 이야기는 다시 갑자기 서리가 내리던 날 잠시 곁에 머둘다간 갓난 아기 이야기로 돌아간다. 또 그렇게 이어지는 그녀 이야기다. 3장 <모든 흰> 세번쯤 반복되다 보니 한강 작가님의 가정사가 훤히 들어난다. 모든 흰이 떠올린 건 앞서 간 언니, 두 번째 사내 아기도 빛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아픔을 느꼈을 그녀가 배내옷이 수의가 된 아기를 흰 천으로 싸서 묻었던 아버지를 떠올리고, 없는 언니를 상상한다. 결혼을 앞둔 동생의 신부가 보내온 흰 무명 소복을 태우고, 연기로 지은 날개옷을 걸쳐주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다시금 적어 내려간다. 흰 배춧속 어린 잎사귀,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 생명이었던 적이 없는 빙하.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로 끝난다. 나 또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 깊은 속내는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내게 흰이 주는 강박은 고결하고, 순결하고, 순수한..전혀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은 천사의 날개나 눈부신 하얀 빛이다. 한강 작가의 흰은 검은 밤처럼 어둡고, 깊은 우물처럼 암울하고,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걸 꺼내 흰으로 들여다 본다는 게 가슴이 하얗게 타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동안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먹먹함을 느꼈다. 깊이 있게 파고들 독자를 위해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있지만 오직 나의 느낌만을 남긴다. 내게도 상실의 아픔이 있고,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실은 삶을 살아가는데 역경처럼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 본다. 한강 작가님의 소설 <흰>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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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 문학동네 (개정판, 2018) [My Review MMCXXXIII / 문학동네 26번째 리뷰] 한강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죽음'과 마주하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작별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소설 전편에 해당하는 문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한강은 '죽지 마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어둡고도 찬란한 미사여구를 흐드러지게 썼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바람이 분다>, <희랍어 시간>...내가 읽은 모든 한강 소설에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써내려는 듯이 '죽음'을 그토록 아름다운 문구로 꾸며 놓고서 말이다. 차라리 끔찍하게 써놓았다면 말이나 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이 책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해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듯이 말이다. 그 첫머리에 한강은 소설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한 '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때론 무심하게 '질문 공세'를 펼친다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몫이라고 했지만, 그조차 급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순간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을 찾기 힘들 거라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 듯 질문에 답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동안 한강 소설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런 책'이며, '저렇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니 '그런 답'을 찾았다면 옳게 읽은 셈이라는...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가 보더라도 뻔한 답을 찾아야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냥 열심히 답을 찾았다. 물론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셈이다. 애초에 뻔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데, 어리석게도 난 그간 헛되게 읽었던 셈이다. 그럼 한강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삶 또한 없으니 '어떤 삶'이든 살아보라. 삶은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모두'가 찬란한 삶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니 살아라! 찰나와 같이 스치듯 지나는 삶일망정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치더라도 삶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살아라! 스치듯 지나는 짧은 삶일망정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모두 기쁨일지니... <흰>의 첫머리에도 단 두 시간 남짓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산달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마저 직장에 있던 그 순간에, 모진 산통을 견디고서 갓 지은 배냇저고리를 검붉게 물들인 채 한 시간만에 겨우 두 눈을 뜬 갓난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 본 젊은 엄마의 첫 아기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한 삶을 살다 온몸을 휘도는 고통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젊은 엄마는 홀로 싸늘히 식어가는 갓난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첫 느낌은 죽음에 대한 애달픔이었다. 너무 짧은 생애이지 않은가 말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춘 의료시설에서도 '팔삭동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초산'이었을 젊은 엄마가 낳은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삶'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조차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아직 뱃속에 더 있어야 할 순간일텐데, 너무 서둘러 나와서 미처 자라지 못한 상황이었을 텐데, 갓난아기는 힘겹지만 두 눈을 뜨고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엄마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한 시간 남짓한 '만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생각의 끝에 나는 '기쁨'이었다고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 그리 생각을 하였다. 조금만 더 느긋한 '만남'이었다면 그 기쁨을 더 오래오래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갓난아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조금 서둘렀고, 그리 많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만남이었지만, 젊은 엄마의 첫 아기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해서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힘겹게 뜬 두 눈 가득 '기쁨'을 뿌려주고 서둘러 가버린 짧은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 작가는 이런 애달픈 기쁨을 온통 '흰' 것으로 치장하였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수의, 그리고 하얗게 웃다는 말까지 흰 것들로 말이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애달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흰 것들은 삶의 '기쁨'을 관통하고 있고, 순간이든, 영원이든, 삶은 기쁨이니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소설들이라는 '질문의 의미'를 찾아냈다. 여전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떠올렸다. 길고 긴 여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삶도 기쁨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까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말이다.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볼 누군가가 없기에 그런 것일까? |
| 한강의 흰을 읽고 쓰는 감상평입니다. 짧지만 쉽지 않은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읽으며 흰이 무슨 의미인지 곱씹으며 읽었어요. 반복해서 읽어보고 의미를 알아내고 싶네요. 함축적인 문체로 쓰여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