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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입문서로 어떤 책이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제 고민 그만. 다니엘 벤사이드의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는 이제껏 접한 마르크스 입문서 가운데 가장 쉽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입체적인 책이다. 숫자와 공식이 싫어 통계를 멀리하는 이들도 있듯, 딱딱하고 추상적인 용어, 생경한 문체와 복잡한 사유의 맥락이 싫어 마르크스의 저작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겠다. 왜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안 읽어봤으면 호기심에서라도 한번쯤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어보는 것이 뭐 큰 대수라고. 더구나 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두 '아픈 자본주의'의 모습을 지켜보고 그 심각한 위기의 증후를 몸소 겪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유령이 전세계 도처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 마르크스가 목격한 자본주의는 '굴뚝공장자본' 으로 자본의 해악이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초창기였지만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자본의 보편적 위기는 가속화되기에 우리는 자본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을 조감할 책무가 있다. 분명 마르크스는 우리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았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지금 더 충분히 그의 이론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마르크스 입문서의 저자인 다니엘 벤사이드(1946-2010)는 제4차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적 활동가이자 신반자본주의당의 열혈당원이었다 한다. 저자도 마르크스처럼 국가의 제거, 인간 소외의 극복 그리고 인간 자신으로의 회귀를 추구한 공산주의자인 것이다.
저자는 1848년에 출간된《공산당 선언》의 주장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세계 시장 형성은 계급투쟁까지도 세계화시킨다. 둘째, 계급투쟁이야말로 역사를 발전시켜 온 비밀이다. 셋째, 소유의 문제는 사회운동의 근간이 되는 문제이다. 넷째,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정치권력의 장악이다. 다섯째,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는 국가라는 편협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단결해야 한다. 여섯째, 행위임과 동시에 과정으로서 새로운 혁명은 영속적인 혁명이다. 일곱째, 공산주의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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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하나의 역사가 저물었다. 더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언론은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시간이 흐른 오늘날, 사람들은 대놓고 그가 옳았노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은 칼 마르크스이다. 1818년 태어난 이 인물의 생애는 혼돈 그 자체였다. 젊은 시절 그는 탕아마냥 술에 취해 사는 날이 많았고, 낭비벽도 심해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까지 착실(?)히 밟은 그는 23살의 나이에 기자로 데뷔를 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에게 기자직을 선사한 ‘라인 신문’은 검열에 걸려 발행이 금지되었고, 자유 없는 독일을 떠나면서 마르크스는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엥겔스를 만난 후부터 이제껏 쌓아온 학문적 내공과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눈을 백분 활용해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으니, 우리의 역사는 그의 이론에 빚진 바가 적지 않다. 어디 역사뿐이겠는가. 현대사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은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고 홀로 서지 못한다. 너도 나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내세웠고 이론의 실현을 위해 앞장섰다. 따라서 20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마르크스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르크스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무조건 숭배하느라 바쁜 나머지 시대적인 한계마저도 뛰어넘고야 말았다. 1800년대 후반이라 하여도 여성의 인권까지 부르짖을 정도로 혁신적이지는 못했을 그를 모든 이의 해방자로 여기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한계까지 정확히 읽어내려 들지 않았다. 마치 성스러운 왕조가 대 끊기지 않고 이어지듯 그의 이론이 현실에서 계속되길 바라는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정통계보를 남들에게 강요하느라 바빴다. 마르크스가 권위적인 구세대와의 결별을 선언했다면 스탈린까지 이어지면서 이는 모든 것의 파괴라는 변태적인 형태로 대다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권력을 쥔 소수만이 활개를 치는 세상은 마르크스가 꿈꿔온 세상이 결코 아니다. 즉, 이 세상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실현이라 여겨졌던 몇몇 실험들은 변종의 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마르크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요, 프롤레타리아라는 절대 다수의 권력 쟁취야 말로 세상에 떠도는 온갖 모순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이상적인 세상을 제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지침마저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일례로 국가의 범주를 뛰어넘어 다함께 단결해야만 한다는 부분은 무국적 자본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본은 국적을 넘나들면서 제 이익의 관철에 총력을 기울인다. 삼성이 우리나라 기업이라고 말은 하지만 삼성의 이익이 우리나라의 이익이고, 우리 국민 대다수의 이익은 아닐 것이다. 꼭 삼성이 아닐지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세계 어디든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공장을 세울 자본에 대항하는 것은 단일 국가 차원으로는 힘든 게 당연하다. 공통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을 찾아 뭉치는 것만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심지어 친환경적인 인본주의마저도 마르크스에게서 우린 발견할 수 있다. 노동을 사용가치, 즉 상품과 떼어놓고, 노동마저도 온전한 하나의 형태로 놔두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 개별 노동자들에게 할당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제 존재가치를 절대로 느낄 수 없다. 그들의 노동은 완성된 상품과 결코 연결되지가 않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소외’를 낳는다. 이윤 추구가 중시될 경우 이와 같은 연결고리는 더욱 강고해지기 마련이다. 헌데 마르크스는 말한다. 생산자는 동시에 소비자이고 개별적인 자본가에게 순수한 생산 비용으로 간주되는 임금도 자본 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지불 가능한 수요라고 말한다. 파업하는 자와 이용자의 위치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으니 부디 세상을 단순하게만 바라보진 말라고. 더 나아가 그는 반목은 사회의 고유한 움직임을 주재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요, 유연하되 자연 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법칙과도 같은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다움을 잃은 운동은 결코 진보를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법칙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외의 것들을 무시한 운동이라면 그것은 타도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마르크스에게 요즘과 같은 호기도 없을 것이다.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우리가 부디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길. 그래서 체제와 자본의 논리에 앞서는 것이 인간의 뛰는 심장이란 사실을 만천하에 드높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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