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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송경동'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처음 듣는 시인의 이름이었다.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상황인데, 나는 굳이 검색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를 읽었다. 툭, 믿기지 않게도, 눈물샘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http://blog.yes24.com/document/5142868) 그렇게 각인된 시인의 이름, 송경동. 그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이력을 다른 책에서 대충 엿본 터였다. 그랬기에 그의 시가 내 가슴을 더 울렸는가보다. 노름꾼 아버지, 지겹도록 싫었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으로부터 도망친다. 당연히 사회의 가장 밑바닥부터 전전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는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왔다. 지금은 '시인'이라는 명함하나 더 얹긴 했지만 그때의 고된 노동의 흔적이 등산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관절과 속병을 지녔을 정도다. 그에게 이 사회가 준 것이 더 있다.버러지같은 대우와 설움, 모멸, 가난과 멸시였다. 미용실에서 퍼머를 했다. 3시간이 넘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 시간이 지겨워 항상 책을 들고 간다. 그런데 하필 이번에 들고 간 책이 송경동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였다. 중화제를 바르고 머리를 돌돌 말고 있는 한 처자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내 모습이지만 상상만 해도 웃긴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대체 몇 번을 울었고 얼마나 눈물을 참았는지 모른다. 나의 아늑한 집과 안정된 직장, 그리고 행복한 가정의 울타리를 감추고 싶어졌고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미안했다. 대학때 소위 운동권 선배들과 친했다. 그 선배들은 나를 여기 저기 데리고 다녔다. 학생운동의 없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한총련은 이미 이적단체가 되어 있었고 21세기에 맞지 않는 학생운동 방식은 학우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 되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들 취업이 최고의 걱정이었고 연애나 취미 활동 등 이미 개인주의가 팽배한 대학 사회에서도 파편화된 사람관계는 더 이상 어떤 조직을 만들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적으로는 동조를 하지만 선배들처럼 내 시간을 희생하고 내 몸과 학점까지 포기하며 그쪽에 몸담을 생각은 없었기에 적절한 선에서 선배들의 애절한 눈빛에 반응해주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이후로 모든 활동을 접고 임용고시에만 매달렸다. 그동안 말아 먹은 학점을 관리하기 위해 재이수도 해야했고 한 번도 한 적 없는 교육학 공부와 스터디 그룹 활동, 그리고 방학에는 학원까지 가는 철저히 나의 미래만을 위한 행보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히 선배들과 멀어졌고 그런 나를 선배들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그때, 그 선배들..... 지금 뭐하고 있을까. 나는 벌써 교직 10년차 중견 교사로 자리잡았는데 그때 그 선배들은 뭐할까. 한 선배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이 되어 농민운동에 몸담고 있고 한 선배는 극단에 들어가 문화예술운동을 한다. 한 선배는 9년만에 졸업해서 드디어 임용고시에 패스하여 교육운동에 헌신하고 또 한 선배는 교사가 되었음에도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의 아내로, 즉 농민의 아내로 살아간다. 모두, 한때 교사를 꿈꾸고 참교육을 외치던 선배들이다. 그리고 현장의 실천가로 살아가는 선배들이다. 송경동의 삶을 보니 10년 전 대학시절 함께 했던 그 선배들이 떠오른다. 지금까지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현장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송경동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건설일용직 노동자로 살아왔다. 잊고 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장산곶매' 같은 노래가 들린다. 대학1학년 때 정기공연 솔로곡으로 불렀던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마라'로 시작하던 노래 가사도 떠오른다. 모두 그(송경동)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장 낮고 가장 춥고 어두운 곳에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시를 읇고 현장을 지키고 동지들을 격려한다. 그의 언어들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과격하게 들릴게다. 무슨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의 언어들이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언젠가 익숙했던 단어들이기에 금세 그의 언어에 적응되고 그의 글에 빠져든다.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분노하면 내 속도 들끓어 오른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지 몰랐다. 그 싸움들은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용역깡패들을 내세워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무자비한 탄압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모른채 나는 내 삶에 안주해서 고것도 힘들다고 징징대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고 심지어 죽어나가는 싸움터를 어떤 언론도 생생하게 대변해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삶에 바빴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지 못할 사실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는 사실 취급했다.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은 5.18 광주민중항쟁을 그렸던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 30년 전의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에 속이 쓰렸다. 아팠고 슬펐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이 땅의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 정도로만 인식했지 그들의 삶을, 그들의 생존을 얼마나 위협하는지 생생하게 전달받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보겠노라 외치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그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자본가에게도 정부에게도, 그들의 귀는 한쪽으로만 열려 있나보다.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으로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라는 구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많이 내뱉는 구호라는 사실에 무릎이 탁, 꺾인다. 김훈의 산문집을 읽고 송경동의 산문집을 읽으니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혼란은 이 시간에도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든다. 김훈의 관조적이고 사색적인 문장들에 매료되어 한껏 들떴던 내가 송경동의 처절하고 사실적인 문체에 우울하고 자괴감이 밀려드는 이 반전을 도대체 수습할 수가 없다. 그의 말들이 구구절절 거시적으로 맞는 말들이란 생각이 들기에 더욱 그렇다. 인간끼리 손을 잡고 인간끼리 연대하지 않으면 철벽같은 자본권력 앞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대로 표출된다. 그는 단지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한 답답함을, 너희가 좀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힘이 없고 아직도 가난하고 아직도 싸우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대항하기 위해 85호 크레인에 올라 306일이나 거기서 투쟁해야 했다. 겨울에 올라가 다시 겨울이 다되어서야 내려온 그녀. 그녀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 송경동 시인 등이 기획한 희망버스 때문이었다. 희망버스가 바로 '연대' 만이 살길이다를 증명해준 실천적 사례로 길이 남을 것이다. 분신을 하고 투신을 하고 목을 매고, 그들이 목숨걸고 싸우는 건 단 하나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이거 하나다. 그런데 힘이 없다. 힘이 없기에 힘을 모으는 것이고 힘을 모아도 여전히 힘이 없기에 돌맹이도 들고 크레인도 올라가고 단식투쟁도 하고 삭발도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 번이라도 쳐다봐주는 게 사회 아니던가. '시대의 어른들'이 한분씩 돌아가신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어른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면 세상을 바꾸는데 더 쉽지 않겠나 하며 제도권으로 들어간 사람들. 그 사람들은 들어가면 감감 무소식이다. 현장에 와서 촛불 하나 같이 들어만 줘도 힘이 날텐데, 넥타이 매고 금뱃지 달면 이젠 안녕이다. 김진숙과 막걸리 나눠마시며 법률상담까지 해주던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송경동의 메마른 음성이 흘러 나온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까지 돌아가셨다. 송경동에겐 "하나의 동산을, 하나의 달을, 간신히 부여잡고 왔던 하나의 시대를 잃어버린 느낌"(255-256p)이었다하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된다. 아들의 유언을 평생 실천하신 분. 희망버스에 그렇게나 타고 싶어하셨다는 그 분. 가장 낮은 곳에 항상 등불처럼 함께 해주셨다는 분. 김진숙에게 절대 죽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는 그 분, 이소선 여사의 죽음은 나에게도 큰 슬픔이었기에 송경동에겐 얼마나 그 충격이 컸을까. 송경동의 산문집은 거친 이야기와 가장 인간적인 외침이 가득하다. 그의 가족과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동희오토, 기륭전자, 콜트-콜텍, 포스코, 삼성전자,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태까지. 그가 없었던 곳이 없었다. 그는 울음을 삼키며 동지의 추모시를 읊어야 했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현장에 꼭 그가 서 있었다. 그의 울분에는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와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강철같은 시들만 쓰는 듯 한데 인간에 대해서 그토록 여리기에 그런 시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하자. 내가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나. 구구절절한 나의 탄식이 그나마 탄식으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이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굴종과 복종을 가르치는 어른이 아니라 내 삶이기에 내 목소리를 내고 내 주장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옳고 공정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서로가 기대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를 나도 꿈꾼다. 아! 꿈꾸는 자가 잡혀가는 시대에 용감하게 나는 꿈꾸어 본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너무 아파서, 지금은 좀 자둬야 겠다.) -------------------------------------------------------------------------------- 기본권의 발달을 가르치며 '사회권' 관련한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보여준 동영상이 있다. 노동3권 이야기를 하다가 보여주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는 이유, 절대 잊어선 안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싸워준 분들이 계시기에 가능하다고, 돈 많고 권력 많이 가진 사람만 기억하지 말자고. 대통령이 누구고 대기업 총수의 이름은 알면서 정작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싸워준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지 않냐며.. *지식채널e 2011. 10. 31 방송 "41년"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jisike&menu_seq=1&enc_seq=3091327&out_cp=e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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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타는 목마름'은 저항의 상징이었고, 자유를 향한 갈급함을 담은 말이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라 울부짖었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여전히 동트기 전이다. 한진중공업 사태로 35m 타워크레인에서 309일을 살다 내려온 김진숙 님의 웃음도 '활짝'이 아닌 애처로움에 가깝다. 누구나 '와락' 껴안아 한줌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그들을 추억하며, 울보 시인 송경동 님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손에 들었다. 우선 블로거 금박웃음님의 생일 선물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수감된 송경동 님의 석방을 두 손 모아 기도하자는 짧은 메시지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두루 느끼게 했던 송경동 님의 산문집.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걸 누리고, 행복한 고민에 시달리며, 나름의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행한 걸까? 900만 비정규직, 현대판 신종 노예란 꼬리표를 단 그들과 그들 가족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절절한 눈물로, 고통으로, 분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올해의 인물로 한 매체에서는 김진숙 님을 꼽았다. 어느덧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은 저항과 희망의 성지가 되었다. 트위터에서는 항상 김진숙 님을 응원하고, 걱정하는 이들로 넘쳐났고, 제 살 길 바빴던 몇몇 정치인들도 뻔질나게 현장을 다녀왔다. 무엇보다 자발적인 희망버스 조직은 촛불과는 또 다른 의미의 민심을 담았다. 그럼에도 조남호를 비롯한 일부 대기업 총수들의 탐욕은 멈출 줄 모른다. 그냥 살게만 해달라고, 사람을 내쫓더라도 적법한 절차와 공정성이란게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한 서린 절규, 피맺힌 울분을 토해내는 이 땅의 사람들.
송경동의 글을 읽는 내내 폐병 환자처럼 쉴 새 없이 잔기침을 해야 했다. 마치 삼성전자의 반도체실에 우주복을 입고 죽음의 세척액을 만지고 있는 듯한, 한국타이어의 유기용제를 숫제 들이키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손가락이 잘리고, 사람이 피떡이 되어 죽어도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측에 대한 노동자의 목소리는 울림 없는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무분별한 뉴타운 정책으로 용산을 비롯한 수많은 철거지역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었음에도, 공허함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그들이다.
그래서 목소리를 낸다. 적어도 내 자식 세대에서만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사람들이 뭉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구금과 구속, 물대포와 곤봉 세례였다. 머리가 깨지고, 손발이 부러져도 아랑곳없는 비열한 권력자들. 지금 사는 이 세상이 과연 대한민국이 맞는지? 혹시 전생에 죄를 지어 지옥으로 떨어진 건 아닌지? 이 지옥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는지? 죽음이 아니면 해결이 안되는 건지... 살 떨리고, 가슴 미어지는 글줄이 책 속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송경동은 꿈을 꿨다. 사람답게 사는 것. 하지만 감옥에 갇혔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주체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연대했던 송경동을 표적 구속해버렸다. 도처에 불의가 도사리는데, 그래서 할 줄 아는 거라곤 시를 쓰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마흔 여섯 시인은 미운털이 박힌 거다.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죽음, 비정규직 해고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극에 달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안 되는 게임이다. 죽어서도 이기기 힘든 게임인 것이다.
가슴 한 켠이 달아오른다. 반 평생을 온전히 내 한몸 보전하기에도 힘들기만 했던 나약한 소시민이 바로 나다. 대학시절 운동의 끝물에, 어정쩡 발도 못 담그고 피해만 다녔던 나약한 이기주의자가 바로 나였다. 송경동을 비롯한 수많은 저항 세력들에 대해 멀찍이서 박수만 칠 뿐,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게 바로 나다. 그래서? 뭘 해도 소용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설령 박근혜가 아니라 문재인, 안철수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서 뭐서 달라질 것인가? 망해야 끝나는 게임이라고 넋놓고 있어야 하는가? 수많은 의문과 체념과 한숨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임을, 사람이기에 안다. 해봐서 아는게 아니라, 함께 나눠봐서 안다. 그래서 송경동의 글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그는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곳에 연대하려 가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그 간명한 마음들이 살아나면 좋겠다. 정리 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무슨 죄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냐고, 그리고 그게 무슨 그리 큰 어려움이냐고..... 국민의 1퍼센트도 안되는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회적 자산들이 원래의 사람 몫으로 나눠지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현대 민주주의가 그나마 실험된 게 몇백 년인데 계속 이런 내용적 봉건영주들의 시대를 가만히 놔둘 거냐고...... 이런 세상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더하기, 빼기의 단순 정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얘기할 거냐고 사람들이 마구 얘기하면 좋겠다.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던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다시는 조남호 같은 이들이 없게 만들겠다는 지역 희망의 연대운동들이 만개하면 좋겠다. 아,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 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p9 작가의 말을 대신하며, <여기는 감옥, 나는 나비다> 중에서
그렇다. 그는 나비를 꿈꾼다. 지금 이 지옥과도 같은 시대를 벗어날 수 있도록 저마다 가슴에 맺힌 고치를 뚫고 나비로 훨훨 날아오르길 기도한다. 여전히 난 몸을 움츠리며 사면 어둠밖에 없는 고치 속에서 이를 갈고 있다. 이만 갈 뿐이다. 나 또한 현재는('자발적'이 앞에 붙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다. 탐욕과 기만이 아닌 적어도 내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불현듯 오전에 말도 안되는 금액으로 내 자존감과 가치를 흔들어 놓은 '그 회사'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도록, 이미 나비로 화(化)한 송경동 시인의 석방을 꿈꾸며,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며 어깨를 겯고 걸어나가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한없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한없이 따뜻해졌다. 이 책이 내게 작은 위로와 힘을 전해준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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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된 말보다 표현되지 않은 말이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애초에 말은 사람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 책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쓴 책이기에 가슴으로 읽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끌며 이 책을 펴지 않아도 될만한 변명거리를 독백처럼 뱉어냈다. 굳이 불편한 상황에 나를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송경동의 이야기에 다 동조하지 않음에도 가슴이 쓰렸다.
상처 많은 글이었다. 분노와 울분, 때로는 집어삼킬 듯한 증오까지 내비치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렇기만 했다면 아마 나는 중간에서 책을 덮었을 것이다. 끝까지 읽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꾸역꾸역 밥을 입에 밀어넣듯 글을 읽었다. 참 슬픈 책이었다. 핏발 선 눈과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갈라지고 탁한 음성은 언제부터 그의 것이 되었을까? 왜 그는 속죄양처럼 타인의 짐을 짊어져야 했을까? 분명 그와 나는 동시대인이건만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괴리를 느꼈다. 세상 어디도 만만한 곳은 없지만 그가 맞닥뜨려야했던 세상은 마치 무법지대와 같은 이질감마저 불러왔다. 그런 세상에서 송경동이 살았다.
물론 내가 속했던 세상도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그곳에서도 일어났다.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그곳은 차가웠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누군가를 돌보거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20대의 나는 늘 가슴이 얼어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제작 여건은 자유로웠으나 그에 비례한 책임을 져야하는 곳이었다. 심적 부담과 초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업무 때문인지 그 직장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다른 곳보다 짧았다. 그래도 업무는 견딜만 했다. 더 어려운 것은 비교 대상들의 탁월함에서 오는 상대적 열등감과 열패감이었고,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을 다칠 때 였다.
그런 상황이 송경동에겐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늘 불화했던 부모님과 특히 시장터의 세치 처세술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깨진 유리 파편처럼 날 선 가족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모멸감에 젖게 했다. 그랬건만 세상은 그를 품어주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대했다. 인격이 아닌 체력으로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했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를 악물고 참아도 하늘아래 보금자리 하나 얻기 힘들게 만들었다. 또한 함부로 대했으며 검게 탄 얼굴과 손톱 밑의 때가 부끄러워 버스 손잡이마저 잡지 못하는 쓰라린 소외감을 갖게 했다.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고 송경동은 자신의 상처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타자기가 되어 열악한 노동 현장의 친구들을 위무해주었다.
그러나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았다. 산재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김씨, 이씨, 박씨 형님의 죽음 앞에서 '남의 불행을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서 감사해야 하냐'며 송경동은 처절하게 절규해야만 했다. 이름을 놔둔 채 성씨로만 존재했던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장의 모습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죽어도 되는 목숨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그만 나오라'는 통고를 사전고지도 없이, 어느날 아침 문자로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도 결코 남의 일일 수 없었다. 절망을 숙명인듯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사는 것은 이미 지난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송경동은 희망을 연대하며 노동자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꾸었고 그 일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송경동. 꿈꾸었기 때문에 잡혀갔고 꿈꾸었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의 꿈이 내 꿈이라는 입에 발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의 과격한 투쟁구호에 다 동의하지도 않는다. 희망버스가 아니었다면 송경동이 누구인지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가 가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바랐던 '외뢰움보다 더 간절한 삶에 대한 예의와 청춘의 욕정보다 강했던 어떤 신뢰와 환대의 시간들'만은 내 가슴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삶 속에서 그것을 지키며 살고 싶다.
거칠고 고함 가득했던 책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떠올렸다. 이곳에 있는 내가 저곳에 있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 시밖에 없다. 이 시는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소통의 또 다른 이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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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민중의소리]
희망버스를 처음으로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송경동 시인의 산문집이다. 희망버스가 김진숙씨를 구원해 냈지만 송경동 자신에게는 희망고문이 되어 버렸다. 수감 중인 시인에게는 희망고문이 되어 버렸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송경동 시인을 알지 못했다. 희망버스가 이슈가 되고 보도가 되면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그대로 시인의 절규이다. 수십 년을 하루같이 하나의 문제를 위해서 싸워왔지만 극과 극의 대통령을 거치며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앞뒤로 하늘 끝부터 땅 끝까지 완전히 막혀있는 구조를 깨부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절절한 실패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은 불편하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지식인입네 하며 온갖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허접한 ‘글’들 과는 차원이 다르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그대로 송경동이다. 삶에서 살아낸 흔적이 그대로 글자가 되어버렸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 그것이 느껴지고 진심이 전달된다. 이것은 힘이다. 송경동 시인이 가진 힘일 것이다.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공권력이라는 명분으로 짓밟고 때리고 겁주고 빼앗았다. 그래도 그는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홀로 사투를 벌이는 김진숙씨 옆에 유령도시가 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노조원들 옆에, 8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 바로 옆에 있었다. TV시사 프로그램에 화장 떡칠하고 앉아서 개기름 섞인 자만으로 진보입네 하고 연결된 라디오 프로그램 전화통화에서 마치 시국을 혼자 관통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나 SNS를 통해 무지하고 몽매한 대중을 가르칠 대상으로만 인식해 오만방자한 칼을 휘두르는 먹물 잡배 놈들과는 다르다.
시인은 이 사회의 가장 끄트머리 건설현장 일용직 잡부로 일한다. 그러면서 글을 쓴다. 그러면서 늘 운동의 선두에 선다. 소외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하고 미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 자신을 질책한다. 그래도 이 불편함과 미안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늘 현재 일어나는 불의와 폭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어떤 과거의 민주주의도 다 허상일 뿐이다.” (p.156) 체제가 바뀐다고 해서 정치주체가 바뀐다고 해서 노동자, 농민, 궁민(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의 국민도 아니다. 노래패 꽃다지의 노래에 나오는 ‘궁민’조차도 못 된다.”, p.104)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통해 확인한 바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역사의 분곡점마다 혁명, 전쟁, 봉기, 투쟁의 형태로 점 찍혀 있다. 분노하든 짱돌을 들든 무언가 해야 할 때란 말이다.
희망버스가 조직되고 부산으로 향하는 것을 알면서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휴가를 내지 않았다. 괜한 호기를 부릴 용기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냥 피해버렸다. ‘내가 아니어도 사람 많은데 뭐’ 비겁한 변명이었다.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으로 스스로의 구차함을 자위했다.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형태의 운동을 그렇게 축제로 만들고서는 조용히 감옥에 수감되었다. 희망버스도 결국 송경동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지는 싸움을 했다. 아니 싸움을 해보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냥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집단 린치를 당했을 뿐이다. 시인이 만들어 낸 희망버스가 자신에겐 희망고문이 되어 버린 것을 아닐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자발적 운동을 처음 경험하면서 ‘이번에는 뭔가 바뀌겠다.’ 핑크빛 환상을 꿈꾸게 한 건 아닐까. 해가 올라오면 급격하게 사그라지는 새벽안개처럼, 바람 빠져 방향 없이 휙휙 나부끼는 풍선처럼 ‘희망’고문을 가한 것은 아닐까.
시인은 자친출두했다. 마지막 자존감을 지킨 것이다.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미안하다.
“먼지바람이 휭하니 부는 낯선 객지 공사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띄엄띄엄, 쓸쓸하게 들리는 망치소리로나 만나요.” (p.79, 「노동자 전영관 잘 가시라」 중) 머릿속의 자맥질이 멈추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도 공사판 망치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굽히며 살았던 시인의 삶이 제발 시사 하는 바가 컸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을 때 맨 앞에 서서 확성기에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조용히 그들 옆에 쭈그려 앉아 함께 눈물 흘린 시인의 삶이 아름답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써도 살아본 경험이 없는 자, 삶에 녹아있지 앉는 자의 그것은 거짓말이다. 제 자랑일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럽고 미안해 몸이 쪼그라드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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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을 처음 안 것은 2차 희망버스 행사 때 였다. 내가 탄 희망버스에 송경동 시인도 타고 있었다. 버스가 부산 영도로 가는 동안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마이크 잡은 송경동 시인의 얼굴을 처음 봤다. 슬픔이 어린 눈빛이었다. 2차 희망버스를 통해 나는 그제야 비정규직 문제를 실감했다. 다음날 영도에서 송경동 시인은 목이 쉬었는데도 큰 소리로 외치며 연설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규하게 했을까? 나에게 시인이 노동운동하고 추모시를 낭송하는 일은 낯설다. 시인은 희망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송경동 시인도 그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의 비참한 현실을, 자본주의 권력들의 탄압을, 용산 참사를, 추모시를,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억울한 삶에 대하여 노래한다. 무엇이 그에게 절망적인 현실을 노래하게 만들었을까? 이 책에는 송경동 시인의 지나간 삶과 현재의 삶이 들어있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할 때 시화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시들 중에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시가 있어서 문예반은 학생과장실로 끝려가서 징계받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잡부 숙소 생활을 하며 건설현장에서 하루벌어 사는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일은 계속 했다. 깡패 큰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 젊은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이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시기이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지나간 삶은 아픔과 상처가 많았던 것 같다. 시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들이 내 눈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떤 말들이 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떤 말들이 움켜진 주머처럼 내 안에서 뻗어져 나왔다. 세계가 내 몸을 타자기로 삼아 제 이야기를 두드렸다. 더 이상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가 내 몸에 자신의 구조와 상처를 깊이 새겨두었다. (18-19쪽) 이 책 안에 '어느 비정규직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영화 <졸업>의 더스틴 호프만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가난했지만 청춘은 아름다웠고 안타까운 사랑은 추억이 됐다. 지금은 자신이 꿈꾸던 시인이 되었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렸다. 아이가 사우나 가자고 손을 잡아 끌고 놀아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행복할 수 없음이 슬프다. 도대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상처의 종유석들이 박혀있는 것일까? 산재 추방의 날 읽을 시를 써달라는 요청에 긴 시를 쓴다. 결국 이 자본주의 자체가 산재라는 얘기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무시당하고 억압된다. 일용직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구로에 십 수년을 살면서, 시인은 자본주의가 결국 가장 큰 산재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것 같다. 자동차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 기타 만드는 콜트-콜택이 모두 그런 경우다. 근로자를 마치 기계부품처럼 여기고 마음대로 해고한다. 최소한 노동법만을 준수해달라는 요구하며 시위를 하면 폭력이 그들을 기다린다. 특히 이 책에 있는 대추초등학교에서 1만 5천명의 경찰의 진압장면은 정말 전쟁터보다 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진압 때 시인은 경찰이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학교에서 치료받고 있는 부상자들도 연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연일 '폭력 시위 근절'이라고 경찰과 정부는 외치지만 그들이 더 큰 폭력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 사진작가 이시우님,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죽은 황유미님, 기륭전자, 용산 참사, 한진중공업 사태와 김진숙 등 이 시대의 아픈 현장들에서 시인이 느낀 슬픔들이 들어 있다. 읽으면서 많이 불편했다. 우리 나라에 이런 폭력과 억울한 일들, 죽음들이 이렇게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주류언론들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는 얘기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진짜 세상이 아닌 듯 하다. 앞으로 약자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행동해야겠다. 약자들이 억울한 일 없는 세상을 꿈꾸며 노동과 문학의 길을 걸어간 시인이 있다. 자신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라고 하는 시인이 여기 있다. 추도시를 쓸 때 누군가 자신의 몸에 들어와 글을 쓴다는 시인이 있다. 꽃과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고 싶었다는 시인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의 아픔과 상처가 절절히 느껴졌다. 그가 가난한 마음이라고 한 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비정규직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절규하게 했는지, 무엇이 그에게 절망적인 현실을 노래하게 했는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상처의 종유석들이 박혀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제 시인이 노동운동하고 추모시를 낭송하는 일은 낯설지 않아졌다. 이제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송경동 시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정부와 거대 자본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가한 폭력과 착취는 생각하지 않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한미FTA 반대 시위자들을 '폭도'라고 얘기한다. 한겨울에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댄다. 김진숙씨는 85크레인에서 내려왔지만 지금 시인은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른다. 정부는 시인이 풀려나면 또 다른 시위를 할까봐 붙잡아 두는 것 같다. 폭력으로 밖에 대항할 수 없는 현실, 폭력과 폭력이 부딪혀 남기는 상처들.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정말 대화와 화해의 길은 없을까? 경찰청장, 장관, 국회의원, 대통령, 재벌들, 조중동 등을 스쿠르지처럼 데려가고 싶다. 밤에 이들의 꿈속에 들어가서 이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 때문에 피흘리며 죽어갔던 영혼들과 만나게 해 주고 싶다. 그들은 보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겠지만, 그들이 사람이고 양심이 있다면 이런 모습을 보면 동정을 느낄 것이다. 스쿠르지처럼 변하지는 않아도 이들에게 대화의 길을 기대한다. 꿈꾸는 자 송경동은 잡혀갔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비정규직 차별없는 세상이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이다, 철거민들에게 폭력없는 세상이다, 산재 피해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정부와 자본의 폭력 때문에 억울함이 없는 세상이다, 노동자가 기계부품처럼 버려지지 않는 세상이다. 나 역시 이런 세상을 꿈꾼다. 꿈꾸는 자를 잡아간다고 꿈이 사라질까? 꿈이라는 것은 잡아간다고, 가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폭력없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꿈꾼다. 송경동 시인이 꿈꾸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약자가 부당하게 고통받지 않는 세상, 송경동 시인이 추모시 대신에 꽃과 사랑에 대한 시를 낭독할 수 있는 세상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혹독하게 갖혀 있는 감옥은 '나'라는 이 지지리도 못난 에고의 감옥이다. '너'라는 집착의 무덤이다. 현상 앞에서 늘 본질적 물음들을 후퇴시키는 삶의 보수주의이고, 내 안에 도사린 어떤 역사와 진보에 대한 패배의식이다. 결코 깨끗하게 털어버리지 못하고 음습한 내 영혼이 기숙처로 삼는 이 뿌리깊은 자본의 문화, 가부장제의 문화다. (8쪽) 그게 불의고, 부당함이고, 폭력이라 생각하면 날아오는 미사일조차도 겁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진실과 평화 앞에서라면 늘 자신을 숙이고, 자신의 마음을 거울 닦듯 닦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어떤 핵폭탄보다도 더 웅혼한 폭발력을 담지한 '양심'이라는 숨은 무기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159쪽) 사람들아, 과격한 것은 즉자적 분노밖에 표출할 수밖에 없는 무지렁이 우리가 아니라, 너무도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우리의 노동을 착취하고 권리를 앗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다. 없는 이들에겐 자살공화국이 되어도, 산재공화국이 되어도, 실업고 노숙자들의 공화국이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배와 권력만 챙겨가는 저 잔인한 참여왕국, 딴나라왕국, 삼성왕국, 현대왕국, 포스코왕국에 사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아니다. (213쪽) 이것은 어쩌면 원폭보다 무섭고, 광우병보다 치명적이며, 조류인플루엔자보다 무서운 일상적인 테러이며 살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비정규직이라는 벼랑으로 내몰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는 살 수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241쪽) <단어> 자울거리다(20쪽): '졸다'를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 부평초 (21쪽):(같은말)개구리밥. 물 위에 떠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이르는 말. 얽다: 얼굴이 얽었다는 (31쪽), 노끈이나 줄 따위로 이리저리 걸다. 이리저리 관련이 되게 하다. 직정(33쪽): 자신이 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냄. 도덕군자연(110쪽): 오독(126쪽): 등신불(198쪽): <불교> 사람의 크기와 같게 만든 불상. 미필적 고의: [법률]어떤 행위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 통행인을 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골목길을 차로 질주하는 경우, 상대편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그를 심하게 때리는 경우 따위가 해당한다. <의문> 수많은 이들이 죽었디(186쪽): 죽었디?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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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모름지기 활자로 많이 만나는 법이지만 활자로 보다는 오히려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게 더 많은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송경동이다.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용산 추모제에도 있었고 서울시청광장에서도 이랜드 파업장에도 있었고 기륭에도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도 그리고 85호 크레인 아래에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시대와 역사 앞에 연약했던 개인은 용서받지 못하지만 구조는 용서받는 이 사회(p.31)'에서 무너지는 개인, 파괴되는 가정과 직장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고 때로 격정이 너무 차올라 400만원이나 하는 무선마이크를 집어 던지면서 까지 아프고 아픈, 억눌리고 내몰리는 그와 우리를 위로하고 그렇게 정말 자신의 시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를 읊었다.
송경동은 그런 시인이었다. 배운 것도 짧고 가진 것도 없지만 문학이 결국은 이 모든 시대의 어둠을 뚫고 희망의 새벽을 길어다 줄 마중물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그 누구도 시대의 그늘 속에 웅크린 자들을 보려하지 않고 아무도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지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려 하지 않을 때
그는 그들이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라 믿었고 그들이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라 믿었으며 그들의 이야기야 말로 문학이 담아야할 진실이라고 믿어 늘 그들의 삶의 현장에 머물며 같은 막노동꾼으로 그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누구도 하려하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했던 시인이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신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세상 속에서의 '살이'들이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모두 저마다 삶의 힘겨움을 떠 안고 걸어가는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아이들'에서 우리는 송경동 시인이 가진 사람을 보는 근본적 시선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새 생명으로, 나와 30년 밖에 차이가 안나는 새로운 역사의 손짓'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미안해하고,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동화책을 읽어주지 못했고 만화책을 읽어주지 못했고(...) 단 한 번도 따스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음을 미안해 한다. 이 미안함은 송경동 시인이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가지는 미안함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그에 맞는 예의를 보여주지 못했음에서 나오는 미안함이다.
그렇게 그는 모든 인간들이 그저 인간인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 받을 가치가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믿는 시인이다. 때문에 그는 이 세상 모든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한 억울한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또 그렇게 내몰고 있는 모든 권력과 자본에 대해 성토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바로 그렇게 죽은 넋들의 억눌린 목소리들을 되찾아주려는 '초혼'이며 지금 고통 당하는 이들의 눈가를 훔쳐주는 소매이며 그들과 함께 싸워줄 무기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내 현장에 있었고 동지들의 아픔과 죽음을 하나하나 영혼에 아로새겨 가면서 싸웠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해버린 故 황유미씨...
2006년, 일주일에 한번은 유급 휴가를 쓰게 해주고 작업복을 갈아입을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가 끝내 거부되자 30년만에 처음으로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경찰이 다시 무력진압하는 가운데 경찰의 곤봉 또는 휘두른 소화기에 맞아 죽은 故 하중근씨...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라는 핸드폰 문자 하나로 생존의 근거가 날아가는 하루살이 같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키고자 천일 동안 싸웠으나 끝내 강제연행으로 끌려가야 했던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또한 역시나 한 많은 죽음과 피눈물로 얼룩진 용산 참사...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태...
그래서 이 모든 아픔과 죽음으로 가득한 사회는 그에게 '산재' 자체의 사회가 되고
보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재 아닌 것이 있는지. 모든 실업도 산재다. 모든 파탄 난 사랑의 많은 부분도 산재다. 가정불화의 대부분도 산재다. 독거노인도 거개가 산재다. 모든 교통사고의 주요인도 산재다. 모든 생태위기도 뿌리는 산재다. 이런 사회다 보니 가지지 못한 자들은 축복 어린 아이를 가지면서도 어떤 재난을 떠올린다. 삶 자체가 재난의 연속이다. 모두 무한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의도된 결과다.(p. 100)
그의 시란 이 모든 산재가 가져온 고통과 그것을 간직한 자들의 기억이며(자본은 늘 망각을 강요하므로 기억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 된다.) 근원적으로 산재 자체를 근절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산문집을 냈다.
시가 위로요 무기였다면 산문은 '전시(展示)'이다. 화려한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어쩌면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은 그러한 삶의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展示'
그렇게 시가 같은 자리에서 함께 아픔을 겪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산문은 이제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는 손짓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아픔을 보고 눈물을 보고, 모든 것이 산재인 이 사회에서 내 한 몸 챙기고 산다는 것 역시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결국은 모두가 하나이며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임을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게 하는 손짓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 모두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이다. 저 아랫쪽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멀어 보이는 일이 아니다. 언제 당신과 내가 다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지 모른다. 함께 나서서 저 여린 소금꽃나무 김진숙이 김주익의 슬픈 영혼을 고이 안고 저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하자. 우리 시대가 고통받는 모든 이웃들을 함게 껴안고 조금은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 (p.236)
송경동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하지만 그는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되어 구속되었다. 나는 막연히 그것이 희망버스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밝혀진 구속 이유는 정말 뜻밗의 것이었다. 그는 다른게 아니라 말 한 마디 때문에 구속되었다. '쌍용자동차에게로 희망버스가 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그 한 마디의 말...
그 작은 말하나, 모두가 그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 소박한 꿈 하나가 그를 차디찬 감방에 가두는 이유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같이 어깨를 걸고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 역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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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면서 누구든 불평 불만이 없을 수가 없다.또한 꿈과 희망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원하기에 인류의 역사는 '고인 물'이 아닌 형태로 어디론가 힘차게 흘러가면서 우주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주기도 한다.그렇기에 인류는 지금보다는 더 낳은 삶을 위해 쉬지 않고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축적해 왔던 것이다.그것은 혼자의 힘보다는 다수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고 보다 나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빨리 앞당길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그런 면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자유와 인권을 향한 희망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닌 처절하고 고독하며 끈기있는 깨어있는 의식이 살아있어야 한다.
여기 힘없는 민중으로서 노동자의 멋진 내일의 희망을 향해 노동자를 대신하고 글로 울분과 공분을 표출하며 없는 자의 편에 서서 분연히 일어선 '송경동 시인'은 유복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노가다판,용접공 등의 힘든 일을 하면서 노동자의 마음과 감정을 시로 달래보기도 하고 현재 진행되고 풀리지 않은 비정규직 등의 애환을 함께 하는 진한 연대의식까지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하여 겉으론 경제대국이 된거처럼 정부나 언론에서는 자랑스레 떠들어대고 있지만 국민이 느끼는 생활행복지수는 OECD국 중에서 가장 밑바닥이 아닐까 한다.정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력과 검찰 등과 결탁하여 소위 강부자층만을 두둔하고 절대 다수인 일반서민들은 그들의 '수익 모델'로 둔갑하여 어둡고 모진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해 달라고 뽑아 주었건만 일부 소수들만 사복을 채우고 부를 세습하며 대다수의 서민들의 낯가죽이라도 벗겨갈 마냥 현재의 삶은 '도탄지고' 그대로이다.
부를 걸머쥔 특정 계층은 어느 시대나 그 부를 독식하면서 못사는 사람들에게 시혜를 펴는 정책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다만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모두가 발버둥을 친다.또한 법 앞에 기회의 평등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실상황은 전혀 다르다.오로지 돈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위한 제도로 인해 소외층은 제대로 된 일자리,사람답게 살아볼 틈조차 주지를 않기에 의식이 있는 계층들이 일어나고 연대한다면 지금과 같이 소용돌이 속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든다.
현정권 들어서 수많은 불상사가 발생했다.용산4지구 철거민 사태부터 천안함사태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통곡할 사건들이 일어났건만 현정부는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비인륜적이다.또한 안보 문제는 국민의 알권리마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채 엉거주춤한 무능력의 행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에 신뢰도 안간다.나아가 생존권이 달려있는 철거민,비정규직,일용 노동자 등의 생계문제에 대해서는 마치 '너희들이 알아서 노력하여 살아가라'고 방치하고 있는거 같다.너무나도 나 몰라라 하는 작태와 귀막음의 님비 현상은 분노마저 일게 한다.
나 역시 일용 노동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다.군을 갔다와 복학할 때까지 생활비를 번답시고 제지공장에서 배수관을 나르는 일과 시립 도서관에서 잡역을 해본 경험은 있다.하지만 이 글에 소개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과 처우를 보니 한국사회가 사회구성원간에 왜 통합이 안되는가를 여실히 알 수가 있다.비정규직은 불명예스럽게도 세계 1위일거 같다.물경 890만.이것은 공식 통계이고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하면 1.000만을 넘지 않을까 한다.
보다 나은 생존권을 확보하여 정규직들이 누리는 인간다운 삶을 누려보고자 노동자들은 15만 킬로와트의 전기가 흐르는 100여 미터 높이의 송전탑에 올라 단식농성도 하기도 하고 한진중공업 김진숙과 같은 노동자는 거의 1년을 크레인 위에서 노동자의 밝은 미래,밝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분연히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MB정권이 내세웠던 재개발,재건축,뉴타운 사업이 자본 놀음,투기 놀음으로 변질되고 일반 서민은 아무런 혜택도 없기에 말없는 '공분'은 산불마냥 퍼져만 가는 것이다.
현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고 일부 소수들과만 친하게 지내려는 '비지니스 프렌들리'정책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그들을 위하고 편안하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용산 철거민,비정규직,쌍용자동차 문제,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를 통해 그들의 속내를 만방에 보여 주었던 것이다.그러나 썩은 정치,국민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정치는 언젠가는 눈물 쏙빼는 보답을 받으리라 생각한다.상생하려고 온 국민이 노력해도 부족할 판이고 시대 역행적인 정책들을 보면 모든게 답답하기만 하다.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고 밝은 한국사회를 원한다면 좌시(座視)해서는 안될 것이다.함께 연대하여 살아있는 민중의 힘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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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송경동 자신이 이야기한 "이것은 우리 시대 어떤 난쟁이들의 서럽디서러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며, 당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이들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P218,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중)
그들의, 아니 바로 우리를 포함한 현대사를 파장모드로 이끌고 가는 것은 '시대의 악성종양인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돌연변이들'. 그리고 그들에 동조하는 대중이, 내 안위를 내 자식의 승리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는 현생 인류의 조연들....바로 우리 자신...
리뷰를 해야하기에 글은 시작한다만, 리뷰를 쓰면 안될 책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굳이 리뷰를 하자면 '일단 무조건 읽으시라'는 이야기 말고 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송경동은 '노동'으로 부터 벗어난 양 살고 있는 모든 직딩들에게 고한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 아닐까?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P95,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그가 진단하는 이 땅의 모든 고용된자는 산재의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이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시위현장과 진압을 위해 출동된 공권력 내지는 공권력의 면죄부를 받은 용역들과의 대치, 충돌의 장면에 대한 묘사를 읽어나가면서 중학교 때 읽었던 '솔페리노의 회상(적십자를 설립한 앙리 뒤낭 저)'의 피터지는 전장의 너무나도 리얼한 묘사를 읽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아 오르고 가슴이 뛰어 읽기를 잠시 멈춰야 했다.
우리가 무심한 사이, '여전히 꿈꾸는 자를 잡아가는 세상'. '참여정부'란 이름에 속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그들의 목메달림에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전 대통령... 그리고 그런 말 조차 할 생각도 못하는 현 정부의 똥구멍을 빨며 살고 있는 사람들...
송경동은 외친다. 지나지 안았다고. 여전히, 아니 더욱 피터지게 현재 진행형이라고. 감은 눈을 뜨고 앞만 보던 자들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수 백, 수 천의 집을 짓고도 하나도 소유하지 못하는 이땅의 일용직 노동자'라는 아이러니를 직시하라고.
공부를 못하면 '저렇게'되는 표상이 아니라, 어른 말 듣지 않으면 '저렇게' 되는 불량 표지판이 아니라 이들이 존중받는, 아니 존중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인간된 권리'를 꿈꾸면서도 잡혀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 몰매를 맞지 않아도 되는 세상.
우석훈의 지적대로, 20대? 가망없다. 30대 희망없다. 40~50대? 논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10대들 밖에 없다. 그들과 동조하고 한 끈으로 묶여 그들이 깨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30대를 넘은 모든 자들은 거름이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의 내일이 있고,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우리의 자식들의 미래가 있다.
한마디로 리뷰를 마무리 하자면, "닥치고 읽자" 가능한 한 빨리 중등학교 독본으로, 사회과교보재로 사용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와 다른 해법'을 찾도록 도와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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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며, 나 어릴적 어른들은 말했었다.그리고 여전히 어른들은 자신들의 아가들에게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겠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꿈꾸는 시인을 우리는 자꾸만 세상이 아닌 저 차디찬 때(감옥)에 가두려고만 한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란 시집을 2010년엔가 읽었다.당연히 시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그저 화두처럼 던진 시제목이 좋아 골랐을 뿐인데..시들의 내용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멋진 시인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희망버스에 자주 시인의 이름이 거론 되는 것을 알게 되면서,당신의 시처럼 그렇게 현장에서 뚜벅뚜벅 살아가는 시인이였구나 하고 또 생각만 했다. 다시 시간은 흘렀고,김진숙위원은 85호크레인에 내려왔다.이제 좀 다행이다 싶었는데,시인은 희망버스 주동자(?)자로 구속되였단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는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읽으며 궁금했던 시인에 대한 궁금중은 이 책으로 다 풀렸다. 어째서 시인이 되였고,노동운동을 하게 되였는가로 산문집은 시작된다. 힘든 사람이 힘든이의 마음을 더 잘안다고 했던가? 시인 역시 가난했고,그 가난에서 벗어나려 했으나,도저히 한 개인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절감하면서 시인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는 달려가기 시작했고,억울한 이들의 혼을 씨김하듯 시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전태일평전>을 읽을 때도 나는 이런 세상이 어떻게 있을수 있어 그랬던 것 같다.그때는 어렸고,서울을 몰라서..라고 애써 외면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울어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역활은 다 한것이겠거니 했는데 여전히 가난과 억울함은 끝나지 않았으니,시인은 이 모든 것이 산재라 했다.
"보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재 아닌 것이 있는지,모든 실업도 산재다.모든 파탄 난 사랑의 많은 부분도 산재다.모든 교통사고의 주요인도 산재다.모든 생태위기도 뿌리는 산재다.이런 사회다 보니 가지지 못한 자들은 축복 어린 아이를 가지면서도 어떤 재난을 떠올린다.삶 자체가 재난의 연속이다.모두 무한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의도된 결과다"
다큐 강정을 보는데,한 마을주민은 왜 이제사 와서 이렇게 활동을 하느냐 억울해했다.판결이 나기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그때 왜 진작 와 주지 않았느냐고 절규했다. 시인의 '산재'라는 말이 새삼 쿵 하고 내려 앉는 기분이다. 지금 내가 평안하다 해서,산재로 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시인이 말해주고 있다. 사회의 약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 나섰기에,꿈을 너무 많이 꾸고 살아가는 탓에 시인은 옥중에 있다.그러면서도 꿈을 잃어가고 날개가 꺽여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함께 꿈을 꾸고 날아보자고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외면하고 방관했던 세상의 소리들...아픔의 눈물조차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 시인의 꿈꾸는 분투기였다.
"세상의 모든 군국주의와 그 무기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호혜와 평등 다양한 인류의 협력과 조회만이 가득 찬 세상을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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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회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충동질하는 제목 이랄까? 소심한 행동 가는 책으로 간접경험을 한 후 부당함을 마음 속에 묻어 두었다가 선거 때 소심한 복수를 다짐한다. 새 사람이 오든 헌 사람이 오든 그 자리가 원래 그런지 어느 누구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말씀 하셨다. 저자 송경동과 저자가 소개한 박근영, 조영관, 이시우, 하중근, 이윤엽, 배인석, 박영진, 류외향, 이재웅, 서수찬,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들은 대범하게 행동하였다.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 그 들의 희생에 편승해가는 듯하다. 며칠 전에 나는 꼼수다 진행자인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되었다. 이유는 이명박이 BBK 실질 소유주라는 사실을 허위로 유포했다는 죄목이다. 자신의 입으로 본인이 소유주라고 하는 영상기록과 명함이 명백한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허위라고 판결을 하니 민초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도 잡아가버리는 판국이니 소시민들은 말할 가치도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헌법1조1항에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했는데 언제부터 자유민주주주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과학과 기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통치는 수십 년 수백 년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폭력적인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힘없는 민초들이 폭력으로 맞설 때 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폭력을 행사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며 탄압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우리가 저 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가 사회 요직에 않아 그들을 포섭하고 요직에 않아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은 않을까? 즉 마음 속에는 정의를 간직한 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회를 바꿔보자는 것이다. 나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 등의 등장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행동할 시기가 된 것이다. 행동 가들이 행동을 할 때 이 사회는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변화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을 보았다. 저자는 93세의 노인이었지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증명하였다.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면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모든 시민이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이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고 좋은 사회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언제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고 언제쯤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 질 수가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좋지 못한 사회가 된 것이 그들만의 잘못일까? 우리의 잘못은 없는가에 대해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도 약자 이지만 더 힘 없는 약자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을 도와 준 적은 있는가? 또한 도울 준비는 되어 있는가? 우리의 일상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비 정규직 노동자를 탄압하고, 상사가 부하를 못 살게 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정리해고 철폐를 주장할 때 나는 그에게 어떤 응원을 보냈는가? 그의 불편함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사소한 내 고민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이 불편한 진실이 순환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모두 확인할 필요가 있다. 책을 읽고 나서 저자에 대해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희망버스 기획자로 현재 50일째 수감 중이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인물이지만 그가 있었기에 한진 중공업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고 투쟁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이 이 만큼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노조도 없는 곳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 한 체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생계만을 생각하는 노동자가 적지 않다.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민초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기득권 자기들만의 잔치는 이쯤에서 끝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