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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어떤 작가들은 자기 세계를 독자의 세계로 불러온다. 빌헬름 뮐러의 시는 독자를 차갑게 한다. 그 문장은 모든 겨울, 모든 여름, 모든 낙엽과 이별까지 똑같이 느끼게 한다. 아니, 똑같이란 말이 틀릴지언정 그 깨어지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최근부터 독일 시인들의 저작이 줄곧 번역되고 더구나 좋은 상태로 번역이 되어 출간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고무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빌헬름 뮐러처럼 자연에 빗대고 자연을 끌고 와서 감정을, 사랑과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시인이라면 말이다.
흔히 하는 착각은 자연을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구란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작가의 방법론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꽃에, 생기를 잎에 비교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 자체와 자연의 생 그 자체를 병치하는 시인이 얼마나 되나? 이는 작가의 문장력 뿐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기조 자체에 달려있다. 위대한 작가는 자연을 글에 가두고 글을 자연처럼 펼친다. 일반 작가가 아름다움을 꽃에 비교할 때, 위대한 작가는 꽃을 자기 글의 아름다움에 가둔다. 이것은 그의 문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평생을 자연을 자기 글에 가두는 일에 몰두하였기에 얻은 기술이라고 해야겠다.
빌헬름 뮐러는 괴테, 하이네와 더불어서 몇 안 되게 그런 기술을 가진 작가다. 즉 그는 일평생 그렇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로서 말이다. 괴테는 자연을 넘어 신을 자기 글 안에 두어 신처럼 글을 썼고 하이네는 자연을 자기 붓으로 삼았다. 그에 비할 수 있는 독일 시인은 단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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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되면 종종 쓸쓸함과 고독함을 느끼곤 했다. 소위 가을을 탄다고... 음악으로 드라마로 접해 본 적이 있는 겨울 나그네를 원 저자의 손길을 통해 전해 듣게 되니 더한 쓸쓸함이 밀려오는 듯하다. 또 한편으로는 예전에 느꼈던 감정선들이 사라지고 있어서 눈물도 웃음도 없이 시인의 노래를 듣고 있는 내가 슬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 예전 감성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메마른 인생을 살아왔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 눈길 위로 홀로 걸어와 다시 홀로 발걸음을 돌리는 저자의 마음이 우리 각자의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복해하고 더 많이 울고 웃고자 한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오히려 따뜻한 시절을 보낼 것 같다는 기대를 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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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꽤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꿈의 한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지금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마을의 물방앗간은 내 기억속에 1977년까지 있었다. 그 이후 언제 폐쇄되고 헐렸는지는 기억이 없다. 물레방아의 풍경과 내부의 구조도 머리속에 잘 잡고 있다. 마을로 이어지는 큰 길(당시는 큰 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 보면 작은 길, 마을의 주도로) 에서 직각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물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앞으로 수로가 나 있고 끝모서리에서 기역자로 꺽이면서 물레위까지 흐르다가 물레위에서 물이 떨어지면서 물레를 돌린다. 물론 방아를 찧을 때만 물이 흐르고 평상시는 물길을 옆으로 돌려 냇물로 흘려 보낸다. 유소년기에 물레방앗간과 그 주변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물레방앗간 아래 냇물에는 보가 두 개가 있었다. 여름에는 그곳이 아이들의 물놀이 공간이었다. 물이 깊지는 않지만 헤엄을 치거나 놀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보의 위아래를 오가면서 장난치며 진탕 놀다가 지겨워지면 물레방아 밑으로 몰려간다. 물레가 가동되고 있지 않을 때 물레 속으로 들어가 다람쥐가 된다. 아이들 힘으로 거대한 물레를 돌리지는 못하지만 두세명이서 물레속에서 이리 뛰어갔다가 저리 뛰어 갔다가 하면 물레가 앞으로 조금 돌다가 뒤로 조금 돌다가 하는데 놀이기구타는 듯한 맛이 있다. 물론 주인한테 들키면 큰 일. 물레밑 바닥의 자갈 속에는 가재가 있어서 가재를 잡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방앗간 안으로 잠입한다. 정미기의 축안으로 작은 손을 집어넣으면 남아있던 쌀 두 줌은 꺼낼 수 있다. 생쌀을 군것질삼아 씹어 먹었다. 밤에 물방앗간은 공포 그 자체다.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마을 너머에 있어서 컴컴한 검은 물체로 바뀐다. 귀신이 살고 있어서 감히 접근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조차 두려울 뿐이다. 어쩌다 지나칠 때면 오금이 저리고 몸이 뻣뻣해진다. 악몽을 꿀 때 등장한다.
詩란 게 정서적 공감을 전제로 하는데 아무래도 외국시는 공감이 쉽지 않다.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내가 느끼기는 힘들다. 하지만 19세기 독일의 물방앗간 속으로 들어가고자 나를 내몰아 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충분히 가능하다. 神과도 교감하고 식물이 되기도 하고 우리집 똥개하고도 대화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의 언어인데 왜 교감을 못하겠는가. 모처럼 외국시를 읽는다. 1800년대 초 독일 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빌헬름 뮐러. 지금 내가 느끼는 우리의 옛 물방앗간과 19세기 초 산업혁명 직전의 최고의 산업시설 물방앗간은 그 느낌이 엄청 다르다고 봐야겠지. 떠돌이 방아기술자=뮐러의 사랑과 좌절의 시. 뮐, 뮐러, 뮐레린, 이 말이 지금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계, 단어' 밀링',' 밀링 머신'하고 관련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도 뮐러인 셈이다. 그 때는 곡식을 빻는 일이고 지금은 금속을 가공하는 일이다. 사랑과 고독과 방랑... 이 시의 세 줄기이다. <방랑> 방랑은 방아꾼의 즐거움 방랑은! 방랑을 모르는 방아꾼은 엉터리 방아꾼, 방랑을.
물에게서 우리는 방랑을 배웠네. 물에게서! 물은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 언제나 방랑만을 생각한다네, 물은.
물방아에게서도 우리는 배웠네, 물방아에게서도! 물방아는 쉴 줄 모른다네, 지칠 줄 모르고 돌아간다네, 물방아는.
물방아의 돌도, 아무리 무거워도, 물방아의 돌도! 물방아의 돌은 기쁘게 윤무를 추며, 좀 더 빨리 구르고 싶어 한다네, 물방아의 돌은.
오 방랑, 방랑은 나의 기쁨, 오 방랑일세! 주인 나리, 주인 마님, 내 갈 길 막지 말고 방랑하게 해 주오.
본 시집은 두 편의 연작시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를 합본한 것이다. 좋은 점은 독일어 원어와 한글 번역을 한 쪽에 같이 넣어 동시에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독일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운율을 약간은 느낄 수가 있다. 번역자가 번역에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시 '거리의 악사'에서 'Leier'를 '손풍금'으로 번역한 것은 좀...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손풍금을 돌리다니. 손풍금이라면 아코디언정도로 이해가 되는데 전혀 아닌갑다. 손풍금이 아니라 드렐라이어Drehleier혹은 허디거디HurdyGurdy라는 악기인데 손잡이를 돌리면서 현을 타는 현악기란다. 10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어 17,8세기에는 거지나 부랑자들이 들고 다니던 악기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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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은 누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그만큼 음악을 듣는 시간도 늘어났다. 여러 음악을 듣다가 가곡을 듣게 됐고 슈베르트와 슈만의 가곡을 듣게 됐다. 특히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게 됐고 음악을 들으며 보려고 산 시집이다. 한쪽에는 원어로, 한쪽은 우리말로 적혀있어 함께 볼 수 있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