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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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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고자대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주요 2개국(G2) '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은  올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동시에 권력교체기를 맞는다. 쫓기는 자로서의 미국과 쫓는 자로서의 중국에 동서양의 모든 나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중국의 초고속 성장때문이다. GDP에서 세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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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고자대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주요 2개국(G2) '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은  올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동시에 권력교체기를 맞는다. 쫓기는 자로서의 미국과 쫓는 자로서의 중국에 동서양의 모든 나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중국의 초고속 성장때문이다. GDP에서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을 앞지르며 2010년에 들어와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의 일원인 중국은  서구 열강에 100년 가까이 수모를 겪고 이후 공산체제하에서 후진적인 빈곤경제에 허덕이던 나라였다. 그런데  어떻게 30년만에 'G2'의 일원이 되었을까? 그에 따른 답을 중국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인들을 통하여 중국의 정치행보와 통일시대를 맞이하게 된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웃인 중국을 소상히 알 필요가 있음이다.  

 

<원세개>

중국 인민들의 지탄 속에 숨을 거둔 원세개는 심상시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후한 황실을 평정하고 권력을 장악한 동탁에 비유할 만하다. 원세개는 수양 아들 여포에 의해 비명횡사한 동탁과 달리 지병으로 사망했으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뒤 이내 화병이 나 죽게 된 것은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휘하 군벌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점에서 두 사람은 하등 차이가 없다. 원세개가 생전에 그토록 추구하다 끝내 실패한 '중화제국'은 30년만에 모택동에 이르러 실현된다. 

 

모택동

모택동은 원소를 격파하고 화북의 주인공이 된 조조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원소로 비유되는 손문을 직접 타격한 것은 아니나 큰 틀에서 보면 손문의 '삼민주의'를 물리치고 '모택동주의'를 채택한 점에서 손문을 사살적으로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다. 모택동은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기존의 어떤 형식이나 관행에 얽매이지 앟고 검소하며 서민적이고, 재담과 계교에 능하고, 임기응변을 잘하고, 준령대천을 지날 때면 늘 천하를 삼킬듯한 기백이 넘치는 시사를 짓는 등 조조와 너무나 빼닮았다.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것도 닮았다. 역대 황제 중에서 모택동과 꼭 닮은 인물은 명제국의 주원장이다. 두사람 모두 득천하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음에도 치천하에는 적잖은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인해 '문자지옥'을 일으킨 것처럼 모택동 역시 '문화대혁명'과 같은 참사를 일으켰다. 이는 출신부터 주원장과 똑같은  빈농이었으며 둘째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것 또한 같았으며 셋째, 빈민과 노동자를 동원해 천하를 거머쥔 것도 닮았다. 넷재, 주원장이 학력 콤플렉스와 더불어 엄청난 자존심으로 기본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불신 및 열등감등이 뒤엉킨 결과였다.

 

득천하를 성공한 것은 중국의 전통에 기초한 농민혁명 노선을 취한데 있다. 모택동이 득천하에 성공하고도 치천하에 실패한 것은 농민들의 바람과 동떨어진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데 있다. 임기응변의 자유로운 사고와 많은 독서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연마치 못한 자신의 부족한 학문에 대한 인식부족, 창업자의 지나친 자만심 등 또한 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득천하에 성공한 이후에도 경서와 제자백가를 멀리하고 문학서에 탐닉한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사에 공산주의 사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특유의 역사문화를 배척해야만 했기에 결국 공자를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낙인 찍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차원을 넘어 유구한 동양문화 전체에 대한 모독이었다.후에 등소평은 보수반동의 표상으로 낙인 찍힌 공자를 중국 문명의 아이콘으로 부상시킨다.

 

<주은래>

주은래의 삶은 여러 면에서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과 닮아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6無를 행한 군자의 삶을 살았다. '신 중화제국'의 초대 황제 모택동과 최고의 승상 주은래는 대장정 과정에서 군신지의를 맺은 이후 죽을 때까지 시종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중화제국'의 창업이 결코 모택동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은래를 뺀 모택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내에서  '엘리트 유학파'의 선두주자였으나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이끌 당대의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그에게 1인자 자리를 양보한뒤 평생 충심으로 그를 보필했다. 주은래는 모택동을 보필하는데 그치지 않고 등소평을 다시 등용케 만들어 마침내 중국을 G2의 일원으로 우뚝 서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 모택동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은래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등소평>

등소평은 사마의에 비유할 만하다. 명민한데다가 말수가 적고, ,온갖 굴욕 속에서 칼을 갈며 때가 오길 기다렸다가 일거에 정적을 무너뜨리는 도광양회의 행보가 그렇다. 조조의 위나라가 조환때 사마염에게 넘어갔듯이 모택동이 죽기 직전에 세운 화국봉 역시 조환처럼 등소평 세력의 막강한 힘에 밀려 '황권'을 고스란히 넘겨주어야만 했다. 등소평이 모택동이 이루지 못했던 치천하를 성공한 비결은 모택동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데 있다.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를 부정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모택동과는 달리 등소평은 자국의 역사문화 맥락을 충실히 좇은 것이 요체이다. '신중화제국'이 21세기에 들어와 'G2'의 일원이 된 것은 전적으로 등소평의 공이다. 등소평이 정의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중도 내지 중용을 역설한 공자사상의 진수를 보여준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우고 있는 중국은 일부 측면에서 한국 등 여타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는 공자가 역설한 인레人禮와 선신, 온고지신, 자강불식등의 전통적인 덕목을 얼마나 잘 실행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부강'의 달성이 달려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택동이 득천하를 하였음에도 치천하에 실패하였지만 후대의 권력승계를 등소평에게 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 모택동의 득천하와 주은래의 치천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이란 인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21세기 전반에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타계할 방법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것 또한 서양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자 결국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동양의 유기체적 자연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재'신 중화제국'은 등소평의 뒤를 이은 강택민과 호금도의 치세에 들어와 '부강'의 속도와 질이 훨씬 고도화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고대사에서 근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역사를 자국에 편입시키는 공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말해 소수민족 통일국가론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주장해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에 당면한 문제는 등소평이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득천하와 치천하를 이루었던 것처럼 한국 전래의 역사문화에 기초한 정치이념의 성립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이 책 <중국 현대사 >는  급변하고 있는 국제상황속에서 통일시대의 개막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 전래의 문화 전통에 기초한 통치이념 및 제도의 수립이다. 정치뿐만아니라 사회 , 경제 등  다각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중국현대사>였던 것 같다.

 

"모든 개혁 가운데 정치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조국은 정치개혁에 성공해야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오타 324p 9번째줄 자나쳤다. ☞ 지나쳤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12.01.07. 신고 공감 11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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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현대사에, 우리의 현대사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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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가 1995년 이었다. 광동성 일대에서 시작된 경제특구가 연안지방으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리 눈에 들어나지는 않았다는 기억이다. 그러다 2001년 다시 그곳에 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던 서구 학자들의 의견을 조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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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가 1995년 이었다. 광동성 일대에서 시작된 경제특구가 연안지방으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리 눈에 들어나지는 않았다는 기억이다. 그러다 2001년 다시 그곳에 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던 서구 학자들의 의견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레드캐피탈리즘을 성공적으로 이식하고 있었다. 물론 양극화와 같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해법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은 현대에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서구열강에 100년 가까이 수모를 당하고, 공산체제에서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30년 가까운 세월 만에 세계 G2의 일원이 되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작동되는 중국, 그들의 사회는 투표행위로 표출되는 인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 위정자의 무한책임에 기초하여 인민에게 책임지는 정부 형태이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는 물론,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정통 공산주의와도 일정부분 차이가 있는 정부형태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해서 그런 체제를 만들어냈고, 또 어떻게 해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었을까? 동아시아에서 그들과 맞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경제적으로는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공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있고, 그들이나 우리의 체제 혹은 환경 변화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의 중국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들을 이끌어온 면면을 살펴, 동아시아시대 어떤 해법을 찾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현대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3국의 학계에서 근대의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중국은 영국과 처음 맞붙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을,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함대가 개항을 요구했던 1853년을, 그리고 한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어진 1876년 강화도조약을 그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이 패전과 해방을 이룬 시기를 시점으로 삼지만 학자마다 이론이 많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저자는 청조가 막을 내리고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취임한 1912년이 역사적으로 가장 부합된다고 말한다. 신해혁명으로 진시황이래 2천년간 지속된 왕정을 끝내고 서구식 공화정을 시작한 중국, 그러나 그 후 약 40년간 혼란에 빠진다. 저자는 이를 중국역사에서 왕조교체기에 나타나는 하나의 패턴으로 이해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위 나라에서 활약한 중장통이 처음 제기한 왕조교체기의 패턴은 이렇다. 군웅 할거의 상황에서 최후의 승자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 초기에는 강력한 위민정치로 국고가 충실해지고 인구가 늘어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치풍조가 만연해지고, 부패가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조세부담이 극한 상황에 처한다. 마침내 백성들이 도적떼로 변하고 봉기의 깃발이 오르면 또 다시 군웅이 할거한다. 저자는 이 패턴에 중국 현대사를 대입하여, 청조멸망 이후 군벌의 시대를 군웅 할거의 혼란시대로, 그리고 1949년 모택동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새로운 왕조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군벌시대를 거쳐 현재의 중국에 이르기 까지 중국 역사를 움직여 온 원세개,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그리고 등소평의 행적을 쫓아 중국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군벌이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그 권한을 행사한 고급 군인을 말한다. 원세개의 북양군벌, 장개석의 남경군벌, 장학량의 봉천군벌이 바로 그들이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원세개가 지병으로 죽은 후, 중국에서는 각 군벌간에 주도권 다툼이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북양군벌이 장악한 중화민국만이 존재하였다. 이는 군웅 할거를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북경을 장악한 군벌이 곧 중국의 공식적인 정부에 해당 함을 의미 하였다. 이들 군벌은 이권을 위해 외세와 연계하기도 하고, 또 정부에 맞섬으로써 중국을 반식민지 상태로 몰아갔다. 저자는 손문과 장개석 또한 그러한 군벌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장개석이 북벌을 완료한 이후 남경정부 시대를 열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도 대소 군벌의 연합 위에 있었기 때문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군벌시대에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장개석은 군벌시대 모택동을 제압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대소 군벌간 파벌싸움은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을 이길 수가 없었다.

 

모택동 또한 군벌시대의 한 축으로 출발하였다. 그의 무력은 가장 취약한 농민군이 주였지만, 시류에 부합하는 3대 규율과 8항 주의를 활용하여 농민이 대부분인 인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득천하와 치천하의 행보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고 한다. 중국 역사서에 정통하고 시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를 두고 대장정시기 한 소련 유학파는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손자병법만 안다고 했듯이, 그는 득천하를 하는데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침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1949 10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을 때, 중화인민공화국은 겉만 빨간색 일뿐, 속은 역대 왕조와 마찬가지로 황권을 상징하는 노란색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지만 치천하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빼어난 문학적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정치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그것은 결국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역대 최고의 승상으로 제갈량과 주은래를 꼽는다고 한다. 성단위로 유망한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는 근검공학 계획에 의거 프랑스로 유학을 했던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 성립시기 모택동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대장정시기 모택동의 참모로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그의 참모로써의 역할만 하게 된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자 초대 총리가 된 그는, 3세계 외교를 주도하였다. 이후, 모택동의 신뢰와 견제 속에 명암이 엇갈렸지만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일선에 나서고,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혁명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주력하는 등, 실질적인 황제인 모택동의 참모로써, 승상으로써 역할을 다했다. 그는 또한 1972년 미국과의 수교를 일구어 냈으며, 등소평이 후계자가 되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근검공학의 일원으로 프랑스 유학 중, 주은래의 영향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등소평은 대장정에 참여하면서 모택동의 신임을 얻게 된다. 모택동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인 그는 승승장구하여 서남부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중, 1952년 북경으로 돌아와 국무원 부총리가 된다. 이후 유소기, 임표, 4인방등과 후계자 경쟁에 들어가나,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모택동과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문화대혁명시기 모든 직위가 해제되었으나 당적만은 유지토록 한 모택동의 선택에 의해, 결국 중화제국의 실질적인 2대 황제 위에 오른다. 그는 천안문사태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개방정책을 추구하여 오늘의 중국이 있게 만들었다.

 

저자는 중국현대사에 나타난 이들을 역사 속 인물들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저자의 동양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황제가 되려는 꿈을 너무나 일찍 표출하여 인민의 지탄을 받은 원세개를 후한 황실을 찬탈한 동탁에 비유하고, 장개석을 우유부단하여 천하를 잃은 원소로, 모택동은 조조로, 주은래는 제갈량으로 그리고 등소평은 사마의로 비교한다. 그렇기에 등소평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저자는 이를 조씨의 위나라가 아닌 사마씨의 진나라로 보고 있다. 모택동이 득천하를 했지만, 진정한 오늘의 중국이 있게 만든 것은 등소평이란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흔히 중국 현대사에서 모택동을 이야기하면 주은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주은래를 말하면 등소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들 3인이 엮어낸 중국이 바로 오늘의 중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아직까지 분단국인 우리가 통일을 이루는데도 그들의 입김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한반도가 중국을 위협한 적이 세번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는 조선조 중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로, 그때 명은 조선이 일본과 혹은 청과 함께 처 들어 올까 전전긍긍 했다고 한다. 두번째와 세번째는 청일전쟁과 한국전쟁때로 한반도에 중국에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중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우쳤다고 한다. 경제적인 이유, 역사적인 이유 모든 것을 떠나서 우리가 중국에 대해 알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현대사를 보면서 우리가 현대사가 가슴 아픈 이유이기도 하다.



k*****1 2012.01.10. 신고 공감 8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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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국 어떻게 형성되었나. 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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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국 어떻게 형성되었나. 중국의 현대. 이제는 G2인 중국, 이런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 특히 현대 중국에 이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지금의 중국은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생각하던 그런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아니고, 세계의 대국이며, 세계의 공장이며 이제는 세계자원의 블랙홀이 되어간다. 개방과 개혁과 더불어 나아진 살림살이로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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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국 어떻게 형성되었나. 중국의 현대.

이제는 G2인 중국, 이런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 특히 현대 중국에 이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지금의 중국은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생각하던 그런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아니고, 세계의 대국이며, 세계의 공장이며 이제는 세계자원의 블랙홀이 되어간다. 개방과 개혁과 더불어 나아진 살림살이로 풍요를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그들은 공산당의 일당독재 하에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서구 공산권의 몰락으로 공산주의가 퇴조의 분위기이나, 아직도 중국, 쿠바, 북한은 건재하다. 이런 중국식 공산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중국이란 새로운 실험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산당의 중심인물 등을 통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과거나 현재나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기에, 그들을 관심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현대를 대표하는 선거민주주의, 책임민주주의 그러나 국가는 다 국익을 중요시 한다. 그럼 중국은, 흔히 과거 생각하는 그런 공산주의가 아닌 중국식 공산주의, 경제의 자본주의 체제와 아직도 공산당 일당체제가 지속되고, 군부가 힘을 발휘하는 조금은 후진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경제는 엄청 성장했고, 변했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에서 보여준 변하지 않는 정치형태와 실상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중공과 중화민국(대만)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중국으로 변했다. 이제는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블랙홀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을 일본이나 미국에 의자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등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남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그릇된 풍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깊이가 부족한데 기인한 문제이다. 그만큼 연구가 부족하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의 시각을 가지고 현대 중국에 대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중국의 현대는 1912, 청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간 때가 시작일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흔히 말하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다민족의 역사로 주변의 많은 민족들과의 함께한 과정이다. 중국의 특히 역사공정, 한반도와 주변국 등의 문제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와 중국 그리고 일본은 동북아의 평화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현대는 군벌시대로 막을 연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 원세개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문이 군벌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12년 원세개의 총통취임에서 1929년 장개석의 북벌 완수까지의 시기로 보면 될 것 같다. 군벌시대를 마무리하는 장개석의 북벌은 반제와 반군벌을 외쳤으나,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역시 군소군벌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장개석은 손문의 명성을 등에 업음으로써 그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손문도 반란정권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그는 서남군벌의 발호의 책임이 있다. 이 군벌들은 대부분 군비조달을 수탈, 세금, 아편재배(기근심화), 화폐남발, 공채와 차관으로 충당하였고, 군벌의 병사가 토비의 중요원천이 되고, 토비의 증가가 토비 토벌군의 수를 늘리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또한 난세에 군벌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물론 군벌의 피해자는 농민으로, 후에 모택동이 홍군의 민간약탈행위 봉쇄하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통일의 목전에서 주저 않은 장개석.

흔히 그를 지칭하는 장개석은 호로 그의 본명은 중정이다. 주역을 끼고 산 장개석과 자치통감을 끼고 산 모택동, 묘한 대조를 보인다. 생각은 많이 하되 일단 경정하면 밀어붙이는 스타일 이었다. 군벌시대를 마무리하고, 중국은 형식적으로 남경정부의 깃발 아래 통일이 되었고, 그는 자신을 새로운 국가이익과 완전히 동일시 하고 있었다. 국내를 평정하는 일이 먼저이고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은 다음 일이다. 국공합작과 일본 패망, 항일 전쟁의 승리도 우리의 혁명을 성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장개석의 현실과 동떨어진 도덕적 우월감이 패배를 불러 왔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인플레가 주요 원인이었다.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장개석 어떻게 재평가될지 궁금하다.

 

중국 그 자체였던 모택동.

그는 황제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문학적 상상력이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정치에 그대로 적용돼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중화제국 건설이라는 꿈, 천시를 만난 사람이었다. 양계초의 개혁사상과 손문의 민족혁명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러시아혁명이 청년 모택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로 농민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물론 팽배가 중국에서 농민운동을 최초로 고양시킨 인물이었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추수봉기, 무력에 의한 공산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준회의는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일대전환점이었고, 대장정은 인간 생존의 대승리로 그에게 중국을 안겨주었다. 스스로 움직여 입는 것과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라와 위민복무,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싸우다 죽는 것이 삶의 보람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겉만 빨간색일 뿐 속은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황권을 상징하는 노란색이었다. 개인 숭배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주덕, 등소평, 왕가상 모두 문화대혁명과정에 곤욕을 치렀고, 팽덕회 등 반대노선과 유소기 및 등소평의 수정주의 노선으로 볼아 부쳤다. 모택동은 강청 등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뒤에서 조종하는 한편 주은래를 통해 문화대혁명 이후를 구상하고 있었다. 중국특유의 역사문화가 존재하는 까닭에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창업의 어려움만 알았을 뿐 수성의 어려움을 간과했다. 그는 공자를 아주 안 좋게 평가하였으나, 그는 진시황, 수양제와 맞먹는 폭정을 일삼았다.

 

중국의 유지에 목숨을 건. 주은래

5세동당에서 소황제로, 중국최고의 승상은 제갈량과 주은래를 꼽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이유가 중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밝힐 만큼 중국을 위해 살았다. 장신부(진독수와 대교와 함께 중국공산당을 창건 한 인물)와 만남이 현재의 그를 있게 한 것 아닌지. 그가 부인에게 말한 8개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돕고, 격려하고, 의논하고, 염려하고, 신뢰하고, 이해하는 것가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남창봉기로 자체 인민혁명군을 구축 시작 조직의 귀재로 불리며 공산당조직을 구축하였으나, 인테리로서 국내파(토착파)와의 대립 등 실패도 많이 겪는다. 특히 토지개혁문제로 모택동과 대립하였다. 대장정에 이런 원인은 주 등 앨리트 유학파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대장정으로 지도부와 홍군은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침으로써 오늘날 중국을 있게 만들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과 함께 인민 민생,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한반도 전쟁, 3세계외교, 평화 5원칙 비동맹국의 외교정책, , 중 핑퐁외교 소련 견제, 유엔 대만 추출과 중국 가입 승인 등 많은 일을 이루었다. 중화제국 초대 황제와 최고의 정승, 실용적 테크노크리트 세력과 이상국가의 조속한 실현을 꿈꾸는 정치이념주의자였다. 공산당 초기에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던 모택동에게 죽을 때까지 복종한 유약한 모습도 있었다. 죽음 후 민중의 애도, 당시 중국인들은 주은래의 죽음을 모택동의 죽음보다 더 슬퍼했다. 왜 중국인들을 그를 사랑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고 온화하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등소평.

오뚜기라 불리는 등소평, 그도 분명히 프로레타리아는 아니다. 근공검학을 통한 프랑스 유학과 주은래와의 만남과 프랑스의 인종차별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의 흑묘백묘론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전래 역사문화 전통에 뿌리를 둔, 경제우위, 중상주의 그리고 현실주의를 추구한다. 등소평의 모택동의 평가는 10분의 3은 부정적, 10분의 7은 긍정적이다.에 잘 나타난다. 모택동과 달리 전고를 인용하지도 않았고, 어려운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범한 서민적인 삶(?)을 즐겼고, 가정을 중시했다. 그러나 분명 천안문 사태는 그의 책임이지 일 것 같다.?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 구도의 변화, 조자양과 이붕, 강택민과 호금도 그리고 습근평과 이극강으로 이어진 현대중국, 더 개혁하고 더 개방하라를 외치는 등소평의 이론과 행동, 당과 국가의 통치를 규범화를 통한 법치로 만든 것 그리고 등소평이 남긴 걸작 중 하나는 총서기(주석)임기제로 제한한 것일 것이다. 또한 당내분규는 가장 큰 경계 대상으로 차단하였다. 제왕통치에서 군현공치를 실현하였다. 하지만, 태자당과 공청당이라는 권력을 쥐게 만들었고, 부는 일부가 독점하여 분배의 문제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민주와 자본주의 민주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신중화질서, 신중화제국을 완성해 나갔다.

 

이 책을 읽고. 미래의 중국은 중국적인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공자 재평가를 통한 유교중상주의로 나아갈 공산이 크다. 흔히 조조와 모택동, 사마의와 등소평을 연관시킨다. 이 둘이 현대중국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일 것 이다. 모택동은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도 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 붙였지만, 등소평은 차근차근 개혁을 실천하였다. 전체적으로 개인별로 나열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통합하여 하나로 엮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대부분 동시대의 인물들이니. 그리고 이 책은 너무 방대한 량을 묶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 평전이나 전기에 언급된 내용이 주류를 이루기에 평전들의 종합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국의 중심이 되는 왕조 순환설, 일단 이념이 과거 왕조시대와는 달리 공산주의라는 배경을 만든 점이 차이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모택동의 실정으로 등소평의 정책이 더 잘 먹혀 든 것 아닐지. 중국의 역사상으로 보면, 새로운 왕조의 성립 이후 치세의 시대로 돌입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1대 황제 때는 거의 개국공신들이 숙청되고,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나, 모택동에게는 물려줄 자식도 후계자도 없었다. 아직도 수많은 민족과 체계, 종교를 중국이라는 큰 울타리에 얽어 매고 있기에 언제 다시 분열될지도. 저자는 후계자 선정 에 대해 모택동이 관점 중립이었다고 하나, 견제와 모택동의 은연중 등소평의 지원, 그러나 말년에 모택동이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를 둘러싼 세력들의 살아남기 위한 권력투쟁의 장에서 엽검영을 주축으로 한 등소평의 세력이 승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군대를 쥐고 먼저 행동한 자들이 승리한 것 같다. 현대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엄청난 발전을 하였으나, 발전 후 뒤따른 분배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과거의 중국의 예처럼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도 많이 있다.

 



p*******t 2012.01.31. 신고 공감 6 댓글 18
리뷰 총점 종이책
좀 더 생각해보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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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만큼 급격하게 움직였던 역사도 없었다. 전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서는 전세계를 멍들게 했으니 말이다. 그 험난한 경험이 오죽했으면 새천년을 맞아 전세계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한다고 했겠는가 싶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배울 것이 많다. 분명 우리를 아프게 했던 역사임에는 틀림없지만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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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만큼 급격하게 움직였던 역사도 없었다. 전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서는 전세계를 멍들게 했으니 말이다. 그 험난한 경험이 오죽했으면 새천년을 맞아 전세계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한다고 했겠는가 싶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배울 것이 많다. 분명 우리를 아프게 했던 역사임에는 틀림없지만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위해서라도 꼭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가까운 중국의 현대사에 큰 관심을 기우일 때다. 아마도 지금이 딱 적기일 테다. 독재국가가 3대 세습에 성공한 역사가 없는 것을 비추어 볼 때 현 북한의 정세를 시시각각 하나도 빠짐없이 관심을 두어야 할 요즘이니 더욱 그렇고, 아직도 세계 최강대국임에 틀림없는 미국과 쌍벽을 이룰 만큼 중국의 위상이 커진 요즘이니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대사에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인지 우리 나라의 현대사조차도 학생들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는 실정이다. 논란이 많았지만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점점 부각되었고, 이제 역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배워야할 과목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네 역사교육의 현주소는 아직도 '과거지향형'이다. <고대-중세-근대>로 세분하여 가르치는 역사지만, 유독 <현대사> 부분만은 대충, 그리고 설렁 배우고 만다. 얼마전에는 그렇게 대충이고 설렁 배우는 <현대사>마저 자학사관이니 좌편향하다더니 라고 따지고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고, 한편으론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난리를 치더니 결국 고쳐버리고 말았다. 뭐, 좋다. 잘못된 것은 다시 고치면 그뿐이니까. 현대사를 가르치기만 하면 분명 올바르고 바람직한 쪽으로 바뀔 것이니 한 번 제대로 가르쳐 보면 좋을 테다. 참말로 말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 <중국 현대사>에 관한 책이다. 청 왕조가 몰락하고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일어난 '군벌'로 시작하여 천하를 손에 쥘 뻔한 '장개석', 결국 천하를 손에 쥔 '모택동', 중국 최고의 지략가 '주은래', 그리고 가난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기초를 다진 '등소평'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아주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이다.

 

  물론 신동준 교수의 주관적인 견해가 가미되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이를 테면, 중국의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시점을 '1919년 5·4운동'으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신동준 교수는 신해혁명 뒤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초대 총통'을 지낸 1912년을 중국 현대사의 시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평했다. 청 왕조(근대)가 몰락한 시점이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란다. 이 정도는 토론거리로도 적당하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하여서 큰 혼란을 끼치거나 논란의 핵심이 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렇다 할 줏대도 없이 다른 이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따르는 앵무새 같은 교수들보다 훨씬 나을 테다.

 

  이 책을 통해 중국을 새롭게 조명하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테다. 한편 이 책을 읽으니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에만 목을 매고 있을 것인지 걱정스럽고, 한편으론 답답하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 가운데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무래도 중국과 일본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야 강대국으로 치기에는 한참 모자른 면이 많고, 누가 뭐래도 같은 핏줄이니 따로 구분지어 논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나머지 나라인 미국과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우리 정서와 사뭇 다른 나라들이고, 지정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멀게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와 가장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 있으니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나라를 목숨 걸고 지켜줄 리도 만무한데, 자꾸 그 나라만을 목놓아 부르짓는 모양새가 그닥 보기 좋을 리도 없다. 그럴 바에야 동등한 처지와 상호존중하는 관점에서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할 터인데,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가는 비굴한 외교가 웬말이냔 말이다. 해방 뒤에,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 또 전쟁 뒤에도 우리 나라에 막대한 원조를 하여 도와준 고마운 나라임은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국이 자국이익과는 별개로 순수한 호의로 도와주지 않았음이 만천하에 공개된 마당에 우리만 결초보은한다고 해서 서양인의 정서상 그다지 감복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베푼 호의를 뻔뻔스레 자국이익을 앞세우는 일본의 행태에 분개하는 것도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양을 따라한 일본의 오랑캐스러움 때문이지 않느냔 말이다.

 

  한류 열풍이 가장 먼저 분 곳이 중국 쪽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중국은 정서상 우리와 비슷한 점이 참 많은 나라이다. 그 까닭인즉 미우나 고우나 반만 년을 붙어지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근래에 펼쳐진 한중간의 모습은 암울하기만 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근대를 맞이한 한국과 중국이 처음부터 티격태격한 것만은 아니었다. 청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조선과 청은 전통적인 외교관례를 따르며 침탈해오는 서구열강들에 함께 맞서 싸웠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제병탄하고서 만주에까지 세력을 뻗쳤을 때에도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일본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다.

 

  그랬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단연 '한국전쟁' 뒤 였다. 장개석과 한판 승부에서 판정승을 거둔 모택동은 같은 공산국가를 도와준다는 명분과 가까운 곳에 강적(미국)을 온전히 두지 않는다는 실리를 챙긴 중공은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남한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나라가 될 뻔했는데, 다행히(?) 대만과 멀리하면서까지 1992년에 중공과 수교를 맺은 우리 나라는 중국과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포석을 깔아두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인 요즘이다. 하아~나오느니 한숨뿐인데 더 할 말이 없다. 좀 더 생각해보련다. 중국...



YES마니아 : 로얄 z******8 2012.01.08. 신고 공감 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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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만든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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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이야기 2015-174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신동준 / 인간사랑     중국의 전승절   중국은 올해(2015년)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으로 대대적인 홍보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을 견제하고 세계에 G2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속이 보인다. 전승일인 2015년 9월 3일에 열릴 열병식을 준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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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174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신동준 / 인간사랑

 

 

중국의 전승절

 

중국은 올해(2015)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으로 대대적인 홍보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을 견제하고 세계에 G2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속이 보인다. 전승일인 201593일에 열릴 열병식을 준비하기 위해 장병 1만여 명과 무기장비 500여대, 군용기 200대가 참여한다. 각 부대의 거리와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인공위성까지 동원됐다. 중국은 이를 위해 전례 없이 외국 정상들을 대거 초청했다. 49개국에서 열병식 참석을 확정지었고, 30여 개국의 정상급 지도자와 정부대표 19, 국제기구 수장 10명이 참석예정이라고 한다.

 

 

 

중국의 위상 - 중국식 민주주의

 

중국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 서구 열강에 100년 가까이 수모를 겪고 이후 공산체제하에서 후진적인 빈곤경제에 허덕이던 나라가 어떻게 30년 만에 ‘G2'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서방이 한사코 동양적 전제정부로 깎아내린 체제가 어떻게 서구식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이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중국식 민주주의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는 동서의 민주주의 모델을 각각 수평적 민주주의수직적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수직적 민주주의는 정부의 하향식 지도와 인민의 상향식 참여가 상호작용하는 중국 특유의 정치체제를 말한다. 정부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속에서 인민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국가 및 사회에 기여한다는 게 기본 골격이다.

 

 

서구와 중국 간에 민주에 대한 개념 또는 인식의 차이는 없을까? 없을 리가 없다. 서구는 자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를 막론하고 개인의 자유 및 권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권익을 중시한다. 그러나 중국은 개인보다 국가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중국인에게 국익우선의 불문율은 진시황이 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후 2천여 년 넘게 면면히 이어져온 기본 상식이다.

 

 

 

현대의 시점

 

이 책의 제목인 중국 현대사에서 현대는 언제부터인가? 이 시기를 두고 중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하긴 한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긴 하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해가 다른 방향에서 뜨는 것도 아니고. 중국의 대다수 학자는 현대의 시점을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으로 잡고 있다. 이에 반해 대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학자는 청조 붕괴의 결정적 배경이 된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그 시기를 소급시키고 있다.

 

 

 

중국 현대사속의 존재감들

 

고전연구가이자 평론가인 신동준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섯 존재감을 소개한다. 중화제국 건설에 도전한 무장단 군벌’, 중화제국 건설에 실패한 풍운아 장개석’, 중화제국 건설에 성공한 혁명아 모택동’, 중화제국의 동요를 막은 명재상 주은래’, 중화제국의 변신을 꾀한 부도옹 등소평등이다.

 

 

중국에서 군벌(軍閥)은 일본의 군벌주의 등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중국식 군벌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의 일부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들의 병력을 뜻한다.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의 재평가

 

저자가 소개하는 이 4인의 성장과정 및 정치적 활동에 대해선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든, 현 중국인 또는 외부에서 느끼는 정서든 간에 이 4인에 대한 재평가를 정리해본다.

 

 

장개석(蔣介石)은 군사적 재능 면에서 확실히 모택동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성공적인 북벌로 대소군벌을 일단 남경정부휘하로 끌어들이고 군벌할거에 따른 혼란을 대폭 줄였다는 점만은 나름 평가할 만하다.” 실제로 이 일을 계기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경제 분야에선 법화정책, 문화교육 사업 분야에서 가장 큰 기여는 민중들을 각성시켜 일제와 맞서게 한 데 있다. 과거 서구 열강이 청조와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대부분 폐지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오랫동안 모택동이 미화된 것과 정반대로 장개석은 과도하게 폄하된 면이 있다.

 

 

모택동(毛澤東)은 역대 왕조의 황제보다 더욱 폭압적인 방법으로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을 지휘했다. 중국사를 개관할 때 이처럼 무지막지한 광풍이 분 것은 진시황과 수양제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모택동의 전 생애를 종합해 볼 때 그의 업적과 리더십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 분석할 수는 없다. ‘득천하과정에서 땅을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 중에 희생된 수백만 병사의 목숨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치천하과정에서 그가 거둔 실제적인 경제성과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대기근과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끔찍한 혼란과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평가한다면 말년의 커다란 과오에도 불구하고 공이 과를 덮는다는 등소평의 평가가 대략 옳을 듯싶다.”

 

 

 

주은래(周恩來)는 강소성 희안출신이다. 남창봉기를 지휘하고 혁명군사위 부주석으로 장정에 참여했다. 인민공화국 건립 후 27년 동안 총리를 역임하면서 안팎의 여러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다.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에 비유하는 이유다. 주은래가 죽은 날 유엔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반기(半旗)를 내걸었다. 이는 그가 생전에 그 유명한 소위 육무(六無)와 무관하지 않다. 첫째, 죽으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둘째, 살아서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 셋째, 관직에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다. 넷째, 당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이 없었다. 다섯째, 고생스러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여섯째,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등소평(鄧小平)은 외국인투자 허용 등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여 중국이 G2의 일원으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중화제국2의 창업주에 해당한다. “다소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모택동이 등소평을 위해 부작위에 의한 권력승계를 허용함으로써 그의 사후 등소평이 신 중화제국의 제2대 황제 자리에 오르도록 배려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에 대해 매우 정리가 잘 되어있다. 책 말미엔 등소평의 후예들중국 현대사 연표가 담겨있다.

 

 

 

 

 

s******5 2015.08.27.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