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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인 그러나 완전한 영혼의 무구성이 주는 힘
"식물적인 그러나 완전한 영혼의 무구성이 주는 힘" 내용보기
운동권에 몸담은 나는 1987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낙심하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한 후 폭음을 일삼는다. 어느 날 같은 운동권 선배 지성수가 찾아와 책 한 권을 주며 번역이라도 하면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대선의 패배로 인한 메마른 풍경도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할 시간들 뿐이라는 말을 덧붙이며.한참을 더 폭음하다 찾아간 출판사에서 나는 장인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식물적인 그러나 완전한 영혼의 무구성이 주는 힘" 내용보기
운동권에 몸담은 나는 1987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낙심하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한 후 폭음을 일삼는다. 어느 날 같은 운동권 선배 지성수가 찾아와 책 한 권을 주며 번역이라도 하면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대선의 패배로 인한 메마른 풍경도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할 시간들 뿐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한참을 더 폭음하다 찾아간 출판사에서 나는 장인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장인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며, 지성수가 출판사 사장과의 친분으로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여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대신 발휘되는 그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와 나는 주로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일상의 말들을 글로 치환하는 것이 상당히 낯설고 머뭇거려지는 나와 반대로 그는 나의 모든 문장을 민감하고 진지하게 읽어주었다. 장인하라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그는 무구하고 투명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와 점점 더 친해지며 나는 그의 귀가 안들리게 된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던 5월 18일. 작업장에서 작업을 하다 잠시 밖으로 나왔을 때 총을 든 군인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친 남자들을 마주쳤다. 군인은 금방이라도 그들을 죽일 기세였으며 그 때 장인하는 순수하게 본능적으로 그 총을 손으로 막았다. 그날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친 남자들 중 한명이 바로 지성수였다.

그 후로 5월이 되면 이상하고 괴로운 소리가 들린다는 장인하. 나는 비로소 장인하와 지성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고 장인하와의 대화를 통해 그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91년 5월의 어느날, 지성수로부터 자정에 걸려온 전화는 장인하의 죽음을 알려준다. 장인하는 지성수에게 그리고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기에 몇번이고 도돌이표를 돌려가며 한 글자 한 단어를 머리에 새겨가며 읽었다. 솔직히 다 이해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그 중 표제작인 <완전한 영혼>의 줄거리를 짧게나마 추려봤다.

5월 광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부분을 빼고 읽어도 사유하기에 너무나 좋다. 이념적인 말들도 있고 줄줄이 읽히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문장과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이게 뭘 뜻하는 것인지 전부는 아니어도 내 마음에 그것이 들어온다. 읽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얻는 것들이다.

장인하의 무구성을 드러내주는 여러가지 부분들이 있지만 황소의 뿔을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장인하 안에 있었다. 총구를 막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장인하의 무구... 무구란 때가 묻지 않고 깨끗한 것을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에서 쓰는 도구를 이르는 말도 있다. 장인하의 무구(無垢)는 무구(武具)였다. 그는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으나 완전한 영혼으로 남아 인간의 특권인 사유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YES마니아 : 골드 c*********3 2023.06.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