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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이다. -p208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 한 달 전 질문지를 남겼다.이 회장의 질문은 모두 24개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종교가 없어도, 종교가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그렇게 가슴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물음들이었다.
인류 최초로 대기권 밖을 여행한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한눈에 보이는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 하늘에 신은 없었다." 반면에 아폴로 12호를 탑승했던 미국의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저 멀리 지구가 오도카니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God is no where!(신은 어디에도 없다) " → "God is now here!(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 단어 하나로 정반대의 문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잊혀진 질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생의 참된 가르침을 주는 책이라고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고 있거나 놓치고 있던 , 틈틈히 의문으로 남았던 질문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무엇보다 감명깊었던 장은 신은 존재하는가? 에 대한 장이었는데 우리 교회에 백세가 가까우신 노자매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비록 이빨이 다 빠져서 말씀도 어눌하시고 잘 보이지 않아 성경책을 보기도 힘드시지만 그분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노자매님의 셋째딸은 하반신 소아마비이다. 소아마비 딸을 교육시키기 위해 두시간을 업고 학교에 데려다 주시기를 수십년, 결국 딸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였다. 노자매님의 지극정성으로 네명의 자식들 모두가 장성하여 교육업에 종사하시고 자식중에는 이제는 퇴직하신 교장선생님도 계신다. 그분이 이제는 죽음과 가까운 나이가 되셨음에도 거동도 불편하고 머리도 다 빠지시고 예전의 총기도 없으시지만 정말 단 하루도 교회를 빠지신 적이 없다. 내가 하도 교회를 나오지 않자 노자매님은 늘 걱정이셨다고 한다. 왜 자신이 기도하는데도 내가 나오지 않는거냐고 나중에 화를 내셨다는 말씀을 듣고 웃다 못해 눈물을 흘린적이 있다. 그런 것 같았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느끼는 것은 딱 한글자 차이다. 나는 늘 그 자매님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감동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고통스러워야 하며, 왜?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말이다. 친구와 나는 같이 임신하고 같은 달에 출산하였다. 그러나 친구의 아이는 뇌성마비와 하반신 소아마비가 된 아이가 태어났다. 이 후 몇년을 연락이 되지 않다가 최근에 연락이 되자 친구가 내게 말하기를 아이로 인해 세상의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차동엽 신부님 또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지게로 연탄배달을 하였고 집안 형편으로 공고에 진학해야했으며 20대말에는 B현 간염보균자, B형간염, 간경화로 고통을 받았던 고백을 한다. 그러나 고통의 작동메커니즘은 보호의 기능과 단련의 기능으로서 나타나기도 하며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이 생겨난 것처럼......
그래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 그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결국 모든 걸 소멸시키리라.
차동엽신부는 종교인이지만 밀리언셀러 저자이며, 연 600회 강연을 소화하며 대중과 소통해온 우리 시대 멘토 중 하나이다.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은 문학과 과학, 종교, 사회를 넘나들며 폭 넓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생에서 거부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통하여 다다른 마지막 장에는 사랑 하나만 있으면 삶의 애환 따윈 쉽게 견뎌 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사랑이 답이다. 사랑에게서 나와서 , 사랑으로 살다가, 끝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때는 마음으로 볼 때 라고 했듯이 이 책 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나도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하며 사는 것이 가끔 손해보는 느낌이 들지라도 ,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를 견뎌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사랑이 답이다. 신이 있는 것을 믿는 안믿든 그것은 오로지 한끝차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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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은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지난주에 어머니의 기일이 있었고 그 전주에 산소를 다녀왔는데 그때 이 책을 가져갔습니다. 사실 가져갔는지도 모르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짐을 싸며 책을 넣어둔 이유는 아마 이 책을 그 전부터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이 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을까요.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날 밤 습관처럼 책을 집어 들었고 몇 개의 답은 가슴에 그래도 알 수 없는 것들은 무덤에 묻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한 바퀴 휙, 돌아와 있었습니다.
올 초에 아는 분이 제게 이 책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쩐 일인지 이 책이 썩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고 책에서 제시하는 질문들에 하나도 가슴이 뛰질 않았습니다. 책을 건네준 분은 평소 성당에 같이 가자고 늘 틈만 나면 이야기 하는 분이었고 저만큼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일 년에 한 두 권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서를 하는 분이라 믿었습니다. 신앙인이면서 신부님의 책을 권하고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필 이 책을 읽어보라 하는 것이 결국 성당에 가자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즈음 서점에 가보니 마침 이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보란 듯이 진열되어 있었던 점도 더욱 반감이 들었습니다. 보편적 대중성,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책에 대한 일종의 불신과 폄하, 더군다나 종교적 색채가 가득한 사유의 향연, 오만과 편견인줄 알면서도 나는 설득당하지 않겠다하는 비뚤은 마음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받아 들고 와서 질문의 리스트만 보았을 때 저는 지금까지 그 어떤 종교도 불신해온 한 사람이 명망 높은 한 종교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제부터라도 종교를 가져볼까 하는 복잡한 심경을 엿보았습니다. 질문은 한눈에 보아도 종교를 가진 사람이 던지는 내용이 아니었어요. 하나같이 너무 흔하고 닳아빠져서 마치 참고서에 정해진 답이 있을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안다고 하여 답을 말해보라 하면 저마다 답이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더욱 뒤돌아 나만의 정답이 절실해 지는 질문이긴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몇 가지 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고 누군가 인생을 상담한다고 물어왔을 때 어줍잖은 몇 마디로 답해주던 장면도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구태여 이 책에서의 답과 내 질문을 교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누구에게든 곱고 예의 바른 말투로 친절하게 옳은 내용을 전해주실 테니까요. 내 마음 하나 열어젖히면 이 책은 그대로 희망이 될 것이니까요. 그렇게 선뜻 마음을 주기엔 심술이 났습니다. 삶이 이렇게 시험노트처럼 일목요연하게 요약되는 문제들이었다면 그동안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번민하던 시간들은 대체 무엇이었나. 갑자기 주마등처럼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나자 인생이 이처럼 몇 가지의 질문과 답으로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답을 찾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만큼 이상하게도 이 책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한 희망에 화가 났습니다. 예, 저는 선물 사달라고 떼쓰던 아이가 막상 청을 들어주었더니 고맙다고 인사하기 싫은 마음이었습니다. 누가 좀 떼쓰던 그동안의 시간을 알아주었으면 했던 것이죠.
그런데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기도 해 산소가기 며칠 전부터 스쳐지나갔던 질문들이 꼭 잠들기 전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오면서 외치던 질문들과 하나둘씩 겹쳐지는 것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돈에 권력과 명예를 한껏 누려온 한 대기업 회장이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질문이라 생각하니 그도 사람이었고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구나 싶어 새삼 부끄러운 위로가 되는 것이었어요. 찬찬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일반인들보다 더 죽기 싫지 않았을까 싶었죠. 그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으니 자신도 곧 죽을 텐데 종교를 믿으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종교인이 되면 천당에 갈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제게 있어 이 궁극의 질문은 누구도 내 마음에 드는 답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가슴속에 묻어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잊혀진 질문이라기 보다는 잊고 싶은 질문이라고 할까. 분명 비종교인이라면 신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은 없다고 할 것이고 종교인이라면 일단 자신처럼 믿어보라고 설득할 것이니까요. 그러니 故 이병철 회장의 경우 더더욱 죽기직전까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을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많은 걸 이루느라 질문의 기회나 계기, 필요성도 가질 일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필경사가 꾹꾹 눌러 대신 쓴 글이지만 두어본 훑어 본 질문의 위력은 예상외로 컸습니다. 다른 건 다 이루고 깨우치고 이해하고 준비했을테죠. 그런데 왜 신의 존재 의미와 종교의 목적이 마지막 질문이 된 것일까요. 짧은 생각이지만 시기상으로 보아 죽음을 준비하는 막바지 과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죽기는 정말 죽기보다 싫지만 누구보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그래서 자신보다 큰 신에게 의지하고 그 절대적 믿음으로 마지막 눈을 감고 싶었던 것. 저는 대기업 총수가 아닌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의 마지막 간절한 소원을 느꼈습니다.
산소로 떠나기 전에 신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 앞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우리. 신은 우리들의 그 자유의지를 허락했을 뿐이라고. 신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드는 것이라는 구절도 보았습니다. 수준이 낮고 높은 기도는 있어도 세상에 틀린 기도는 없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와 성공을 위해 하는 기도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말씀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불교학교에 다녔고 대학교를 기독교학교에 다녔습니다. 회사의 사장님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살면서 종교에 노출되는 시간들은 충분했고 기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차 위반하는 차에 떡하니 십자가가 걸려 있을 때 손가락질을 했고 평일 내내 허름하게 다니다가 일요일 하루 한껏 치장하고 교회를 다니는 아줌마들을 비웃었습니다. 신은 없다고 믿는 것보다는 있다고 믿는 것이 손해를 덜 보는 생각이라고 믿어 왔지만 종교를 학문으로만 여기고 일상으로 체화하지 않았기에 모든 원인과 결과를 신과 연결 짓는 태도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어느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말처럼 저도 다만 ‘내 삶은 글을 쓸 뿐’ 쓰는 게 나의 종교이며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라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십 년 전 아버지의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신에게 기도를 했었고 오 년 전 어머니의 뜻밖의 사고를 목격하곤 신을 원망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신이 있었기에 수술은 성공이었고 덕분에 아버지의 생명이 연장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의 사고를 겪고 나선 반대로 신이 있다면 나와 어머니에게 이럴 순 없다고 목 놓아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동안 내가 벌여온 일들, 내가 저질러온 잘못을 생각하면 신이 내게 벌을 내린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악한 사람이 오래 살고 착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도 어쩌면 착한 사람만이 운명을 감당하는 능력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단지 신은 그러한 특별한 능력만을 주었을 뿐이라고 자위도 해보았습니다. ‘꿈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신도 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슬며시 기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알고 보면 드러내지 않아왔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내 자신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신을 향해 감사도 하고 때론 넋두리도 또 어떨 땐 욕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심 의지를 해온 세월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이 어머니의 다섯 번째 기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형제들과 오늘처럼 바람 좋은 어느 봄날 꽃구경을 떠나셨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던 관광버스에 치여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몸은 10m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고 머리는 깨져버렸습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관광버스 기사보다 어머니와 달리 멀쩡히 살아남은 다른 이모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왜 같이 떠난 사람들 중에 하필 내 어머니가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른 이모님들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생각되어 저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그들을 살렸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이 그렇게 억울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오빠와 동생들에게 모든 걸 양보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분이셨습니다. 아무리 땅을 치고 가슴을 쳐봐도 분노와 원망에서 해방되지 못한 시간들을 보내었습니다. 신이 어머니에게 주신 자유의지가 결국 어머니를 죽게 하였다면 우리가 과연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똑바로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매년 이 맘 때면 곳곳에 봄기운이 만연한데 산소 근처 강물은 얼어 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산도 건물도 나무도 모두 얼음으로 느껴졌습니다. 묘지를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기 때문에 무슨 사막이나 남극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와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꾸밈없이 벌거벗은 내 자신과 독대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뒤늦게 찾아온 한파로 손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늘만 그래도 태양이 떠있음을 증명하듯 시리도록 파란 날이었습니다. 신기한건 그 하늘만 믿고 묘지 앞에서 돗자리 깔고 앉아 있다 보니 내 머리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참 따스하게 느껴지더군요. 연신 콧물을 훌쩍이며 앉아 있는데도 순간 봄소풍 온 것같이 그 공간만 안온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영하 십도의 날씨였지만 어느새 추위에 적응이 되면서 그 속에서도 반짝이던 온기를 발견하고 기뻐하던 나...... 이것이 혹 절망을 없애려 하지 말고 절망과 싸우려 하지도 말고 자꾸 희망을 붙잡다 보면 결국엔 절망을 몰아 낼 수 있다는 신부님의 이치와 같은 것이었을까요. 일어서면서 예상외로 한 시간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경주 보문호엔 운치 있게 자리 잡은 호반교의 다리가 흡사 거울에 비친 것 마냥 수면에 대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어림없다는 듯 얼음은 여전했습니다. 그날 저녁 얼마 남지 않은 책의 후반부를 읽어버렸습니다. 중간 중간 시인과 철학자, 문학작품을 인용해 이성과 감성에 두루 공감 가도록 해석하는 성찰의 모습도 자꾸 호감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신부님은 마치 나 들으라고 하는 말씀처럼 ‘용서는 그 놈에게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 힘주어 타이르시더군요. 왜 모르겠습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 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용서이고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내 마음만 지옥이라는 걸 용서하지 않아온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지옥을 견디며 그들을 더 괴롭게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내가 지옥인 건 얼마든지 참아도 그들이 편해지는 건 싫었습니다. 그들 중 한명의 이모님은 이제 팔순이 넘었습니다. 내일이라도 부음기사를 듣게 되면 달려가 통곡을 하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오랫동안 마음의 빗장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묘지 앞에서 늘 그 사실이 면목 없고 목에 걸려 어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번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마음이 하는 일을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故 이회장은 자신의 무덤에 질문을 물었지만 저는 어머니의 무덤에 침묵을 가득 묻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날 아침이었습니다. 산책을 하다 같은 호수에서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음은 '스르르' 녹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침부터 어디서 공사를 하는 것인지 둘러보던 중에 그 소리가 물 밑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얼음 저 밑바닥에서 부터 심하게 싸움을 벌이는 듯 하나둘 부숴 지고 빠개지고 으깨지고 때론 예리하게 돌아서면 둔탁하게 그야말로 요란을 떨면서 형태의 변형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얼음이 깨지는 곳에서 퐁퐁 여린 물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내친김에 돌을 던져 저 균열을 극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와 함께 여러 번 돌을 던져 보았습니다. 나쁜 짓이었을까요. 어떤 곳은 꿈쩍도 하지 않아 애꿎은 돌만 저 멀리 미끄러져 갔고 어떤 곳은 돌의 충격이 컸는지 물의 파장이 꽤 멀리 나아가는 듯 했습니다. 무엇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사이 몸소 제 살을 깨뜨리며 자신을 처절하게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건, 모르긴 해도 우리처럼 아니 우리보다 더 전쟁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요.
그럴 것입니다.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것도 그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마음이 녹는 걸 보고 기온이 올라가는 걸 보고 풀린다고 하지 않나요. 단단한 응어리가 녹아야 비로소 풀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대단한 발견을 한 과학자나 되는 듯 한참을 다리위에서 얼음이 녹아 다시 물이 되어 흐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아프더라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니 날씨는 거짓말처럼 풀려있었습니다. 일부러 나 추우라고 날씨가 심술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아직은 아니다 긴장감을 주려고 그랬나 싶기도 한데 여튼 겨울을 통과하고 돌아온 느낌은 확실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두 눈으로 얼음이 녹고 있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죠. 아픈 겨울은 반드시 떠나가는 것. 자신을 부수면서까지 떠나가기 때문에 다음에 도착한 봄은 자리를 내어준 겨울을 잊지 말아야 하겠죠. 무쇠 같던 저 얼음을 녹이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저들은 누구보다 아팠기 때문에 봄이 된 것이니까요.
그렇게 산소 여행도 마치고 이 책도 다 덮고 나서 얼마 후였습니다. 일상의 평화를 찾아 다가오던 새봄이 마냥 설레기만 한 날이었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된 강영우 박사가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마음은 다시 그날 꽁꽁 얼어있던 호숫가로 달려갔고 이 책을 있게 한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분명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을 못 보는 대신 그분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더 아름다운 영혼의 세상을 믿고 따르며 아름답게 살다간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어쩐지 이 책에서의 모든 질문과 답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질문을 남긴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아들과 아내에게 사랑과 감사 가득한 편지를 남긴 것을 보면 말입니다. 故 강영우 박사의 부처님 같은 미소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결국 이 책을 만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 책과 함께 남몰래 의심하고 또 더 몰래 의지하면서 겨울을 지나온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책을 읽었다는 생각보다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요즘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쌓여진 냉철한 비판정신이 서슬 퍼런 냉소와 무관심으로 바뀌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저 역시도 조금씩 아는 것도 많아지고 작가와 작품을 많이 접하다보니 대충 목차만 보고서 저자가 어떤 식으로 독자를 설득하려고 하는지 첫 장만 읽어보고서 속내가 무엇인지 섣불리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신부님, 스님의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를 향해 내심 콧방귀를 끼는 사람의 편에 들 때도 있었습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자기 종교를 근간으로 한 추상적 설명이 반복된다는 이유로 그들의 논리를 폄하하며 결국 종교교화와 선도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저자의 선의를 오독하길 즐겨합니다.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꼭 종교와 결부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한번은 마주치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답을 찾아야 하는 운명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질문을 하는 것도 답을 하는 것도 모두 사는 동안 지혜롭게 삶을 이어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질문을 많이 해보고 답도 오래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정답과 가까운 인생을 살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나는 몰랐지만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아름답게 보고 있을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먼저 가신 故 강영우 박사님처럼 말입니다. 어떠한 질문을 던졌고, 어떤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갔고 어떠한 이유에서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는가는 사실 철학자가 철학하는 방법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어진 삶을 한번만 살 수 있고 또 언젠가 한번은 꼭 죽어야 합니다. 사는 동안 내 삶을 나만큼 고민하는 철학자, 종교인은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동안 의심하면서도 그냥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질문과 답이 잊혀 질 수 있어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어서 안 되지 싶습니다. 그건 아마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내 삶을 스스로 잊혀 지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일 테니까요. 내가 나를 잊지 않아야 세상도 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 봄에 산소에 갈 때엔 이번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어 묵묵히 묻고 온 그 질문을 다시 슬그머니 꺼내어 볼 생각입니다. 일 년 후엔 가슴속에 묻어온 그 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꼭 확인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진 오늘의 질문도 답도 그리고 그동안 더 뜨겁고 단단해질 고통의 시간들도 잊지 않으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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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형을 뵈온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동안 잘 계시온지요. 매섭기만 하던 겨울 날씨도 한 풀 꺽이는 지 어제부터 비가 내립니다. 그러고 보니 우수가 지났고 곧 경칩이군요. 그저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경외롭기만 합니다. 형과 함께한 학부의 시간이 가끔씩 그립습니다. 자유와 진리, 정의에 갈망하던 시절에 통음으로 세상을 논하던 그 시절이 이젠 풋풋한 웃음으로 남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몸에 배인 저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익숙한 형이 서로의 믿음 쪽으로 끌어당길려고 서로 공을 많이 들였죠. 한 잔의 술 속에 종교와 철학이 녹아들어 이론적으로 지지않을려고 무지 애를 쓰며 공부하던 그 때가 엇그제 같기만 합니다. 신의 존재에서 시작하여 전쟁과 인간성, 죽음과 영혼에 이르기까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도서관에서 읽은 몇줄의 지식에 의존하여 서로에게 우기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던 그 한 때. 형을 만났기에 정신적으로 많이 컸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툭 하면 신의 이름으로 테러와 전쟁이 일어나는데 신은 과연 있을까요? 신은 왜 고통과 불행을 주는걸까요? 빨간 십자가는 대한민국 야경을 상징할 정도로 많아졌는데 악하고 모진 이가 잘사는 듯한 이 세상이 정녕 신의 작품일까요? 1%와 99%로 대립되는 이 시대에 부자는 나쁜 사람일까요? 다른 종교를 믿으면 정말 천국에 갈 수 없는건가요? 이런 의문에 대한 차신부님의 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던 형을 떠올립니다. 차신부님의 답은 형의 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유일의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챙길 수 있는지 아느냐는 뻐김에 형은 '월인천강(月印千江)' 단 한마디로 저를 침묵하게 하였지요. 달 하나가 천줄기 강물에 두루비치는 것처럼 사랑 하나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물결치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도 부처도 우리의 마음 속에, 즉 '신은 믿는 자에게 있다'는 말로 절 감복하게 하였습니다. 동호회 모임에서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서 신은 사랑의 번민을 허용했다"며 제법 의미있게 마무리하던 그 시절의 치기(稚氣)를 이 책에서 읽어냅니다. '악인이 잘사는 사회개선은 신의 몫이 아니라 국민의 몫'이라는 답변이 얼른 이해가 안되다가도,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신의 자비'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의미가 참 무겁고도 무섭게 다가옵니다. 그러고보면 'God is no where!' 에서 한 글자만 옮기면 'God is now here!'로 변한다는 말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로 마음에 있음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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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왔누나 / 온 곳을 모르면서 나는 있누나 /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라 /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철학자 칼 야스퍼서의 시입니다.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것이 우리의 생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철이 드나 봅니다. 칼 야스퍼스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죽음을 앞둔 인간은 어떤 절박한 질문들은 가지고 있을까요? 오랜 시간 살아가면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책은 평생 종교를 갖지 않았던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에 대하여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물론 이병철 회장은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24년이 지난 후 차동엽 신부가 이에 대한 답을 쓰고 책 제목을 <잊혀진 질문>이라고 지었습니다. 24가지 질문내용은 신과 종교에 대한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질문들입니다. 대표적 질문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간다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그럼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이런 질문들은 "도를 아십니까?" 아니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으며 선교활동에 열심인 신도가 무신론자와 만나 맨처음 만나 이야기하게 되는 주제들이기도 합니다.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 올바른 삶의 자세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닫힌 마음으로 자신의 견해만 강요하게 되면 영원히 평행선만 달리게 되고, 자칫하면 싸움으로 끝나기 쉬운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쉽지만은 않은 인생의 근본적 질문들에 대한 차동엽 신부님의 접근은 좀 색다릅니다. 신부님이지만 가능하면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과학과 문학, 인문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의 이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종교를 갖지 않는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조곤조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갑니다. 종교를 가질 것을 강요하기보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수많은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 온 지금까지의 내공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책 내용 중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토론부분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진화론이 가지는 의미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창조론과의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나 할까요? 지동설을 탄압했던 중세교회의 그런 모습이 아니라 빅뱅이론이나 인간게놈과 같은 과학적 발견들이 어떻게 창조론과 함께 설명할 수 있을지를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는지의 문제는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이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는 신부님 이야기에 공감이 갑니다. 영어로 보아도 양자간의 차이는 조그만한 뛰어쓰기에 불과하잖아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God is nowhere!)에서 한 곳만 띄어쓰면 신은 여기에 존재한다(God is now here!)가 되잖아요. 결국 어느 쪽에 더 많은 관심과 마음을 주느냐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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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시작된다. 잊혀진 질문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는데 타계하기전 이병철 회장은 한장의 질문지를 절두산성당의 박희봉신부께 한장의 질문지를 보내게 된다. 만남이 성사되었더라면 답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그 질문들은 이병철 회장의 별세로 인해 만남이 무산된채 그저 잊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지가 이책의 저자인 차동엽신부에게로 가게 되는데 죽음을 앞둔 한인간이 영원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날카로운 직관력이 빛나는 질문들에 대해서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희망을 잃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분명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답을 보여주고 싶어 만들어진 책이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신부님의 말씀이나 스님의 말씀의 경우는 일단 피하려는 성향이 있다. 내가 알지못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그분들이 생각하는 믿음이 나의 견해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읽는 마음이 불편하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부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진질문]은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일수 있어 편하게 받아들일수 있었다. 저자는 이책에서 질문을 근본적인 물음과 동시대인의 물음 두가지로 나누어 답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질문중의 하나는 누구나 한번 태어나는 인생인데 왜 유독 나만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가에 대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다른사람들의 인생은 평탄한것 같은데 유독 모든 고통이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물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질문이라고 한다.그 고통의 이유에 대한 질문에 답을 가장 시적으로 표현한 독일의 작가이자 시인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렇게 답한다.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 사는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살면서 되도록이면 고통을 피하면서 살고 싶어하지만 고통에도 우리가 알지못했던 순기능이 있다는 시각에서 보면 고통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고 단련시키며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계기로서 필요한 생의 한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을수없는 고통의 한계점에 다다랐을때 종교가 있는 사람이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이거나 최종적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찾게되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를 독일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최종적포괄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더이상 기댈곳이 없는 극한적인 한계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신이라는 존재에게 의지하게 된다.믿음과는 상관없이 그 순간을 신이라는 존재에게 의지함으로써 내면의 불안과 고통을 잠재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하는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이 그대로 사라진다고 하더라고 힘든 시간을 견디는데는 힘이 되어준다.
지금은 바야흐로 푸어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워킹푸어'라는 말이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단어들에 푸어라는 말이 붙어 가난하지않은자를 찾는것이 더 어려워진것 같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금전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열정으로 도전하기보다는 안정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행복의 우선순위를 행복,기쁨, 평화등의 '목적가치'보다는 부귀,권세, 명예등의 '수단가치'에 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직업선택 동기에 따른 부의 축적 여부'라는 통계를 살펴보면 수단가치에 의미를 두고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보다 목적가치에 의미를 두고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이뤄냈다는 것을 알수있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는것,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것이야말로 자신이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선뜻 내아이에게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할수 없는것이 또 부모된 자의 마음인것 같다. 단순히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것' 그것이 아이에게 바라는 삶이다. 아구르라는 현자가 소박한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 기도야말로 가장 큰 기도인것 같다. "저에게는 당신께 간청할 일이 두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제 생전에 이루어주십시오.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가 불러 '야훼가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을 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게 내가 가진것이 많아 남이 나를 시기하지않게 혹은 반대로 내가 가진것이 너무 없어 남이 가진것들을 욕심내지않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꿈꾸는 이상적인 기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런것은 아니지만 간혹 자기가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볼때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볼때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에도 비난의 화살이 향하고는 한다.나의 믿음이 존중받길 원한다면 상대방의 믿음 또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한것이 아닌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 물론 다수의 문제가 아닌 광신도라는 소수의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믿음만이 절대적이라는 태도는 폭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책에서 만난 한용운님의 시는 이채롭게 다가온다. 이외수님의 벽오금학도를 보면 강은백의 할머니에게 목사님이 찾아와 하늘님과 하느님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나무를 솔나무라고 발음하는 동네도 있지만 그렇다고 소나무가 쑥나물이 되는것은 아니며 목사님이 말하는 하느님과 할머니가 믿는 하늘님이 같은 신이라는 동의를 이끌어내는 내용이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었다.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진느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래전 우리네 어머니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두손 모아 빌던 존재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 부르는 명칭은 전부 다르지만 결국엔 '최종적포괄자'를 이르는 같은 말인것만 같다. 'God is no where!' 에서 'God is now here!' 로 변하는 것처럼.
생명의몸살, 고독한 영혼의 초월본능, 내인생의 비밀코드, 피할수 없는 물음 네개의 파트로 나뉘어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게 들어오는것들도 있고 추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해답들도 있다. [잊혀진질문]을 읽으면서 든 느낌을 말하라고 한다면 저자가 피할수 없는 물음편에서 예를 든 마크트웨인의 말로 대신 답하려고 한다. "20년 후 당신은 ,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더 실망할것이다. 그러므로 돛 줄을 던져라.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항해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아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어떤 책이던지 읽고나서 후회하는편이 읽지않는것보다 나을것이다. 인생의 질문에 해답을 구하고 싶다면 일단은 책을 펼치라고 말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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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질문이 아닌 우리들의 의문. 나는 이전부터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살았다. 이 화두의 함정 속에서 많은 번민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길을 접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나에게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는 못했다. 어쩌면 존재의 함정인지 모를 이런 의문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왜? 우리의 존재는 있지만, 존재하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니 너무 한심한 인간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나에게 세월을 붙여버리고, 가족과 생활이라는 삶의 무게로 인해, 점점 정신은 무디어져 가고, 삶 속에 매몰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인간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 많은 의문, 그 중에서 신과 종교 그리고 영혼 그리고 인간(생명) 같은 인간의 숙명적인 의문들,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누가 그 정답을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한 인간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들이 펼쳐져 있기에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내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게 의지하는 길로, 나에게 의지하는 길은 가시밭길이며 스스로 모든 답을 다 찾아야 하기에 많은 기쁨과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신에 의지하는 길은 모든 것을 신에게 던지고 신의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길이며 헌신의 길이다. 이 두 길 모두,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 보통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가, 어떤 순간, 존재와 삶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힘들고, 어려울 때 이런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역사이듯 인생(삶)도 고(고)아닐까? 물론 인생은 끊임없는 희로애락의 연속이라고 여기지만, 과연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괴로워하고? 왜 고통스러워하는가? 고통은 자연현상이기에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고통은 우리를 보호, 단련, 정신적 성장의 계기가 되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해 준다. 고통의 원인과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바로 우리의 것이다. 고통을 신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책임도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위이고, 마음이다. 삶의 동기는 무얼까? 우리는 태어났기에,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러니 이 존재에 충실 하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건도 답도 필요치 않다. 우리 스스로 만족할 답을 만날 때까지 찾기가 삶이 아닐까. 모든 일에 스스로 앞장서라. 삶에서 나와 우리 사회에 변혁을 가져올 사람은 나다. 우리는 앞장서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탓하고, 비난한다. 이보다는 솔선하는 대안실행이 필요하다. 또한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이 적임자임을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보지만,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경계하고, 타인에게도 협조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고 함께하는 불안과 두려움, 이 두려움은 역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불안은 우리의 생각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또 두려움은 단지 이전에 기억된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괴로워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물론 불안은 도약을 위한 계기도 될 수 있다. 불안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누리는 특권, 곧 생의 에너지다. 진짜로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치솟는 분노이다. 분노를 없애려면 그 원인을 제거하고, 무엇보다 화낼 일을 만들지 말라.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올바른 판단이라는 객관적인 확신이 없으면 분노를 품지 말라. 의로운 분노를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은 그만큼 균형 있는 반복을 요하는 것이다. 칼 포퍼의 책제목처럼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고 믿고 싶다.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것이 인간의 길인지 모르겠다. 인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그리고 부자. 선한 자는 복을 받는다는 말이 종교나 도덕에서 많이 언급된다. 복이 무엇일까? 돈일까, 명예일까?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왜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을까? 그렇게 믿고 싶어서가 아닐까? 분명 돈과 선악의 인과성은 없다. 단지 인간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기에 기왕이면 선을 택하고 복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부자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부자가 적은 것 같다. 살아있을 때 선행을 하지 않으면 “살아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죽어서도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선한 인간, 악한 인간은 없다. 살아가면서 선과 악을 배우고, 스스로에게 묻고 실천한다. 이따금 악하지만, 대부분 선하다.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지도? 또 절대적 선인이나 악인을 보기 힘들다. 인간의 죄악 중 큰 죄악인 전쟁, 지구상 전쟁에 소요된 비용으로 인류의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또 TV나 영화 속의 화려한 바티칸 등 수 많은 종교단체의 재산이나 세계적인 부자들의 재산 등, 이런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세기의 살인마들도 교도소에서 종교에 의지하거나, 죽음의 공포로 힘들어 하고 그들의 과거를 후회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상황이 사람들을 악인이나 선인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의 특권이기에, 악인은 자유의지의 독점적 남용이고, 선인의 자유의지는 하느님과 소통으로 신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인간을 따르는 죄와 죄의식,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필요한 것은 용서의 길이다. 용서하라. 우리는 산수를 못하니까 용서를 못하는 것으로,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이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안다. 우리의 부의 편애, 악인의 부귀영화는 인간의 책임, 탐욕과 착취는 스스로 만든 함정이 아닐까? 또한 죄인,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신의 자비인지도 모른다. 벌과 상은, 자기 삶의 인과관계에서 발생하는 고생과 축복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왜? 만족하는 삶은 현재 가진 것으로 최대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불행하다. 그러기에 가치관의 혁명이 필요하다. 먼저 우리 스스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삶은? 최선을 다했는가?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행복하면 성공한 것이다. 천국과 지옥, 과연 있을 것인가? 많은 종교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이다. 인간에게 현세도 중요하지만, 내세도 중요하다. 인간에게 내세는 모르는 영역이다. 그러기에 내세를 보장해주는 종교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인간에게는 안심이 필요하다. 죽음이 심판의 역할을 하기에 더 선하게 살아가는가? 내세를 믿지 않아서 막 사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물론 종교와 도덕은 인간을 선하게 이끌어나간다. 하지만, 종교의 광신 또한 인간을 그릇된 방향으로 모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의문은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 속의 문제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모르기에, 만족하지 못하기에 살아가는 것 아닐까? 우리가 완성된 존재라면 과연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침묵과 맞대면하면서 자신에게 의문을 던져보라. 그 속에서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이 되었건 사명이 되었건, 자신의 목적, 사는 이유를 발견한 사람은 이미 절반을 이룬 셈이다. 좌절의 순간,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시련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내심, 절망감이 엄습할 때 절망을 보지 않고, 희망을 붙들면 절망이 발붙일 틈이 없게 된다. 희망으로도 넘지 못하는 절망을 견디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항상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오늘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이다. 시작 전의 의문,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해 온 의문들. 생명은 소멸한다. 물질도 소멸한다. 단지 그 지속시간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잠시 후에 죽을지, 긴 세월이 지나서 죽을지 모른다. 우리의 죽음은 숙명이기에 당당하게 받아들일 연습이 필요하다. 인간은 모르는 일에 대해 지레 겁을 먹는다. 그것은 죽음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 같다. 그런 두려움이 영혼이나, 천국과 지옥 같은 관념을 만드는 것 아닐까? 영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유물론이 말하는 물질적인 존재, 물질을 넘어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되 육체를 나쁘게 보는 이원론적 입장, 영혼의 존재 인정하나 육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 일원론적 관점,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로 보는 것 등”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영혼이 무언지를 모른다. 저자는 “나는 영원한 삶을 위해 몽땅 거는 도박을 감행했다.”로 종교에 귀의함을를 말한다. 영원하게 살면 무엇 하리오? 삶이 있어야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무엇은 있을지라도, 영원이 존재할지도 의문이다. 신이 있기에, 종교가 있기에 천국과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닌지? 우주는 넓고, 우리의 기준으로 아주 조금 알 뿐이다. 인간의 시야는 매우 좁다. 우리의 관념은 우리 눈 앞의 세상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런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는 없다. 신은 어디에?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볼 수가 없고, 알 수가 없다. 어떤 개념 안에 실재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모두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부분적)체험가능성과 (완전)파악불가능성 사이의 괴리는 존재한다. 존재는 유일하고 그 속에 수많은 변용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그 뒤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기에 인간은 자연을 더 이해하기 힘들다. 시간의 상대적 관념, 우주에서 인간은 아주 미약한 존재이다. 가끔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 과연 그들에게 의혹이나 의심이 사라졌을까? 어떤 확신에 나약한 인간이 신에게 완전히 헌신할 수 있을지, 만일 전적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삶에서의 종교? 배움이다. 우리는 배우지 않은 것은 하나도 모른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 종교심은 인간에 내제된 본능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는데, 늑대소년 이야기 등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배우지 못했기에 알지 못했다. 종교도 배움이고, 실천이고 이를 통해 그 신념이 강화된다. 종교는 종교심에서 출발한다는데 사실은 부모들의 교육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인류 역사에서 단일종교 하에서도 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있다. 종교는 바램, 기도와 헌신, 세상에 틀린 기도는 없다. 기도는 영혼의 강건함을 청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복을 빌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이다. 기도의 답은 ‘주마, 안돼, 기다려라, 다른 것을 주마’, 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에 대한 위로이며 보상이다. 나는 기도는 한다. 그것은 나의 바램이며, 자기 위안이며 자기암시이다. “종교(신앙)의 선택, 교리가 보편성을 지닌 종교, 평소 지성, 감성, 의지가 조화롭게 균형을 갖춘 인격자가 되도록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에 열심할 권리는 있으나, 타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 증오심을 품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종교를 선택할 기회는 적으면서도 많다. 종교선택의 자유는? 과연 우리는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하는가?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부모의 종교가 자식의 종교로 되는 확률이 높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부모이고, 어렸을 때 우리는 선택의 기회가 거의 없다. 부모를 따를 수 밖에 없다. 특히 무슬림국가에서 태어나서 다른 종교인이나, 무신론자가 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제도권 밖의 종교들이나, 기존의 구조(교단이나 종단 등)를 거부하는 믿음(무교회주의 등) 등은 항상 박해를 받는다. 요즘 거리나 동네, 지하철 등 곳곳에서 공격적인 선교활동과 믿음을 전하는 사람, 도를 전하는 사람, 복을 주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교신도들의 행동에 동감보다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왜일까? 왜 인간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가? 각자 자신이 믿고 싶은 바대로 믿고, 선하게 살면 안되나. 믿음에도 순위가 있는가? 굳이 믿음에서 종교를 높이 올려야 할 이유는 무언지. 왜 자신이 믿는 종교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가? 가난하고, 민중(못 배운 자)들을 위한 종교는 항상 종교라는 큰 테두리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무엇보다 믿음을 먼저 중시한다. 믿음은 어떤 교리를 머리로만 끄떡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실천에 의해서 결정된다. 머리는 반에 지나지 않기에 몸으로 체득이 필요하다. 창조와 그 후, 창조, 그 궁극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체험의 문제, 제 삼자가 어떤 사람의 체험고백 차체를 부인하거나 평가할 권리는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럼 다양한 의견도 그들의 생각이고, 체험이라고 볼 수는 없는가? 안 그런 것 같지만, 책 곳곳에서 진화론을 비꼰다. 의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의심이 생겨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다. 일반적인 생각의 문제는 진화, 낮은 차원 높은 차원으로 진화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도 한 방향이지만, 그냥 현실과 자연에 맞게 진화할 뿐이다. 자연은 발전적 선택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 종교계에서 진화론과 약간은 타협하여, 일부 종교인들은 소진화를 인정한다.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와 합리성에 입각한 과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완전하지 않은 과학을 보는 다른 시각, 빅뱅이론을 보는 다른 시각, 우주를 보는 다른 시각 등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서로의 시각을 존중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확실히 해소해줄 답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다.”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면 우리는 신의 의도를 탐색하는데 인류의 역사를 보내야 하는가? 인간의 세상은 인간들에 의해 돌아가고,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과학과 종교. 종교만큼 역사가 깊은 것은 과학이다. 많은 현대적 과학의 발견은 서양, 그것도 기독교 국가에서 이루어져왔다. 인간에게는 신이라는 개념만이 있지 신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아는 것만을 알뿐이고,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 우리의 세상은 초월계에 대한 욕구, 물질계에 대한 욕구가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종교는 과학을 이성의 우상화로 보는 것 아닌지? “옥스포드의 훈장들은, 생래의 예언능력을 버려가면서까지 이성을 우상화하라고 가르치던가 ”, 종교는 신이 아니고, 신도 종교가 아니다. 신은 신일뿐이다. 종교는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 내린 것 아닐까? 과학만능주의와 무신론, 과학은 만능이 아니다. 탐구과정이다. 무신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알기 전에, 보기 전에 믿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의아한 것들. 종교에 대한 통계의 문제, 종교에 대한 통계기관이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이고 무신론자가 2.02%로 종교인이 비종교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것은 무신론자를 너무 작게 잡은 것 아닌가? 무신론자를 구분하는 기준도 궁금하고, 각종 종교 하에서 무신론자들을 대부분 그 종교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신뢰도가 낮은 것 같다. 또 미국 과학자 40%가 신의 존재와 내세를 믿는다고 언급한다. 그럼 60%는 무엇을 믿는가? 그들은 무신론자인가? 또 신(법칙, 자연)을 믿는 것이지 종교를 믿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아니면 종교를 믿지만, 의심을 하는 것일까? 또 그들이 믿는 종교 비율로 표현했으면. 무종교인들의 범죄비율이 높다니, 범죄는 상황, 현실에 따라 생기는 것이지. 종교를 가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대부분 기독교나 천주교국가 그리고 이슬람국가, 불교국가의 범죄는 누구의 범죄인가? 무엇보다 범죄인들 부모들의 종교가 궁금하다. 신에 대한 인정이라면 모르겠지만, 종교의 진리성 인정은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진리가 아닌가? 911테러 등 자살폭탄테러와 연쇄보복들은 영웅적인 이슬람 신도들이 범인이다. 다른 종교의 살인범이나 테러범들을 ‘기독교 범인이나 불교 범인이라는 말은 하지를 않는다. 왜 유독 이슬람에게 이런 말을 붙일까? “인간의 유전자는 하느님을 믿을 때 영적차원의 치유력이 발휘하도록 설계되어있다.”는 전형적인 지적설계론의 논리로, 창조론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난받을 수 있다. “종교는 유전자가 아니라 언어와 상징을 통해 문화적으로 전파된다.” 물론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잘 제시하고, 이정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는 실천인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기에 알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머리, 그 속의 변화보다 많은 변화가 자연과 우주에서 일어난다. 분명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자꾸 과학을 종교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학을 종교처럼 비난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리고 종교가 완벽하다면, 과학의 검증을 받는다고 해서 손상될 가치가 아니지 않는가 의문의 이즈음까지로. 광고의 효과와 신부가 쓴 글이라서, 더 종교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재벌이 왜 신부에게 이런 질문을 했는지? 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만남이기에 색다른 결과를 기대했다. 다 읽고 느낀 것은, 이 책은 무엇보다 종교적 책으로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를 묻다니, 답은 그의 종교였다. 저자가 카톨릭 신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 그의 생각과 답은 카톨릭 중심적이고, 종교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인은 한 발은 세상에, 다른 한 발은 종교에 걸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말을 일상에서 너무 따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좋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좋게 보고 배우고픈 것은 배우고,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알려고 노력한다. 또한 서로를 통해 배움을 이룰 수 있다. 세상은 다양하다. 그러기에 인간의 문화가 발달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 아닐까? 다양성은 인간의 세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토양일 것 같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경험할 수 있는 일이나 타인의 경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스스로 두려움을 적게 갖고 안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도 순간이 지나버리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에만 존재할 뿐, 우주 어디에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지 현재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에 더 충실해야 한다. 왜 지식의 길과 믿음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까? 믿음을 분명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오류가 사람들을 점점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아닐까? 아집을 가지고 한쪽으로 믿기 시작하면 인간은 생각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생각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찾는 오류를 범한다. 많은 종교인들이 지식 특히 과학을 종교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신의 창조에 다가가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시 한쪽의 길로만 가서는 안된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본 책에서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의문들이 다시 눈앞으로 나타났고, 더 많은 의문이 쏟아졌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해준 책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저자는 돌려서 말한다고 해야 하나, 많은 인용문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고, 결국은 카톨릭이 답이다라고 하는 것 같다. 잘 쓰여진 글은 독자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보편성에 기인하여 자신의 종교로 이끄는 기술이 부족한 것 같다. 이런 글은 자신의 느낌이나 주장이기에 저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글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힘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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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작가의 글 전체를 좋다, 나쁘다 평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독자들의 정확한 평가(그것이 비록 악평일지라도)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를 선도하는 작가로 하여금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각성하고 정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차동엽 신부님의 글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스트 셀러 작가인 동시에 유명 강사라는데 말이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나로서는 차동엽 작가가 신부라는 또 다른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내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일이다. 오히려 외국 신부님들 저서는 그럭저럭 많이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핏 생각나는 이름만으로도 폴 신부님, 안젤름 그륀 신부님, 피에르 신부님, 앤드류 그릴리 신부님, 헨리 나웬 신부님 등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그분들의 작품을 읽고 가끔 리뷰를 올리기도 했지만 '괜히 시간만 버렸다'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오히려 그 진한 감동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은 적은 많았지만. 평생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세상에 내놓는 모든 작품이 다 독자의 구미에 맞을 리가 없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차동엽 작가의 이번 작품이 왜 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지적하고자 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기에 이것은 전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1. 시간에 쫓겼거나 사색이 부족했거나
처음부터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기록한 책이라면 당연히 수필에 속하겠지만 인용글이 80%가 넘어 보이는 이 책을 수필이나 산문집으로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렇다고 주제에 어울리는 글들만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잠언집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작가의 견해나 경험을 완전히 배제했더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잠언집이라고 단언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짜깁기로 일관한 학부생의 리포트라고 할 수도 없고...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나는 가끔 시간이 나면 근처에 있던 특수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주로 다운 증후근을 앓고 있었는데, 그들과 어울려 생활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나 스치듯 지나쳤던 사람들은 학생들 각자의 외모로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일텐데 말이다. 비슷비슷한 외모 탓인지, 아니면 그곳을 찾는 외부인에게 많은 실망을 경험한 탓인지 자기네들끼리의 유대감은 강하지만 처음 찾는 외부인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인가 방문하면서 낯을 익히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내게 수줍게 내밀었던 사탕 한 알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주머니에 몰래 남겨두었던 사탕을 내게 건네며 환하게 웃던 얼굴. 그때의 감동을 후에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손끝이 무디다라고.
내가 이 경험을 적은 이유는 작가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작가라는 직업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무한정으로 남아 그 무료함을 달래려 글이나 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임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글솜씨만 믿고 시간에 쫓겨 감동이 없는 글을 쓰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일컬어 가슴이 차고 손끝이 잰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문체에 대하여
책의 구성은 크게 네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의 몸살'이란 제목이 달린 현실 세계의 문제 극복에 대한 조언, '고독한 영혼의 초월 본능'이라는 제목의 종교와 기도에 대하여, '내 인생의 비밀코드'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피할 수 없는 물음'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본 얼개로 하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 듯이 고인이 된 이병철 삼성 회장이 죽기 전에 남긴 24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출발한 것이 이 책이 나온 배경이다.
천주교의 주일 미사나 개신교의 주일 예배를 참석한 경험이 한번쯤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목사나 신부는 일반인과 다른 독특한 억양과 어투로 설교를 한다. 그 어투도 어투려니와 말을 전달하는 자세에서도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마치 초등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사석에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어투와 자세, 누군가에게 교훈을 주어야 할 의무감에 부푼 듯한 일방적 욕심은 오히려 성직자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비록 그 의도가 선할지라도.
이 책에서도 그런 모습이 군데군데 비친다. 어려운 내용을 쉬운 말로 풀어 쓰거나, 더 나아가 적절한 경험을 버무려 읽는 재미까지 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여지없이 적절한 예시가 등장한다. 작가가 어떤 글을 인용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사색과 경험에 의존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인용글조차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 자신이 글을 풀어 가는 역량의 문제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작가만 알고 독자는 모른다면 그런 책은 더더욱 읽을 가치가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공감하려는 자세가 작가의 기본적 책무가 아닐까 싶다.
3. 이 민감한 시기에 왜 이병철인가?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적 양극화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다.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닌데 왜 일반 국민들은 그토록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일까? 내 생각으론 국민들이 인내할 수 있는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의 출발은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무엇에서 글의 아이디어를 취하든, 글의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죽음에 임박한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소박하고 진솔한 것이었다. 작가는 책에서 그 질문과 크게 관련이 없는 글도 실었고, 일정 부분 그 질문에 충실한 것도 있다. 인간이기에 품을 수 있는 인류 공통의 근원적 질문만을 골라 답을 하고자 했다면 굳이 이병철 회장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4월에는 총선이 있고, 사회 양극화의 문제로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 시점에 작가는 왜 우리나라 재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이병철 회장을 책의 전면에 거론한 것일까? 사회 분위기를 몰랐었거나 아니면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자든 후자든 책의 판매나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에서나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한데 왜 작가는 뜬금없이 고인이 된 이병철 회장을 언급했던 것일까?
블로그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을 유희 삼아 하고 있는 대다수의 블로거들과 내가 다를 것도 없고, 지식도 일천하다. 책에 대한 이런 일방적인 비판이 작가로서는 일견 당혹스럽고 화가 날 만도 하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 견해이니 항변할 것도 많을 것이다. 나는 독자로서 '다 읽지도 않고 무슨 서평을 쓰며, 더구나 비판을 가할 수 있느냐'하는 비판을 면키 위해 인내심을 갖고 책을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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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맨 먼저 만나는 것은 뭘까요? 윌리엄 윌리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셀레느니.’라고 노래했지요. 이렇듯 삶을 위로해주는 것들은 일곱 색깔처럼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어떤 사람은 책을,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연인을, 또 어떤 사람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극복해 나갑니다. 그러나 아팠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답을 찾으려는 ‘질문’(question)이지 않을까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질문』은 무지개(舞之開) 작가로 널리 알려진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를 나름대로 엮은 것입니다. 질문들은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 즉 3차원적 인간의 문제를 오직 3차원적으로 몇 번이고 해결하는 것이라면 앞서 말한 절실함은 허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들은 사실 단숨에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3차원적인 우리가 무한한 존재인 신(神)에 대해 뭔가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믿음’ 혹은 ‘체험’으로 우리의 정신을 깨닫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절실한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차동엽 신부는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 즉 ‘Big Q'와 'Rael Q’를 던지면서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가슴을 뛰게’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Big Q는 오랜 시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다음 Rael Q는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입니다. 저자의 질문은 고통, 기도, 신의 유무, 창조와 진화, 과학, 악인과 선인, 용서, 천국과 지옥, 지구의 종말, 꿈 등등 여러 가지 입니다. 이러한 물음의 이면에는 신앙심이 깊은 저자의 고백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거부감이거나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질문의 근본을 성찰하기 위한 근거로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특유의 ‘난문쾌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종종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악인(惡人)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의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이 세상에 악인은 없다고 하며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악인이란 생각과 행동이 100% 악으로만 구성된 사람인만큼 가끔은 선(善)을 행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을 선택하는 인간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악인 히틀러’는 ‘인간 히틀러’가 됩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에게 악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사람의 운명이 선과 악으로 결정되며 혹은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마주대할 때마다 어느 순간 일명 ‘얌체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참된 기도일까? 라고 고민해봤을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나쁜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위로이며 보상’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닥터 지바고』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리라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리도, 교회의 전례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면의 음악이 필요했다. 인간은 이러한 음악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작곡할 수 없다. 리라는 삶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러한 음악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참된 의미를 혼동한 채 무조건적인 긍정은 오히려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말 그대로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라든가 긍정적인 희망으로도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으로 모든 것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저자의 답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사랑’이라는 뜻 깊은 기쁨 덕분입니다. 온갖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은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하오?)”를 거듭 되묻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치유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유기농법’내지 ‘태평농법’을 권하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는 가장 큰 과제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버티기’와 관련된 것으로 ‘계획농법’이 아닌 ‘drift’(표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에서 '하늘 냄새'가 나고 있나요? 잊혀진 질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은 괴테의『파우스트』에서 죽음을 앞에 둔 파우스트가 하나의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영혼을 깨달은 후 파우스트는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르지 않다고 생의 의지를 토닥거렸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저자 말대로 "나는 영혼이다."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사람 냄새는 물론 하늘 냄새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혼이라고 해서 저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곧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힘으로 인해 우리의 칠흙같은 마음은 무지개로 찬란하고 기쁘게 빛나면서 삶의 용기와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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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손에 잡게 된 것은 블로그의 한 지인이 쓴 리뷰를 읽고나서였다. 그 때 처음으로 난 고 이병철 회장이 죽기 전에 한 신부에게 자신이 절실하게 알고 싶었던 24개의 질문을 남겼으며 바로 그 질문에 대해 24년이 지난 지금 '무지개 원리'로 유명했었던 차동엽 신부가 내어놓는 대답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흥미를 무엇보다 끌었던 것은 고 이병철 회장이 죽기 전에 남겼다는 24가지의 질문이었다. 그건 내게 참으로 낯이 익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질문을 평생에 걸쳐 풀어나가는 과정인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건 오래 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거기서 수명을 다한 영혼들을 하늘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한 천사는 갓 아기를 낳은 임산부의 목숨을 이대로 가져가는 것이 너무 측은해서 가져가지 않았다가 하나님에게 불려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오라며 지상으로 보내진다. 그 이야기를 읽고 어쩌면 우리도 이 천사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 보내졌고 온 삶을 통하여 그것을 풀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대학 때 사귄 한 친구가 있었다. 음악 취향이 비슷해서 친해진 친구인데 자주 홍대나 황학동으로 음반을 사러 같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가을의 어느 주말. 황혼의 엷은 오렌지 빛살이 창을 가득 채우던 홍대의 한 카페에서 친구는 내 맞은편에 앉아 새로 구입한 무디블루스의 'QUESTION' 음반을 만지작거리며 문득 이런 말을 했었다. "넌 삶이란 게 뭐라고 생각하냐? 난 삶이란 게 문제지 같다. 살면서 계속 해답을 찾아가는... 그런데 재밌는 건 처음엔 온갖 것들이 다 궁금한데 살다보니 결국 정말 궁금한 건 몇 개 안되더란 말이지. 그런데 그 몇 개 안되는 질문들이 알고 보니 내 삶 전체의 의미마저 알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었어. 그것만 알게 되면 난 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비록 이런 몸을 가지게 해 버린 삶이라 해도..."
난 이 말을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 들었던 것 같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역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가웠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한없이 쓸쓸했고 또한 '이런 몸'이란 말을 했을 때 내비친 그 묘한 뉘앙스 때문에 놀랐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병이 있으며 평생 그로 인해 고통 받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었고 때문에 그 역시 당연히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왔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에게 이런 병을 허락한 신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 밤에 고통이 온 몸을 할퀴며 깨어날 때 마다, 미친듯이 약을 찾아 먹어야 할 때마다 그는 정말 신에게 묻고 싶었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악한 마음조차 먹은 적이 없는 자신을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도대체 자신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이렇게 고통을 그림자처럼 달고 사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는 것을. 인생이 여전히 숙제 같다고 말했던 그는 그렇게 살다가 신록이 한창 푸를 나이에 그토록 만나고 싶은 신을 찾아 떠났다.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던 나는 그 날 장례식장에서 그저 멍한 눈으로 그의 영정 사진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묻고 있었다. 그토록 알고자 했던 대답을 지금은 신에게서 들을 수 있게 되었는지 말이다. 친구는 가고 그의 질문은 이제 내 몫이 되었다. 내 몫에 그의 몫이 더해진 만큼 절박함도 더 늘어났다. 차동엽 신부는 이 책에서 군복무 도중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올 인 아니면 올 아웃'하는 기분으로 절을 찾아갔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느 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의 갈망이 너무도 커서 나 역시 종교의 귀의해 볼까 하고 한 겨울밤 미친 듯이 교회를 찾아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 때 그 중 한 교회라도 내게 문을 열어 보인다면 진심으로 귀의할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밤에 내게 문을 열어준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한 때는 그토록 절박했었다. 삶과 죽음, 고통과 신의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이제는 세월이 흘러 책갈피 삼아 끼워둔 낙엽이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바래지고 부서지듯이 그 때의 갈급함 역시 많이도 산산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마지막 질문과 그 대답이라는 말에서 낯익음을 느끼고 이렇게 바로 이 책을 손에 잡고 읽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그 낯익음엔 까닭이 있었다. 차동엽 신부는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 이병철 회장이 물었던 질문들은 개인만의 질문은 아니며 그 질문들은 우리들이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묻게 되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그래서 바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사실 그랬다. 톨스토이가 소설로 풀어내었던 질문이나 나나 친구가 가지고 있었던 물음 역시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이라는 차동엽 신부의 표현 그대로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고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누구나 다 묻고 싶은 물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질문으로 생각하고 이 책을 읽었다. 과거의 언젠가 절박하게 해답을 찾았던 나를 떠올리며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떠나간 친구에 대한 내 나름의 위령(慰靈)이기도 했다. 지금쯤은 벌써 해답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차동엽 신부의 글을 통해 그 친구가 찾게 된 대답은 무엇일까 간접적이나마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읽게 된 이 책, '잊혀진 질문'은 읽어보니 이 책은 참으로 장점이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를 말한다면 우선 이 책은 쉽다는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들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신의 존재나 고통의 의미 혹은 지구의 종말 등 그 대부분이 철학적으로 난해하거나 종교적으로 심오한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대답의 수준은 질문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니, 이러한 높은 차원의 질문들일 경우 그 대답 역시 난해하기 십상이다. 그동안 우리가 접해본 철학책들이나 성경 강해서등을 조금만 떠올려 봐도 여기에 대해 별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처음에는 아무래도 질문이 질문이다 보니 이 책 역시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에 불과했다. 이 책은 정말 쉬웠다. 그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청소년들도 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평이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더구나 시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이나 예술 혹은 과학 이론을 비롯하여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각종 통계 자료들이나 풍부한 예화들까지, 차동엽 신부는 자신의 논의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서게 하기 위하여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인용해 넣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나처럼 살면서 한번쯤 이러한 질문들을 품어본 이들이라면 나름대로 그 대답을 스스로 찾아가는데 있어 그야말로 더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뿐만아니라 특히나 예화들의 경우,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꼭 새겨두고 싶은 아주 인상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에 행여 그 논의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예화들을 얻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벗할 가치가 있었다.
쉬운 것만큼이나 강조하고 싶은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커다란 장점은 바로 진솔함이다. 이렇게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심오한 질문들을 다루는 책의 경우 따를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독자들에게 뜬구름 잡기 식의 허황된 말놀이로 그치고 마는 경우일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논의 자체의 부실함도 한 몫 하지만 더 큰 원인은 바로 독자들이 지은이에게서 허영과 가식의 냄새를 맡을 때이다. 즉 아무리 고차원적이고 또한 빈틈없는 논리로 말을 하더라도 정작 말하는 이 자신이 그와 같은 것을 전혀 믿고 있지 않음을 글에서 느끼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그 순간부터 빛을 잃고 다만 말 무더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책이더라도 지은이의 솔직함은 무엇보다 책에 담긴 내용들이 독자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느냐 아니면 그저 죽은 말로 남느냐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들이 '잊혀진 질문'처럼 바로 우리 삶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사실 차동엽 신부가 풀어내는 말을 읽지만 그 말을 정말 내 가슴의 생생한 언어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은 차동엽 신부가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의 삶의 가치와 자세로 여기고 있음을 볼 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난 이 책이 보여주는 진솔함을 크게 평가하고 싶다. 차동엽 신부는 아마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기 삶의 편린들을 담아내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편린들을 통하여 지은이 역시도 자신이 하는 말을 정말로 충실히 믿고 있으며 삶의 기본적 태도로서 실천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감명 깊게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냥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그대로 우려낸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24년이 지난 지금 더욱 어렵고 힘든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내가 꼽는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히 논의를 위한 책이 아니라 진심으로 읽은 이에게 힘과 위로를 주려는 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차동엽 신부는 고 이병철의 질문이 단순히 그만의 질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질문임을 강조했던 것이며 또한 거기에 대한 대답 역시 철학이나 신학에 전혀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해하기 쉽게 써 내려갔는지 모른다. 차동엽 신부는 이 책 자체가 추운 겨울과도 같은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당신에게 따스한 차 한잔이 되길 원한다. 따스한 위로의 온기로 언 몸을 녹이고 온 몸에 퍼지는 차의 원기로 다시 일어날 힘을 얻게 되길 바란다. 이러한 그의 바람은 무엇보다 책 내내 들려오는 그의 친근한 어조에서 바로 느껴진다. 차근차근 조곤조곤 말하는 그 품새가 꼭 그 옛날 학창시절 모르면 끝까지 차분하게 가르쳐 주시던 내가 정말 좋아했던 선생님을 닮았다. 그 선생님이 애타는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르쳤듯이 차동엽 신부 또한 어떻게든 독자에게 온기와 원기를 북돋아 주려는 그 마음이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그 자신의 삶마저 그토록 녹여두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싶다. 그 때문인지 정말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손이 되어 내 등을 토닥이는 것 같았고 두 팔이 되어 지친 내 몸을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멀리 가버린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괴로워 내 두 눈에 눈물이 얼핏 어릴 때면 조용 조용 위로하는 듯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리가 찾고 싶었던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고 삶을 지속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긍정과 위로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 그 가을 친구의 고백 역시도 사실은 내게서 진심어린 위로와 넌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긍정의 말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만일 바라는 대로 대답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은 내 삶의 긍정과 위안 말고는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아... 그래서... 여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왜 차동엽 신부가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 책의 장점, 그러니까 왜 이 책이 설명 보다는 위로와 힘을 주는 것에 맞춰져 쓰여졌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 해답 추구의 궁극에 위안과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차동엽 신부는 알았던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이 왜 죽음을 앞두고 그러한 질문을 던졌으며 그리고 많은 이들이 왜 그토록 삶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지 바로 그것들은 내 삶을 긍정하고 지금의 고통에 뭔가 의미가 있음으로 스스로를 위안 받고 싶은 바람의 또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야 더욱 제대로 차동엽 신부가 건넨 차 한잔의 따스한 온기가 온 몸에 가득 퍼지는 듯 하다. 멀리 떠나간 친구로 인해 우울했던 마음 역시도 그 따스함에 풀어지는 듯 하다. 차동엽 신부의 말들로 내가 위로와 힘을 받은 것 처럼 친구 역시도 저 하늘 어딘가에서 그 자신 궁극적으로 찾고 싶었던 위로와 긍정으로써 이제 온전히 고통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순진한 미소로 언제나 자기 보다 타인에게 먼저 마음을 쓰던 착한 친구. 그 영혼 만큼이나 아름답게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도 너의 그 순박하고 욕심없던 웃음은 오늘 이 밤 참으로 그립구나... 그 웃음에 차동엽 신부가 달여 놓은 따스한 차 한 잔을 진심으로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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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 한 권의 책이 던진 묵직한 질문들이 참으로 무수히 쏟아지는구나.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들,,, 차동엽, 노르베르또 신부는 관악산 기슭 달동네 난곡에서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 배달을 하며 어렵게 공고에 진학 공부했고,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들어갔지만, 기계를 발명해 편리한 세상을 만드는 것보다 세상의 진정한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어 사제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 즉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을 평생의 미션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사실,,, 종교적인 색채가 짙으면 어쩌나,, 싶어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었으나,,, 1987년 죽음을 앞두고 작성된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니,,, 호기심을 자극했음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그가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에게 보낸 질문지라니 말이다. 생의 한 가운데 내 존재의 이유, 내 인생의 고달픔의 이유, 내 시련의 몫은 도대체 왜?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묻으려 해도 묻히지 않는, 잊혀진 질문들을 통해 사람은 어디에서 온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하는가? 죽음에 직면한 대기업 회장이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질문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한 이야기들,,, 조심스럽게 얘기하며 정답이 아닌 길을 제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했기에 선뜻, 누구도, 답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차동엽 신부가 집어 들었다. 왜? 그가 살아가는 평생의 미션이 바라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갖게 하는 것,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그게 바로 답의 시작이자, 답의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을 오랜 시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을 Big Q와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을 Real Q로 나뉘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정답이나 해답일 순 없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던져진 질문을 통해 답을 구해보고, 변화할 순 있을 것이다.
“왜 나에게만?” 누구나 이런 한탄을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왜 나에게만이 아닌,, 누구나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가 나에게도 닥친 것이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내 생채기가 가장 아프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내 인생은 왜 힘들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늘 행복하고 힘들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있었던가? 힘들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즐거울때보다 힘들때가 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혹독함이나 고통은, 성장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 괴로운 경험은 왜 이리 복잡한 것일까? 이 세계는 왜 나에게만 불공평할까? 하지만 고통, 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 두려움, 불안, 분노, 노여움이 다가올지,, 아니면 강력한 희망, 꿈, 긍정적인 마음, 균형 있는 안목이 다가올지는 ,,, 선택의 권리는 나에게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가져오는 변화나 더 좋은 시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결국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이고,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찾는 변화란 얘기를 던지고 있다. 물론,,, 이것을 깨닫기까지 삶의 전부가 필요할른지도 모르겠지만,,,
“청춘이든 노년이든, 누구에게나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불만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 직장, 집, 가족, 친구 중 못내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늘’이 다시 주어졌습니다. 이 오늘은 매일 주어지는 ‘덤’입니다. ‘오늘’이야말로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고, 주어진 것을 만끽할 무제한의 가능성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오늘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오늘이 매일 주어질 터이니, 더는 꿈을 이룰 기회가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 356쪽
어디서 들은 듯한, 어디서 읽은 듯한, 어디서 경험한 듯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슴을 친다. 왜일까?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자신이 가진 견해와 사상을 통해 흔들림 없는 태도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피력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신념을 갖고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 정치, 종교, 문화, 사회를 떠나 자신만의 신념으로 가슴 뛰게 할 잊혀진 질문에 희망으로 답하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이 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인생을 건 절대적인 신념이자 깨달음인 잊혀진 질문의 답,,, 희망이 주는 세상의 울림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가 잊을 수 밖에 없었던, 하지만 우리가 잊으려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질문들을 다시금 되물으며 외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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