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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한 유명 작가의 선입견이나 주관적인 결정이 일반적인 독자의 자유로운 책 선택과 읽기를 저해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에서부터였다. 그것은 문학을 말하기 이전에 삶에 대한 진솔한 느낌들을 먼저 만나고 싶어하는 者로서의 당연한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의 책 선정이 자신의 경험 아래 놓여진 편파적인 강요가 된다면 독자는 다시 제도권적인 읽기의 범주 내에서 허덕일 가련한 운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문열이라는 우리 문단의 거대한 장인(匠人)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오히려 새로운 아집과 독선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음을 염려한 탓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번의 선집에서 제시해놓은 주제어들에 우선적으로 반응했다. 삶에 있어 모든 것을 총괄해 놓았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주제어들은 이 책들이 주는 진지함을 예견케 했고, 그 중에서 제3권 <성장과 눈뜸>에 집요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단어들이 젊음을 지시하기에 가장 예리한 수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그토록 빛나 보이던 젊음에서 한 걸음쯤 물러난 지금의 나로서는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 이제는 젊음에 대하여 향수에 가까운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더구나 나는 여전히 젊음이 주던 흥분과 희망을 알지 못하며, 그 가련하기조차하던 젊은 날의 무거움과 기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결코 화해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한 조소는 여전하고, 물리적인 부조리에 대한 고찰 또한 과잉인 채로 남아있다. 도대체 그 화해의 첫 출발점을 어떻게 잡아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혼란 속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제법 독기 서린 눈빛으로 <성장과 눈뜸>을 대했다. 조그만 허점이라도 발견한다면 한 장인에 대한 애초의 신뢰는 여지없이 실망으로 돌아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고백이 될지 모르나 이번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에 세심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던 경험은 없었으며 또 그만큼의 기대로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을 접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서문에서 밝혀 놓은 대로 섣부른 판단이나 독선에 의한 단편적인 제시가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대목이었다. 이것은 차후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오랜 성찰과 고심이 선자(選者)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일깨우고 있었으며 그 무거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자의 번민이 엿보였던 것이다. 더욱이 읽는다는 행위의 즐거운 감격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도 책 속에 실려있는 낯설기 그지없는 작가들의 예외적인 선정은 신선함을 넘어 일종의 당혹스러움으로까지 비춰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현재의 독서 풍토가 잘 알려진 작가들에 머물러있다는 편협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대로 이 책의 폭넓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프랭크 오코너', '후앙 기마랑스 로사', '스티븐 빈센트 베네', '싱클레어 루이스'라는 생면부지의 작가들을 한꺼번에 만나고 그들이 보여주는 작법에 환호작약하였다. 그런가 하면 젊은 시절 내 정신을 무겁게 가라앉히던 '토마스 만'이 보여주는 다른 세계의 소식을 들었고, 오래 잊고 지냈던 '플로베르'와의 감격적인 재회를 맛 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 안에는 책읽기의 흥겨움을 가르치는 '에이빈트 욘손'이 있으며 또한 새로운 무거움으로 자리한 '제임스 조이스'의 상처들이 있다. 하물며 '헤세'와 '체홉'에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이들이 보여주는 여러 갈래의 군상(群像)과 행위들을 통해 아무런 직접적 동기 없이 오랜 짐작만으로 세상을 가늠하던 착오를 조금은 깨우칠 수 있었다. 만약 젊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눈부심, 혹은 처절함이 곳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삶에 대한 인위적인 조율(調律) 같은 것은 없다. 정형화된 문법을 강요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어느 한 순간까지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요란스런 비밀을 인식하게 되는 감격스러움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장은 죽음이나 삶, 어느 한 쪽에 대한 눈뜸의 과정이라고 말한 편자의 말은 옳다.
<성장과 눈뜸>에서 가장 눈부시고 빛나 보이는 부분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로부터 시작된다. 스물이 되기 전의 어리숙함으로도 경도될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이 주던 장엄한 울림에 비하면 선량하기조차 한 <토니오 크뢰거>의 말들은 왜 책을 읽고 어떻게 '삶'을 배우는가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리자베타.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일종의 고백처럼 저는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삶'은 피로 얼룩진 거대한 전쟁터나 광포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삶'이란 비정상적인 인간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삶'이란 정상적인 것이고 존경할 만한 것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것으로, 우리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세계입니다." (p97)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예리한 관찰인가. 방법론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에 의해 느끼고 말하며, 결국은 의도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유로운 화법. 게다가 예술이란 결국 일반적인 삶과 다르지 않다는 시선은 새삼스러운 충격이었다. 그것은 '길을 잘못 든 속인'이 보이는 연민이며, 기만적인 예술 지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그런 통찰에 이르기까지 지녔을 고통들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다.
나는 당 시대의 거장들이 보여주는 성장과 눈뜸을 통해 한 번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젊은 날의 치기와 좌절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 속에 녹아있는 삶의 정신들을 사유의 과정으로 삼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일천한 소견으로서는 이문열 씨가 말한 대로 이 책이 문학으로서의 한 전범(典範)이 될지, 아니면 주제 나열을 가한 단편적인 재구성에 그칠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 가지는 놀라운 흥분과 감격들을 이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 부인해 왔던 내 젊은 날의 치열하던 '성장'을 돌아보게 했으며, 어느 순간에서는 꼭 [인상깊은구절] "리자베타.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일종의 고백처럼 저는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삶'은 피로 얼룩진 거대한 전쟁터나 광포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삶'이란 비정상적인 인간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삶'이란 정상적인 것이고 존경할 만한 것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것으로, 우리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세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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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씨가 선정하여 펴낸 세계 명작 모음집이다. 10권까지 있는데, 각 권마다 주제를 정해놓고 그 주제에 맞추어 작품을 선정했다. 3권의 주제는 성장과 눈뜸이다. 주제에 맞게 이 책에 실린 10편의 단편소설은 전부 성장 소설인데, 전부다 한번 읽어 볼만한 작품이다. 세계 명작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단편이지만, 전부다 깊이가 있다. 짧은 분량에 어떻게 이렇게 심오한 오의를 풀어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성장 소설이라 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큰바위 얼굴' 같은 소설이다. 맨 처음에 나오는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주인공 조니 파이의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삶의 모습을 단편 단편으로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바보귀신으로 희화화된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나이가 먹어감에 따른 태도의 변화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큰바위 얼굴'을 읽었을 때와 같은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향해 막 피어나는 유년기의 풋풋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인상깊은구절] 어떤 계기로 삶의 오의를 포착하는 순간 그 의식은 이미 그 이전의 의식은 아니다. 크건 작건 삶과 죽음에 관한 눈뜸은 의식의 새로운 태어남을 뜻하는 동시에 낡은 의식의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러한 눈뜸의 과정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이인 동시에 고통이다. 삶과 죽음은 때로는 미혹 혹은 신비로 안개를 피워 올리고 때로는 심술궂은 무의미로 위장해 우리의 둔감을 유도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개는 걷히고 둔감의 굳은살이 터지며 우리는 눈길을 찌르는 햇살 아래 갓 돋은 살갗으로 그 진상과 대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