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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미 우리에게 순전한 기독교(홍성사刊)로 익히 알려진 C. S 루이스의 유작과도 같은 책입니다. 저자의 탁월한 기독교적 지성은 잠잠하게 때론 처절하게 슬픔을 드러내고 있는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 합니다. 기쁨과 슬픔, 가슴 벅찬 감동과 지극한 비애가 교차되는 감정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요. 서두는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비탄이 공포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체험하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란 감정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연이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말합니다.'비탄의 나태함에 대해서 나에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과 적막함을 표현한 것인데 읽는 첫 순간부터 상당한 충격을 주지요. 한편으론 아내가 세상을 떠난 시기에 저자의 나이가 60세를 넘었음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감각적인 말들은 어쩌면 사치스런 감정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 나이가 되어도 사랑의 슬픔에 대해 그토록 순수하고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서술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이겠지요.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만약 신이 사랑의 대용물이라면 우리는 신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어야 옳았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저자가 단지 그러한 슬픔 속에 매몰되어 비탄에만 잠기는 아주 값싼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절대적 고독 앞에서 저자는 자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좌절과 슬픔의 깊이에 비례하여 신과의 대면 또한 간절하게 표현하지요.
'어찌하여 신은 우리의 행복과 번영 속에서는 그토록 엄연한 지도자로 존재하면서 그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우리의 역경 속에서는 이토록 철저하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래, 신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래, 이것이 바로 신의 참된 모습이다. 더 이상 네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기독교가 이해하는 신, 즉 여호와 하나님이 왜 경외의 대상인지, 왜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사실 기독교인은 이 세상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 흔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은 우리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해 그런 문제나 고통도 주시는 것이다'라고 그저 쉽게 말해버리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 굳게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께 자비를 애걸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더욱더 굳게 믿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한 카이로스의 시간이요, 최종적인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지요. 만약 심한 고통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나쁜 신이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선량한 신(그것도 완전히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고통은 필요한 것이라는 아주 극명하고 논리적인 사실인식의 문제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과 결단이란 강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단지 저자는 그 분이 완전히 선량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문제의 해결책이나 희망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 도움을 청하는 외침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 때가 아마도 신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때인지도 모른다 ; 우리는 꽉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물에 빠진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어쩌면 되풀이하여 외쳐대는 우리의 고함소리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듣기를 갈망하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말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자아를 버리고 신발을 벗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려주는 듯 합니다. 호렙산의 모세처럼.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짧지만 감동적인 명작이라 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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