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 혹은 데뷰작이 르노도상을 받으면서 대중적으로 그리고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된 죠르쥬 페렉. 작년2002년이 그의 사망 10주기여서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곤 한 것 같다. 이 책은 "60년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학계에서는 소설이 아니라 시대의 보고서라고 정의를 내릴 정도로 그 당시 프랑스의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자꾸자꾸 대비가 되는 것은 왜 일까? 프랑스라는 공간적 차이 그리고 40년이나 차이가 나는 시간적 깊이와는 상관 없이 소비와 소유를 지나치게 부추기는 후기 소비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매스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을 속에서 허우적 대는 제롬과 실비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
"우리의 욕망은 치유할 약이 없다."
책의 서두. 마치 카메라가 촬영하듯이 방안의 풍경이 묘사된다. 다소 이국적인 풍경이긴 하지만 늘상 꿈꾸어 오던 장면과 거의 다르지 않다. 커다란 가죽소파, 고풍스런 장식품들, 영국풍의 커다란 침대, 책장 가득 꽂힌 책들. 단순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이 있는 풍경. 느지막한 아침, 저절로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토스트와 커피만으로도 풍요로운 아침식사를 하고 늦은 오후 슬슬 카페로 나가 커피 한 잔에 신문을 읽는 그런 모습. 그런 모습엔 소설에 나오는 문장대로 물질적인 삶과 관련된 모든 의무들과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있을 테고 그저 간단하고 쉬운 삶만이 있을 것이다. 그래, 사실은 내 머릿속 어디엔가에도 이런 풍경이 꿈의 한자락처럼 고이 접혀져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뜨끔했던 것도 내 머릿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롬과 실비,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꿈꾸면서 늘 '부자가 되고픈 욕망'에 시달리는 그들, 그들은 "좀 더 넓은 방과 샤워실, 식단이 다채로운, 학생식당보다는 좀더 양이 많은 식사, 그리고 자동차와 레코드, 바캉스, 옷"을 원한다. 마치 부에 대한 환상에 취해 있는 것처럼 안락한 생활에 대한 환상과 현실적인 생활 사이에서 아슬아슬 오고 가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위태해 보였다. 그들은 꿈꾼다. 백만장자가 되기를, 좀더 넉넉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를. 그렇게 비현실적인 꿈만을 바라보는 생활 속에서 일상은 당연히 후줄근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부가 안정적인 생활의 바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부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때 삶은 너무나 황폐해진다. 그렇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물질적인 것에 맞춰졌을 때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페렉은 제롬과 실비라는 두 인물을 통해 쓸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소비사회에 관한 탁월한 사회학자의 보고서>라는 평을 받으며 '소설이냐, 비소설이냐'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작품. 페렉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순한 방법으로 살기를 방해하는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광고의 유혹"이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경제의 안정성은 노동자 계급을 생산력이라는 차원에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는 것보다 여가의 정신적 성격을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비평가의 해설 중 한 부분은 그런 점에서 매우 귀담아 들을만 하다. 노동력보다 욕망에 집착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광고는 그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잘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통제가능한 욕망을 즐겨라, 욕망의 노예가 되지는 말아라. 광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말라. 이 책을 읽고 나서 대충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부자가 되라고 충고하는 서적들이 붐을 이루는 요즘, 가난은 죄이고 부는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현실 속에서 현실적인 수단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연결지점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을지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 쓸쓸하게 들렸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고 한동안 그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거금을 들여 [인생 사용법]을 장만하고 만만치 않은 시간을 들여 읽어나갔지만, 당연히 지금도 조르주 페렉을 알 지 못한다. (아, 벌써! 페렉은 죽었다.) 학부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대출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멋진 얼굴 때문이었다. 프랑스 소설치고 가벼운 것은 별로 없지만 간단하고 가벼운 소품으로 생각하고 [사물들]을 읽어나갔지만 의외로 만만치 않은 훌륭한 작품이었다. 아마도 인간이 물신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페렉의 [사물들]은 언제나 빙글거리고 능글거리는 그의 웃음처럼 우리들을 풍자하고 조롱하고 있을 것이다. 페렉의 꼼꼼하고 치밀한 묘사와 풍경을 이어가는 흐름은 탁월하다. 매끄럽게 진행되는 풍경에 대한 문장들은 곧바로 상상으로 이어지는 체감으로 전해졌다. 문장의 즉각적인 실체감, 치밀한 구조와 엄중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문장 실력이어야만 이런 입체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 병장 말년에 하일지의 지루한 소설을 모조리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역하고 나서는 하일지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못했는데, 당연히 그의 지리멸렬하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묘사에 대해 이제는 재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맛이 하나도 없는 영양제 덩어리를 꼼꼼하게 씹어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페렉의 묘사는 훨씬 더 정감 있고 맛깔스러운 느낌을 준다. ([경마장 가는 길]에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오는 성교장면을 거의 외우다시피했던 욕구불만의 시절에, 그래도 하일지는 훌륭한 진정제 역할을 했었다. 흐흐, 이제는 그 장면을 읽어봐도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 참 시간이 많이 흘렀다.) - 예를 들자면 시체를 해부할 때 하일지는 철저히 직업적으로, 객관적으로 대한다면, 페렉은 다소간의 애정과 인간미를 가지고 대한다고나 할까. 주인공 제롬과 실비는 그들이 원하는 사물들에 의해 종속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사물들에 의해 행복을 좌지우지 당한다. 이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은데 그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니 을 보는 거북함과 씁쓸함을 준다. 소설을 읽는 내내, 페렉은 철저하게 바라보는 자의 시각으로 일관했다면, 독자인 우리는 철저하게 발가벗겨지는 자의 입장에 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어느 누가 이 소설의 풍자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불행하게도 인간의 역사는 당분간 이 풍자의 세례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것이 자명해보이니 우울할 뿐이다. A : 사물들의 의미는 그들의 결혼에 의해 형성된다. 즉 그들은 그들 사이의 인척관계 때문에 그들 자신이 된다. 인간은 그들의 혼례를 주선하고 주례한다. 인간은 사물들의 결합에서 생겨나는 황홀의 전부를 갈취하는 ‘펨프’이다.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에서 B : 불을 쬐듯이 불행을 쬘 것, 다만 너 자신의 살갗으로! 목적과 방법의 의도적 혼동. 사물의 집인 네 마음이 악기가 아니라(그보다 더 가난해야 한다.) 사물 자신이 너의 악기이도록 할 것.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에서 A의 진술에서 B의 진술로 건너가기 위해 인간은 위선적인 희생 - 대다수의 인간은 이 과정을 행복의 과정으로 느낄 것이리라! - 을 견뎌낼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인간의 인생은 마모되어 사물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순간이 곧 오리라. |
|
1. 이 소설 <사물들>은 1960년대 파리에 살았던 20대 청춘들의, 말하자면 현대소비사회 부적응기다. 설문조사원 커플인 제롬과 실비는 직장생활의 지겨움을 꿋꿋이 견뎌내며 나름 프티부르주와적 소비를 만끽하며 살고 있지만, 돈을 벌면 벌수록, 더 높은 수준의 의식주를 소비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진짜 부자가 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절망스럽게 깨닫는다. 궁상맞은 방 두 칸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뻔하기 짝이 없는 레스피로 만든 요리로 친구들과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는 따위의 생활은 결국 두 사람을 파리에서 떠나게 만드는데, 그렇게 해서 떠난 곳이 그래봤자 튀지지, 거기 수도에서도 동쪽으로 170킬로미터나 떨어진 스팍이라는 곳이다. 여기서 실비가 학교 선생을 하며 버는 수입으로 한 1년을 버텨보지만 그나마 파리에서 근근히 향유하던 문화생활에 비하면 역시 비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파리로 귀환하고 만다.
2. 제롬과 실비가 살았던 1960년대의 파리는 그런데 어쩐지 2010년대 우리 청춘들의 삶과 매우 닮았다. 아직도 뭔가 신분상승이나 일확천금의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다소 허술해 보이는 사회체계, 그 안에서 발버둥쳐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질낮은 일자리뿐. 그렇다고 그 일마저 피해버리면 곧장 패잔병이 돼버릴 것 같은 냉혹한 현실 또는 공포!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은 도저히 수십 년 전 남의 나라 젊은이들의 심경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삼십에는 어떤 목표에 도달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면, 즉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면, 사무실과 배지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56쪽)
어쨌든 다른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사람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중략) 그들은 종일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과 게으른 기상의 아침나절을, 탐정소설과 공상과학소설 등을 뒤적거리며 침대에 파묻히는 것, 부두를 따라 걷는 한밤중의 산책, 문득 가슴에 부딪혀오는 자유의 벅찬 감정, 지방에서 앙케이트조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휩싸이는 휴식의 감정을 사랑했다. 물론 그들은 모든 것이 거짓이며 그들이 누리는 자유 또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요컨대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고 어리석은 상황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중략) 벌써 오래 전부터 일과 자유의 대립은 더이상 엄격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삶을 결정짓는 첫번째 조건이었다. (57~58쪽)
공부를 끝내고 병역 의무를 마친 젊은 남자는 막 스물다섯일 테고 전문지식 덕분에 이전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돈의 잠재적인 소유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언젠가 아파트와 시골 별장, 자가용, 하이파이 전축을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러한 흥분된 약속들은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기다려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에 결혼, 아이들의 출생, 도덕적 가치관과 사회적 태도의 변화와 동일한 궤도 위에 놓여 있다. 요컨대 한 젊은 남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15년이 필요할 것이다. (59쪽)
한 명씩, 한 명씩,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항복을 선언했다. 닻줄이 없는 삶 대신 안정된 생활이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중 누구도 이처럼 삶을 계속할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이 <이처럼>이라는 표현은 막연한 몸짓이었다. 역마차와 같은 나날들, 너무도 짧은 밤, 으깬 감자, 해진 옷저고리, 고된 작업, 그리고 지하철을 가리키는. (74쪽)
단순성과 통찰력의 부재, 그것이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잔인하게도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부유함과 마찬가지로 여유 있는 마음이었는데, 그것은 가장 심각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단지 객관적인, 물질적 풍요로움만이 아닌 일종의 거침 없음, 즉 일종의 여유였다. (26쪽)
3. 물론 이런 우는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울리포(Ouvroir de Literature Potentielle, OuLiPo)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에서 보여주는 울리포의 정신이란 무엇보다 페렉이 이 소설의 1장은 조건법(현재), 마지막장은 미래형, 중간 이야기들은 반과거와 단순과거로 굳이 나누어 썼다는 점일 것이다. 페렉은 일찍이 알파벳 e가 없는 장편소설('실종', 1969년)을 발표하기도 했고, 1972년에는 거꾸로 알파벳 모음 가운데 e만 사용한 소설('돌아오는 사람들')을 발표한 바 있다. 즉, 페렉은 도전정신이랄까 실험정신 만땅인 작가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울리포의 정신일 것이다. 그는 비록 마흔다섯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지만(1982년), 그의 도전과 실험은 그의 작품과 독자들의 감동 가운데 유구할 것이다.
4. 스팍 제롬과 실비가 임시로 지냈던 튀니지의 스팍(Sfax)이라는 도시는, 소설에서는 비록 썰렁하기 짝이 없는 아프리카의 여느 중소도시로 묘사됐지만, 구글을 뒤져보니 썩 예쁘고 매력적인 도시처럼 보인다. ![]() ![]() ![]()
5. 세계사, 정영문, 한유주 이 소설을 읽은 바로 그 주에 소설가 정영문 선생님을 만났다. 서로 요즘 피곤해죽겠다는 엄살을 떨며 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엄청나게 존경하는 작가와 더불어 담배를 물고 문학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라스베가스나 러플린 같은 도박장에서 500만원짜리 한방을 터뜨리는 것과 같은 기쁨을 주는 체험인데, 이 정영문 선생님께서 인근으로 이사오신 덕분에 요즘 그런 기쁨이 잦아지고 말았다. 아무려나, 그와의 대화는 세계사라는 출판사에 대한 나의 걱정이랄까 푸념으로부터 시작했다:
나: 세계사가 1996년에 페렉의 <사물들>을 낼 때만 해도 참 갸륵하고 전도유망한 출판사였는데 그 뒤로는 너무 잠잠하네요? 정: 아, 그땐 최승호 시인이 편집장을 맡았던 때죠. 프랑스 소설들뿐만 아니라 꽤 좋은 문학서들을 많이 냈었죠. 나: 그러고보니 제가 2000년부터 한 2년에 걸쳐서 한겨레문화센터 야간과정에서 출판편집, 출판기획, 출판창업 같은 과정을 밟았는데 거기에 바로 세계사 직원들이 배우러 왔었네요. 회사에서 뭔가 해보려는 마음이었으니까 직원들을 그렇게 돈 들여가며 재교육했던 거겠죠? 정: 글쎄 뭐, 그때쯤해서는 최승호 선생님이나 그 팀이 세계사를 떠났죠. 사장이 문학출판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고, 90년대에 뭔가 해보려던 기획들이 다 흐지부지됐죠. 사실 나도 96년에 세계사에서 내는 잡지 <작가세계>로 등단한 거죠. 나: 아, 맞다. 그렇지요? <사물들> 같은 앞서가는 실험적인 소설을 내던 시기니까 그때 선생님이 거기에서 데뷔한 게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네요. 아, 그나저나 페렉이 이 <사물들>에서도 장난스럽게, 처음에는 불어 조건법을 쓰다가 중간에는 과거로만 가다가 나중에는 미래형으로 가거든요. 울리포 그룹이란 게 아마 이런 걸 좋아하는 이들인가 봐요. 참, 그런데 혹시 페렉 말고 울리포의 다른 작가중에서 제가 알만 한 사람이 있을까요? 정: 페렉이 유명하고, 나머지는 나도 뭐.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도 울리포 좋아하는 이들 좀 있죠. 한유주라고, 아직 서른이 안 됐지만 장차 우리나라 소설계를 이끌 재목인데, 그이가 집에다가 출판사를 차리고 그 이름을 '울리포_ad'라고 했데요. 나: 저 이제 집에 갈게요.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출판사검색(http://61.104.76.20/html/)을 해보니 한유주 선생이 진짜 등록해놓은 출판사가 있고 그 이름은 '울리포 프레스'다. 아직 나온 책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이가 진짜 울리포를 좋아하나 보다. 다른 신인작가가 작가들과의 술자리 객담을 제 블로그에 끄적여놓은 것을 보니까, 너무 얌전을 빼고 있던 이 신인작가에게 뜬금없이 한유주 선생이 "울리포 쪽으로 데려가려고 해요"라고 했단다. 흠. 그리고 정선생님이 추천해준 베케트의 <몰리>를 책장에서 찾아봤는데, 없다. 청목출판사에서 1991년에 나온 <고도를 기다리며>에 붙어있지 않아 싶어 열어봤더니, 아뿔싸, 여기에는 황당하게도 아그논이라는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들이 들어있다. 표지안밖에는 온통 베케트 사진과 이름뿐인데 책속에는 은근슬쩍 다른 작가의 작품들을 우겨넣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가 한유주를 검색해보니, 내가 지난겨울에 사읽을까말까 잠깐 고민했던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의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의 작가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결국, 날이 새자마자 서점에 사람을 보내 이 소설책을 사와서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완전 재미있다!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