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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책을 좋아했던 것은 20대였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98년 정도에 읽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져 아예 휴가를 하루 내고 집에 들어앉아 이 책을 읽었다. 세계명작은 어릴 때 읽고, 훗날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면 느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 이야기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단지 '좋았다'라는 잔상만이 남아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500페이지 넘는 책이 단숨에 읽혔다. 그 즈음에는 아마 '읽어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뒀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 늙어서 이 책을 읽으니, 그 시대의 배경이나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느낌이 남달랐다. 특히, 내가 이렇게 광적이고 자극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탓도 있겠지만. 힌들러는 보편적인 부잣집 나쁜 놈이다. 캐서린은 선택장애(?)와 막장 이야기 전개에 큰 공을 하는 정신나간 인물이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이런 캐릭터는 별로인데, 소설속에서는 이런 인간들 덕분에 이야기가 재미나게 된다. 그리고 히스클리프. 폭풍의 언덕=히스클리프,라고 할 정도로...매력적인 인물이다. 엽기적인 복수도, 집착에 가까운 사랑도, 그로인한 광기있는 행위도 괜히 측은해진다. (헤어튼과 캐시가 보여주는 해피엔딩 같은 결말은 조금 아쉽다) 어느 방에 틀어 박혀서 끊기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따면 세계명작만 읽다 죽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루에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보니, 세계 명작을 손에 잡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저런 쓰레기같은 출판물을 읽어내느니...어쩌다 한 번이라도,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하기는 더 이로울게다. 만족스러운 책이고,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덧붙임. 이 책의 번역이 조금 아쉽다. 내 기억에도 예전에 읽었던 책보다는 더 잘된것 같기는 한데, 등장인물들의 사투리가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되다보니, 폭풍의 언덕이 저기 부산 근처에 있는 건가 싶기도했다. 나름대로의 최선책이였겠으나, 거부감없이 독서를 할 수 있는 번역법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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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에 관심이 생기고 난 후에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단편소설만을 보거나 짤막짤막하게 발췌본을 보곤 했었어요. 문학동네 출판사의 책들은 표지도 멋지고 번역도 잘 되있다하여 구입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작가의 기발한 등장인물의 감정 묘사와 재미난 대사들이 원본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궁금하여 원서도 구입하여 읽어보려 합니다. 좋은 시간 선물 받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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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새로 세들어 살게 된 영국인 록우드 씨는 소유주인 히스클리프와 대면키 위해 폭풍의 언덕을 찾는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 씨가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폭풍(wuthering)'이라는 말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이 고장의 표현이다.”(p.11) 그곳에서 하룻밤 묵게 된 록우드 씨는 악몽을 꾸다 캐서린 린턴의 유령을 만나고 주인의 미심쩍은 행동까지 목도한 후 간신히 돌아온다. 록우드 씨는 하녀장인 딘 부인으로부터 자신이 만나고 온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 듣는다. 언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헤어턴과 린턴 가문의 마지막 후손 캐시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는 힌들리와 캐시의 아버지 언쇼가 “악마에게 받은 것 같”은 까만 피부의 아이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오던 날부터 시작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김정아 옮김,문학동네,1847,2011,544쪽)』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을 문학적 교양의 수준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칭했다.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주에서 성공회 사제의 딸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와 함께 세 자매는 필명으로 공동 시집을 출간한다. 다음해인 1847년 각자의 작품이 나오는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 되며 1848년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간 당시에는 비도덕적이라고 비판이 많았으나 반세기 후 서머싯 몸, 버지니아 울프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고 지금까지 영화와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조명받고 있다.
아버지 언쇼는 아이들에게 약속했던 선물 대신 히스클리프를 데려왔고 극진히 편애한다. 눈에 보이는 부당함에 아들인 힌들리는 원한을 새기지만 캐시는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힌들리의 원한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줄지 않았고 특히 아내가 죽은 후에는 학대와 자학 사이에서 망가져 간다. 캐서린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에드거 린턴으로부터 청혼을 받아들인다. “천국에서 살면 너무 불행할 것 같”(p.129)다는, 천국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캐서린은 이 결혼에 대해, 그리고 히스클리프에 대한 진심을 넬리에게 털어놓는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p.130)라는 이 유명한 문장을 당사자는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린턴에 대한 내 사랑”과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p.133)이 어떤 격차를 지녔는지를 듣지 못한 채 나가버리고 3년이 지난 후에 둘의 재회는 이루어진다.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격변을 예고하면서. 그야말로 폭풍이다.
소설은 화자인 하녀장 넬리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상황 전개, 인물의 드러난, 또는 숨은 감정도 넬리의 해석을 거친다. 그녀는 아내 캐서린의 죽음을 슬퍼하는 린턴을 보고 캐서린의 축복받은 해방을 슬퍼하니 헌신적 사랑 안에 이기심이 들어있음을 단정한다. 캐서린의 죽음에 고통받는 히스클리프의 끈질김에 감동해 마지막 작별을 고할 기회를 만든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단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이지만 넬리의 목소리는 상황에 개입하고 의도하고 이끌고 예측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짧은 삶도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구성의 3요소 중에서도 단연 “인물”이 주도하는 작품이다. 캐서린이 개에게 물려 처음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머물게 되었을 때 히스클리프는 그 집의 남매가 캐서린을 보고 홀딱 반했다며 “캐서린은 그런 애들 따위와는, 이 세상 사람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잖아.”(p.83)라고 자신의 우상을 확실시한다. 캐서린은 자기감정을 살피고 의지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캐서린에서 딸 캐시로 이어지며 압박과 위협, 규범과 굴레에 굴하지 않는 캐릭터는 생생한 현존으로 다가오고 선명한 인장처럼 남는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죽음 이후 한 가지 욕구로만 치닫는다. 소설은 사랑과 사로잡힘, 집착의 경계를 줄타기하듯 그린다. 집착은 원망과 투사를 부르고 제어장치 없이 극대화된다. 감정의 해소는 파괴에 다름 아니다.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빼앗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망가뜨리겠다는 의지와 그로 인한 여파를 작가는 직설적인 단어와 빠른 전개, 황량한 풍광으로 묘사한다. 돌연히 멈추었을 때야 비로소 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은 호흡의 부재, 즉 죽음 뿐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세대를 이어 바통을 건네면서 다가오는 운명과 환경에 휩쓸리고 맞서는 인물들은 고립된 배경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인간의 내밀한 심리, 무의식의 발로를 언어로 아로새긴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고전하게 된다는 말에 동의했다. 한 가지 더, 고전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다. 유추의 대상도 아니다. 고전 읽기는 문장과 낱말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멈칫거리게 되는 행간을 견디고 섬뜩할지라도 전진하는 일이다.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조절하면서 이완과 외면, 재촉과 대결을 오롯이 통과해야 한다. 굳이 “고전이란”으로 시작하는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정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느지막이 만나는 고전은 민망함마저 부른다. 문학기행의 꿈을 품었던 히스 언덕의 낭만은 ‘아직도 내가 낭만으로 보이니?’ 라고 물으며 비틀린 미소를 짓는다. 오해가 길어지다 보니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상상 속 이미지는 고착되고 말았다. 편역과 축역의 혼란한 선택지를 넘어서서 온전한 완역으로 본색을 드러내 보자. 비로소 얼어붙은 바다가 산산이 깨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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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 숨겨진 뜨겁고도 파괴적인 집착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 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지독한 사랑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광기 어린 감정이 오히려 지독하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남들에겐 보여줄 수 없는 결핍과 상처가 있잖아요? 작가는 그 상처를 애써 포장하지 않고 폭풍우 치는 황야처럼 거칠게 쏟아냈기에,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자들의 가슴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고백처럼,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그들의 절규는 서툴고 아프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친절하고 예쁜 사랑 이야기에 질렸을 때, 내 안의 야생성을 깨워주는 이 소설을 꼭 한 번 펼쳐보시길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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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막무가내고, 히스클리프는 과할 정도로 분노에 차 있죠. 요즘 같으면 '금쪽상담소'나 '이혼숙려캠프'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자기 파괴적인 사랑에 도취된 인물들이라 낭만보다는 '지독한 광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에메랄드 펜넬의 영화를 보고 다시 펼쳐든 소설 속에서, 저는 오히려 그 광기가 넬리의 정돈된 목소리조차 뚫고 나오는 원초적인 생명력임을 깨달았습니다. 문명이 거세할 수 없는 야생의 감정, 그것이 1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이 지독한 악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