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네도 알다시피, 신학대를 그만두고 팀에 들어올 당시의 나는 꽤 화가 나 있었다네. 모아둔 돈도 없는 주제에 늙어서 죽겠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얘기인가? 젊은이가 노인들 부양하려고 사나? 세상이 너무나 꽉 막혀 있었지. 살리기 위해서는 숨통을 터주어야 했네. 하릴없이 연금이나 축내는 늙은이들을 처리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네. 하지만 끝도 없었지. 이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도대체 어느 소굴에서 기어 나오는 걸까? 좌표라도 뜨면 가서 불을 지르고 싶었다네. 매일매일 힘겹게 처리해도 다음 날이 되면 빳빳한 새 리스트가 전달되곤 했지.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어. 하지만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생각했네. 결국, 몽땅 처리해버리면 될 테니까. 아주 산술적인 생각이었지만 그 바보 같은 산수가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라 믿으며 나 자신도 잊은 채 살았다네." (…) 제풀에 격해진 젊은이가 가슴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오즘 툭하면 12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시시콜콜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온통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거야?" 장길도는 문득 젊음의 정체가 의아해졌다. 젊은 시절 당연히 누리던 그 싱그러운 감각이 통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잊어버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건 왜 잠깐 주어졌다가 사라지는 걸까?
불치병을 앓는 젊은 여성이 '경로석(?)'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가 다짜고짜 그 여성의 뒷덜미를 내리쳤다고, 하필이면 그 소설을 읽고 있을 때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가 전해 주었다. 아, 그런 인간이 늙도록 살아 있다니, 나는 분을 못이겨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언제까지 살아 있게 될까? |
|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알았다. 줄거리만 설명 듣고는 어떤 작가님이 쓰신 책인지 작가님의 이름도 책 제목도 알 수 없어서 한동안 책 찾기에 열중했었다. 어찌어찌해서 책 제목을 알게 되고 단번에 구입했다. 스토리가 너무 신선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의 시대라는데 어쩌면 먼 훗날 이런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는 책 시리즈들을 오해 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
|
박형서 작가의 당신의 노후는 누군가의 칼로 살아왔었던 이가 이제는 그 칼로부터 자신의 아내를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자,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대놓고 꼬집고 있는 작품입니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의 작품이다 보니 작 중 설정 자체를 꽤나 극단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 점을 제외한다면 단숨에 읽게 만드는 속도감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물론, 전개 과정에 뿌려놓은 여러 단서들을 회수하는 과정 또한 정말 뛰어났던 소설이었는데요. 무엇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던 고령화 사회에 따른 여러 사회적 이슈들이 아직까지는 픽션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조만간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박형서 작가의 필력이 정말 돋보였던 작품이었습니다. |
|
"당신은 국민연금보험에 가입하셨습니까?" 이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줄이야. |
|
“이유는 물론 돈이다. 공무원 신분이었을 적에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70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했고, 공무원연금은 쥐꼬리다. 연금에서 아내의 요양원 비용을 제하고 나면 하루 두어 번 김밥천국에 갈 정도의 돈이 남았다.” (p.15)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년에 발표된 국내 작가의 소설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소설이라는 평을 읽었는데, 뭐야, 기본적인 사항조차 어긋나 있는 건가, 70세 정년퇴직에 공무원연금이 쥐꼬리라니, 투덜댔다.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반리얼리즘 소설인 건가, 의구심을 잠시 가졌다. 하지만 이 아무 말로 느껴지는 설정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근미래 사회파 소설의 형태를 띠어가기 시작한다.
“... 송 씨의 바로 이웃집에는 94세의 할머니가 122세의 부친을 간호하며 산다. 학계에 보고된 모든 성인병을 장착한 그 부녀가 매달 받는 국가노령연금, 생필품 공제쿠폰, 최저생계 보조비, 가사도우미 보조비, 의료비 및 약제비 할인은 어지간한 젊은이 셋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시스템에 구멍이 나면 가끔은 이런 케이스도 발생하는 법이다.” (p.30)
그러니까 사실 《당신의 노후》는 현재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혹은 이십 년 길게 잡으면 삼십 년쯤 후라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늙으면 소설 속의 주인공인 장길도가 되어 허겁지겁 뛰어다니게 될 수 있고, 장길도의 아내 한수련이 되어 자신의 밑천이 자신의 목숨줄을 죄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적색 리스트에 오른 과다 수급자를 처리할 때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들은 주로 ‘가능성을 높인다’고 표현한다. 어차피 인생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질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보면 피로 가득 찬 풍선과 다를 바 없다. 자그마한 바늘 하나에 숨이 끊어지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 것이다. 장길도의 팀은 풍선 주위에 압정을 몇 개 슬그머니 놓아둠으로써 조기 사망의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을 해왔다...” (pp.55~56)
소설은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들이 말하는 적색 리스트, 많은 세금을 수령하게 되는 노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장길도가 어느 날 자신의 아내 한수련이 바로 그 적색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이 장길도는 퇴사를 한 다음이고, 장길도는 남아 있는 국희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한수련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한다.
“저 멀리 인형술사가 추락한 화단 주변에 예닐곱 명의 늙은이들이 모여들어 웅성대고 있었다. 평일 저녁에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다들 은퇴하고 연금이나 받아먹으며 사는 모양이었다. 터지고 짜부라진 주검 주위에 초승달 모양으로 둥글게 서서는 다름 아닌 저희들의 노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p.92)
그리고 틈틈이 소설은 장길도와 그의 팀이 처리하였던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식으로 은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소설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염세적이지만 이 이야기들이 리얼하지 않다고 옆으로 밀쳐놓을 수 있는 호기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소설은 괴기스럽고 공포에 가득한 리얼리티를 충분히 수반하고 있다.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줘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나머지 50만 원은 당신 같은 늙은이들한테 갖다 바치고 말이야...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 (pp.125~126)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이 소설을 추켜세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수명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출산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가족 공동체의 붕괴는 가시권에 들어섰고, 이를 보완해야 할 사회 시스템은 개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재가 소설 속에 그려지고 있는 가까운 미래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포가 우리의 이타利他를 북돋기 보다는 우리의 이기利己를 더욱 부채질 할 것도 알고 있으므로...
박형서 / 당신의 노후 / 현대문학 / 158쪽 / 2018 (2018)
|
|
-인생의 어느 시기인들 낯설지 않겠는가만, 당신은 과연 노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 『당신의 노후』 (박형서, 현대문학, 2018년)를 읽고■
어느 나이에 이르면 자연스레 노후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퇴직 연령대에 이르러 노후를 염려하는 것은 어쩌면 생의 주기에서 때가 되면 당연히 갖는, 특별할 게 없는 고민일 것이다. 그런데 노인에 대한 사회복지가 거의 노령 연금밖에 대책이 없는 지금의 한국에선 그 노후의 고민을 아주 젊은 세대마저도 한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라면 일일까. 이십대의 한창 나이마저 직업 선택의 과정에 안정된 직장이라는 요소와 연금이라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히 직업의 안정성과 연금에 초점을 두면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으로 떠올라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다. 특히 노령화의 가속화로 국민연금이 고갈될 거라는 뉴스를 한두번 접하다 보면 과연 국민연금으로 나의 노후가 보장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지는 법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현실의 불안을 반영하여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닌 미래의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인다.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14년 뒤 초고령화 사회의 어느날.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 간의 갈등의 심화로 '노인 혐오'라는 패러다임이 공공연한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 노령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연금이 고갈될 처지에 놓인 연금공단은 조직적으로 외곽 팀을 꾸려 은밀하게 수급자들을 제거하여 연금 지금을 줄인다. 죽음이 유보된 장수 사회가 가져온 끔찍한 재앙과 세대간의 노골적인 적대감은 기어이 장기 수급자를 없애 연금 고갈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이다.
인권위는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65세 이상 노인 1000명과 19∼64세 청·장년층 500명을 대상으로 노인인권 인식 및 경험 등 노인인권실태조사를 실시했다. 국가인권위의 「노인인권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층의 56%가 고령화 사회로 인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고, 77%가 노임 연금 등 노인 복지가 증가할수록 청년층의 부담이 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곧 노인 새대들을 책임지기 위해 젊은 세대들이 희생될 거라는 프레임을 사회에 퍼뜨렸다. 지금 우리 사회의 노인들에 대한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자료는 고령화 사회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연금고갈의 문제를 비롯한 초고령 사회의 여러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신의 노후』 는 연금 고갈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장수하며 연금을 수령하는 불량수급자(?)에 대해 연금공담에서 외곽팀을 꾸려 살해할 것이라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다.
“자살이지 뭐. 어쩔 수 없던 거지.” “뭐를?” “싫은 거지.” “뭐가?” “제가 늙은 게 싫은 거지. 유서에 이런저런 사연을 남겨봤자 조사해보면 결국은 그게 그거지, 팍삭 늙은 게 싫은 거지.” “그게, 그런 건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거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나?” “있지.” “누구?” “늙은이들.” --- p.82~83
주인공 장길도는 국민연금공단의 노령연금TF팀 팀장으로 최일선에서 ‘조직의 일’을 시행하다가 퇴직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의 임무(장기 수급자 처리)를 성실히 수행했던 장길도는 퇴직 후 지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있는 아홉 살 연상 아내 한수련이 오래전부터 노령연금을 부어왔고, 연금의 수급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의 아내 한수련이 공단의 제거 대상이 되자 장길도는 이제 자신의 과거의 임무와는 반대로 국민연금 공단을 적으로 맞서 아내의 죽음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장길도는 과연 아내를 연금 공단의 암살에서 구할 수 있을까.
“장길도는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아니라면 저 많은 노인들을 처리할 때 필연적으로 들러붙는 죄책감, 동족 살해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극복하지 못해 정신이 이상해졌을 것이다. 군인들이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동안 장길도는 내부의 적과 대치해왔다. 둘 중 어느 한쪽의 결기와 희생이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장길도는 사명감과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이었고, 바로 그 덕분에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적어도 현재의 노령연금TF팀 중에는 장길도만큼 길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외곽 공무원이 없었다. 그런데 그 팀이, 그 조직이, 그 국가가 아내를 해치려는 중이었다.“(p.42~43)
소설은 장길도가 국가 권력의 암살 기도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려는 것을 큰 줄기로 하여 장길도가 현역 시절 저질렀던 살해의 장면과 그의 동료나 선후배가 자행한 노인 살해의 에피소드가 펼쳐지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인 고독사가 어쩌면 자살이 아닌 타살의 결과라는 암시를 꾸준히 하며 섬뜩한 현실성을 더해간다.
“병원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던 날 밤에 원 씨는 병실 창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실력을 보여주려고 벼르는 의사가 주변에 득실거렸음에도 이번엔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어찌 손써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은 비슷했다. 원 씨는 늙었다.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치기만 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그랬던 게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꽤 합리적이어서 부검이 생략되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다.(p.51~52)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장길도의 죽음이 분명한 장면을 소설의 앞에 배치한다. 전직 공무원 장씨의 죽음은 처음엔 여러 죽음의 사례 중 하나로 읽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전직 공무원 장 씨가 주인공 장길도임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은퇴한 전직 공무원 장 씨(70세, 남)는 서울 성북구 자신의 집에서 전깃줄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서랍에서 나온 달랑 넉 줄짜리 유서에는 오래 앓던 아내의 죽음에 상심하여 삶의 동기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장 씨 부부를 오래 보아온 이들은 아내를 떠나보낸 장 씨가 자살을 안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상처받은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이러한 죽음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덕에 사회는 숨통을 트고, 한층 젊어진다.(p.83)
또 다음과 같은 장면은 이 소설에서의 장면이 실제의 우리 현실과 맞물리면서 지하철 무료 승차에 대한 시끄러웠던 뉴스의 한 토막을 떠올리게 한다. 지하철 적자 운영의 원인이 노인 무임승차의 비중이 커지는 데 따른 것이라는 뉴스, 물론 터무니없다고 치부할 수 없는 이 소식은 잠시 논의가 불거지다가 사그라지는 문제다. 노인층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 중 아무도 이 문제를 공론화하여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짓을 할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어느 장소에서나 도드라지는 노인층의 증가는 결코 시간이 약이려니 하고 넘기기엔 이미 목전의 칼날이 되어 가까워지고 있다.
“지하철은 늙은이가 밥 먹는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만 지하철을 타기 때문이다. 장길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노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내가 경험이 많아 다 안다’는 표정과 ‘나이 들어서 창피하다’는 표정을 함께 짓고 있었다. 전자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고, 후자는 너무 당연해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지하철 요금은 어지간한 밥 한 끼 값을 넘은 지 오래다. 값싼 고령 인력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p.72~73)”
장길도는 아내가 연금 공감에 의해 수령액을 과다 수급한 인물로 적색 리스트에 올라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구제하기 위해 연금공단의 젊은이사에게 항변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비아냥과 이기적이라는 따가운 질책이다.
“사실 내 아내가 적색 리스트에 오른 건 좀 문제가 있다네. 내가 봤는데, 그간 수령액이 한 80%쯤에 불과하더군. 적색 리스트에는 보통 100% 수급자들이 오르잖은가.” 장길도의 말에 젊은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 와이프가 올해 79, 그렇지?” 장길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젊은이가 말했다.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나머지 50만 원은 당신 같은 늙은이들한테 갖다 바치고 말이야. 뭐, 80%쯤이라고? 80%면 괜찮은 거야? 이봐 장길도 씨, 양심이 좀 있어야지!”( p.125~126)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잡다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막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 (p.126~127)
결국 장길도는 아내를 부정 수급자로 리스트에 올려 제거하려는 권력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이기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라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보려고 천천히 지는 싸움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 시간마저 허락지 않는다 고군분투의 싸움을 벌이며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한 젊은 날의 사랑의 기억을 붙잡고 회고하며 용기를 낸다. 밤길을 헤치고 달려가 사 온 사과 두 알. 아내는 그걸 자다 깨서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모두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그렇게 사랑은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는 깨달음. 최선을 다해 구해 온 사과를 역시 최선을 다해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사랑은 전부를 요구하고 전부를 내주는 삶의 시간이며 그것은 생의 절박함에 마지막 기대는 생의 기억이라는 것.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린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그 젊음의 돌이킬 수 없는 눈먼 열정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전부 끝난 것이다. 장길도는 이틀간의 전력 질주 속에서 분실해버린 단어들을 하나둘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누나, 스승과 동료, 자존심, 신뢰, 명예, 애국……. 너무 많고 또 너무 뜨거워 속이 바짝바짝 탔다. 새콤한 사과 한 알이 먹고 싶었다. 아니다. 사과를 먹고 싶은 게 아니다. 사과 따위는 개한테 줘버려도 좋다. 그깟 사과가 뭐라고 그걸 구하려 밤새 달렸던 자신의 젊음과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사과 두 알을 꼭지째 우적우적 씹어 먹던 수련 씨의 젊음, 그토록 수많은 게 가능했던 젊음,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저 새파란 젊음이 그리운 것이다. ( p.133)“
인간은 시간이라는 괴물 앞에 무방비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하고 성찰의 깊이가 깊어져도 모든 걸 무위로 돌리는 시간의 힘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인간은 자신만은 항상 젊은 것이며 시간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만 시간의 유한성 앞에서 모두들 가망이 없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닌 것이다.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것이고, 싸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우린 흰머리와 주름진 피부로 맥없이 늙어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 역시 시간의 괴물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지는 법. 그렇다면 우린 결국 “지금 여기”라는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 앞에서만 한껏 뽐을 낼 수 있는 하루살이의 삶이라는 것인가.
사상누각이라는 말처럼 모래 위의 쌓아올린 집이 한바탕 파도가 덮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듯 시간의 거대한 파고에 우린 속절없이 무너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제 아무리 낙척적인 자라 할지라도 인생의 노후에 오면 불안하고 어김없이 낭패감을 갖게 되지 않는가. 결국 노후의 불안은 연금 수급의 액수가 얼마냐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뻔하건만, 우리가 기껏 관심을 갖는 건 연금액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정말 나/당신의 노후를 무엇으로 채울지 심각한 논의를 해봐야 할 때라고 본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 생활의 문제가 되려면 노후를 사회적 의제로 삼아 더 처절한 고민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당신의 노후를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좌와 벌. 이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가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미를 발할 수 있으려면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저 불가항력적인 시간 앞에 지금 여기의 즐거움과 의미만 찾는 것이 과연 최선이랄 수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장생불사의 신비한 의약품을 개발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 과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그다지 길지 않은 중편 소설의 분량이지만. 소설이 던지는 물음은 읽는 이들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성찰의 화두를 던진다. 늘 일회적인 사건이요, 반복이 있을 수 없는 시간의 경험을 우린 제대로 대접을 하며 보내고 있는지도 한번 자문할만한 일이다. 늙는다는 건 결코 외면할 주제도, 먼 미래의 문제도 아닌 지금 당장 눈앞에 주어져 성찰을 요하는 화두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