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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나는, 나를 증명한다.【16인의 반란자들】
"나는, 나를 증명한다.【16인의 반란자들】" 내용보기
이 책은 특별하다.(식상한 문구지만!!)단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그것 뿐만 아니라-그것도 충분히 특별한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이들을 ,'반란자'라는 타이틀로 한자리에 묶었다는데 내가 이 책에 부여하는 특별함은 배가된다. 누가 감히! 이들을 반란자라고 한데 엮어 부를수 있었겠는가? 실로 그렇다고 해도 입 밖으로 꺼내기는 여간 거북스런
"나는, 나를 증명한다.【16인의 반란자들】" 내용보기

 

이 책은 특별하다.(식상한 문구지만!!)단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그것 뿐만 아니라-그것도 충분히 특별한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이들을 ,'반란자'라는 타이틀로 한자리에 묶었다는데 내가 이 책에 부여하는 특별함은 배가된다. 누가 감히! 이들을 반란자라고 한데 엮어 부를수 있었겠는가? 실로 그렇다고 해도 입 밖으로 꺼내기는 여간 거북스런 단어가 아닐 수 없는 말이다. 

 

 

평소 문학을 즐겨 읽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무슨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작품, 또는 그런 영예를 안은 작가들의 책만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상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그런건 내가 책을 보는데 굳이 중요한 선택지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이 인터뷰집 속에 자리하고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 대부분을 알고는 있으나 작품으로 만난적은 몇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다. 난 언제나 문학에는 척을 두지 않는다. 웬만한 세계 각국의 문학들을 다 읽고는 싶으나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굳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터뷰집을 보며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오는건 이 늙은 문학가들의 손이다. 그건 어쩔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의 주름져서 쭈글쭈글 해질대로 해져버린 늙어버린 손을 사진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 늙어버린 손은 투쟁의 흔적이다. 이 손에서 당신의 글이 탄생되었단 말인가! 그 주름 가득한 늙은 손에서 당신의 삶에 대한 역경과 회한과 사회를 향한, 부조리를 향한 분노가 펜대를 통해 쓰여졌단 말인가! 그리고 여전히 그 늙은 손의 끄적거림은 현재진형이 되어가고 있고-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절필을 선언했고, 이미 고인이 된 작가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손에서 나풀대는 활자와 행간의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백분 공감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노선을 타고 비판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보듬어야 할 상처는 다르지만 문학은 모두를 치유한다.

 

문학은, 특히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 활자 그대로의 치유력을 안겨준다. 세상으로부터 단절 되고플때, 고립된 나의 숨구멍을 틔게 해주는 책이 있었고, 그 안에 문학이 존재했다. 작가들의 경험에 빗대었든 순 허구의 이야기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또다른 세상을 보고 그로 인해 상처를 어루만질때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문학을 읽는다. 그리고 이 인터뷰집 속 작가들 역시 그렇기에 문학을 상상하고 문학을 써내려간다. 모든 세상의 전쟁,치욕,차별,굶주림 뒤에서 굳건하게 그 싹을 틔워낼 건 문학밖에 없다고 이들은 믿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소리치는 아우성은 사라질지 언정, 소리 없는 아우성 즉 지면에다 쏟아내는 활자들의 향연은 그 명맥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발악한다. 그들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은 우리같은 사람들은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손' 하나로만 바라보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보여지는 그대로이다. 글을 손으로 쓰는걸 모르는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말 글이 손으로 쓰여지는 걸까? 아니다. 글은 그들의 머리에서 마음에서 쓰여지는 것이고 손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말은 정확히 하자. 손은 이차적인 부수기관일 뿐이다. 우리가 행하는 생각과 표현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치이자 몸의 일부분일 뿐이다. 손은 펜대를 잡지만 머리와 마음은 우리 삶을 관장한다. 그렇기에 난 이들의 손을 보며 그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머리 속 생각을 그려보려 했다. 그리고 또하나, 인터뷰집에서 눈에 띄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다는 아니지만 간혹 보여지는 작가들의 뒷모습에는 당당함 외에 그들만의 몸짓이 있다. 그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의 몸짓에는 머리와 가슴에서 쏟아져나오는 열정을 손이라는 육체로 펜대를 굴려가며 글을 나열하고, 그들의 뒷모습에서는 그들이 처절하게 투쟁하고 부딪히려 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았다. 체재에 불복하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에 맞서고 차별이라는 무지함(난 차별을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에 일침을 가하고 우리가 아는 그 모든 편견,인권,민주주의,노예제도,군부독재, 홀로코스트, 아파르트헤이트 등에 과감히 맞서는 그들의 뒷모습은 쓸쓸함이 아니라 당당함으로 무장한 그 무엇보다 든든한 어깨요, 등판이요, 곧은 다리이다. 늙수구레한 그들의 얼굴과 손의 주름 뒤로 건장한 풍채를 자랑하는 뒷모습이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반란을 일삼고 꿈꾸고 또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맞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체화해 글 속에 투영함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누구들처럼 비겁하게 뒤로 숨지도 숨으려 하지도 움츠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글로 증명할 뿐이다. 난 그들의 뒷모습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렇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예술가들이 있기에, 자신의 삶에, 작품에, 무엇보다 당당한 그들이 있다는건-굳이 내가 그들 작품을 다 섭렵하지 않았더라도!- 나의 등을 곧추세우게 만들기에는 차고 넘친다. 

 

이들의 주름진, 뒷모습. 권력의 부당함에 글로, 문학으로 맞서는....이들의 삶의 진행형의 모습은, 개개인의 성향이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그런건 굳이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문학의 힘은 그런데 있다. 이들의 성향을 보고 그들의 글을 읽을게 아니라, 글을 읽고 작가를 보는 것이다. 절대 작가를 먼저 보고 글을 읽는게 아니라. 엄청난 상금이 쏟아지고 세계적인 찬사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 위대한 상을 거머쥔 이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호사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려 더 치열하고 처절하다. 그래서 더 그들의 주름진 손과 뒷모습과 주글주글한 잔주름의 표정이 가슴 깊이 박히는건지도 모른다. 인종차별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부당함에 맞서 부당함을 호소하고 권력에 맞서고 체재에 불응하다 망명길에 오른 여럿 작가들을 보며,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 굴복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진정 문학의 힘은 건재함을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삶 자체가 살벌한 이 시대에, 아니, 전 세대에도 언제나 문학만은 그 존재를 꼿꼿이 드러냈다. 전시에 총구에 겨눠진 채로도 문학은 쓰러지지 않았고, 혼돈의 시대에도 문학은 그 존재가치를 흩뿌리고 있었다. 내가 이 16인의 작가 아니, 반란자들을 만나는 시간 동안 그것은 더 큰 확신으로 다가왔다. 체재에 순응하지 않는건 쉽다. 불복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쉽게 그러지 못한다. 이들, 16인은 그러나 그런 삶을 살았다. 불복하는 삶, 자신이 처한 비극적 환경에 순응하지 않는 반란자라 불리우는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를 나로써 증명하는건 자그만 직사각형 플라스틱 카드면 충분하다. 내가 존재하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이 그리 간단한 것이다. 허나 이들은 그런 '신분증'이 아니라 글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이들이다. 글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넣고, 생각을 넣고 삶의 희노애락을 풀어제끼고 온갖 불신과 선망과 신앙과 독단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넘어선 그것들을 이들은 글로 증명한다. 그들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면 보인다. 주제 사라마구, 오에 겐자부로, 토니 모리슨, 다리오 포, 오르한 파묵, 도리스 레싱, 월레 소잉카, 나딘 고디머, 가오싱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귄터 글라스, 나기브 마푸즈, V.S. 네이폴, 임레 케르테스, 데릭 월콧,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이 위대한 16인의 반란자들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늘어버린 주름살과 그럼에도 곧추세운 뒷모습과 끊임없는 문학에 대한 긍지와 세상에 대한 애정어린 투쟁으로 이미 충분히 자신들을 증명하고도 남았음이라...너른 등판을 가졌든 왜소한 등판의 뒷모습이든 그들의 뒷모습을 통한 문학에의 남다른 긍지는 절대 꺽여버리지 않을거라는걸 나는 오늘도 내 두 눈으로 증명한다.

 

 

 



w*****8 2012.02.20. 신고 공감 28 댓글 52
리뷰 총점 종이책
가난한 휴머니스트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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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너무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내게 또 하나의 창조자로 숭배의 대상이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잠시 멈춘채 바라본 유리창 너머의 세계, 그곳에서 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책은 나에게 그리움을 달래주는 동시에 나에게 가보지 못한 곳을 느끼게 해 주는 제 2의 세계이다. 치열하게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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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너무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내게 또 하나의 창조자로 숭배의 대상이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잠시 멈춘채 바라본 유리창 너머의 세계, 그곳에서 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책은 나에게 그리움을 달래주는 동시에 나에게 가보지 못한 곳을 느끼게 해 주는 제 2의 세계이다. 치열하게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들이자 생명을 가진 또다른 육체없는 영혼들이 살아있는 생명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친구이자 애인이 되어주는 그 위대한 상상속에서 소설가는 내게 창조자와 동의어로 인식되곤 했다. 더군다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니 !!!!!!!!! 개인의 영광뿐만아니라 한 국가의 영광이자 인류의 영광 아닌가 .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에게 전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는 이유 또한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대화로 엮어진  <16인의 반란자>라는 이 책을 보았을 때 호기심이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뇌구조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들의 뇌구조는 인류사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누구에게나 글을 쓰는 목적이 있지만, 내가 처음 리뷰어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책을 읽은 후의 기록이라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나의 리뷰에는 개인적인 내용을 배제한 책 이야기 중심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함을 지나 이제는 글쓰기라는 분야에 나 스스로 진화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더욱 뜻 깊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에게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의 문학 공통점은 다름아닌 휴머니즘이 바탕이라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휴머니즘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는 책이 숲을 죽여서는 안된다며 지구의 숲을 지키기 위해 종이의 제작도 환경과 대기의 오염을 시키지 않는 재생지 사용을 권장하고 있고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인을 어루만져 주며 보듬어주는 세상을 꿈꾸는 목적으로 글을 쓰며 , 토니 모리슨은 인종차별주의와 남성우월주의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어 주기 위해 , 월레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는 인권주의자로서 , 이어  나치에 대항하여 평화와 싸워온 유대인 임레 케르테스까지 이들은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 자유를 억압하고 가난에 허덕이며 권위주의자들에 대하여-에  치열하게 글로써 투쟁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다른 삶이 있어요. 그건 손에 든 책이오. 내가 읽는 이야기들이 지니고 있는 깊이는 나한테 평범한 것을 안고 가도록 허용해주었어요." -오르한 파묵

 

내가 절도범이나 창녀 같은 평범한 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 그들이 역사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에요.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되돌려주고 싶었어요.-토니 모리슨-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는 고통이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세상에 엄청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수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디 하나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카인]을 통해 웅변해주며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보며 히로시마 원자폭탄 희생자들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며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당하는 고통에 동참하길 원했다는 고백과 노예 제도로 인해 오랜 편견과 차별과 싸워야 했던 여성이자 흑인인 토니 모리슨 또한 억압의 고통을 받아왔다.  아프리카에 창궐하고 있는 에이즈와  가난과 불법 이주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나딘 고디머,  [양철북]으로  잘 알려진 귄터 그라스는 자신이 과거 나치 친위대에 있던 사실이 수치스러운 과거라 말하지만 그가 정작 괴로웠던 것은 나치 친위대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다. 40년을 따라다니던 괴로움과 고통의 실체는 다름아닌 과거 총알받이가 되어 끌려가는 급우와 교사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 그게 바로 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이자 내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고통이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라스와 반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케르테스는 " 독일은 끝났다."는 말을 통해 분노와 파괴의 탄식을 한다. 이들 모두는 그렇게 자신의 고통을 치열하게 신음하며 인류의 고통으로서 문학을 표출하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세상은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고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을 자율케 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정치권력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뇌구조는 이렇게 인류의 문제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의 고통속으로 들어가 처절하게 고통을 신음하게 될 때 , 문학이  탄생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이기적이라고, 그것은 내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들이 말하는 고통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 번이라도 인류사에 고통을 느껴보았는가? 지구상에 그 누군가는 굶어 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고통에 한 번이라도 동참해 보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현대사회는 분노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자 슬픔이라고 했다. 소설가들이 창조해 내는 주인공들을 허구의 인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대변해주는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한번이라도 느껴보지 못한다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내적으로 성숙되고 인류의 고통에 신음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책을 다 읽고 나는 이들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고통받고 있는 현대를 기억해 줄 것인가 .......이들 가난한 휴머니스트들의 기도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YES마니아 : 로얄 k********2 2012.02.16. 신고 공감 19 댓글 33
리뷰 총점 종이책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16인의 반란자들』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16인의 반란자들』" 내용보기
사진 속의 손   손을 들여다본다. 조그마한 덩치에 비해 남자같이 큰 손을 가진 나는 누군가 내 손을 볼라치면 금세 손을 뒤로 감추고 만다. 그 정도로 못난 나의 손이지만 그래도, 그(킴 만레사)가 찍어준다면, 그의 렌즈에 나의 투박한 손이 담긴다면, 재주 많고 신비한 매력에 휩싸인 손으로 둔갑할 수 있을까.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손처럼.             이 책은 그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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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손

  손을 들여다본다. 조그마한 덩치에 비해 남자같이 큰 손을 가진 나는 누군가 내 손을 볼라치면 금세 손을 뒤로 감추고 만다. 그 정도로 못난 나의 손이지만 그래도, 그(킴 만레사)가 찍어준다면, 그의 렌즈에 나의 투박한 손이 담긴다면, 재주 많고 신비한 매력에 휩싸인 손으로 둔갑할 수 있을까.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손처럼.

 

 

 

 

 

  이 책은 그 디자인부터 품격과 중후함으로 채워져 있다. 거기에 제목까지 예사롭지 않다. 무게감 있는 디자인과 정사각 금백 바탕에 새겨진 ‘반란자’라는 단어가 그냥 지나치려던 독자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결국 무거운 양장본 책장을 넘기게 만들고 만다. 일단 넘기기 시작하면 독자는 치밀어 오르는 소장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리라. 사진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이게 하려고 속지마저 고급 종이인 아트지를 썼으니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절대 침을 묻힐 수 없다. 아니 도대체 그 반란자들이 누구시길래 이렇듯 정성과 돈을 들여 만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2단계로 넘어간다. 스르륵 넘겨보고 대충의 손지문만 남기고 돌아서리라 다짐했던 처음의 마음은 어느새 우두커니 서서 한 땀 한 땀 수놓듯 한 장씩 시간 들여 책장을 넘기고 있다. 책장 곳곳에 박혀있는 흑백사진들의 정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결국(최종단계인) 알알이 박혀있는 검은 글자까지 읽고 말 것이다.

 

 

 

손의 의미

  손은 인간의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인간은 두 발로 걷게 됨으로써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로부터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펜도 쥘 수 있었고 타자기도 칠 수 있었으며 컴퓨터 키보드까지 두드릴 수 있었겠지만, 인간의 손이 도구화될 수 있게 해준 직립보행에 원초적 감사함을 느낀다. 그래서 킴 만레사도 이 반란자들의 손에 집중해서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나보다. 마치 사진화보집 같으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사진 속의 인물들의 현재 삶과 가치관과 말투를 함께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화보집이 아니라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이의 얼굴과 그들 삶의 배경과 그들이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던 손을 흑백 사진으로 담아놓았다.

 

 

반란자들의 공통점

  노벨문학상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위키백과) 수여하라는 노벨의 유지에 맞게 1년에 1명씩 선정한다고는 하는데 100년이 지나는 동안 아시아에서 수상한 작가는 오직 네 사람. 그 중 두 사람은 90년대 들어와서야 받았다. 주최측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거의 유럽과 미국 쪽에서 배출된다는 비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 아직까지도 아시아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의 위대한 작가들이 없단 말인가. 이런 분위기에서 노벨문학상의 불모지인 아시아 국가 출신 작가 두 명(오에 겐쟈부로, 가오 싱젠)이 여기 반란자 목록에 포함이 되었다. 고작 열여섯 명의 인터뷰이를 만났는데 전체 인터뷰이의 대륙별 비율로 따지자면 아시아계 수상자 두 명이나 넣었다는 것에 반가움이 먼저 든다.(생존한 수상자 중 100%이지 않는가! ^^) 경계 짓기와 편 가르기 하자는 것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은 그렇게 움직인다. 거기에 요즘 대세인 아프리카와 남미 출신 작가들 수상을 반영하듯 다섯 명(월레 소잉카, 나딘 고디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나기브 마푸즈, 데릭 월콧)의 인터뷰도 함께 한다. 이렇게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며 3여 년에 걸쳐 진행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대부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작가들. 그 중엔 이미 이 책이 나오기도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 분도 있다. 말년의 삶은 걱정과 세상사 다 던지고 글이나 쓰며 관망하는 자세로 살아갈 듯 한데 여기 담긴 작가들의 말년의 삶은 관망도, 낮은 자세도 아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조우하고 주관대로 움직이고 필요한 일에 행동으로 표현한다. 관조하는 삶보다는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열여섯 사람의 공통점 중 하나이다. ‘반란자’라는 단어를 단지 독자들을 자극하고 상술로 붙인 제목만으로 몰아가기엔 이른 증거다. 그걸 증명하고자 인터뷰어 사비 아옌은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으로 만났고 그들이 가는 길을 동행하며 일상생활 속의 자연스러운 작가의 모습을 담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보드랍다. 사각의 공간에 갇혀 예상 질문지를 미리 넘겨 준 상태에서 진행된 정형화된 인터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작가 한 사람마다의 색깔이 살아있다. 짧은 글일지라도 또는 아직 접하지 못한 작가일지라도 작가들의 어슴푸레한 형체를 분간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어머니기도 하며 아내이기도 하고 스승이기도 한 그들이, 작가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아서 더욱 우리의 삶 영역 안으로 들여다 놓고 따스한 눈으로 열여섯 작가를 훑어간다.

 

  위의 열여섯 작가의 공통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유”롭다. 국가 시스템에 갇히지 않고 전 인류적인 사상을 가졌다. 끊임없는 창작 욕구를 불사르며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옳다는 일에는 과감히 몸을 던진다. 언론과 서평가들의 비평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묵묵부답의 길로 간다. 그런 사람들이 이 인터뷰에 응했다는 것은 흔한 인터뷰형식이 아니라서 일수도 있고 인터뷰어(사비 아옌)에 대한 신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거기에 아마도 책 출간의 의도와 목적에 흔쾌히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일일이 언론을 통해 대응하기보다 하나의 책을 통해 비슷한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의 비슷한 목소리를 모은 책으로 자신들의 입장과 그 동안 묵혀 둔 변명과 항변의 기회도 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지 않았을까. 자, 이제 그걸 확인하는 여정을 떠나보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평생의 연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문화의 날 부여되는 상을 거절하는 오에 겐쟈부로(1935~ , 일본,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를 보며 민족주의를 넘어서고 거시적인 가치관과 인류애를 가진 작가의 뚝심에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가오싱젠(1940~ , 중국계프랑스,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정치권력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굴종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선택한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인간으로서의 누려야할 최고의 가치 존엄성에 대한 굳은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반란자다. 국가의 눈으로 보면 더더욱 틀림없는 반란자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 , 콜롬비아,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절필 선언은 엄청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그렇지만 그의 절필 선언이, 남은 날 계속 되진 않을 것이란 어렴풋한 가능성도 점쳐본다. 그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상 언젠가 자신의 가장 멋진 표현 수단인 글로써 호소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내 나름의 청사진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킴 만레사의 카메라에 손을 가장 많이 내어준 마르케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란자들’의 사진 중 가장 인상 깊은 손도 마르케스의 손이다. 그건 자신의 생각을 고정된 텍스트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손임을 방증하기에, 꼭 작가로 돌아오리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 평가를 넘어

  역사의 소용돌이 정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20세기의 작가들. 작품에서도 삶의 현장에서도 그들은 정점에 서 있다. 권터 그라스(1927~ , 독일,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자기 고백은 충격적이지만 나치 친위대에 근무했던 사실에 대한 그의 변명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만은 이해심이 넓어져버린다. 머리가 영글기도 전에 나치즘에 뼛속까지 노출되었던 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엔 이미 일상화된 삶으로, 그리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상황을 상상하니 없던 이해심마저 생겨난다. “내가 나치의 범죄를 깨달은 건 전쟁 후였소.”(201p)라고 아무리 고백해도 언론과 사람들의 나치 사냥에서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치의 요직에 있지도 않았고 나치즘과 파시즘을 널리 전파한 것도 아니며 당시 대부분 독일 젊은이들이 밟았던 수순을 걸었을 뿐이라고, 돌아보니 자신의 나치 전력이 과대 포장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했다고. 그는 날조하는 것도, 인위적인 것도 거부할 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겠노라며 파이프를 문 입술을 굳게 닫는다. 그렇게 수치의 역사와 연결되었지만 자신의 소신만큼은 굽힐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임레 게르테스(1929~ , 헝가리,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로 그 여정을 옮기는 순간 권터 그라스에 대한 이해심이 고무줄처럼 줄어들며 갑자기 권터 그라스는 가해자로, 임레 게르테스는 피해자로 역사의 대립 관계에 놓여버리고 만다. 자신이 유대인인지 인식조차 없이 살았던 그가 어느 날 납치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야 유대인임을 자각했다. 게르테스에겐 노벨문학상이 과거 묻어둔 상처를 까발리게 된 계기가 되어 시리기만 하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입장의 트라우마를 지닌 채 권터 그라스와 임레 게르테스는 끊임없이 자극하고 치유하려 글을 쓴다.

 

 

인종주의와 단일성을 넘어

  유럽과 백인주의 세계에 통렬한 일침을 가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도 들어보자. 피부 색깔들의 노예, 확연히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색깔론이 가져다 준 근원적인 문제, 그것들로부터 뻗어 나온 부수적인 문제들까지 칼칼한 목소리로 세상의 전반적인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토니 모리슨(1931~ , 미국, 1993년 노벨문학상 수상). 그녀는 흑인이지만 흑인 전체를 대변하려 들지 않는다. 고정화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기보다 흑인도 평범한 사람 속에서의 사람일 뿐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나딘 고디머(1923~ , 남아프리카공화국, 1991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이라는 위치만으로도  순탄하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의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자각하게 되면서 그녀 스스로 가시밭길로 전향한다. 인종차별주의에 눈을 뜬 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을 벌여 지금의 민주주의 남아공 건설에 큰 기여를 한 작가였다.

  비디아다르 네이폴(1932~ , 트리니다드계 영국,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자신의 세계 여행 경험을 바탕삼아 “정체성은 넓을수록 좋은 것”(240p)이며 “모든 작가들이 전 세계를 아우”(240p)를 수 있기를 기원한다. 태생국과 혼혈이라는 열등감으로 네이폴이 이방인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데릭 월콧(1930~ , 세인트루시아, 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 반대다. 유럽과 흑인 노예의 피를 물려받아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데릭 월콧. 복잡한 혈통을 가진 만큼 복잡한 카리브해 역사를 바탕으로 글을 써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아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힘은 문화와 예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들에겐 희망적이다. 그래서 데릭 월콧은 유럽중심주의의 대표작인 유럽통합에 대해 “유럽의 정복정책”(274p)라 비꼰다. (반면 임레 케르테스는 강한 유럽을 표방하며 뿌리가 같은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길목인 터키. 터키의 대표 작가 오르한 파묵(1952~ , 터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자국 내의 민족 살상을 지켜본 그로써는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터키인으로 남고 싶을 뿐 유럽통합의 미끼로 자신이 이용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권력을 넘어

  ‘반란자들’ 중 다리오 포(1926~ , 이탈리아, 1997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의 후덕한 미소와 익살스러운 표정을 고스란히 잡아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어쩜 이렇게 그의 삶을 잘 잡아냈을까 싶다. 희극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면 젊은이들과의 끊임없는 교감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젊은 생각을 누리면서도 전지구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스스로를 광대라 생각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 속에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요. 권력은 유머를 견디지 못해요. 하물며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통치자들조차 마찬가지요. 웃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나한테 주어진 노벨상은 일반 대중의 체념과 권력의 부당함을 기꺼이 보여주려 했던 모든 광대들을 위한 보상이오.”(87p) 우리나라에서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떠오르며 다리오 포의 즐겁고 유쾌한 웃음 뒤의 반전이 시원하다.

“우리 국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관습조차 상실해버렸어요.”(131p) 월레 소잉카(1934~ , 나이지리아, 198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말이다. 오랜 독재정부의 사슬에, 다민족 다종교의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인간이 최소한 지녀야할 존엄성마저 망각해버린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대항”(132p)한다. 그래서 그는 ‘나이지리아의 만델라’라고 불리지만 정작 그는 정치로 나갈 생각은 없다. “자유와 권력은 대립적”(139p)이라는 그의 소신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

  반란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아랍어권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기브 마푸즈(1911~2006, 이집트, 1988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인터뷰한지 몇 주 후 타계했다. 이슬람근본주의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규칙적인 일상을 죽기 직전까지 지키던 그였다. 마푸즈처럼 지금은 가고 없는 주제 사라마구(1922~2010, 포르투갈,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를 인터뷰로써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죽음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그래서 그는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31p)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성 반란자 3명은 주름마저도 닮아있었는데 나딘 고디머와 도리스 레싱, 그리고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이다. 도리스 레싱(1919~ , 영국,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아흔이 넘었지만 히피적 감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청춘에 대한 갈망을 어지러운 그의 집처럼 떠돈다. 그리고 이달 초에 타계한 비슬라바 쉼보르스카(1923~2012, 폴란드,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가래 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즉답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고 당당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289p)고 말하는 그녀가 왜 이리 친숙한지, 아마도 손뿐만 아니라 그러한 생각마저도 나랑 닮아서 일게다.

 

 

  이 책을 덮는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손이다. 오래된 손의 흑백의 음영이 이제 그들을 과거로 편입시키고 있다. 생물적인 늙음은 손댈 방도가 없지만 문학적인 성숙과 깊이는 죽지 않는다. 실천적 삶이 투영된 그들의 작품을 통해 어리석은 민중을 계몽시키기도 하고 깨닫지 못했던 세상의 부조리를 알아가게 만든다. 자신만의 세계에 함몰되어 세상과 괴리되어가는 작가들과 다르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문학의 역사에 세상의 창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꿈틀거리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16인의 반란자를 따르는 추종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 아마도 추종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편집오류★

 

목차엔 권터 라스, 본문 제목과 내용은 권터 라스로 표기.



YES마니아 : 로얄 g********s 2012.02.20. 신고 공감 15 댓글 37
리뷰 총점 종이책
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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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을 것인가? 문학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책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왔다. “16인의 반란자들”, 광고에서 언뜻 들은 바와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와 닿는 의문, 왜 반란자들이었을까? 이 사람들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고명한 작가들인데. 그러나 이런 의문도 책을 펼치는 순간 사라지고, 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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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을 것인가?

문학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책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왔다. “16인의 반란자들”, 광고에서 언뜻 들은 바와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와 닿는 의문, 왜 반란자들이었을까? 이 사람들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고명한 작가들인데. 그러나 이런 의문도 책을 펼치는 순간 사라지고, 글 만나는 순간 이내 그들의 인생의 지혜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이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삶의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만물을 바라보는 탁 트인 시각을 배우고 싶다.

 

사실 노벨문학상으로 문학성을 인정 받는 이들의 작품, 그러나 나는 많이 읽지 못했다. 작가들의 대표작을 따져봐도 나는 반도 못 읽었다. 이것이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나마 몇몇 작품을 접한 작가가 ‘주제 사라마구, 오르한 파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V. S. 네이폴’이고, 한 권이라도 읽은 작가는 ‘귄터 글라스, 토니 모리슨, 도리스 레싱’ 이었다. 한 권도 읽지 못한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 다리오 포, 월레 소잉카, 나딘 고디머, 가오싱젠, 나기브 마푸즈, 임레 케르테스, 데릭 월콧,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로 제일 많다. 그들의 작품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어떤 일이든 계기가 있어야 되는 법, 이번 이 책을 기회 삼아 이들의 작품에 도전해 보리. 분명 그들의 작품 속에는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뭔가가 있겠지, 그런 것들을 배운다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들의 경험이 녹아난 소설이나 시 속에 숨어있는 뜻,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가르침,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배우려 한다. 삶을 먼저 산 선배로써, 위대한 작가로써 우리에게 전할 말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나가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으리.

 

책을 펼치며.

이 책에서는 다행스럽게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특히 문학 이외의 사회참여, 작가는 권력과 주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이 책의 제목을 16인의 반란자들이라고 정해졌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책을 요약하면,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 나이든 분들은 고루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진정 젊은이들 못지 않는 열정과 뚜렷한 생각(개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정치와 사회참여. 문학과 사람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알게 된 주제 사마라구, 그는 포르투갈공산당 회원이다. 그의 글을 보면서 의식적이다라는 생각은 항상 따라다녔지만, 대부분의 작가소개에 이런 것들을 빠져버린다. 군부독재를 조롱하는 한 마디 “사람 살려!”, 이 한 마디가 함축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해지고, 목숨이 위태로우니 고함을 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잘 표현한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다. 세상은 점점 소수의 독재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고, 국가나 사회는 점점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를 받는다. “엘리트들의 오만함에 분노해요. 그들은 교만과 자존심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고 민주주의와 문화를 파괴하고 있어요.”, 이런 정치를 위대한 드라마 혹은 호시절에 대한 반추 정도로 대하는 이도 있다. 아프리카의 현실을 말하는 한 마디 “이곳은 관광지인데,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광객이 없다는 사실이 모순적인 현실로 다가선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들의 말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권력에 맞서 대항하기 해야 하고, 진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시대의 현실에 맞서는 “내 곁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고, 불화가 있었고, 독재가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아직 그 힘은 미약하여 “나는 분노와 파괴로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한다면 세상은 변하리, 아니 바꿔야 한다. 과거보다는 나아지고 있지만, 더 많이 변해야 한다. 예술이나 문학이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우리들의 삶에 빠지지 않는 질문이리라. 점점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시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현실 앞에서 한숨을 쉰다. 그들은 예술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는 말로 자책도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계속 된다. 이런 이들의 노력으로 사람들은 깨어나는 이데올로기 기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주는 도구이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세속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후배 문학인들에게 경고도 보낸다.

 

무엇을 쓸 것인가?

평범한 질문이다.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오에 겐자로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 아들은 내 이야기의 중심”, “물고기의 고통을 반영하고자 작가가 된 셈이고, 이제는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로 인간의 고통, 아 인간은 얼마나 저열한 존재인가? 그 고통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위로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닐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작가 토니 모리슨,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않는 아메리카의 흑인들에게 목소리를 주겠다.” 평범한 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역사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상 민중을 대변하고, 약자들을 위해 목소리 높여 외치고 써야 하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 아닐까? 또한 글쓰기를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내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 종교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도 있다. 하지만, 윌레 소잉카, “픽션에서는 내가 신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현실에서 괴리도 느끼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파묵은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글을 쓰는 것이다.”는 자신의 욕구를 보여준다.

 

사람의 길.

인생이란? 질문에서 이들의 공통점은 인생을 초연한 듯 사실을 사실대로 인증한다고 할까? 사라마구가 “강박증은 올 때도 그랬듯이 슬그머니 사라집디다.” 그러면서도 “인생은 기적이다.” 인생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초로의 노인이 인생을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며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우리는 그의 글과 더불어 그의 삶 속에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다. 의외로 이혼한 작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리오 포는 부부에 대한 생각 “부부는 머리가 두 개에 몸이 하나인 작가나 다름없다.”, 이런 행복한 부부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부럽다. 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의 재능을 더 살리는 길, 이것이 동반자로써의 진정한 길이 아닐까? 귄터 글라스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백, 과연 내가 그의 상황에 있었다면, 나도 비슷한 방향으로 성장했을 것 같다. 그를 나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분명한 것은 그에게도 책임은 있지만,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실행한 사람들과 하부에서 그들의 강요나 이끌림으로 한 사람들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의 늦은 고백은 자신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한 것 같다.

 

이런 일은 제발 그만.

자국의 노작가, 그것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를 테러 하는 단체, 그들이 그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백주에 테러를 하는가? 작가들이 자신의 글 때문에 경호를 받고, 불안과 위험속에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은 인간사의 비극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것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여러 곳에서 일어날까? 그들은 진정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펜을 꺾으려 하는 것인가? 또 터키민족정체성, 파묵의 글이 터키의 극우파들을 화나게 했다는 기사를 보며, 그렇게 이념이고, 종교를 강조하는 작가가 아닌데, 어떤 작품이나 말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인지? 문학을 가지고 종교로 처벌하는 것 진정 있어서는 안될 행위이다. 물론 글로써 종교를 모독해서도 되지 않겠지만. 예술은 신과 인간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지.

 

세계를 보는 시간.

찬란한 미국, 세계의 제국인 미국에서는 아직도, 인종문제 노예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인종주의가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에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또한 한때 찬란했던 유럽은 문명의 모델이지만, 야만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들의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여러 문화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모든 문화에는 똑같은 위엄이 있다. 오늘날은 모든 작가들이 전 세계를 아울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한 카테고리로 나누는 세상의 분류에 치우치지 않는 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휠씬 더 어려운 일이다.

 

거기 다 더.

책이 숲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사마라구, 책을 사랑하는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을 잘 지적해준다. 숲을 파괴하지 않고 종이를 만들 수 없을까? 안되면 재생종이라도.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생명운동을 주장하는 비사교적인 네이폴, 노벨상 수상 후 변화를 솔직히 돈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토니 모리슨, 그래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해방의 수단이기에 소중하다고, 작가들도 엄청난 일벌레들인 것 같다고 말하는 마르케스, 대가들인데 이들도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2005년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낸 첫 번째 해가 될거요.’로 자신의 부지런함을 자랑하는 작가, 공식석상에서 주먹다짐을 했다는 마르케스와 요사, 무슨 이유로 이 거장들이 주먹을 휘둘렀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삶 속에서 문학의 위대함과 거장으로써의 삶, 하지만 한 곁에는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리하는 것 같다.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한 것 같으면서도, 사회에 대한 변혁,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라는 결의로 요약되는 것 같다. 그들이 분명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길을 계속 걸어오면서 사회에 힘을 보태고 있기에 그들은 존경과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닐까? 비슬라바 쉼보르스키의 현재성. 그에게서 배우는 것은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리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심사숙고하는 방법과 생각을 표출하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가 많이 취약한 부분 집단, 민족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우리는 집단 이데아를 지지해선 안 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특히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사진들이다. 흑백사진 속의 거리, 세상 속에서 작가가 사람들과 호흡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의 일상생활의 모습과 집의 사진에서 그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곳을 엿본다. 그들의 손에 주목한다. 노인의 손, 수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 그 손, 그들의 손은 그들의 상징성이 아닐까. 세월과 작품 그리고 그들의 나라, 그 속에서의 그와 그의 손이 이끄는 데로 쓴 수많은 그들, 그것들이 지금의 이 모습을 만들었다. 비극적인 환경, 그 속에서 그들은 살아왔다. 그들은 증인이자, 기록자였고, 행위자였다. 그들은 세상을 보았고, 그것을 써 내려갔고,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의 바램.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가 나왔으면.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원하려 했을까? 그들의 삶을 통해 인생에 대한 그들의 답을 엿보기 위해서 일까? 그들과 같은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이기에 그들의 삶이 부러운 것일까? 흔히들 말하는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광고, 난 그들이 부럽다. 그들이 존경스럽다. 이들에게 대통령으로 출마할 것을 원하는 국민들과, 이를 거부하는 작가, 우리나라 같으면 앞 다투어 나서지 않을까? 자신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아니 이런 존경을 받는 작가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문학은 삶과 결코 담을 쌓을 수는 없다. 삶이 곧 문학이기에, 그들은 오늘도 작품을 쓰면서, 세상에 힘차게 외친다. 우리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점점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사회적으로 분열되어가는 대한민국 그 속에 점점 힘든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나라에도 이들을 대변하는 작가가 있었으면. 이 땅의 민주화운동과 최근의 촛불집회에서 참여한 수 많은 사람들, 왜 우리는 이렇게라도 촛불을 밝히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우리를 대변해 줄 단체나 사람들이 부족하고,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이 많은 마음들을 한데 모은 것이 아닐까? 이전보다 나아진 인터넷 세상이기에 분명 글로써 말로써 세상을 깨우기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그렇게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글은 적고, 소통의 노력이 조금은 아쉽다.

 

언제쯤 우리들이 소망하는 노벨문학상 작가가 탄생할까? 노벨문학상이 그 나라 문학수준을 판가름하는 잣대는 아니지만. 우리만이 인정하는 한국문학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공감하는 한국문학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이 세상이 살 맛 나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대변하며, 모든 사람들과 공감하는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며.

책과 나의 손, 그들의 손은 글을 쓰고, 나의 손은 책 읽기를 도와준다. 언젠가 나의 손도 그들처럼 글을 썼으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서 더 성숙된 사람이 되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글을 쓰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프다.



YES마니아 : 골드 p*******t 2012.02.19. 신고 공감 15 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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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위에 혹한을 잇던 겨울도 촐촐히 내리는 빗물 사이로 매서운 기운을 흘려보내고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봄이 머지않았음을 전한다. 쉽사리 극복하기 힘든 소외계층의 고달픈 겨울나기는 걷잡을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희망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비극이 배태된다.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량 사이로 힘겹게 수레를 끌며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을 프레임에 담은 기자의 글을
"외진 세상을 밝히는 등불들의 삶에서 쓰는 힘을 발견했다." 내용보기

  강추위에 혹한을 잇던 겨울도 촐촐히 내리는 빗물 사이로 매서운 기운을 흘려보내고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봄이 머지않았음을 전한다. 쉽사리 극복하기 힘든 소외계층의 고달픈 겨울나기는 걷잡을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희망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비극이 배태된다.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량 사이로 힘겹게 수레를 끌며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을 프레임에 담은 기자의 글을 보는 일은 강추위를 더욱 얼어붙게 만든다. 제도가 규정하여 보호하는 형태의 생활 보조금은 빈한한 삶을 회복하는 데 실질적인 보탬은 되지 않는 당의정(糖衣錠)일 뿐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뚜렷한 지금의 사회에서 편법을 쓰더라도 자신들의 성을 더 높이 쌓는 일에만 골몰하는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정부의 논리 아래 사회 구조적인 병폐를 바로 잡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다양한 상황과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 사회의 지배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들과 뜻을 함께 했던 반란자 열여섯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16인의 반란자들>>은 공명을 일으켜 개개인의 삶 속 깊숙이 빠져들게 했다.

 

 

 

세상을 바꿔가는 나의 꿈

 

 

   글쓰기로 평생을 살아 온 수상자들의 삶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며 그 과정에 충실한 생활을 이었다.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깊이 사유하고 경험한 일을 표현하려는 욕구에 열정적으로 매달린 작가들은 체제에 불응하는 글쓰기 로 반대파의 습격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작품을 써내려가는 일이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방법을 달리하여 글 쓰는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하여 작품 활동에 매달렸다. 충분한 휴식도 없이 여백을 채워가는 일에 몰두하던 이는 심신이 무너져가는 신호도 감지하지 못한 채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이 겪는 일처럼 받아들인 작가들은 자아와 타자와의 선을 그어 성을 높이 쌓기보다는 미처 살피지 못한 타자의 내밀한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겪는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심리 장애를 겪는 아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오에 겐자부로는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하는 힘을 마련해줬다. 아버지는 글로, 아들은 음악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소통하여 가는 삶을 실현해 나갔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고통스러우면서도 소리도 지르지 못하였던 일을 떠올리며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아들 히카리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들의 탄생으로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불운하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다른 일들의 영향으로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곧추 세우며 민주주의 대척점에 놓인 천황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한 일은 그의 정신세계를 집약해 준다. 이익을 구하려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가 낳은 노예제도가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하여 질곡의 삶을 잇는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토니 모리슨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살아 온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품 세계를 구현해 갔다.

 

 

   나이지리아의 만델라로 불리는 월레 소잉카는 석유 대국이지만 국민들 스스로 자신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관습조차 상실해버린 현실을 온 몸으로 바로 잡아가는 일에 능동적이다. 그는 인간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파괴하고 긴박한 순간에는 격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여 스스로 힘을 취하는 오군을 숭배하며 나이지리아의 자유를 위해 권력에 대항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석유 송유관에 구멍을 내어 훔친 석유를 팔아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합법성을 어기는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체념이 독재정권의 사슬에 묶여 극한적 삶이 되풀이되는 나이지리아의 민주화를 위한 작가의 헌신적인 노력에 환호하는 자국민들의 애정이 들려온다.

 

 

 

평화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자랑하는 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은 실효를 거두기보다는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있어 풍자적인 수법으로 관객과 배우들이 연대하여 그 대상을 조롱하여 핵심을 찌른다. 희극작가 다리오 포는 정치계의 전횡과 부패에 맞서는 운동으로 비판적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아내 라메는 상원의원으로 안티파시스트 활동을 벌이며 정치적 소신을 지키다 수차례 능욕을 당한 일을 담담히 기술하며 그 경험을 토대로 ‘능욕’을 썼다는 작가의 말에 외경심은 더했다. 겪은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집필할 때 그동안 경험한 일을 반추하여 다시 살아가는 생활 속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탈고한 글을 수용하여 의미를 더한다. 흑인의 인권을 분리했던 억압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대항하여 이를 승리로 이끌었고, 새로운 밀레니엄 전염병인 에이즈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에이즈 예방과 퇴치에 나선 나딘 고디머는 점진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운명 없는 인간들>>이라는 책에서,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보낸 시간이 딴은 행복하기도 했다는 말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는 임레 케르테스는 10대 시절에 직접 경험한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인간의 존재적 의미를 천착하였다. 작가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홀로코스트에서의 잔혹한 일들을 떠올리며 무감각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수용소에서의 삶은 생존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가 생명의 소중함을 둘러싼 트라우마로 자리하였다. 광기어린 집착은 이성의 시대를 조롱하는 아우슈비츠라는 거대한 폭력 아래 한없이 무력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존재적 가치를 둘러싼 부조리를 글로 풀어나갔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다른 생명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일기 속 한 구절-‘나는 절대 다른 존재의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끔찍한 경험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 생명의 존엄함을 인정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일은 화해의 시대를 열어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삶이 잣는 무늬 속으로

 

 

   출생은 의지적인 바람으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각자의 삶 앞에 놓인 운명을 스스로 열어 존재감을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지낸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일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며 늘 여백을 채워 나가는 작가들은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혜택은 또 다른 꿈의 지평을 열어가게 하는 힘을 실어준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싶다던 바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매사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장점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라는 말에 여든 셋의 고령의 나이가 무색해지고 만다. 자신의 시는 어떤 순간을 표현하여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며 테러리스트를 영웅화하는 시대에 테러리즘에 대한 비판적인 시를 발표하여 이 시대를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생각게 했다. 고국에서는 반체제 인사로 거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질곡의 시간을 떠올리며 창작을 위해 망명을 요청한 가오싱젠은 스스로를 유린하는 권력의 부정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절대 권력의 서슬에서 도피한 도망자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차분한 일상을 바라는 고독한 작가의 소망이 투영되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하여 세계적인 독자를 만나가는 일은 작가로서 자긍심이 더한 일이다. 월콧의 문학적 야망에 불을 지핀 어머니는 아들이 쓴 시를 시집으로 출간하도록 지원했고, 혼합적인 문학을 옹호하는 작가는 유럽중심주의 편견을 맹렬히 공격하며 자신의 작품을 비하한 네이폴과의 논쟁 등은 그만의 특수성으로 비춰진다. 서른 살까지 돈을 벌지 못했지만 유년 시절 어머니가 심어 준 자기 확신은 표현의 자유를 허용치 않는 터키에서 정부가 숨기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는 오르한 파묵으로 자리하게 했다. 이스탄불 작업실에서 터키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집필하는 시간을 좋아하고 즐기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의연히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손과 발이 되어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현상 너머 본질을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경험의 정점에 놓이는 과정이다. 사비 아옌과 킴 만레사가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16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만나 다각도로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 평범하지만 특별한 생활을 이어가는 여정을 깊이 있는 대화 속에 담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나 작가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찾아 기존의 체제에 반하는 작품 속 의미를 프레임 속에 담아 수상자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극명히 하였다. 깊이 있게 생각하여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작가들의 손은 굴곡 있는 삶을 택하여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하여 인류의 행복을 위한 일에 보탬이 되는 창작 활동에 몰두해왔고 글을 쓸 수 있는 동안 자아와 타자를 잇는 일에 충실하였다.



n*****9 2012.02.16. 신고 공감 13 댓글 19
리뷰 총점 종이책
영원한 현재를 소유한 시간의 승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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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담보로 붙잡힌 사람들...검버섯이 새겨질 때까지   한 사람이 자신의 사유를 글로 풀어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은 시간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시간은 세월이란 이름의 무게를 달고 온다. 그들에게 시간은 매섭다. 그들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산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그들을 담금질하고 해체한 것이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사투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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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담보로 붙잡힌 사람들...검버섯이 새겨질 때까지

 

한 사람이 자신의 사유를 글로 풀어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은 시간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시간은 세월이란 이름의 무게를 달고 온다. 그들에게 시간은 매섭다. 그들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산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그들을 담금질하고 해체한 것이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사투와 같았다.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싶을 때, 시간은 비로소 작은 선물 하나를 그들에게 주었다. 준엄한 시간을 막 통과했음을 알려주는 지표는 그들의 얼굴에도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 훈장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흔하고 쉬운 표식을 하고 있었다. 검.버.섯! 그렇다. 검버섯이 자신의 얼굴에 새겨질 때까지 그들은 시간에 볼모로 붙잡혀진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 불렀다.

 

노벨 문학상이란 거대 담론과 나

 

오늘날 노벨 문학상은 인류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그 안에 자신을 등재한 사람들은 유명세란 이름의 반대급부를 치르게 되었고, 이제 그들의 남다른 사유와 개인사의 질곡은 궁금증을 넘어 글쓰는 이의 교본이 되었다. 그들에게 글은 무엇이며, 그들의 내밀하고도 아픈 경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에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그런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읽는 동안 마치 넓은 대양 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내 숨통을 틔워주었다.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老 작가들의 짧고도 명쾌한 말은 답답한 내 가슴에 차가운 물을 부은 듯 청량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 배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나는 타인의 재능을 향한 경쟁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타인의 재능을 기뻐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될수록 내 알량한 지식에 기대지 않게 되었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어리석고도 교만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될수록 내 생각은 조금씩 자라게 되었다.

 

그녀가 떠나던 날, 그녀를 만나다 

 

이 책을 읽게 된 날은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가장 뒤에 있던 그녀의 글을 사람도 몇 없는 지하철 안에서 읽으며, 한 권의 책은 운명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사유가 다른 한 사람을 매료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그녀를 소개하는 첫 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게 매혹적인 것이다' 이렇게 멋진 말을 老 시인에게 듣게 되다니, 나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만일 지하철만 아니었다면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독자에게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말해요. 인생이란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것을, 아주 명확한 것처럼 보이는 사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해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 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 있잖아요."

 

이렇게 근사한 말을 책을 펴자 마자 보게 되다니, 내 심장이 일정 속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뻔한 얘기와 뻔한 시각에 나는 꽤 질려 있었다.

 

독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작가

 

몇 편을 거꾸로 읽다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주제 사라마구였다. 그의 책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앞을 못보게 된다는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 인간 본래의 모습을 폭로하는 작가의 글은, 읽는 동안 나도 모를 긴장감을 갖게 했다. 그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와는 또 다른 소리를 냈다.

 

"......본격적으로 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은 <디아리우 데 노티시아>지에서 기자 일을 잃었을 때였소. 그때 내 나이 오십이었지요. 누군가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진지하게 이렇게 대답해요. 아무것도 쓸 게 없었다고."

 

그러면서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의 삶에 지표가 되어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러나 전직 자물쇠공을 위대한 작가로 만들어준 이 영향력 있는 시인이, 가족에게조차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됐음을 아는 것은 비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문학의 도상에 자신의 生을 바쳐야 했던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언뜻 비쳐진다. 그들에겐 보상이 없었다. 아프다.

 

                                      사진 출처: http://www.cyworld.com/heebee747

 

그들도 인간이었다...우리와 같은

 

이 책엔 이들을 비롯 16인의 대담이 실려있다. 예전부터 익히 이름을 알았던 작가도 있었고, 처음 들어본 작가도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 하여 이들 모두가 자신만의 사유를 진지하게 풀어낸 것은 아니었다. 삶에 너무 지쳐 버린 작가도 있었고, 혼탁한 세상이 흠집을 낸 작가도 있었다.

 

아직도 과거의 상흔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작가도 있었고, 여전히 치명적인 우울과 싸우는 작가도 있었다. 문학적 소신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작가도 있었고, 그로 인한 실질적 외상으로 남은 생을 힘겹게 살다 가버린 작가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여리고 작은 한 인간에 불과했다. 일반인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럼에도 그들은 달랐다...현재를 복원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우리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찰나인 현재를 붙잡았다. 바로 그때, 즉시 과거가 되는 현재를 글로 포착해, 영원한 현재성을 우리에게 복원해 주었다. 잠시 잠깐 스치고 만, 그래서 항상 놓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시간을 그들이 포획함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시간의 회복으로 우리는 이제 과거의 회한에 젖지 않게 되었다. 시간을 회복시키는 작업은,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획기적인 役事였다. 지나간 것을 미화하지 않으며, 미래를 희망으로 채색하지 않고도 그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현재 속에서 있는 그대로 구현해 냈다. 그러므로 현재는 지난 과거를 추억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주며, 오늘을 오늘로서 살게 하는 미래의 선물이 되었다.

 

시간안에서 보편성을 걷어올리다...승리자의 노래

 

'약속하되 거기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는 주제 사라마구의 말은 문학적 희망의 부재를 말함이 아니다. 이는 문학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희망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터다. 홀로코스트의 공포와 천안문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또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것은 밤새 쓰고 지웠던 글밖에 없었다.

 

그 오랜 시간 글을 붙잡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그들은 마침내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획득하게 됐다. 이제 그들은 전세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우르는 사람이 됐다.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 시간은 그들을 무섭게 단련했다. 혹독한 시간의 다룸 속에서 자신의 아픔으로 시대를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의 상흔으로 시대의 가공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들은 시간의 보상을 받았다.

 

이런 그들에게 노벨 문학상이란 영예는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것이 별 것 아니며 세상의 영예 또한 부질없는 것임을 알 때 시간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 영예는 그들에게는 기쁨을, 우리에게는 희망을 되돌려 선물할 것이다. 이는 검버섯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날 때까지 참고 인내해준 그들에게, 혹은 미래의 그들인 우리에게 주는 시간의 축하 메시지이기도 하다.

 

 

 

* 스테이지 팩토리 리뷰대회 3등

 

 

d*********2 2012.02.20. 신고 공감 12 댓글 25
리뷰 총점 종이책
타인의 이야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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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어떤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하는 것이 있다. 한 분야에서의 그 사람의 유명세가 그를 마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식견이나 능력을 가진 존경받을 만한 존재라는 믿음으로 번져가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가 그렇다. 이를테면 컴퓨터 바이러스를 개발, 인기와 부를 한 몸에 받아낸 안철수 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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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어떤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하는 것이 있다. 한 분야에서의 그 사람의 유명세가 그를 마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식견이나 능력을 가진 존경받을 만한 존재라는 믿음으로 번져가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가 그렇다. 이를테면 컴퓨터 바이러스를 개발, 인기와 부를 한 몸에 받아낸 안철수 교수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그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의 모습과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도 좋을 어깨의 힘을 빼고 늘 겸손함으로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모습은 한 인간으로서, 더 나아가 위인 비슷한 반열로서 존경받고 찬사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정치라던지, 여타의 다양한 모든 분야에서도 역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는 그런 존경과는 별개로 꽤 위험한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측면과 성실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세상을 위해 좋은 일.. 다시말해 사회공헌을 많이 한다는 것은 모두 훌륭한 일이며, 이 삼박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세가 요소의 시너지가 누군가를 모든 분야에 적합한 완벽한 위인으로 만든다는 연결은 논리나 개연성이 낮은 감정적인 측면의 판단이 될 수 있다. 세가지 중 한 가지 요소를(또는 두 가지) 만족시키는 이들은 꽤 많다. 이를테면 특정 분야에서 꽤 전문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거나 불성실한 사람,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매사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 전문성도 성실함도 다 평균 정도이지만 타인을 돕거나 사회적 공헌 활동에는 꽤 헌신적인 사람 등.

 

얼마전 「댄싱퀸」 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 황정민은 뒤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순수하고 착하기만 할 뿐 세상물정을 모르는, 시장통에서 시원찮은 벌이로 전전긍긍하며 전세값 2,000만원에 쩔쩔 매는 가난한 변호사로 나온다. 술자리에서 늘 잘나가는 친구들의 술을 얻어먹으며 부러워만 하던 그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다. 모 당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드리고자, 최근 우연한 계기로 지하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그래서 그의 삶마저 인권변호사로 재조명을 받은 황정민을 경선 후보로 끌어들인 것. 그때 그 이유에 대해 한 정치인이 설명한다. 「세상은 스토리를 원한다. 그리고 그에겐 스토리가 있다..」 라고.  이 말은 서울 시장으로서의 자질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이야기의 보유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닐까.. 내게는 어쩐지 그렇게 들렸다. 이런 말까지 하면 뒷통수 따가울 일이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안철수 교수에 대한 세간의 열기 역시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현상 역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거나 감동을 이끌어낼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어가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는.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소. 민주주의의 적은 극우와 극좌, 이슬람주의 자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로부터 자유의 내용물을 비워내고 있는 것은 거대기업과 은행들, 입법권을 쥐고 흔드는 정치권력이란 게 증명되고 있어요. 우리를 쫓아내는 기업들은 자기들의 주가가 오르는 동안, 모두한테 익숙해진 파렴치한 타락행위를 일삼고 있어요. 아니 그것도 부족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법을 지키느냐고 강변하고, 정치가들은 그들의 편법을 묵인하고 있어요.       <권터 그라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노벨문학상 작가(16인)들과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있길래, 일상적 작품활동과 관련된 대담이나 기 발표 작품의 집필 동기 및 해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요한 골자를 이룰 것이라는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사회적 이슈나 정치적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된 대담 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도 아니요, 뚜렷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며 사회변화를 주도해 온 것도 아닌데, 이런 관점의 접근이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물론, 등장한 16인의 수상자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지역사회나 국가에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현재 정권이나 주류 정치권와 대립각을 세워가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관점이나 비판적 자세가, 시대적 흐름과 대세에 편승하는 안이한 자세보다는 분명 그의 집필활동에 풍성한 소재와 아이디어를 던져주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정치적 관점이 그가 수상자라는 이유로 옳다고 여겨지거나 지지를 받아야할 이유가 되어선 안된다고 본다. 그건 앞의 예에서 든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단순한 카테고리로 나누는 세상의 분류에 치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오. 반면에 누군가가 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보지 않거나,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에게 어떤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아주 쉬워요.     <V.S.네이폴>

더구나, 등장한 모든 수상작가들의 견해가 비슷한 색채로 일방향성을 띄고 있지도 않다. 어떤이는 위화감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가하면, 누군가들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까지 한다. 그런 그들의,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해 이물감마저 느끼게하는 가치관의 전달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판단에서는 가져가야할 기본적 주안점에서 다소 편이(Bias)가 일어나버린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내 경우는 그들의 삶 이야기 속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공감하기에는 다소 먼 다른세계 속 낮선 이들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랄까. 그건 내가 이미 작품을 접한 다섯명의 작가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해가며 편하게 읽을 수는 있었지만, 내 삶의 모습과 견주거나 나 자신에게 슬며시 투사시킬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던, 담백했지만 어딘지 허전하고 아쉬운 독서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마음에 딱 드는 문장을 만났다. 그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허전한 내 리뷰의 마지막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내 경험에서 나온 건데, 내가 어디를 가면 가는 곳마다 내 입에다 마이크를 대 줘요. 그리고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하요.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아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래도 그들은 '아니. 지금 당장 부탁한다'고 우겨요. 나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어쩌면 내일이나 대답할 수 있겠다'고 대답해요. 그래도 그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내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누가 되었던지,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처럼 이 세상에는 즉답을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요. 어리석은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도 말이에요. 여전히 나는, 잠시만 생각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어요. 첫인상이 더 정확한 것도, 더 흡입력이 있는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실제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돌아다녀야 하고, 생각해여 하고, 되돌아봐야 하고, 이곳저곳 들여다봐야 하고...

 

나는 독자에게 '세세한 곳에 주목하라'고 말해요. 인생이란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것을, 아주 명확한 것처럼 보이는 사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해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 있잖아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리뷰 총점 종이책
기꺼이 반란군에 지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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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검정색으로 덮인 표지 디자인은 매력적이다. 표지의 중앙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16인의 반란자>들이란 도발적인 제목이 시선을 뺏는다. 겉표지에 눈길이 가는 책이 드문데 <16인의 반란자들>은 손에 쥐자 2가지 질문이 호기심과 함께 떠올랐다. 하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기에 금처럼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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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통 검정색으로 덮인 표지 디자인은 매력적이다.

표지의 중앙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16인의 반란자>들이란 도발적인 제목이 시선을 뺏는다. 겉표지에 눈길이 가는 책이 드문데 <16인의 반란자들>은 손에 쥐자 2가지 질문이 호기심과 함께 떠올랐다. 하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기에 금처럼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 왜? 반란자라는 도발적인 단어를 사용했을까? 저들이 진정 반란자라면 어둠의 색인 검정색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란 생각도 들고…….”

두 번째는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색의 표지 속에는 미소를 짓거나 파안대소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7명의 늙은이들이 보인다. 반란자들이라면 인상은 날카롭고 총 한 자루쯤은 들고 다른 사람을 선동하는 모습의 사진이 어울린다. 그런데 저들의 표정은 폭력 따위를 사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표지는 분명히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일까?” 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들어가는 글’속에 그 답이 나와 있다. ‘우리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 거의 대부분이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문화 너머에 있는 일들과 담을 쌓는 작가의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  다리오 포의 손 -  

 

표지에서 ‘16인의 반란자’들을 금빛으로 치장해 놓은 이유는 저들이 이룬 작가적 역량을 칭송하고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은 문학적 성과가 아니라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저항했기 때문이다. 돈도 권력도 젊음도 없는 16명의 늙은이에 불과하지만 저들에게 공통적인 무기가 하나 있다면 펜이다. 얼굴은 굵은 주름살이 박혀있고, 머리털은 늙은 사자와 같이 빠졌고, 손은 투박하고 거칠고 쭈글쭈글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저들은 그 손으로 수십 년간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펜을 들었기에 늙어도 아름답다.

 

‘16인의 반란자’들은 독수리와 같은 예리한 눈빛으로 이 시대를 관찰했고,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각양의 문제를 알았기에 기꺼이 반란군이 되어 이 시대와 싸웠다.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1982년 가브리엘 마르케스로부터 2007년 도리스 레싱까지 총 25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었지만 이 책의 글을 쓴 ‘사비 아옌’과 사진을 담당한 ‘킴 만레사’는 그 가운데서 16명의 노벨상 수상 작가를 선정했고, 3년 동안 최대한 자유스러운 분위기속에서 저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작가의 집이나, 고향,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 심지어 작가가 잘 가는 술집 등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즐거운 만남을 이어갔다. 인터뷰가 이루어지면서 ‘16인의 반란자’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지극히 아픈 개인사나 가족사, 작가가 된 동기, 자신의 가치관등을 진실하게 털어 놓았다.

한 시인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노래했는데 이들도 외롭고 아팠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저들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유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40살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은 언제나 나이 들어가는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흑백사진으로 촬영된 ‘16명의 반란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이웃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결같이 푸근하고 이해심이 많아 보인다. 더군다나 저들의 미소를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저들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겪었기에 아픔이 무엇인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인생을 체험적으로 산 사람들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 지혜의 깊이는 얼굴만 봐도 보인다. 사진으로 보는 저들의 얼굴은 소중하고 부럽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도 흔들리지 않고 인생을 거침없이 살아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구나 아픔과 고통을 지니고 산다.

평생 지적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아픔, 백만 명의 아르메니안 인을 살해한 자신의 조국 터키의 야만성을 폭로했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도 경호원이 있어야 외출할 수밖에 없는 암살의 두려움. 재혼한 남편은 어린여자들과 어울려 집을 나갔고 돈이 없는 그녀는 어머니였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등 저들도 누구나 겪는 인생의 아픔이 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저들은 하얀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썼으리라. 마침내 문학으로 승화된 작품은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일으켰고 저들은 문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제공했다.

 

‘16인의 반란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 그들은 늙었기에 육체적인 힘은 없고, 아직도 검버섯이 피고 주름살이 깊게 패인 손을 가지고 있다. 그 손이 움직이는 날까지 저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써내려갈 것이다. 특히 그 상처와 아픔은 주로 약자들이 가지고 있다. 약자이기에 빼앗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그들을 위해 누군가는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저들은 자원해서 이 시대의 반란자가 되었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지구의 숲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 되었고, 장애인의 고통을 알기에 기꺼이 그들을 보듬는 일에 뛰어드는 배려와. 아직도 인종차별 때문에 억압받고 있는 흑인의 권익을 위해서 절도범과 창녀와 같은 평범한 이들에 대한 관심. 나이지리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부당한 권력 앞에 가슴을 여는 용기,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유산을 내어놓는 동물 사랑‘등 16명의 반란자들은 자신이 지켜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위하여 힘든 싸움을 진행 중이다.

 

청년시절에 읽다가 내 팽개친 샤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되는 한 구절이 있다. ‘문학의 사명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참여에 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가치를 파괴하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억압과의 투쟁을 선언했던 샤르트르라는 선각자가 있었기에 16명의 반란자들도 흔들리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   권터 그라스의 얼굴 -                                                                                     

그러나 누군들 흔들리지 않을까?

살기 위해 예수를 3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연약성.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16인의 반란자’들 중에서 권터 그라스의 아픈 자기 고백을 읽고 또 읽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치 치하에서 친위대로 복무했다는 이력 때문에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가 진짜로 미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전쟁초기에 그들은 내 사촌을 총살했고 학교에 있는 내 급우와 교사를 데려갔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어떤 병사는 총살 집행인으로 뽑히는 것을 거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소. 나는 그들을 향해 왜? 그러느냐? 고 묻지 않았고, 그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수용소로 데려갔지만, 그때마다 나는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게 바로 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이자 내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고통이요“ (203쪽)

 

친위대가 되어 나치 정권에 협조했던 것보다 더 권터 그라스를 아프게 한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침묵했기에 그는 평생 동안 그 아픔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문득 2009년 우리 사회를 뜨거운 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용산사태가 생각이 났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이 사태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그때 우리의 문학은 철저히 침묵했다. 물론 모든 문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명서를 발표하며 투쟁에 참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명의 문인이라도 이 사태에 동참하는 모습이 있었을 때 문학이 건재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외면했기에, 침묵을 지켰기에, 지금도 아픈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권터 그라스의 모습을 우리의 문학에 요구한다면 과한 것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삶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가끔 한 권의 책은 그 모습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덧 현실에 안주하며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이 책은 잃어버린 절대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자신을 각성하게 한다. 16인의 반란자를 따라 기꺼이 반란군으로 참여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다.


 



YES마니아 : 로얄 j*****r 2012.02.20. 신고 공감 11 댓글 23
리뷰 총점 종이책
몰랐기에 더욱 매혹적이었던 반란자들과의 만남
"몰랐기에 더욱 매혹적이었던 반란자들과의 만남" 내용보기
국어 사전 속 ‘반란’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두 가지였다. 첫째, 사회나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규모의 집단적 행동. 둘째, 기존의 일정한 체계나 관습에 반하는 새로운 양상이나 시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6인의 반란자들]이라는 책 제목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분명 후자일 터였다. 그런데 좀 묘한 느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을을 지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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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 사전 속 ‘반란’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두 가지였다. 첫째, 사회나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규모의 집단적 행동. 둘째, 기존의 일정한 체계나 관습에 반하는 새로운 양상이나 시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6인의 반란자들]이라는 책 제목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분명 후자일 터였다. 그런데 좀 묘한 느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을을 지칭하는 단어가 반란자라니 그 의도가 무엇이든 그들은 혁신이나 혁명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들에게 혁신이나 혁명과 같은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처럼 노벨상이라는 수식어는 내 내면에서 큰 권위를 의미하고 있었고, 국가 권력이 아닌 예술적인 분야의 권위는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될 절대 성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 성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라면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까지 생긴다. 읽고 싶지만 읽으면 안 되는 것 같은 금기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 금기 모티프는 대체로 금기의 파괴가 나타나듯 금기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나 역시 그 금기를 깨고 이 책의 표지를 넘겼다.

 

 

 묵직한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책은 검은 색이 주가 되는 표지를 사용하고 있었고, 황금색을 이용해 제목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책 속에는 16명의 작가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인터뷰 내용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사진들은 모두 흑백 사진이었다. 흑백 사진이 주는 차분함과 색의 배제한 농담의 표현이 이 책에 언급되는 작가들에 대해 어떤 색을 부여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들은 다양한 국적에 다양한 문화권을 경험한 작가들이었고, 그들의 삶과 경험, 그리고 그들의 고뇌와 아픔, 미래에 대한 소망까지도 글로 표현하고 있는 작가들이었다.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술회를 어떻게 짧은 글 속에 담아 낼 수 있을까?

 

 

 책 속의 저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위험을 자초하기도 한다.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개개인의 종교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위해 천황이 수상하는 상의 수상을 거부한 오에 겐자부로부터, 자신의 글 때문에 조국을 등져야 했던 가오싱젠과 같은 작가는 물론 작품 속에서 다룬 내용 때문에 정부로부터 기소를 당하고 극우민족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버린 오르한 파묵과 같은 작가들도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그 상으로 때론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좀 더 용이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유명세로 인해 오히려 역으로 더 심한 표적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이집트 작가인 나기브 마푸즈는 그의 작품으로 인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시력을 잃어버렸고, 귀 역시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으니 이들의 문학 여정은 잘 다름어진 길이 아닌 험로를 거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겪은 일로 좌절하지 않고 문학과 조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는 커녕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느낌마저 들고 있으니 그들은 천상 문학을 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책 속의 어떤 저자들은 자신의 유명세를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는 한 수단으로 활용하며 세상에 변화를 꾀하기도 하였는데, 글을 통해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책을 원시림을 파괴하지 않는 조건을 걸고 출판하는 주제 사라마구나 에이즈 문제에 대해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는 나딘 고디머가 그랬다. 또는 억압적 국가 환경 속에서도 다른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와 같은 작가도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경향의 작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 문학은 나라와 민족의 아픔을 표면으로 이끌어내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자신의 삶의 괘적 속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 될 때도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써야 한다는 강박적 고통 속에서 글을 써 내려가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고통적인 면이라면 글을 쓰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고수하고 있음과 동시에 항상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애정과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 속에서 몇몇 저자는 노벨상 수상이후의 자신의 시간을 일부 빼앗겼음을 그리고 끝임없이 어떤 현상에 대한 빠른 대답을 요구하는 현실에 처한 자신의 삶을 밝혔다. 이에 잠시 빌어본다. 우리가 그들의 끊임없는 발칙하지만 유쾌한 반란을 계속 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기를....



YES마니아 : 골드 w******6 2012.02.26. 신고 공감 10 댓글 34
리뷰 총점 종이책
16인의 반란자들 / 사비 아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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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하면 떠오르는 얘기가 있다. 언젠가 국어선생님이 하셨던 이야기 같은데 우리나라 작가들중에서도 노벨문학상를 탈 만한 뛰어난 작가. 작품들이 있는데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을 하자니 그 느낌을 살릴 수 없어 안타깝게 세계에 알리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조지훈의 <승무>를 예를 드셨던 기억이 난다. 얇은사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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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하면 떠오르는 얘기가 있다.

언젠가 국어선생님이 하셨던 이야기 같은데 우리나라 작가들중에서도 노벨문학상를 탈 만한 뛰어난 작가. 작품들이 있는데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을 하자니 그 느낌을 살릴 수 없어 안타깝게 세계에 알리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조지훈의 <승무>를 예를 드셨던 기억이 난다.

얇은사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이러 싯구들을 대체 어떤 영단어로 번역하여 그 시를 표현할 수 있겠냐며.. 정말 노벨문학상감인데... 하시며 아쉬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정말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고 어차피 서양에서 수여하는 상인만큼 우리와 같은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수상하기가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그런 기억이 난다.

 

그동안은 해마다 노벨문학상이 발표가되면 작가보다는 작품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아직 읽지도 않고 사 놓기만 한 작품도 몇개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수상작품보다는 그 작가들의 이야기여서 또 다른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수상자들이 아닌 반란자로 표현되 그들의 모습이 자못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진솔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도 이 책을 흥미롭게 하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한다. 일상적인 모습들과 그 작가를 대표하는 이미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쏟아져나온 손...

 

 20세기에 태어나 거의 한 세기를 자신들의 신념을 묵묵히 글로써 표현한 그들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공통 테두리안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물리적인 공통점 외에도,

자연을 거스르면 안 되고 , 나와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듬고, 인종,성적차별에 맞서 올바른 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바로 글쓰기로 그렇게 맞서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수상자라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실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가 되어 추방을 당하기도하고 표적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도 끝임없이 그들과 맞서는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

 

가오싱젠을 말한다

예술가는 두가지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고.

그 하나는 정치권력의 압박으로 인식의 척도를 제한하고 어떤 틀을 유지하라는 굴종을 강요하는 압박.. 그것에 대해 그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압박은 글로벌화된 시장의 압박으로 모든 것을 소비상품으로 변화시키면서 모두를 황폐하게 만든하고 한다..

문학은 상업적인 것을 훨씬 뛰어넘는 가치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주는 도구이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리오 포는 말한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권력은 유머를 견디지 못하고 웃음은 두려움을 벗어나게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수상작가들.

유명세를 치르며 나름 그 위치를 누리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안일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이 추구하는 인류애적인 가치관들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m 2012.10.14. 신고 공감 8 댓글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