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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하면 먼저 간서치(看書痴)라는 말이 떠오른다. 평생
읽은 책이 2만권이 넘었고, 스스로 베껴 둔 책만 해도 수백
권에 이른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看書痴)라 부를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후기 실학자중의 한 사람인
이덕무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했고, 적성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얼출신인 그에게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미친듯이 책을 읽지 않았나 싶다.
이 책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은 이덕무의 청언소품(淸言小品)을 정민교수가 모아 엮은 책이다. 소품(小品)이란 일정한
형식이 없이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간단히 쓴 짤막한 글을 말한다. 그러니 청언소품이라 함은 마음을
맑게 하는 짧은 글이란 뜻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 이덕무의 청언소품집인 [선귤당농소] 전부와 [이목구심서] 일부를 우리말로 옮기고 자신의 평설을 보탰다고 한다. 매미와 귤의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여 선귤당이란 당호를 쓰기도 했던 이덕무의 [선귤당농소]는 ‘선귤당에서 크게 웃다’라는
뜻으로 일상생활 속 신변잡기와 여러 사물을 보고 일어난 감정에 대해 쓴 글이다. 그에 반해 [이목구심서]는 책제목 마냥 평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글의 주제가 거대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들을 대해서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묘사하고 솔직한 생각을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보게 되는 주변의 풍경들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느끼는 대로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글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책 만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빈한한 삶을 생각하면 사뭇 마음이 경건 해진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욕심, 시기,
미움과 같은 마음속의 쓸데없는 생각이나, 몸의 게으름이 생기지 않도록 뜻을 세우고 평생을
정진했다는 것이 이런 소품을 남기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어느 겨울 추운 밤, 한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
한 질을 가지고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아, 조금이나마 추위의 위세를 누그러뜨리고, 간밤에도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았다는 이덕무. 그는 갈대 꽃으로 이불을 만들고 금은으로 새, 짐승의 상서로운 상징을 새겨 병풍을 만드는 것보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이 더 낫다고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쓰여진 글은 청언소품이 되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책읽기와 글쓰기를 소망하지만 한숨부터 나온다.
또한 이덕무는 스스로 자신을 평하기를, 백 가지 가운데 한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했다. 바둑과 장기를 둘 줄 모르고, 소설을 볼 줄 모르며, 여색에 대해 말할 줄 모르고, 담배 피울 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그가 일상생활에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일 게다.
그가 왜 바둑을 술수와 모략으로, 그리고 소설이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싫어했던 것은 소설과 바둑 자체가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그것들이 가지는 폐해를 꼬집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덕무는 그 시간에 더 많이 듣고, 보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시대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난 그 네 가지를 다하고 있다. 이를 어찌한다?
나도 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나 역시 그저 미친 듯이 읽는다. 아마 마음이 허전한걸 책을 읽음으로써 위안을 받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의 굴곡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치유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책 읽기였다. 그러나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다잡을 수는 있었지만, 내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다. 책을 읽고 그것이 생활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덕무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왜 책을 읽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나의 책읽기에 대한 의문이 들 때면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러기에 오늘도 책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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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가 좋은 일이나 독서 또한 좋은 일이다 -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이 책은 간서치 이덕무의 글을 읽어 볼 기회다. 이덕무는 그의 책 읽기, 독서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 책에는 저자인 정민 교수가 이덕무의 글을 번역하고 거기에 저자의 생각을 평설로 붙여 놓았다. 이 책의 제목인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에는 유래가 있다. 이덕무는 어떤 사람인가 <추운 겨울 찬구들에서 홑이불만 덮고 잠을 자다가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漢書)』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 죽기를 면했던 사람이다.> (17쪽) 『논어』와 『한서』는 그렇게 이덕무와 인연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덕무가 쓴 글 중에서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의 전부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의 일부를 한글로 번역하고, 정민 교수가 평설을 보탰다.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선귤당’이란 이덕무의 호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었다 하여 『이목구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일단 이 책의 가치를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덕무요, 둘은 정민이다. 이 책의 저자 정민은 이덕무의 글을 그대로 소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유려한 필체로 번역은 물론, 평설을 보태어 이덕무의 글을 더욱 빛나게 했다. 서설에서부터 정민 교수의 글은 음미할 만하다. <정말 마음에 맞는 벗이 하나 있어, 멀리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그런 만남이 문듣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는 글로 시작하니, 이 책에 펼쳐질 이덕무의 글세계가 못견디게 기다려지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말로 이덕무의 세계를 보이려고 하는 것인데, 그걸 '마음에 맞는 벗'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의 첫 번째 글에서 다시 음미할 수 있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하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이다지도 그런 기회가 오기 드물단 말인가? 일생에 무릇 몇 번일 것이다.> (29쪽) 이때, ‘마음에 맞는’이란 말이 바로 회심(會心)이다. 그 뜻은 다음 두 가지이다. ①마음에 듦, ②또는 그런 마음 그런 의미를 지닌 단어 회심이 이 구절에서 ‘마음에 맞는 시절(會心時節)’, ‘마음에 맞는 벗(會心友)’ 등으로 쓰이니 더욱 새롭다. 한자 읽는 맛 한자는 소리 내어 읽어야 제 맛이다. 이런 글,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자. 먼저, 한글 번역은 이렇다.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하여....... 한참 만에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향해 날려버리리라.>(45쪽) 원문은? (밑줄 친 부분만) 久之, 向花間微風, 飛送也. (구지, 향화간미풍, 비송야.)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花間微風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향하여 向花間微風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향해 날려버리리라. 向花間微風, 飛送也. 이렇게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이덕무의 글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민 교수가 이덕무의 글을 왜 사랑하는지를 공감하게 되는 구절이다. 번역 글의 멋스러움 <3월의 푸른 시내에 오던 비 갓 개면 햇볕이 따스하다. 복사꽃 붉은 물결은 언덕까지 나란하게 차오른다.> (53쪽) 한문으로 읽어도, 번역된 한글로 읽어도 마찬가지로 글이 정경이 되어 떠오른다. 소리내어 읽어보면 더욱 그렇다. 바로 정민 교수가 번역을 멋스럽게 한 덕분이다. 모처럼 글의 맛을 느껴본다. 정민 교수의 글 이 책에는 비단 이덕무의 글만 있는 게 아니다. 이덕무의 글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 정민교수의 글도 음미할 만한데 다음과 같은 글이다. <독서가 지적 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그 지적 토대를 나는 선망한다.> (25쪽) <지상위의 온갖 아름다운 빛깔들은 누가 색칠하는 것일까? 형형색색의 꽃잎들, 눈 그친 뒤 안게 낀 풍경의 농담, 여름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노을 지는 가을 강물이다. 나는 그 앞에 서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75쪽) 다시, 이 책은 이런 글, 세상에!, 읽어본 적이 있는지 <뱃속에 조금 시장기가 있어야 책 읽기가 맛이 있음을 문득 느끼게 되고, 책 읽는 소리도 어느새 공중에 뜨게 된다. 부귀가 좋은 일이나 독서 또한 좋은 일이다.>(224쪽) 이런 글 이 책에 가득하니, 무릇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의 맛을 볼지어다. 글이 이렇게 맛이 있는 줄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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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이덕무의 명문장을 선망하고 있었기에, 이 책이 나오자 읽고 싶어서 다음과 같이 서평 신청글을 써서 책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며칠만에 뚝딱 읽어 치울 수 있는 성질의 책이 아니었다. 한 장, 한 쪽 속에 담긴 이덕무의 삶을 깊게 생각하고 내 삶을 돌아보면서 읽어야할 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좀 더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읽기로 마음 먹었다. 몇 쪽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의 저자 정민은 어쩌면 이덕무에 빙의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민은 이덕무보다 더 이덕무를 많이 아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이 부분 善讀陶彭澤集(선독도팽택집) -> '도연명의 문장을 잘 읽을 수만 있다면'이라 번역하고, 정민은 이렇게 다시 풀이하고 있다.
이덕무가 '도연명의 문장을 잘 읽는다'는 의미는 도연명의 삶과 철학을 읽는다는 것이었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을 때 저자가 초판 서문에서 밝힌 말이 생각 났다.
이렇듯 이덕무에 빙의된 저자의 해설은 읽는 동안 내내 감동을 주며, 마음의 평온을 주었다.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의 한문의 대가가 아니기에, 나는 직역만으로는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저자의 이 책은, 이덕무의 문장의 행간에 숨은 뜻까지 밝혀서 이 글들이 이덕무의 생각인지 저자 자신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책을 늘 옆에 두고, 한 장 한 장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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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똥구리와 여룡(驪龍) 사이, 말똥과 여의주 사이 - 정민, 『이덕무 청언소품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이덕무는 책에 미친 사람이다. 배가 불러도 그는 책을 읽었고, 배가 고파도 그는 책을 읽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그는 책을 읽었고, 한겨울 강추위에도 그는 책을 읽었다. 집에서 책을 읽을 상황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책을 읽었다. 그는 왜 이리 책읽기에 모든 인생을 건 것일까? 이덕무는 책에서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양반가 서자로 태어난 가난한 선비가 글 읽기 말고 할 게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는 책으로 가슴 속 울분을 풀었고, 그는 책으로 가슴 속 울분을 삭였다. 책을 읽으면 울분이 가라앉고 맑은 기운이 온몸을 감돌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에 있을까?
이덕무는 책으로 살았고, 책으로 죽었다. 책으로 살고 죽은 사람이 남긴 글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엄청난 위안을 준다. 추운 겨울, 문으로 새어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한서(漢書)로 이불을 삼고 논어(論語)로 병풍을 삼아 책을 읽었다는 이덕무의 글을 읽다 보면, 찬바람이라곤 새어들 수 없는 따뜻한 방에서 책과는 인연을 끊은 채 사는 우리네 삶이 자꾸만 떠오른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는데, 책을 꼭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인터넷 속 정보와 책 읽기는 과연 같은 것일까? 인터넷 정보는 생각의 흐름을 끊는다. 정보를 찾으면 그뿐이라는 얘기다. 책 읽기는 다르다. 생각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곧 생각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민이 해제를 한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열림원, 2018)은 조선 후기 학자인 이덕무가 지은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추려 뽑은 글을 모은 책이다. 이덕무가 일상에서 느낀 마음을 표현한 글들을 읽노라면 글과 글을 쓴 사람의 품성이 다르지 않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이덕무가 사물에서 정감을 느낀다면, 정민은 이덕무가 쓴 글에서 정감을 느낀다. 두 사람이 느끼는 정감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이룬 셈이다. 글은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민이 읽은 이덕무는 과연 어떨까? 이덕무가 읽은 사물이나 세상은 과연 어떨까? 여기서 정민이 읽은 세상살이가 보태지면 이 책은 조선 후기와 현대를 잇는 새로운 정경으로 거듭난다. 이덕무가 쓴 글에는 과거만 있는 게 아니라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 우리가 왜 옛사람이 쓰는 글을 굳이 찾아 읽겠는가?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외면하지 못할 삶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쓴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하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이다지도 그런 기회가 오기 드물단 말인가? 일생에 무릇 몇 번일 것이다. (29쪽)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하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란다. ‘마음에 맞는’이라는 어구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작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에둘러 드러낸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태어나는 것부터 힘들다. 태어나는 건 우리가 선택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마음에 맞는 벗과 말과 시문은 상황에 따라 이룰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맞는 벗이라고 해서 마음에 맞는 말을 꼭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말이 그런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건 더하지 않겠는가? “일생에 무릇 몇 번”이라고 이덕무는 말한다. 그 몇 번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후회만 하다 저세상으로 간다. 짧은 글 속에 마음에 맞는 무언가를 만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드러났는지 알겠는가? 절실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도 일생에 무릇 몇 번인데, 그 마음조차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민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쓴다.
회심會心은 순간은 기약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려 한다 해서 되지 않고, 만들려 한 대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은 그때에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긴 날 동안 그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힘을 충전시켜준다. 또 언젠가 올 회심의 그때를 기다리면서. (29쪽) 회심(會心)은 마음먹은 대로 되어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덕무가 사용한 회심을 정민은 ‘마음에 맞는’으로 옮긴 셈이다. 정민은 회심의 순간은 기약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어느 순간 다가왔다가 갑작스레 가버리는 이 순간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고 정민은 이야기한다. 이덕무가 한 얘기와 같으면서 다르지 않은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회심의 순간이 오는 거라면, 그리고 그때를 그리워하며 우리가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거라면, 인생은 언제나 이 순간을 얻기 위한 기대로 넘쳐나게 된다. 이덕무는 그 순간을 책 읽기를 통해 이루려 했고, 정민 또한 그 길을 따르려고 한다. 책을 읽는 일이 이들에게는 새로운 순간을 여는 길이다. 이만하면 책을 미친 듯이 읽는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는 게 아닌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33쪽)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뒤쪽은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깔깔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째서 어두워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105쪽) 말똥구리는 말똥을 아낀다. 여의주를 주어도 말똥구리는 말똥을 아낀다. 여의주 대신 말똥을 선택한 말똥구리를 사람들은 바보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바보는 사람들이다. 말똥구리에게 여의주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말똥구리는 그저 말똥이 좋을 뿐 여의주를 탐하지 않는다. 여의주를 가진 여룡은 어떨까? 여룡은 여의주를 가졌다고 스스로 뽐내지 않는다. 교만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도 않는다. 여룡은 말똥구리에게 여의주가 필요 없다는 걸 잘 안다. 말똥구리는 오로지 말똥을 최고로 삼는다는 걸 잘 안다. 상대를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말똥구리와 여룡의 처세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행하는 방식과는 참으로 다르다. 우리는 말똥과 여의주를 비교하여 여의주를 말똥 위에 세운다. 여의주는 좋고 말똥은 나쁘다.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그래서 벌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유행하는 말이 무엇인가? ‘무한 경쟁’이라는 말이 아닌가? 말똥구리가 웃고, 여룡이 웃을 말이다.
말똥구리와 여룡은 생각하는 방식이 거울을 보는 어린아이와 닮았다.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깔깔대며 웃는다. 거울 뒤쪽으로 가더니 또 깔깔 웃어댄다. 거울에 비친 사람을 찾으러 뒤로 갔는데, 뒤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린아이는 묻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다. 아이에게는 거울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놀이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그냥 놀이일 뿐이다. 거울 앞과 거울 뒤가 다른 이유를 캘 수도 있지만,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똘똘한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거울 앞뒤를 오가며 그저 웃는 아이가 어찌 보면 가장 아이다운 아이인지도 모른다.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이덕무는 말한다. ‘구애됨’은 한곳에 얽매이는 것이다. 아이는 거울에 얽매이지 않는다. 구애됨이 없으니 저리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말똥구리와 여룡도 마찬가지 아닐까? 말똥구리와 여룡은 사람들처럼 여의주에 구애되지 않는다. 작가는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삶을 사물에 구애되지 않는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선비가 한가로이 지내며 일이 없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지 않게 되면 작게는 쿨쿨 잠자거나 바둑장기를 두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재물과 여색에 힘쏟게 된다. 아아! 나는 무엇을 할까? 책을 읽을 뿐이다. (272쪽) 이러이러한 일이 있게 되면 이러이러한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295쪽) 천리마의 터럭 하나가 희다고 해서 그 말이 백마일 거라고 미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온몸의 억천만 개의 터럭에 혹 누런 곳도 있고 검은 부분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어찌 한갓 사람의 한 면만을 보고 그 전체를 논단하겠는가? (330쪽) 사물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사물을 무시하는 삶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물에 기대어 앎에 이른다는 말뜻에 나타나듯, 옛사람들은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되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물에 구애되지 말라는 말은 그러므로 사물에 휩쓸리지 말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잠을 자되 잠에 휩쓸려서는 안 되고, 바둑장기를 두되 바둑장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재물과 여색도 마찬가지다. 재물과 여색에 휩쓸리면 본질을 잃어버린다. 이덕무는 “책을 읽을 뿐이다.”라는 다짐으로 사물에 구애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가 생각하는 군자의 길은 이렇듯 사물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에서 뻗어 나온다. 사물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은 고요하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자기를 비방하는 말을 들어도 그저 그러려니 한다. 오로지 자기 마음만 들여다볼 뿐이다.
이덕무는 “격식이 고착화된 형식”(295쪽)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격식이 고착화되면 우리는 격식에 휩쓸리는 꼴이 된다. 격식은 왜 있는 것인가? 사람살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살이를 위해 있는 격식에 휩쓸리면 우리는 정작 사람살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실학자다운 발상이다. 허례의식에 젖은 당대 양반 사회를 향한 비판의식이 밑바탕에 담겨 있다고 봐도 좋겠다. 이덕무는 “이러이러한 일”은 “이러이러한 격식”을 갖추면 된다면 말한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은 연후에야 이러이러한 격식이 따르는 것이다. 격식을 형식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서 벗어나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그는 애초부터 거부한다. 상황에 따라 격식을 차리는 실용론을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면모가 있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을 옭아매는 형식이 격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덕무는 천리마의 터럭 하나가 희다고 그 말이 백마일 거라고 미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한 면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얘기겠다. 온몸에 있는 억천만 개의 터럭에 누런 곳이 있을 수도 있고, 검은 곳이 있을 수도 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네 삶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말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사회는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 생각이 곧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남이 하는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남이 하는 생각이 틀리면 자기 생각도 틀릴 수 있다. 내 생각만 옳고 남이 하는 생각은 틀리다는 이분법이 우리 사회를 자꾸만 전쟁터로 만든다. ‘터럭 하나’에 담긴 진실을 우리는 이제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 후기에 서자로 태어나 평생을 책을 쓰고 글을 쓰며 지낸 한 서생(書生)이 하는 말을 우리가 지금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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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정민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라 일컬을 정도로 책을 사랑했던 이덕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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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에 초판이 나온 오래된 책입니다. 즉 거의 스무 해가 지나서 절판된 책을 다시 재출간한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스무 해라는 것이 큰 의미는 없는 것이 이 책은 이백 오십 여년 전인 18세기에 조선시대 서얼 지식인이자 실학자인 이덕무가 쓴 ‘청언소품’을 모아서 엮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인 정민 교수는 ‘선귤당농소’의 전부와 ‘이목구심서’의 일부를 옮기고 평설을 보탰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수십 편에 이르는 이덕무의 짧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눈과 석양 그리고 3월과 같은 계절에 대한 소회와 마음가짐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책과 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글은 이 책의 51페이지에 실린 ‘단 한 사람의 지기’라는 글입니다. 여기에 조선후기 실학자인 청정관 이덕무가 생각하는 친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까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우리가 흔히 보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영화 속의 친구의 모습이 동향의 동창으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뜻이 맞는 친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덕무의 친구는 알 것 다 아는 성숙한 인간들 사이의 깊고 고즈넉한 관계를 말하는 듯합니다.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얻은 실을 50일 동안 물들일 정도의 정성이 필요한 관계가 바로 지기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학자이신 정민 교수님은 이미 <책벌레와 메모광>이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책벌레 이덕무의 독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되는 그의 일화 하나하나가 존경심이 저절로 드는 일들이었기에, 과연 최고의 독서가인 그의 문장들이 어떠한지 궁금하고 또 읽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정민교수님이 이렇게 이덕무의 문장집을 펴내고 이렇게 또 재출간 한 것이 너무 반가웠고 그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풍부한 해설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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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이불과 논어병풍> 정민 열림원 따라쓰기 또는 필사하기에 딱 좋은 책을 만났다. 정민선생님의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조선 후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한사람 신분제사회였던 조선에서 양반이 아닌 서얼로 태어나 출세의 꿈을 꾸기도 어려웠지만 독서를 통해 꿈으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분. 자칭타칭 간서치, 책만 보는 바보라는 이덕무의 이야기.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은 너무너무 추운 겨울날 밤,견디다 못해 책을 꺼내서 이불삼고 책을 빙둘러 세워서 병풍삼았다는 일화에서 나온 제목이다. 정조대왕께서 이덕무에게 "남의 글을 교정하거나, 남의 책을 정리만 하지 말고 그대의 책을 쓰도록 하라." 하여 시간과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꾸준히 책을 읽어온 그에겐 큰 기쁨이었으리라. 선귤당이란 호를 지어서 글을 남겼으니 후대의 우리가 만나게 되는 기쁨이 있다. 이덕무의 책<선귤당농소>를 정민선생님이 20년 전에 번역해서 출판했던 것을 2018년에 재출간하셨다.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었다하니 정말 기쁜 소식이다 책에서 만나는 반가운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은 기쁨이다. 상우천고 尙友千古 그 역시 공자를 , 맹자, 두보를 친구로 삼아서 가난에도, 추위에도, 질병에도 굴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 쌀보다 책이요, 술보다 책이고, 책과 친구는 동격이었으니, 그 가난 중에서도 책을 팔아 쌀을 사고, 책을 팔아 친구와 한 잔 술을 하는 서글픈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덕무는 이 책에서 잠언같은 글을 많이 썼다. 18세기의 사람이 21세기의 사람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라고 해도 되겠다. 말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행동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엇보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마음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파주에는 아름다운 자연이 넓게 펼쳐져 있다. 노을이 특히 아름다워서 종종 노을이 질 때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게된다. 이덕무는 한양에 살았는데 거기도 노을이 아름다워서 감탄한다. 그는 책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해서 책만 보면 꼼짝을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 앞에서 밥 안먹어도 배부른데, 그 옛날 책이 귀한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아침 안개는 진사처럼 붉고, 저녁 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朝霞辰沙紅 조하진사홍 夕霞榴花紅 석하류화홍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책만 보는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을 향한 관심과 자연과 사물에 대한 통찰, 예리함과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예술가적인 자세도 갖추었다는 걸 알게 된다. 손닿는 곳에 놓아두고 하루에 한꼭지씩이라도 필사를 해서 노트 한 권을 채우게 되면 이덕무의 지혜가 나에게로 올 것인가? 욕심을 내어본다. 저는 네이버 카페<북뉴스>를 통해 <열림원.이 제공해주신 도서를 읽고 이 글을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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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 이덕무. [이목구심서].
[한서 이불과 논어병풍]
'한서로 이불을 짓고, 논어로 병풍을 만들다니! 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 선비의 위트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의 첫장을 펼쳤다. "한서 이불과 논어병풍" 두꺼운 이불조차 없는 정말 가난한 삶에 홑이불 위에 한서 전집을 늘어놓음으로써 추위를 피하기 위함이고, 쉴새없이 새어드는 찬바람에 호롱불이 꺼져 책을 읽지 못할까봐 논어로 바람을 막았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타까운 현실도 위트 넘치는 표현을 통해 안분지족의 고결함으로 승화시킨 이덕무 선생! 책을 읽으면서 '참 좋은 말이다. 이래서 박지원 선생과 박제가 선생이 이덕무 선생의 문장을 좋아했나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덕무 선생이 책에 집착(?)한 그 이면엔 책이 아니면 신분차별이라는 불공정한 세상을 견디지 못해서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정민 교수님께서 쓰신 이 책 서문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사실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모든 문장,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음에 와 닿지만 제일 뇌리에 남는 한 문장을 적어본다.
[말이 번다하고 경솔한 것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함'과 '간결함'. 이 두가지가 바로 말하는 일의 중요한 비결이다.]
생각없이 내뱉은 말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요즘,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갈 귀한 말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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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간서치 이덕무가 남겨 놓은 문학과 그의 발자취를 들여다 본다. 박지원, 박제가,유득공, 책을 좋아하는 어진 임금 정조까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책에 집착하는 이덕무는 시대를 타고난 행운아가 아닐까 싶다. 동상에 걸려가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는 그가 보여주는 책에 대한 집착은 지금 현재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서로도 무언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덕무의 삶은 치우치지 않았다.. 책만 보는 바보, 멍청이라 불리지얼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을 내세울 줄 알았다.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지, 새상 속에서 소중한 가치는 무엇이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간서치 이덕무의 삶 그 자체에 오롯히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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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윤리 시간인가, 임용 공부할 때인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아니... 역사 공부할 때 본 이름인가? 지난 경진년과 신사년 겨울의 일이다. 내가 거처하던 작은 띳집이 몹시 추웠다. 입김을 불면 서려서 성에가 되곤 해 이불깃에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났다. 내 게으른 성품으로도 한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 한 질을 가지고 이불 이에 죽 늘어놓아, 조금이나마 추위의 위세를 누그러뜨렸다.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얼어 죽은 진사도의 귀신이 될 뻔하였다. 그렇다. 책의 제목인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에는 작가의 말처럼 처절한 궁핍 속에서도 제 가는 길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던 사람, 이덕무의 삶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독서는 정신을 기쁘게 함이 으뜸이 되고, 그다음은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301p 이 부분에 대해 쓴 작가(정민)의 평설을 보자. 책을 읽으면서 써먹을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식견을 남에게 뽐내려고 밑줄 그어 메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독서의 가장 큰 보람은 마음의 기쁨을 발견하는 데 있다. 약간은 이완된 상태에서 옛사람의 육성과 만날 때,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강한 울림을 남길 때, 그 울림이 내 삶을 물끄러미 돌아보게 만들 때, 그때가 독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실용의 목적으로만 책을 읽기 때문에 독서의 순수한 기쁨을 잃은 지가 오래되었다. -301p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동감했다. 독서를 통해 옛사람의 육성을 만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이 아닐까? 그동안 잘 몰랐던 이덕무라는 사람, 그 사람의 생각을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좋은 글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덤으로 주어진 혜택...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