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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고1때 읽었으니 기억은 그리 세세하게 남아있지 않다.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간결하면서도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 문장은 오랜만에 접했어도 그 강렬함은 여전했다. 비교적 짧은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받고 보니 분량이 상당했다. 역시나 번역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어서인지 번역의 문제로 반론을 제기하는 ‘역자 노트’가 작품 내용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위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을 우리는 거의 번역본으로 읽는다. 고전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번역서들을 접한다.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았다면 모를까, 번역서를 만나면서 우리는 가끔 잘 안 읽히는 책을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러한 부류의 책은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는다. 한 나라의 언어에는 그들의 역사, 문화, 풍습, 그들의 생활까지도 모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등장인물의 성격이 달라지고 내용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책읽기였다. 원래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번역의 과정에서 왜곡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 리뷰를 쓰면서도 조심스럽기는 하다. 번역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이 분야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도 이렇게 도마 위에 올라 분쟁을 하는구나 싶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단지 독자로서 이 작품을 읽고 냉정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주로 김화영 번역가의 번역본을 비교하는 문장이 주로 차지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확실히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없는 접속사나 말을 끼워 넣었다거나 하는 오류를 범한 것을 낱낱이 지적한다. 프랑스어에 전혀 문외한인 나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지면을 할애하여 예를 든 문장들이 사실이라면 작품을 번역하는 역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피가 나도록 여자를 때렸다. 그전에는 그 여자를 때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손찌검은 했지만 말하자면 살살 했던 셈이지요. 그러면 그년은 소리를 지르곤 했지요. 나는 덧문을 닫아 버렸고, 결국엔 늘 마찬가지로 끝나 버리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본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년에게 벌을 속 시원하게 다 주지 못했거든요.”(김화영 역 민음사 P39~40) ‘그는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 전에는, 여자를 때리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를 때린 건, 말하자면 다정함의 표현이었소. 그 여자가 조그맣게 소리를 질러 댔고 나는 덧문을 닫아 버리면 그것으로 항상 끝나는 일이었지. 그러나 이번엔 진짜였고. 그래도 나로서는 그 여자를 충분히 벌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본문 P52~53) (※ 프랑스어 원문도 실려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했다.)
밑줄 친 부분은 ‘그 여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Elle’를 그렇게 번역하여 등장인물 레몽을 ‘파렴치범’이나 ‘양아치’의 부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자가 임의로 옮긴 번역의 예라고 하는데 작가가 맨 처음 쓴 인물의 성격과는 정 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뫼르소는 어느 일요일, 이웃과 함께 보내다가 레몽을 다치게 한 아랍인과 마주치게 되고... 그가 겨누는 칼에 대응하여 그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게 된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파고들어 아픈 두 눈을 후벼 팠다. 모든 것이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P88~89)
아,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라니 간결한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고난은 얼마나 큰 것인가.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과정은 뫼르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햇볕 때문에 그를 죽였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오랫동안 쌓아온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게 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 무덤덤한 성격은 어쩌면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악한이다, 라는 쪽으로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다. 그리 살갑지 않은 성격이지만 거짓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변 사람들이나 관계 맺은 사람들에게 굽신 거릴 줄 모른다. 어느 정도로 거짓말을 싫어하냐 하면 마음에 있는 여자 마리가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그에게 묻는데, 사랑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결혼해 줄 수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해야 할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면 묻어가지 못하는 사람 뫼르소는 그렇게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고,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지만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사형집행일에는 덜 외롭게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맞이해 주길 바라기까지 하면서.
<번역문장의 비교 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김화영 역 민음사 P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본문 P17)
“잔은 그 녀석을 붙잡으려고 하질 않았다고요.”하고 여자가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응, 그래?” 하고 사내는 말했다. “당신이 나오면 그 녀석을 꼭 붙잡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붙잡으려들지를 않았어요.”(김화영 역) “잔이 그를 돌볼 수 없대요.” 그녀는 목청을 다하여 소리쳤다. “그래, 그래.” 남자가 말했다. “내가 그 여자에게 당신이 나오면 다시 그를 돌볼 거라고 했지만, 그 여자는 그것을 원치 않는대요.”(본문 P107)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김화영 역 P116) ‘나는 그것이 나를 이 사건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나를 제로로 만들어 버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대체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그 법정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본문 P144)
책을 읽다보면, 특히 번역서의 경우 정말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가 하다가도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고 탓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번역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역자는 여기서 이렇게 당부한다. 번역서를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을 의심하기에 앞서, 역자의 권위에 우선 주눅 들지 말고 그가 번역을 잘못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러한 논쟁은 수없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한다. 해당 업계에서는 불편한 감정이 있겠지만 이를 계기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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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누가 진짜 『이방인』을 찾아냈는가? 이 책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인 『이방인』, 몇 권의 다른 번역을 거쳐 이 책에 이르렀다. 번역자는 이정서, 2014년 그동안 우리말로 번역된 다른 번역본의 오류를 지적하는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으며,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 문제의 번역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기존의 번역본인 김화영의 『이방인』과 같이 대조하여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은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번역한 부분과는 별도로 <역자 노트>가 있어, 그동안 번역 출판되었던 다른 번역본의 문제점을 일일이 대조하며, 지적해 놓았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먼저 앞부분의 이정서 번역의 『이방인』을 읽고, 그 다음에는 다른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역자 노트>를 읽어보면, 기존의 번역본 『이방인』을 읽으면서 의아했던 부분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의아했던 점들이 서서히 풀려가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참고로 내가 가지고 있는 김화영 번역본은 ‘책세상’에서 출판된 것으로 호세 무뇨스의 삽화가 있는 대형판이다. 읽으면서 『이방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게 된 부분을 몇 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에 두 번씩, 11시와 오후 6시에 영감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김화영, 38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아무런 생각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 책에 역자 이정서가 지적한 내용을 읽어보니, 이 책이 더욱 분명하게 번역한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저 문장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는 게 아니고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집 안에서 개를 키워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결코 노인이 좋아서 자기를 위해 산책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181-182쪽) 애완견을 키워본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개를 끌고 나와 사람이 산책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게 아니다. 사람이 산책하러 개를 끌고 나온 것이 아니라, 개를 산책시키기 위하여 사람이 끌려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번역한다. <오전 11시와 오후 6시, 하루 두 번씩 영감은 개를 산책시켰다.>(47쪽) <그렇지 않으면 판사는 나의 변호사와 수임료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김화영, 88쪽) 이 구절을 읽을 때, 나 역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는데, 전체 책을 읽느라 곰곰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무슨 판사와 변호사가 수임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지?' 아니나다를까, 이 책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수임료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charges 다. 이 말은 ‘비용(수임료)’과 ‘기소’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김화영은 그 말을 ‘수임료’로 번역을 해버린 것이다. 이 책에서 이정서는 이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하고 있는데, 굳이 그런 이유를 들 필요조차 없다. 판사와 변호사가 뭐 하러 수임료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판사와 변호사는 이 사건을 기소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처럼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으면 판사는 내 변호사와 기소에 대해 논의했다.>(102쪽) 이런 식으로 이정서는 조목조목 발췌하여 대비,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놓고 있다. 압권은 바로 ‘태양’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든 해석이 그랬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대답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번역이 잘 못된 것, 잘못 된 번역에 기초하여, 우리는 이방인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207- 210쪽 참조)
다시, 이 책은 일단 이정서가 <역자 노트>에 밝힌 많은 부분들이, 논리적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의 번역이 잘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번역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역자의 태도,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번역에도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풍토가 정착될 때, 불필요한 중복 번역본들이 생산되어 출판 문화를 후퇴시키고 독자들의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될 때라야만 번역 그 자체에 대한 대가와 가치도 정당하게 인정받게 되리라 믿는다.>(222쪽) 이 번역본으로 그동안 잘 못 알려진 『이방인』의 진정한 모습, 새로운 모습을 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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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을 발표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교통사고로 수상 후 3년이 지나 사망했고 그의 작품은 별로 없지만 꾸준히 사랑받고 있지요. 한국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불문학계의 카뮈의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다 2014년, 김화영 교수의 오역을 지적하며 새롭게 발간된 <이방인>이 출간되었죠. 당시에는 엄청난 논란은 있었지만 관심있는 사람 몇몇을 제외하면 크게 회자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특성을 보면 아마 김화영 교수의 위치 때문이었겠죠. 번역과 관련해서는 책의 역자노트를 읽고 한번 판단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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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평소 나는 고전 문학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어 왔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읽히는 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에 책의 내용이 때론 지루하고 어려울지라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내용을 이해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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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인데, 아주 오래전에 이 작품을 읽어서 사실 줄거리가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가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라는 어이없는 사실과 어머니의 죽음에 그 어떤 애도도 표하지 않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오랜 세월 뇌리에 박혀 있었다. 먼저 이 책은 1부의 첫 문장이 굉장히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뫼르소는 마랭고 양로원으로부터 모친 사망 소식을 듣고 양로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슬퍼하기는커녕 어머니의 시체를 보기를 거부하며 무덤덤하게 담배도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때론 졸기도 하며 장례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그는 해수욕을 하러 가다 그곳에서 이전에 함께 일했던 마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와 함께 영화관에 가서 코믹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뫼르소는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인 레몽과 친구가 되고 그의 권유로 마리와 함께 레몽의 친구 별장으로 놀러 가게 된다. 그 해변에서 레몽의 옛 정부의 오빠가 끼어있는 아랍인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태양이 눈이 찌르는 오후 결국 권총으로 칼로 위협을 가할듯한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의 간략한 줄거리이고 2부에서는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며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뫼르소의 고뇌와 법의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실 줄거리만 봤을 땐 그저 평범한 한 인물의 살인 사건과 인물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고 보기 쉽지만, 뒤에 실린 역자 노트를 보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자는 그동안에 나왔던 다른 번역본의 잘못을 지적하며 번역이 작품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역자는 번역에 있어 번역자의 의역보다는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 직역으로 하는 것이 좋으며, 소설의 문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역자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굉장히 신중하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앞뒤 문맥과 소설 전체를 아우르며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전 번역본에서 본 것과는 달리 그들의 성격과 행동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어 작품에 대해 더욱 공감 가며 읽을 수 있게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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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혹은 권위라 불리는 것에는 신묘한 힘이 있다. 행여 그것에 생채기라도 날새라, 조그만 위협도 용납치 않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격렬히 탄압한다. 여러차례 흠집이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것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그리고 다시금 예전과 같은 모습과 그 위용을 되찾는다. 사람만 바뀔 뿐, 성은 공고하다. 굳이 여러 예를 애써 찾을 것 없이 역사적으로 늘 같은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역시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편'이다. 절제된 문장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손 더듬어가며 찾아가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읽은 뒤에 물 밀듯 밀려오는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좋기도 하다가도 다시 읽을라치면 손이 잘 가지않는, 그런 책이다. 그런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된 연유는 책을 엮은이가 당당하게 내놓은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소설 '이방인'이 가진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 구조 상,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이런 과격한 문구를 삽입했을까, 중소 출판사에서 으레 써먹는 자극적인 홍보의 일환인가 싶어 눈쌀이 찌푸려지다가도 문득 궁금해진다. 책 띠지에 넣은 이 허언, 혹은 과언과 다름없는 문구를 책에선 어떻게 수습했을까, 얼마나 그럴싸하게 포장했을까에 대해 말이다. 길에 이어져온 전통에 흠집 내기를 시도함으로써 존재의 당위성을 찾는 건 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느냐에 따라 갈리게 마련이다. 애시당초 그런 게 있을리 만무하다는 전제를 깔고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했던 초대형 블록 버스터 영화 '어벤져스' 관련하여, 우리나라에 작은 소동이 한 차례 있었다. 다수의 초대형 외화들을 번역해온 어느 번역가의 오역에 대함이었다. 그 이전 외화들을 통해 오역과 '해석의 차이'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반복해 오다가 이번 '어벤져스'를 통해 대중들의 불만이 터지게 된 듯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사 "We're in the end game now." 및 닉 퓨리 국장이 죽기 전 남긴 'mothe F...' 와 같은 대표적인 오역에 대해 당사자인 번역가는 '해석의 차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데 그친다. 해석의 차이를 유발시키는 어떠한 근거나 본인이 해석한 번역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 '이방인' 역시 커다란 틀에서 이와 마찬가지라고 보여진다. 카뮈의 '이방인'을 처음 번역한 권위 있는 누군가와, 그 번역이 옳은 번역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상대 진영 사이의 논쟁, 혹은 논쟁이라고도 할 수 없을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묵묵부답, 혹은 비판 아닌 원색적 비난. 이것은 카뮈라는 시대의 걸출한 소설가에 대한 예의, 그리고 그의 책을 번역했다는 막중한 책임감 모두를 져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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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타인의 시선에 따라 규정지어 질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과, 이로인한개인의 욕망이 빚어내는 무수한 공동체와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생각.
뫼르소는 자신이 움직이는 반경 내에서 자연과, 사람들을 확연하게 느낀다. 이것은, 뫼르소가 타인을 자신의 주관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걸로 보인다. 그러나, 타인의 다정한 무관심과 따사로운 태양빛 때문에 뫼르소는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토막난 자신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태양빛의 따사로움을 느낀다.
뫼르소는 타인을 권총으로 살인했다. 태양 때문에. 진실은 단순하지만,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이해관계인들은 각자의 나름의 편견과 욕망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형성한다. 판사, 검사, 변호사, 증인 및 배심원. 뫼르소는 부조리에 대항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사형 판결에 대한 항소를 기각하고, 그 결과로서 단두대로 자신을 살해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한번 삶을 살아보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는 모순에 직면한다. 살고자하는 개체, 유전자의 생물학적 욕망을 털어냈기 때문일까. 뫼르소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이해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피해의식, 망상과 같은 개체의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그 결과로서 개인적,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난다. 뫼르소는 종교라는 거짓 허울에 감정을 분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단두대로 가는 순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증오의 반응으로 자신을 맞아주기를 바라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뫼르소와 같은 자유로운 삶은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뫼르소의 일상에서는,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현실과 자연을 만끽하고 이에 녹아드는 삶의 태도가 엿보인다. 토론회에서 회원 한분이,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이 무기력하고 삶의 의지가 없다면서 비판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발생원인은, 삶의 목적을 자본주의적 욕망, 즉 정신적,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삶은 어느 순간에도 성장과, 열정과, 그리고 발전만이 최우선의 가치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뫼르소와 같이, 결혼이라는 형식적인 제도 또는 부조리에 대하여,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결혼을 수용할 수 있다. 가장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결혼의 순간에도, 뫼르소가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회적 부조리의 틀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개인적 욕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뫼르소의 결혼은 그 자체로 형태가 없어 순수하고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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