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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이 된 김서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혼한 전 남편이 살해된 것 같다는 광역 수사대 강력계 수사 반장 주민서로부터의 전화로 소설은 시작된다. 김서희가 남편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잘린 손뿐이었다. 남편 정상훈의 손목을 시작으로 정상훈이 일했던 CS 그룹과 관련된 사람들이 죽은 곳에서 발과 그의 신체 일부가 하나씩 발견된다. 주민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쇄 살인이라 단정하고 사건을 수사해 나간다. 정상훈이 독자적으로 연구했던 프로젝트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의 주변과 해능시의 우성 조선과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한다. 순서가 잘못돼서 『반인간선언』을 나중에 읽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먼저 읽었다. 두 소설 모두 12월 24일에 벌어진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의 소설이다. 주원규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인간과 신 서로가 서로를 모두 구원할 수 없다는 주제를 설정해 치밀하게 서사를 끌고 나간다. 가장 큰 장점은 끝을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설득력이다. 계속 읽게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있다. 당장 뉴스만 봐도 뻔뻔한 모습으로 사실을 부정하고 억울하다고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성이 바닥에 떨어지고 서로의 존재 가치를 무시한다. 타인의 삶에 함부로 이야기하고 간섭한다. 이렇게 사는 게 좋은 데 나의 삶에 충고를 서슴지 않는다. 훅 들어와서 당황스러워 표정이 어색해진다. 소설의 끝은 거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진실을 내던진다. 결말의 일들이 내가 살아가는 현실 어디에선가 자행되고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결코 이 세계는 모두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잘못은 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자들이 형성한 암묵의 카르텔에서 심장은 죽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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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적어도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한 바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만약 그 어떤 존재가, 그 어떤 무엇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신념은 개성과 위치, 살아온 환경과 체험한 모든 것들에 따라 다르다. 타인에게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정작 본인에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 있다. 무참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소비다. 우리는 개인의 선택으로 일생 동안 소비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개인의 선택’은 참으로 비루하다. 자본이, 기업이 이미 권력을 장악한 지 오래인 시대다. 정치는 온갖 화려함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이미 빼앗겼다. 이제는 기업이란 이름의 권력집단이 국가를 통제하고 또한 착취해 나간다. 소설은 종교화 되어버린 기업의 실체를 보여준다. 참혹한 살인사건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자본과 기업의 노예가 되어버린 국가가 조우하게 된다. 국가는 기업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삼성, 현대 두 기업이 대한민국 경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이 자동차를 구입하든, 컴퓨터를 구입하든, 핸드폰을 구입하든 선택의 여지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하다못해 라면 한 봉지조차 우리는 강요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IMF의 환란 속에서 국가는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해가며 기업을 회생시켰다. 은행을 살렸고, 자본을 살렸다. 하지만 그 자본, 기업은 그러한 국민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기업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는 ‘신화’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만 모든 것이 평가받는 시대에 기업은 필히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교, 현대교가 이미 모든 종교를 압도하고 있다. 대통령조차 범접할 수 없는 자본의 힘 앞에 평범한 국민, 시민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시대는 자본과 기업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함께 지려는 이들은 찾을 수 없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다만 소비하고 다시 소비하는 존재일 뿐이다. 제목은 우리가 과연 이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것 같다. 단지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 소비의 능력을 상실하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함께 소멸해버리는 지금, 기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창출이라는 명확하고도 순수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 그 기업은 이제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인 세포분열을 반복하고 있다. 과연 소비의 주체인 개인이 더 이상 생존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온다면, 기업은 개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짧은 분량의 소설은 그 어떤 반전이나 감동도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무한한 자괴감과 무참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자괴감, 무참함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우리는 진정 인간임을 포기해야 한다. “민족, 정치, 시민, 정부, 행정 등의 개념을 신봉하는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지. 하지만 기업은 달라. 기업은 이윤 추구 집단이야. 사악해 보이고 게걸스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투명하지. 기업은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드시 기업의 종교화가 필요한 거야. 이 욕망이 또다시 자연, 짐승인 사람들에게 왜곡된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 신을 향한 욕망의 패러다임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 종교성이 성립되어야 하지. 단언컨대 종교적 근간을 적극 수용하는 기업은 약육강식의 질서 또는 계급의 최상층을 점할 수 있네. 흩어진 자연, 짐승인 사람들을 끌고 가며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임 인류의 참 모델이 될 수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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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 작가는 사회비판적소설을 쓴다. 지극히 냉소적으로 냉철하게 쓴다. 신작 '기억의 문'에서 다단계, 국정원의 민간인사찰을 다뤘다면 구작 '반인간선언'은 정경유착, 종교권력을 비판한다.
주인공 김서희의 아버지 국회의원 김승철, 종교계 원로 정영문, 여당실세 홍남호는 민주화투사시절을 함께한 동지였다. 김승철의 지역구 해능시가 CS그룹의 신재생에너지 개발지로 선정된다. 해당부지는 우성조선이 자리잡은 곳으로 수주가 활발한 우량기업인데도 갑자기 폐쇄명령이 떨어진다. 이를 둘러싼 정치, 경제, 종교권력의 횡포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김서희와 광역수사대 주민서의 진실추적과정이 현실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라면 정영문이 인터뷰한 CS화학의 사보는 대답이다.
기업은 종교다. 기업의 총수는 선각자며 이를 따라야 인간이며 반대하면 짐승이다. 선한사회를 만들기 위해 짐승은 없애야 한다. 이것은 소설속 정영문과 홍남호의 의견이자 현실사회 지도자의 생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소설의 내용이 음모론에 가깝고 극단적이라 작가조차도 미세한 흔들림을 보인다. 소설 전반에 걸쳐 정치 경제 언론 종교가 모두 한점을 향해가다 마지막부분에 김서희의 진실규명에 '언론도 들끓는다'고 썼다. 끝까지 언론은 침묵했다고 썼다면 보다 낫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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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 씨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그러니까, 한겨례 문학상 당선작을 통해서였습니다. <열외인종 잔혹사>라고 몇 회 수상작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읽고 괜찮았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전개하는 능력이나 구성은 다소 어설펐던 반면, 운문이 매우 뛰어났던 걸 기억해 그 후에도 그의 이름을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읽은 그의 소설은 매우 실망스러웠었습니다.
<망루>라는 그 글은 여로모로 덜 여문 소설이었는데 그때의 흠이 고스란히 이 작품까지도 연결되어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래전에 읽은 그 소설에 관한 이미지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만큼 두 소설의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열외인종 잔혹사>에서 보여주었던 뛰어난 운문감은 일단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건 이미 망루 때에도 사라지고 없었으니까요. 뭔가 퇴고가 덜 된 듯한 문장이 꽤 많았는데 이 소설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써서 자꾸 발표하는 것보단 쓴 소설을 좀 더 다듬는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공통점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작가가 느낀 사회상을 작품 속에 담으려는 노력이 작가로선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망루도 그렇고 이 소설도 같은 것은, 소설이란 틀이 가진 기본적인 사항에서 작가의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가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듯 이야기는 뒷전이고 작가의 주장만 이만치 나와있는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얼마전에 읽은 장강명 씨의 소설 <표백>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란 게 이렇습니다. 소설이란 틀 속에서 이야기를 볼모 삼아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사설을 쓰고 있다는 느낌? 작가의 사상이 이야기 속에 매끄럽게 녹아있지 않고 툭 튀어나와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소설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드는 편입니다. 주원규 씨는 그게 아주 심하네요.
직업이 목사 혹은 전직 목사신가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쪽 분야에 몸담고 계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작가가 되어 자신이 그제까지 살아온 세상을 배경으로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목사가 소설을 통해 종교적인 사항을 자꾸 말하는 것은 어쩐지 조금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종교 서적도 아니면서 특정 종교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불편하고 더 보기 안 좋은 건 마치 안 그런 척하고 하면서 자꾸 거론한다는 점이었어요. 전 그런 거 매우 싫어하거든요. 아프간에 갔던 기독교인들이 우린 선교 아니고 봉사하러 가는 거예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이쪽 종교인들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분위기가 조금 일상적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지요. 자신들이 하는 일은 무조건 정의이니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겨져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힘없는 목사로서 힘 있는 종교 권력을 고발한다고는 하지만 글쎄요, 비종교인이 보기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네요. 그 밥에 그 나물이란 생각이 우선입니다. 마치 초선 의원이 4선 의원의 부패를 고발하려는 것처럼 말이죠.
권력에 대항하고자하는 의지를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하시면 자신의 주장을 가득 담아 지면을 채우지 말고 이야기나 좀 더 야무지게 구성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서 매끄럽게 전달하는 방법을 노력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떠올렸는데 이야기는 안 떠오르고 작가가 주장하는 논설만 떠오른다면 그건 좀 아니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그런 건 그런 걸 환영하는 인문 지면에서나 하시면 되고 소설은 소설답게 멋진 이야기부터 다듬어 주시라는 얘기입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뭔가를 쫓는 형식을 도입한다고 해서 전부 추리소설이 되거나 미스테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겠는데 그냥 하면 고리타분할 게 뻔하니까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 틀 속에 넣으면 좋겠는데 뭐가 없을까. 그래 추리소설 형식으로 한 번 써보자. 그래서 어디서 들은 그림자 정부이야기 찔끔, 연쇄 살인을 추적하는 이야기 찔끔, 그런 걸 대충 엮어 권력자들의 부패를 고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되겠지. 중요한 건 뭐, 이야기 따위가 아니고 나의 사상이 전달되는 거니까.
이렇게 느껴지는 게 주원규 씨 작품의 공통적인 문제점이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런 식으로 엮인 이야기는 우리끼리 포장마차에서 떠드는 로스차일드 가문 얘기가 훨씬 재미있고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소설이 되어 작품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수준은 일단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싶다면 말이죠. 챕터의 끝마다 등장하는 다른 폰트의 내용은 아주 최악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별 둘 아니라 하나로 갈까도 꽤 고민했습니만, 솔직히 심정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