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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히가시노 게이고 형님의 소설을 잠시 뒤로하고 세계문학전집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위대한 게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의 또 다른 작품을 알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추천한 '밤은 부드러워라'였다. 이 책이'위대한 게츠비'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는 듯하다. 190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아름다는 문장으로 책을 써내려간 작품이 내 마음을 정화시킨다. 표지 또한 책 제목과 어울리는 듯 하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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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다른 분들처럼 위대한 개츠비에 관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구매했는데요.. 왠지 제목도 젠틀한 느낌이고 그래서 호기심이 갔어요. 이 작가 특유의 인생에 대한 쓸쓸함? 고독?이 글에서 잘 배어나오는 것 같구요. 인생에 대한 허망함을 생각하고 싶을 때 이 책을 종종 열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책을 읽게 됐어요. 다 읽고 다니 뭔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ㅠ 좋은 책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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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대학교 때 들었던 미국 소설 시간에서부터 최근까지 나에게 찜찜한 기분을 덧씌운 작품이다. 소설을 별로 열심히 읽지 않는(또는 읽지 못하는) 나로선 이렇게 기나긴 세월 동안 신경을 쓰고 있는 작품이 있었다는 점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득문득 '왜 위대하지 않은 게 분명한 인물을 위대하다고 규정지어 놓은 걸까?'라는 의문은 어디서든 피츠제럴드를 발견하면 관심이 가게 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가장 집중한 인물은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였고,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보낸 젊고 가난했던 시절을 아름답게 술회하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도 피츠제럴드가 등장하는 부분이 유독 깊게 읽혔다. 아르테 시리즈 중 피츠제럴드 편을 점찍어 두었다가 언제라도 읽을 작정으로 『피츠제럴드×최민석』을 사 두었다.
운이 좋았다. 오랫동안 '의문'으로 붙잡고 있던 개츠비의 위대함에 대한 반발심이 단번에 이토록 개운하게 해결될지 몰랐다. 『월간 정여울』 중 2월의 책 <콜록콜록>을 읽다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3단 이론을 알게 되었다.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이어지는 3단은 유아적인 환상-삶의 고통을 극복-무의식으로 깊이 들어가는 세계로 점점 단계가 높아진다. 이중 실재계는 '객관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주관적으로는 어떻게든 반드시 그걸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라는 확신을 가지는 단계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개츠비를 떠올렸고, 그의 모든 환상, 자기 기만, 고집, 헛수고, 자기 파괴 등등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족적들이 그저 '실재계'를 역력하게 실현한 과정이자 결과라고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허무한 그의 종말마저도 이해하게 되었다.
( https://shinae7lee.blog.me/221461263021에 이 극적인 유레카 순간을 남겨 두었다)
대학시절 때도 개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피츠제럴드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갖고 있는 한편, 이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해 궁금했는지 『밤은 부드러워라』를 영어판으로 사 놓았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사전에서 뜻을 찾아 적어 놓은 흔적을 쫓아보니 '완독'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지난달에 발견, 과거 어느 시기에 내가 쏟았던 노력이 나 스스로부터 잊혀 버렸다니 당황스러웠다. 영어공부만 한 거였는지 내 기억 속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라든가 주요 장면이라든가 대략적으로나마의 줄거리라든가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감쪽같은 황당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수습하기 위해 번역판을 구입하여 영어판과 병행 읽기에 나섰다. 번역본은 발간 당시의 초판본을 옮긴 것이고, 내가 '이미 읽은 것으로 발견된' 영어판은 피츠제럴드가 (이 책이 인기를 얻지 못하자 시간의 흐름을 조정한) 손수 작업한 수정본이었기 때문에 두 책의 순서를 짜 맞추느라 고생을 했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몰입의 순간이었다.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줄거리만 쫓아가는 초라한 읽기가 될까 봐 피츠제럴드 전문가 최민석의 『피츠제럴드』를 중간중간 참고하며 읽었다. 소설 속 개츠비, 영화 속 개츠비, 영화 속 피츠제럴드, 헤밍웨이가 말하는 피츠제럴드, 최민석이 풀어주는 개츠비와 피츠제럴드 등이 겹치고 얽히며, 나만의 개츠비-딕(『밤은 부드러워라』의 주인공)-피츠제럴드를 만들어가는... 실로 의미와 흥미가 충만한 읽기였다.
이 중에서도 딕 다이버는 피츠제럴드로 읽히며 딕의 아내 니콜은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로 읽혔다. 소설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이 피츠제럴드 부부를 직접 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피츠제럴드가 '재즈의 시대'라 불렀던 미국의 호들갑스럽고 이례적인 호황이 끝나가듯, 이 소설을 쓰고 있던 피츠제럴드도 『낙원의 이편』의 대성공이 선사했던 모든 호화로움에서 비켜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지는 어두움에 굴복할 수 없었던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최고의 소설을 써내리라는 결의에 불타 장장 십 년간 『밤은 부드러워라』에 공을 들였다.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시큰둥한 반응을 받자 이를 인정할 수 없어 내용을 수정하고 순서를 바꾸는 등 최고의 작품으로 되살려놓겠다는 의지를 불살랐다. 여전히 냉담한 평가(더불어 이미 파산지경에 이른 경제 상황, 젤다의 병세 악화 등 불운한 현실)에 괴로워하며 알코올에 더욱 의지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피츠제럴드...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는 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의 재능 덕택에 정신분석학자로서 전도 유망한 길을 가던 청년 딕이 (순진한 책임감에 의해서인지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을 의도해서인지) 어마어마한 부자이지만 끔찍한 비극을 품은 환자였던(그 이후로도 어쩌면 영원히 환자의 상태 속에서 살았던) 니콜을 만나면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에 접어드는 궤적과 거의 일치한다. 주체할 수 없는 호황으로 들썩이다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급격한 쇠락에 접어든 미국 사회의 변화와도 겹친다. 심각한 트라우마로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는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로서 역할을 견실히 수행하고 있었지만, 니콜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부가 약속하는 가능성을 뿌리치지 못하여 (아마도 이런 것이 얄궂은 운명의 장난 아닐까) 딕은 이 빛과 어두움을 오가게 될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다. 부, 아름다움, 명성, 인기가 보장된 것 같은 화려한 롤러코스터지만, 짜릿한 쾌감과 자기만족적 함성은 오래갈 수 없다. 뒤틀리기 시작한 현실은 그 어두움을 아슬아슬하게 가려주는 베일에 덮이고, 괴로움과 후회가 삐져나오는 위기의 순간에는 로즈메리로 대변되는 또 다른 환상이 내려앉아 파탄과 파멸을 숨겨버린다. 그러나, 본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허위이고 가장이고 신기루라는 점을. 누가 먼저 그만두자라고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만 남았다. 딕은 내적으로 숨어들며 알코올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니콜은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러 당당해진다. 이 정도쯤 되면 결별은 수순이고 최종 승자는 니콜과 평생 그녀를 지켜온 돈이다. 딕은 니콜과 그녀의 집안의 돈이 몰고 온 소용돌이에 말려 건실한 인생의 빛을 잃었고 모든 회환에서 벗어나고 그 어떤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해 알코올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퇴락해버렸다. 참 사랑(역시 허무만이 가득한 인생을 놓아버릴 용기가 없었기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참'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을 찾아 새로운 인생의 맛을 알아간다고 생각하는 니콜,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을 재개하지만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점점 더 작은 동네로 옮겨 다니는 딕. 소설의 결말은 『위대한 개츠비』못지않게 여자 주인공이 승리한다. 바보처럼 한 우울만 파 오던 남자는 자신의 오판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는다. 반면 크고 작은 도덕적 결점은 현실적 당위로 관대하게 덮어 버리고 부의 위력에 기대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응원하는 쪽을 택하는 여자 주인공은 현실 속에 당당히 살아남는다.
누구나의 인생이든 갈수록 더 견고해지고 아름다워질 수는 없는 걸까? 세월이 흐를수록 어떤 이유에서든 또는 삶의 당연한 이치에 의해서 점점 '작아지는 자아'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차츰 허물어지는 인생에 '왜'라고 물음을 제기하고 '싫다'라고 반기를 든다면, 젊은 나날 자신 있게 꿈꾸었던 항로에서 한참 벗어나 방황하는 오늘의 모습에 더 민감하게 된다. 산사태처럼 덮쳐오는 후회와 회환마저 받아들일 수 없어 희망이라는 빛바랜 무기를 꺼내들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일이 더 나아지리라고 억지로 확신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늘 굳건히 믿고 있고 이따금씩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한다: 아직 나의 전성기는 오지도 않았다고.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는 곧 다가올 거라고. 그래서 계속 살아가고 있게 된다. 딕도 그랬고, (좀 더 정확하게는 자기가 딕의 인생을 망쳤다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으려는 니콜이 바라건대) 딕은 언젠가 제때를 만날 것이었고, 피츠제럴드 역시 『밤은 부드러워라』로 자신의 최고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장편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십 년 동안 확신은 의심으로, 자신감은 절망으로 바뀌는 사이 빛은 결국 어둠을 뚫지 못하고 피츠제럴드는 마흔다섯이 채 못되어 죽음을 맞이해버렸지만.
책을 다 읽기는 했지만, 진하게 곱씹으며 소화하지는 못한 독자로서 우선은 피츠제럴드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스산하다. 주인공 딕과 끝없이 오버랩되는 피츠제럴드의 인생을 생각하며 나의 인생에 대해서도 무기력과 허무함이 일고 있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일단락 짓는다. 다행스럽게, 『밤은 부드러워라』가 피츠제럴드의 사후 지위가 계속 상승하여 지금은 대중적 인기는 『위대한 개츠비』에 미치지 못하지만 평단의 평가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접을 받고 있다 한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확신이 억지는 아니었고, 그의 삶도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랜 세월 개츠비의 위대함에 딴죽을 걸어왔지만 알게 모르게 피츠제럴드 자체에 관심을 끊지 못하다가 '연구'하는 듯한 겸허한 자세로 『밤은 부드러워라』를 읽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그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망설임 없이 올려놓게 된 지금, 적어도 내가 보기에 피츠제럴드는 객관성보다 주관성에 의지해 자신의 삶에 믿음을 가졌던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PS> 이 책의 제목 '밤은 부드러워라'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쓴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 Ode to a Nightingale>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나이팅게일은 유한한 인간세계와 달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불멸의 상징이자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에 비유된다. 키츠의 아름다운 싯구를 빌어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작품이 이러한 영원성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고 있다.
(---)벌써 그대와 함께 있노라! 부드러운 밤이여, 때 마침 달의 여왕께서, 선녀 별들에 둘러 싸여, 옥좌에 앉아 있네(---) (---)Already with thee! tender is the night, And haply the Queen-Moon is on her throne, Cluster'd around by all her starry Fay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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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피츠제럴드는 프랑스 남부에서 조국을 떠난 미국인들과 함께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다이버 부부는 바로 피츠제럴드의 부인 젤다의 친구였던 미국인 명사 부부 제럴드와 새라 머피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은 또한 정신착란을 앓았던 젤다가 스위스에서 받았던 심리 치료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 기대했던 만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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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좋아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는 그렇게 선호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밤은 부드러워라>는 이끌리듯 구입한 책입니다. 일단 표지가 시선을 강하게 끌었어요.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내용도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장점인 인간의 미묘한 심리와 감정들, 관계에서 오는 복잡하고도 섬세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도어김없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읽다 보면 절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거야."라고 체념 아닌 고백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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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특유의 문체로 부유한 상류층의 빛나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허무와 내면의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랑의 변질과 무너지는 인간 관계를 날카롭게 묘사했다. 작가의 자전적 내용이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시대 화려함과 몰락, 잃어버린 청준에 대한 쓸쓸한 여운에 공감이 많이 된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만큼 재미있게 읽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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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 하면 위대한 게츠비를 떠올리 겠으나 위대한 게츠비 보다 오히려 더 선호하는 이들이 있는 작품 밤은 부드러워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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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출간된 번역가 정영목 님의 에세이를 읽고 찾아본 책입니다. 집에 보관된 꽤 많은 번역책의 공통점이 동일한 번역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워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을 보았습니다. 외국소설이 주는 인상에서 번역가의 힘이란 얼마나 중요한가요. 번역가의 길이 얼마나 고달픈지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신선했습니다. 소설 번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분이니 따로 책까지 출간되었겠죠. 밤은 부드러워라는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소설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소설가로서 대단한 행운으로 부와 명예를 젊은 나이부터 얻었다고 생각한 피츠제럴드는 사실 이전의 작품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의 열망으로 절치부심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전소설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과거 시대상을 정말 잘 보여줍니다. 화려하지만 공허한, 미국 같지만 미국 같지 않은 상류층 허영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밤은 부드러워라, 라는 제목은 정말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이미 제목이 암시하듯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좋은 작품 정갈한 번역까지 모두 마음에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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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게츠비와 같은 재즈시대 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배경이 남프랑스 휴양도시다. 니스, 칸 등 프렌치 리제이라는 매우 유명한 관광도시이지만 막상 프랑스 소설 가운데에서도 이 장소를 배경으로 삼은 곳은 많지 않다. 작가 서머짓몸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기에 몸의 소설 곳곳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 외에는 기억이 안난다. 사실 책을 아직 완독하지는 못했다. 유명한 번역가분이신데 잘 안 읽히는 것을 보니 피츠제럴드의 문체가 잘 맞지 않나보다. 당시 할리우드와 미국사교계, 프랑스 휴양지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어째서인지 꽤 낯설고 서사 진행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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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피츠제럴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칭송해마지않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어도 좋아지지는 않았다. 독서모임 책으로 정해지면서 이참에 피츠제럴드를 좀 읽어보자 했는데 30편이 넘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가 피츠제럴드를 잘 몰랐구나 싶었고, 멋진 문장들과 상상력이 반짝거리는 천재적인 글솜씨에 반해버렸다. 20대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했던 그의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편'에서는 전후 상처입고 불안한 '잃어버린 세대'를 그렸는데 J.D.샐린저가 왜 피츠제럴드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알 거 같았다. '낙원의 이편'의 초대박으로 부잣집 딸과 결혼도 하고 호화로운 생활도 가능해졌지만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단편들을 팔아야 했다. 잘 팔리게 하려고 대중적으로 고쳐쓰기도 했고, 헤밍웨이와 결별한 이유이기도 했다. 피츠제럴드는 작가적 욕심을 장편에 쏟아부었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 이후 10년 동안이나 자신을 녹여낸 장편소설을 쓴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밤은 부드러워'는 피츠제럴드의 기대와는 다르게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받았다. 그의 사후 이 작품은 재평가를 받으며 '위대한 개츠비'에 버금가는 평단의 평가를 받지만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점점 추락하며 알콜중독에 빠지고 마지막 역작을 쓰다 완성을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이 작품을 어찌 안읽으랴. 정신과의사 '딕', 그의 아름다운 부인 '니콜', 젊고 싱그러운 여배우 '로즈마리' 세 사람의 이야기가 1부 로즈마리, 2부 딕, 3부 니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불륜, 살인, 폭행, 구금, 정신병 등 자극적인 사건이 계속 벌어짐에도 소설은 너무 쓸쓸하다. 안쓰럽고 속상해서 읽기 힘들었고 글이 공중에 뜬 것처럼 잘 들어오지 않았다. 1920년대 화려한 재즈시대 이후 바로 이어지는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시절을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인생도 20대 황금기 이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파란만장했다. 겉으론 사치스럽고 호하로운 생활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알콜중독, 정신분열, 긴 외국생활, 일탈적 행동 등 불안하고 스러져가는 삶이 있었다. 이런 그의 삶을 소설로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 같은 몰락해가는 분위기... '하루키'는 수많은 독자가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에 열광하는 이유는 '멸망의 미학'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구원의 확신'임이 틀리없다고 했는데, 나는 하루키 만큼의 통찰력이 없어서인지 멸망의 미학만 보였다. 너무 안타깝고 안쓰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