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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더미에서 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그 이름 속에 나의 아련한 첫사랑이 피어오르고... 이어 지금의 내 처지가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형.기... 그리고 낙화... 누구나 다 아는 그래서 언제나 한국의 100대 애송시로 사랑받는 그 시... 낙화 (59~60쪽)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제1시집 '적막강산'에 나오는 '낙화'를 처음 안 것은 고1 때 였다. 인연이었던 東湖의 '그 분'이 준 책갈피... 그 뒤에 쓰여 있었던 분분한 낙화...... 아무 것도 아닌 듯한 그 소소한 선물에 한동안 마음앓이를 했었다. 뭐 그땐 순수했다는 거다. 요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했는데... 정상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내려오려니 마음이 쓰리다. 먼저 은퇴한 선배는 '끝까지 버텨라'고 조언을 한다만, 더 이상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 미래를 두고 견디기 쉽지 않다. 이런저런 걸림 때문에 1년은 더 버텨볼 요량이지만 그 이후를 예측할 수가 없다. 때론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하고픈 일에 대한 기대 또한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삶은 언제나 녹녹치 않았다.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 내 영혼의 슬픈 눈. "이로구나... 모순의 자리 (미간행 발표작ㆍ627쪽) 『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에 실린 '모순의 자리'... 불이(不二)의 묘는 알듯말듯 모르겠다. 꿀꺽 삼켜버린 나의 욕망도 저러 했을까? 새해가 오고 또 다른 새해가 오면 나의 심원(心願)도 새싹처럼 돋아날까? 육도(六道) 의 윤회에서 사람 몸으로 태어났으면 그 이유가 있을진대... 하고픈 일을 하지 못하고 가버린다면 그 인연은 언제 또 오련지... 모순의 자리는 내 마음 속에도 있는 거였구나... 등짐 (미간행 발표작ㆍ643쪽) 사람들은 그것을 나의 짐이라 한다 보기만 그렇지 짐은 무슨 짐 실상 그것은 내가 등에 지고 가는 큰 짐이라 속을 헤집어 보면 아른아른 비치는 순두부 순두부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다 아 그것은 슬픔 내가 등에 지고 가는 슬픔 나의 등짐은 모양이 없다 다만 무게가 있을 뿐이다 『문학수첩』, 2004년 봄호에 실린 '등짐'... 셰익스피어가 말했다던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고... 그런데 왕관이 없더라도,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는 어느 누구에나 힘겹다. 모양도 없는 것이 왜 이리 무거운고... 선사(禪師)는 그 마음을 내어보아라지만 범부의 일상은, 알고 보면 슬픔이다. 나는 지금 슬프다. 그런데 그 슬픔 속에서도 작은 기쁨들이 있어 삶을 지탱하게 한다. 또 알고보면 그 모든 것이 사랑인 것을... 2018년의 마지막 리뷰는 시집으로 해볼까 싶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황망한 무술년이 가고 기해년이 오면 맺힌 응어리도 풀어질까? 새해란 이름으로 그렇게 되길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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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이라는 타자에 대해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 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 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 이형기, 「등」 이형기의 「등」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이다. 존재 탐구의 시학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 특성을 안고 있는 이 질문은 시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화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네가 거기”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제목을 보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너’는 등이다. 자기 등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울로 비춰볼 수 있지만 거울에 비친 등이 실제와 같은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시인은 거기에 등이 있다는 것만 확실히 느끼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빗댄다면, ‘나는 등을 느낀다. 그러므로 등은 존재한다.’와 같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지금 등을 느끼고 있으므로 등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시인이 등에 내포된 의미를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등에서 느껴지는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는 인간 이성에 내재된 한계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인간에게 등은 암흑지점과 같은 대상이다.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나’와 등은 한 몸이지만, 거기에는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이라는 비극적 단서가 붙어 있다. 등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면 등은 숨어버린다. 내가 움직이면 등 또한 움직인다. 내가 멈추면 등 역시 멈추는 상황 앞에서 시인은 등을 보고 싶은 마음을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고통을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등이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시인은 그 느낌을 확인하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다. 자기 등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정작 다른 사람의 등은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등을 보며 자기 등을 상상하는 게 인간의 운명인 걸까? 시인은 이러한 등을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로 표현하고 있다. 타자는 내 밖에 있는 존재이다. 내 밖에 있어야 할 존재가 ‘나’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고 있다”. 밖에 있는 걸 안으로 받아들였으니 ‘나’는 당연히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등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거리”는 시인 또한 이러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에둘러 드러내는 시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처럼” 떨어져 있는 나와 등과의 거리는 이렇게 보면 절대로 메울 수 없는 한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의 그 거리감을 어떻게 메울 수 있겠는가? 시인 입장에서 등과 만나는 것은 저승으로 간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저승을 가려면 목숨을 버려야 하지 않는가? 제 등을 보기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은 거의 없다. 등이 거기에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별다른 문제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등은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있는 것을 거기에 있다고 느끼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한없이 편해진다.
시인은 그러나 이처럼 편한 길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 등 사이에 걸쳐 있는 “아득한 거리”를 시인은 어떻게든 메우고 싶은 욕망을 내보이고 있다. “한 몸”이라는 시어에 드러난 대로 ‘나’와 등은 원래 한 몸이다. 한 몸으로 태어나 두 몸(나와 타자)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상황을 통해 시인은 나와 너 사이에서 펼쳐지는 모순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모순은 하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뻗어 나온다. 가까이 있지만 아주 먼 곳에 있는 역설을 ‘등’에 부여함으로써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관계망을 본격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자기 등만 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시인은 자기 등만 빼고 모든 사람의 등을 볼 수 있다. 자기 등은 껴안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등은 껴안을 수 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대면할 수 없는 타자’가, 내 밖에서는 언제든 대면할 수 있는 타자로 뒤바뀐다. 다만 우리는 내 안에 숨어 있는 타자=등에 의식이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내 안의 타자가 내보이는 완강한 등을 내 밖의 타자가 내보이는 등과 일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안팎으로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느끼는 상태에 빠져버린다.
시인은 이 시에서 등이라는 타자와 대면하길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등은 항상 거기에 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결국 문제는 등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등을 거기에 있는 상태 그대로 인정하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느낄 이유가 없다. 이것은 바깥, 곧 사회적 차원의 타자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타자는 거기에 있다. 거기로 다가가는 건 결국 ‘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나와 너’가 “한 몸”이라는 얘기는 ‘나는 타자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타자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도 있는 것이다.
나와 너를 이승과 저승의 거리로 인식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나=타자라는 생각이 배제되어 있다.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나’라는 관점에서 타자와의 거리를 재는 방식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정말로 타자와 대면하길 원한다면 ‘나’라는 근거를 놓아야 한다. ‘나’라는 근거가 사라지면 등이라는 대상 또한 사라지지 않겠는가. 이형기의 「등」은 ‘나’라는 근거를 부여잡은 채 타자와 대면하길 바라는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나와 너를 가르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는 ‘나’에 대한 뿌리 깊은 자의식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2. 성숙에 이르는 길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落花)」 꽃이 떨어진다. 꽃은 왜 떨어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떨어진다. 꽃이 피는 게 자연이듯, 꽃이 지는 일 또한 자연이다. 가야 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은 떨어진다. 이형기는 「낙화」에서 가야 할 때가 되면 기꺼이 제 갈 길을 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돌려 말하면 가야 할 때가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에 집착하는 이들은 추하다. 떨어질 때가 된 꽃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면 어떻게 될까?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다. 꽃이 피는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던가? 자연은 꽃은 꽃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대한다. 꽃이 예쁘다고 자연은 꽃 피는 시기를 늘리지 않는다. 열매도 마찬가지 아닌가? 열매를 딸 때가 지나면 어떻게 될까? 짓무른 열매는 이내 썩는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맺고,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 다시 꽃망울이 진다. 자연 순환은 이리 보면 생명이 자율적으로 순환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순환은 곧 생명이다.
시인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봄에는 꽃이 핀다. 꽃이 핀 세상은 화려하다. 겨울을 보낸 생명들은 봄이 되면 딱딱한 껍질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몸을 내보인다. 사람들 마음에도 봄이 온다. 어린아이처럼 통통 튀는 봄맛에 젖어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격정을 즐긴다. 그런데 시인은 그 격정이라는 감정 앞에 ‘인내’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왜 격정을 인내한 사랑인 것일까? 자연은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가을을 생각한다. 봄이 내보이는 격정에 휩쓸려 버리면 여름과 가을에 벌일 일을 자연은 저 멀리로 내칠 수밖에 없다. 봄에 꽃은 왜 화려하게 피는가? 아름다움을 단순히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번식하기 위해 꽃은 아름답게 핀다는 얘기다. 제 격정에 취해 이 자연을 잊으면 어떻게 될까? 다음 세대를 위해 제 격정을 인내하는 생명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여기저기로 분분하게 꽃이 떨어진다. 꽃으로서 의무를 마쳤다는 의미이다. 떨어진 꽃은 땅으로 돌아가 다음 생을 기약한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듯, 시인은 꽃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새롭게 맺는 또 다른 생을 표현한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는 건 자연이다. 자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갈 길을 간다. “지금은 가야 할 때.”라는 자연=당위가 실천되어야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이 올 수 있다. 열매는 그러니까 가을을 향해 가는 여정 위에 서 있다. 무성하게 녹음이 지는,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열매는 제 속을 점점 단단히 익힌다. 이게 자연이 내보이는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서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라는 상황이 펼쳐진다. 청춘은 왜 꽃답게 죽어야 하는 것일까? 가을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화려한 시절은 단단한 열매를 얻기 위해 보내는 고통의 시간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열매 맺는 가을이 아니라 꽃이 지는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에 암시된 대로, 시인은 꽃이 지는 순간을 청춘이 아름답게 스러지는 순간으로 표현한다. 스러지는 청춘이 왜 아름다운 걸까? 스러지는 청춘은 맥을 놓은 청춘이 아니다. 스러지는 청춘은 열매를 맺기 위한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인 청춘을 의미한다. 누군들 화려한 시절을 주저 없이 보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듬뿍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이 시절을 길이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우리는 떨어져야 할 때를 자꾸만 뒤로 미룬다.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 영원한 사랑을 마음껏 즐기길 원한다. 하지만 꽃은 그렇지 않다. 때가 되면 꽃잎은 어김없이 떨어져 열매가 맺을 자리를 마련한다. 결별이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으랴
시인의 말마따나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은 결별을 결별로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화려한 시절을 보내야 하는 청춘은 당연히 결별이 슬플 수밖에 없다. 이보다 아름다운 시절을 또 언제 즐길 수 있겠는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절이기에 우리는 지나간 청춘을 끊임없이 아쉬워한다. 영혼에 맺힌 슬픔을 되새기며 흘러간 그 시절을 기억 속에서나마 끌어내 그려보기도 한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시인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결별을 이룩하는 축복”이라는 역설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결별을 인정하지 않는 생명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다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꽃이 지는 현상에 시인이 ‘성숙’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성숙한 마음은 다음 세대를 기약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꽃이 떨어지는 현상에 내포된 영혼의 슬픔을 미래를 향한 성숙한 마음으로 이겨내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