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편의 소제목은 마리우스다. 3편도 기존 1,2편과 마찬가지 이야기 전개 구조를 가졌다. 책을 펴자 가난한 이들에 의해 버려진 길 위의 아이들 모습이 펼쳐진다. 떼나르디에의 버려진 아들인 가브로슈와 마리우스의 집안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작가는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는 중반부를 넘은 이 작품의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후반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이다. 마리우스가 누구인가? 바로 코제트와 사랑에 빠지는 젊은 청년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가 포함된 마리우스의 탄생과 그에 얽힌 부모들의 이야기는 그가 공화파가 되어 6월 혁명에 참여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잉태되는 부분이다. 길 위에서 사는 가브로슈의 모습을 통해서는 그 시절 파리에 만연했던 가난한 부모에 의해 길 위에 버려진 아이들의 삶의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을 통해 그 시절 일반 백성들의 삶의 피폐함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1편부터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는 가난이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한 끼 식사도 해결하기 어려운 소득은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를 가난의 구렁텅이로 내몬다.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했음이 혁명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한 시간을 일하고도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정도도 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최저임금제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삶, 불행, 고립, 내버려짐, 가난 등은 각자의 영웅들을 가지고 있는 전쟁터이다. 그 영웅들은 어둠에 가려 있으되, 때로는 이름 떨치는 영웅들보다 더 위대하다. 견고하고 희귀한 천성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가난이, 거의 항상 계모이되, 가끔은 생모이기도 하다. 결핍은 영혼과 지성의 힘을 잉태시킨다. 절망은 의연함의 유모이다. 고결한 이들에게는 불운이 좋은 젖이다. (158쪽) 원전을 읽지 않고 요약본이나 영화, 그리고 뮤지컬을 통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거론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3권의 내용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레미제라블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 바로 3권이다. 파리 시민들의 열악한 삶의 모습이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청춘의 불타는 사랑의 모습도 그려진다. 사랑은 언제 찾아오는가? 그건 순간이다. 상대방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서 시작하는 사랑은 없다. 만약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형식을 빈 인간적인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랑은 어느 순간, 스쳐가는 서로의 눈빛이나, 한순간 코끝을 스쳐가는 체취에 의해서도 시작된다. 아니면 상대의 우아한 손끝의 동작하나나, 의도하지 않은 순간 찾아든 상념으로부터, 그도 아니면 옷자락을 훑고 지나가는 한줄기 봄바람의 부추김으로도 잉태된다. 그래서인가 만물이 태동하는 봄의 사랑은 더 격동적이다. 봄에 시작하는 청춘의 사랑은 광기, 그 자체이다. 광한루에서 시작되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 그랬고, 뤽상부르크 공원에서 시작된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그랬다. 젊음의 격정과 봄의 격동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추임새에 이끌리어 시작되는 사랑은 그래서 두렵다. 젊음의 격정과 정염을 기반으로 봄의 기운과 어우러지는 사랑은 광란이다. 그때의 사랑은 순간에 찾아와 젊음의 열기와 순수의 정염을 연료로 하여 서로를 태어 없앨 정도의 강한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바로 그랬다. 사랑에 빠진 마리우수와 코제트의 이야기. 서로의 이름도 모른 상태로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 그들의 순수함과 젊음의 격동이 불러오는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젊음의 위대함과 격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젊음은 인간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며 선물이다. 쟝발장은 코제트와 은둔생활을 한다. 코제트에게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극도의 검소함을 유지한다. 쟝발장은 자신을 추격하는 쟈베르 경감의 눈길에 포착되지 않기 위해 은둔생활을 하지만 두 번의 위험한 순간을 맞는다. 근데 그게 이상하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두 번의 고비가 쟝발장 자신의 부주의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2편의 마지막에 남루한 복장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을 자주하다 ‘적선하는 거지’로 알려져 이를 이상하게 여긴 쟈베르의 추격을 받았고, 3편에서는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잊지 못하는 이의 가정을 방문해 온정의 손길을 내밀다가 추격을 받는다. 이뿐만 아니다. 1편에서 미라엘 신부는 어느 곳에서도 외면 받고 길거리를 헤매는 쟝발장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했다가 은접시를 강탈당한다. 어쩌면 그 순간에 미라엘 신부가 잠에서 깨어났다면 쟝발장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작가는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위험에 당면하게 하는지. 그들의 선행의 결과가 왜 예기치 않은 위험을 불러오고,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게 되는지. 선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언제나 당사자에게 위기로 다가오는지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선한 행위는 행위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를 작가는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개인의 진보를 위해 그 댓가를 지불하는 걸 의미하는 건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얻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