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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독서모임에서 고골의 단편소설 <코>와 <외투>를 읽고 토론했다. <외투>는 재작년에도 읽고 토론한 적 있다. 이번에 단편소설 <광인일기>와 희곡 <감찰관>을 읽으면서 고골의 문학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돼 뿌듯하다.
고골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여성'과 '높은 관등'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어쩌면 그러한 콤플렉스는 남성중심 사회의 남자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코>와 <외투>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결핍된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여곡절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라면, <광인일기>와 <감찰관>은 비록 미치거나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욕망의 해소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이야기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들은 왜 미치광이, 광인의 입을 빌어 말하는 걸까? 루쉰의 <광인일기>를 읽을 때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그 이유는 정상적인 보통 사람들이 간과하는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광인의 시선과 말이 효과적이기 때문일 거다. 그런 점에서 광인은 작가의 아바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주인공이 왜 광인이 되었는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이 생긴다.
<광인일기>의 9등 문관 포프리신은 40대 독신 남성이다. 그에겐 자신의 상관도 얕볼 만큼 우월의식이 팽배하지만 현실에선 번번이 깨진다. 아름다운 상관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던 그는 그녀가 어느 시종무관과 결혼할 거란 사실을 알고 분개한다. 그즈음 스페인에서 왕이 폐위되고 어떤 귀부인이 왕위를 계승할 거란 신문기사를 읽고 "귀부인이 왕위에 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고심한다. 어느날 그는 불현듯 자신이 은둔해 살고 있는 스페인 왕이란 사실을 깨닫고 사절단이 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힐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그는 마침내 머리가 밀리고 찬물 세례를 받은 후 갇히게 되고 몽둥이 찜질까지 당하는 신세가 된다.
희극 <감찰관>의 홀레스타코프는 20대 초반의 한심한 청년이다. 카드 도박으로 여행 경비를 모두 잃고 하인과 함께 시골의 한 여관에 머물러 있던 그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인에게 식사를 얻어오라고 다그치는데, 마침 그 지역에 감찰 나오기로 돼 있는 감찰관으로 오해 받으면서 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로부터 융숭한 대접과 뇌물을 받으며 꿈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군수의 딸과 결혼 약속까지 해놓은 그는 위기 의식을 느낀 영리한 하인의 재촉으로 마차를 빌려 타고 마을을 떠나 위기를 모면한다.
아름다운 여성과 연애하고 높은 관등에 오르고자 하는 고골의 주인공들의 욕망은 안타깝게도 끝내 실현되지 못한다. 어쩌면 고골의 현실이기도 하고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건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해학과 풍자에 능한 이야기꾼 고골에겐 그러한 과정이 여성을 미추로 바라보는 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나 보다 내면세계로 다가가고, 관료제 사회의 모순과 실패에 대한 보다 처절한 묘사를 꾀하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작가와 작품 세계에 대한 서문의 해설을 읽고 고골이 변변한 연애도 못해보고 독신으로 살며 우울증을 앓다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의 작중 인물들이 더 잘 이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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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우리 말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어떤 옷차림을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람이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웃지 못할 현실은 무얼 말하는가.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세계를 연 고골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외투>는 권위와 형식에 치우친 관료제 사회와 사회적 지위와 옷이 갖는 의미, 개인의 성격과 운명, 그리고 환상문학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묵직하고 풍자적인 이야기다. 첫장을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실주의 문학에 영향을 준 사람이 고골이라고 한다.
9등관 관료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만큼이나 불편한 낡은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중년 독신남성이다. 아니, 그는 너무 낡은 자신의 외투를 일찍이 '덮개'라고 부른다. 그나마 견디면서 걸치고 다니던 '덮개'가 다시 한 차례 수선을 요구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찾아간 양복장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뜻밖에도 절망적이다. 너무 낡아서 더 이상 기울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속사정과 별개로 그동안 그의 외투를 수차례 수선해준 양복장이의 결심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틈틈이 모아둔 비상금과 월말 포상금을 합쳐 벼르고 벼르던 새 외투를 걸치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가벼운 걸음으로 직장에 출근한다.
늘 후줄근하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새 외투를 걸치고 나타나자 동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대상으로, 한마디로 존재감이 드러나기에 이른다. 고위 관료 한 사람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대신해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 테니 모두들 저녁에 오라고 초대한다. 근검절약해야 하는 가난한 살림에 공문서를 정서하는 일로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족하며 살아온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나 출세는 꿈도 꿔보지 못한 소시민이다. 그런 그가 멋진 새 외투를 입고 꿈틀대는 욕망을 느끼며 파티에 초대받아 갔다가 돌아오는 밤길에 강도를 만나 목숨 같은 새 외투를 뺏기고 만다.
심층심리학에서 '옷'은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를 상징한다. 사회에서 멋진 페르소나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주인공이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성시켜줄 외투를 뺏긴 것은 가진 자는 더 받아 부유해지고 못 가진 자는 가진 것마저 잃게 되리라는 야박한 성경 말씀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주저앉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은 한번 시도해봐야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힘없는 개인으로서 부와 지위를 세습받은 금수저의 특권에 줄을 대어 강탈당한 외투를 찾아보려고 고군분투하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관료제가 요지부동한 계급 사회의 굴레에 갇힌 그를 보는 것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아 씁쓸하고 애처롭기 그지없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억울한 죽음은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다. 유령으로 살아나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밤마다 자신의 잃어버린 외투를 찾는 끈질긴 복수를 통해 요즘 말로 시원한 '사이다' 같은 효과를 거둔다.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이른 죽음을 예감한 고골 자신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힘없는 주인공이 처한 운명을 유령이란 환상으로 살려내 비참한 현실을 위로하고 극복하고자 한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한다.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인으로서는 넘기 어려운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극복과 초월에의 의지를 발휘한 작가의 집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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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독서모임에서 고골의 <외투>를 읽고 토론하면서 이름으로만 알던 고골의 단편소설을 처음 만났다. 이번에 또 다른 회원이 <코>를 추천해 읽으며 미루어 둔 고골의 다른 단편들을 읽게 됐다.
어느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발사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구수한 빵 냄새를 맡고 아내에게 잔소리 들을 각오를 하며 커피 대신 빵을 달라고 부탁한다. 반으로 자른 빵 속에서 사람의 코가 나오자 괄괄한 아내로부터 험한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은 야코블레비치는 코를 내다버려야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긴다. 결국 그는 걸레로 싼 코를 바깥 어딘가에 버려야 하는데 경찰과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등 버리기가 쉽지 않아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잠자리에서 깨어나 전날 코에 생긴 뾰루지를 보려고 하인에게 거울을 가져오게 한 8등관 코발료프는 꿈 같은 일을 당한다. 자신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고 납작하니 편평한 거다. '학력으로 얻은 8등관'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는 그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코가 없는 그에게 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게 해주겠는가. 그 시간 이후 코발료프는 자신의 코를 찾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밖으로 나온 그는 제과점 현관 앞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신사가 바로 자신의 코임을 확신하고 성당까지 쫓아가지만 한눈을 파는 사이에 놓치고 만다.
이발사의 빵 속에서 나온 코나, 밤 사이 사라진 코나, 아예 멋진 신사복을 입고 성당에서 기도하는 코나 황당하기로는 어느 것이 더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코'가 무슨 상징일까? 융 학파에서 '코'의 상징이 뭔지 추측해본 후 <꿈 상징 사전>을 찾아보았다. 코의 상징이 세 가지로 정리돼 있는데 그 중에서 '본능을 따르라'는 마지막 뜻이 이 소설과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코는 발성을 돕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냄새를 맡는 감각기관으로 본능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무언가의 실체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기도 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도 직관이나 육감의 작용으로 인해 안 좋은 일이나 좋은 일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그러한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자연스런 자신의 본능과의 연결을 잃고 이성과 합리주의에 치우친 삶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코가 사라진 8등관 코발료프는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오로지 자신의 페르소나에 치우친 삶을 살고 있는 남성이다. 코가 사라진 것은 이러한 그의 정신이 불균형해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남의 코가 자신에게 온 이발사 야코블레비치는 본능이 지나친 삶을 살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작품 속에서 그는 술고래로 제복의 단추가 떨어져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험한 욕설을 퍼붓는 데는 심하긴 해도 그럴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다. 이제 그는 정신차리고 과한 본능을 조절해야 하는 순간에 처한다. 걸레로 싼 코를 내다버리려고 밖으로 나왔지만 경찰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며 슬그머니 버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은 과한 본능으로 곤란에 처한 그의 상황과 같다.
그럼 코가 된 신사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자신의 본능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남성이 아닐까. 그는 5등관으로 보이는 신사인데다 성당에 가 기도하는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이다. 결국 코발료프의 사라진 코가 다시 나타나 황당한 일이 황당한 방식으로 수습되지만, 중요한 것은 코를 잃을 뻔한 코블료프가 지향해야 하는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융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페르소나에 치우친 삶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세계를 이루는 본능과 직관도 돌보며 균형잡힌 삶을 살라는 거다. 하지만 이후 보여지는 코발료프의 행동을 보면 그는 또 다른 일이나 경험으로 고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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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이야기를 더 어이없이 만드는 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다. 소설은 이반이라는 한 이발사가 아침에 빵굽는 냄새를 맡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커피도 사양한 채 갓 구운 빵을 먹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세부적인 디테일로 시작한다. 날짜와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서술되는 이 부분은 사실상 보통의 미스터리 서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상황의 작은 디테일들에 주목하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하시키지만 그렇게 조심조심 읽어가며 갑자기 맞닥뜨리는 건 건 황당함 자체다. 마치 어둠속에서 더듬어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그 엘리스처럼 그 이상한 세계를 배회하며 미스터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며 글자들 사이를 움직여보지만 결국 작가에게 유린당하는 건 독자다. 이발사 이반은 갓 구운 빵속에서 나타난 코가 자신이 이발한 코벨레프 8등관료의 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면도하다가 잘못해서 베어낸 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한다. 이 때 아내는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고 이반에게 온갖 구박을 다한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런 거 없다. 마치 어떤 영화에서 초반에 지나가는 행인이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데 관객은 그게 맥거핀인 줄 알고 잔뜩 주목하는데 단지 그 씬을 길게 잡았을 뿐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소심한 이발사 이반의 성격을 나타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전체에서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정성들여 설명을 하고 객관적 정보와 세부사항을 전달하지만, 중요한 것, 가장 궁금한 것에 관해서는 설명이 야박하다. 모든 불가능한 일이 마치 원래 자연의 일부인 듯 천연덕스럽게 간략하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천조각에 싸서 이를 몰래 버리고자 거리로 나가지만,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경찰관 때문에 쉽지 않고, 결국 다리 밑으로 던졌지만, 경찰에 걸리고 만다. 한편 여자를 밝히는 8등관 코벨로프는 아침 잠에서 깨자 자신의 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골(1809~1852)은 카프카(1883~1923)보다 훨씬 전에 태어났다. 카프카가 고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현실적 세계와 맞닥뜨리는 시작이 비슷하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 그 모든 면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코》를 읽게 된 계기는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1906~1954)의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소개의 첫줄로부터다.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1]. 찾아보니 고골의 러시안 문학적 위치에 대한 저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었다. 고골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는 이 말과 더불어 여러 핵심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 쪼가리들을 인용한 한 논문을 인용하면 설명이 될 듯하다. 아바스야느크의 첫 작품을 읽고 나서 뭔가 조금 기괴한 느낌이 들어, 작가 소개를 펼쳤다가 발견된 고골 <외투>의 문학적 위상이 그렇다는 걸 발견하고는, <외투>를 읽으려고 고골을 펼쳤다가 <코>에 빠졌던 것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과 창조의 전형인 고골의 문학은 예로부터 낭만성, 현실성, 상징성, 심리성, 신화성, 종교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널리 평가되어 왔다.2) 일찍이 도스또옙스끼(Ф. М. Достоевский)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Все мы вышли из гоголевской “Шинели.”)”라고 말했듯이, 작품 「외투 」는 고골 문학의 독창성과 풍부함을 함께 지닌 ‘가장 심오하고 가장 뛰어난 작 품의 하나’3)로서 러시아 문학사에서 실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코대신 코가 있던 자리가 평평해진 걸 발견하는 코벨로프는 황당하고 낙심하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워 코(가 있던 자리)를 손수건으로 감춘 채로 돌아다니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료를 발견하는데, 그 5등관이 자신의 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가서 당신은 내 코이니 자신의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코는 자신은 당신의 코가 아니며 자신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그러던 중 어떤 여자에 눈이 팔리는 동안 자신의 코이자 신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서 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코면 코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자신보다도 신분이 높은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코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면 일단 스케일이 맞지가 않고, 물리적으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없는데, 바로 알아보다니,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곳곳에서 벌어진다. 후에 경찰이 코를 가져와서는 이발사 이반이 꾸민 짓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더욱이 코를 발견한 당시 경찰관의 눈에도 코는 신사로 보였다는 것이다. 마차에 타고 있는 '그'를 길에서 잡았다고, 처음엔 자기도 그가 평범한 신사로 보였지만, 근시여서 코나 수염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이 안경이 있었기에 그가 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하지만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빠져있고, 장소와 시간 혹은 그 외에 쓸데 없는 부분에서만 객관성과 정교함을 유지한다. 즉 코가 어떻게 사람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보인건지 혹은 변신한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빵 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이반을 잡은 경찰에게 잡혀서 다시 코로 변신했는지에 대한 가장 황당한 부분에 대한 디테일들이 뭉텅이로 빠진채, 화자는 자기도 이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작가들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소재로 삼는지 알 수가 없다며 발뺌하면서 미스터리를 푸는 대신 메타소설의 형식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다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거리를 줄 것 같지만, 19세기 초, 이러한 소설을 썼고, 결국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오늘날의 소설들도 다양한 경로로 고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오래된 작품이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체를 예상했는데, 하도 황당하다 보니까, 그리고 그 황당한 방식이 그 옛날 것인데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롭게 읽혔다. 언넝 외투도 읽어야 겠다 [1] 현대문학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 세계문학단편선 11 [2] 은닉된 논쟁: 고골의 「외투」와 체홉의 「관리의 죽음」의 비교 분석, 오원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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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오늘은 고골의 [외투]를 읽다. 다 읽고난 후 심호흡을 해야만 했으니 이 현상은 어제의 [코]를 읽은 후 같은 증상.
아이구머니나, 아카키야, 아카키야, 얼마나 추웠겠니, 곁에 있었다면 그의 헐거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마른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북커버에 있는 남자가 마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아서 한 번 쓰다듬어봤다. 그림에 그려져 있는 사내는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살아생전의 아카키라고 볼 수 없다. 외투를 강도 당하고 중요인사에게 혼나고 얼마나 억울했을까, 홧병을 얻어 죽은 후에도 유령이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돌아다닐 때, 관리들의 외투를 훔칠 때 이 표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쾌락과 유흥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자신의 일을 성실히 행하면서 만족을 얻는다.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일절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쓴다. 여자친구가 없지만 언젠가는 생기겠지, 없어도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으니 이렇게 성실하게 살다보면 나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그녀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싶은 어여쁜 애인이 생기겠지. 헐거운 머리숱이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생긴 거 갖고 왈가왈부할 청춘은 아니지 않은가. 이상 우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프로필이었다.
이런 사람 주변에 꼭 있다. 아카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고등학교 다닐 때 문학 담당 선생님. 말을 섞지 않았던 시기, 문학 시간에 가르침만 받았을 때, 헌데 그 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반 정원의 절반이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나긋나긋하시던지 자장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 역시 아카키와 거의 흡사, 졸업을 하고 우연히 영화관에서 마주치고 또 우연히 도서관에서 마주치면서 말을 섞기 시작했고 말을 섞는 동시에 담배도 함께 태우면서 친해지고보니 그는 고골의 단편에 등장하는 하급관리와는 전혀 다른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 아, 공통점이 있었으니 착한 심성이 아카키와 같았다. 앗, 너무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외투가 하도 낡아서 새 걸로 맞출 수밖에 없다는 애꾸눈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말을 듣는 동시에 아카키는 절망한다. 내게 그만한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신의 도움 덕택이었을까 이차저차해서 아카키는 새 외투를 맞추게 된다. 이 이차저차한 과정은 또 얼마나 눈물 겨운지 모른다. 좀 길어도 그의 인생 한자락을 살필 수 있기에 옮겨본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돈을 지출할 때마다, 위쪽에 돈을 집어넣는 구멍이 뚫려 있고 자물쇠로 잠근 작은 상자에 약간씩 떼서 저축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반년이 지날 때마다 그동안 모은 동전을 세어보고 은화로 바꾸었다. 그렇게 몇 해 동안 계속 이 습관을 유지했고,결국 40루블이 넘는 돈을 모은 것이다. 이렇게 절반은 이미 수중에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더니, 적어도 1년이라도, 일상적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저녁마다 차 마시는 일을 그만두고, 초를 켜지 않으며, 만일 꼭 그래야 한다면 주인 여자의 방으로 가서 일을 보기로 했다. 길을 가면서도 종종걸음으로 걷다시피하여 가능한 한 가볍고 조심스럽게 돌이나 석판을 밟아 신발 밑창이 빨리 닳지 않도록 하며, 속옷이 빨리 해지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빨래를 맡기는 횟수를 줄일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는 속옷을 벗고 오래됐지만 아껴온 목면(木綿) 가운만 걸치고 지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그런 절제된 생활에 익숙해지기 조금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길이 들었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심지어 저녁을 굶는 게 습관이 되었다. 대신 미래의 외투라는 영원한 이데아를 늘 생각하면서 정신적인 양식을 섭취하였다." (91)
정말 눈물겹다. 아카키에게는 새로운 외투가 그저 새 외투가 아닌 것이다. 고골은 새 외투를 '어여쁜 여자친구'에 비유하는데 정말 연인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결혼자금을 모으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그는 새로운 외투를 입게 된다. 그리고 사건은 일어나고마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련다. 궁금하시다면 당장에 고골의 단편집을 펼치시게 될 테니.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후 가련한 아카키는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되는데, 새 외투를 장만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애꾸눈 재봉사 페트로비치가 바느질을 하다가 옷감이 찢어진다 해도 또 덧대어 아카키의 헌 외투를 손봐줬다면 아카키는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 살아가는동안 일희일비하면 아니 된다는 말이 있는 걸까. 아카키는 새 외투를 얻으려고 고생했고 고생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꼈고 새 외투를 걸치는 동안은 정말 행복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 외투가 사라지면서 인생의 최대 고비에 서게 됐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하게 됐으니 말이다. 죽고난 후 모든 게 끝난다면 죽어 유령이 된 아카키만 불쌍하게 됐겠지만 결말은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죽으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끝난다-고 여기는 생의 태도가 있는가 하면 죽어도 끝나는 건 아무 것도 없지, 끝을 맺으려면 이렇게! - 적극적인 생의 의지로 죽음을 넘어서는 케이스가 있다. 고골은 적극적인 생의 의지를 휘리리릭 펼쳐 보인다. 아카키의 마지막 모습,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적극적인 생의 의지를 다져 다음 작품 [광인일기]는 내일 읽어봐야겠다. 고골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외투]를 읽고 리뷰를 쓰던 중 갑자기 옛날 친구 한 명이 떠올랐다. 녀석은 대단한 박애정신을 지닌 기독교인인데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강의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 한켠에는 노숙자 한 명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역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엇을 줘야 하나 그 노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친구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노숙자는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친구와 눈싸움을 하다가 이내 자리를 뜨기 위하여 깡통을 가방 안에 넣고 일어선다. 때는 11월 중순, 한겨울이 바로 코앞이었다. 때마침 칼바람이 불고. 노숙자는 얇은 면바지와 늘어질대로 늘어진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친구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노숙자가 걸음을 옮긴다. 친구는 "저기요!' 노숙자를 불러세우지만 노숙자는 친구가 뭔 짓을 할지 몰라 초조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진다. 녀석은 달려가는 노숙자를 뒤쫓기 시작한다. 노숙자의 어깨를 붙잡은 녀석, 노숙자는 두려운 눈빛으로 친구를 돌아본다. "이거 입으세요." 황당해하는 노숙자는 생각한다. '이거 미친놈 아냐?' 황당해하는 노숙자의 표정은 아랑곳않고 친구는 입고있던 파카를 벗어 덜덜 떨고 있는 노숙자의 가녀린 어깨에 덮어주고 뒤돌아 뛴다. 노숙자는 소리친다. "고마워요!" 때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 가쁜 숨을 내쉬며 버스에 올라타는 내 친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들과 회사원들은 박수를 친다. 쑥스러울 것이다. 녀석은 정류장 반대편, 대로에 시선을 박고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문다. 버스 안에 이미 타고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일까 싶어 호기심에 가득판 표정으로 내 친구와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본다. 버스는 출발한다. 차가운 11월의 칼바람을 가르면서.
물론 이 이야기는 친구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다.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 물론 녀석은 내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외투]는 이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다. 그 노숙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니, 녀석이 탄 버스가 출발한 지 한참 뒤에도 파카를 어깨에 걸친 그 노숙자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단다. 그렇다면 녀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니, 녀석은 지금 남미의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어여쁜 아내와 녀석의 눈망울을 그대로 빼닮은 사내녀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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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일기]
누군가가 그저 하루 하루는 평이함의 연속이며, 그어떤 요철조차 없는 평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출근하면 질책하는 상사의 목소리는 익숙해진 소음일 뿐이고, 월급 가불을 해주지 않는 경리는 악마같은 놈이라며 일상을 살고 있다. 관청에서 국장의 연필을 깍는 일을 하고 있는 하급관리 포프리신의 이야기다. 다만 그는 스스로가 하급관리로 있을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평범한 꿈을 꾸는 정도이다.
그가 어느날 국장의 딸 소피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빠진다. '맙소사' 인간이 욕망을 갖는 순간, 현실은 비로소 그에게 맨살의 눈보라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너무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되는 순간 남은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외면하거나. 포프리신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캉디드의 '낙관주의'나 아Q의 '정신적 승리'처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결론이 별개로 내려지는 쪽이다. 그 정도가 심해질 때 우리는 그를 '광인'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그의 일기를 엿본다.
현실에서 바뀔 수 없는 것들을 바꿔야만 그녀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는 망상을 시작한다. 그는 강아지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 동물들이 주고 받은 편지를 손에 넣는다. 거기에 써있는 내용은 절망적이다. 소피가 시종무관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할 때 시종무관이라는 직책은 그저 관직의 하나일 뿐인데, 그녀는 그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그의 이상적 사랑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이성적 현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그에게는 고통의 순간이다. 그래서 그는 역시 현실로 돌아오기를 거부한다.
난 전에도 이런 차이가 왜 생기는지 알고 싶었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9등 문관이어야 하는가? 어쩌면 내가 백작이나 장군인데, 9등 문관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진짜 누구인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가능성을 꿈꾸던 어느날 아침 스페인 왕이 폐위되어서 계승자를 선정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는다. 왕이 어딘가에 은거 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스페인 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 이제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그렇게 무시했던 것이다. 그는 3주만에 재미삼아 관청에 가서 사람들을 살피면서, 내가 스페인 왕이라는 걸 알게되면 깜짝 놀랄 것이라며 흐뭇해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찾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 행복에 대해서 살짝 귀뜸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남자가 아니라 악마에게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껍데기인 직책에 빠져 사랑을 했던 그녀가 이제 자신의 직위를 보고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정신병원에 격리된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매질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왜 자신의 국왕을 괴롭히는지 알지 못한채 어머니를 부르며 괴로워 한다. "엄마, 불쌍한 자식을 구해 주세요! 이 아픈 머리에 눈물 한 방울만 떨어뜨려 주세요!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해요! 고아처럼 불쌍한 자식을 꼭 안아주세요! 세상에 기댈 곳이 없어요! 사람들이 저를 고통스럽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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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지인이 하는 연극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작품제목은 고골의 <코>였다. 당시 나에게는 생소했던 작가와 작품이었는데 이제와 책을 읽고 보니 꽤 많은 각색이 가해졌던 것 같다. 연극의 주인공은 8등관 코발료프가 아닌 허영심이 많은 소녀였고 그저 자신의 잃어버린 코를 찾아다니는 여정이 무난하게 표현된 작품이었다. 긴 연극이 끝나고 한숨과 함께 ‘어렵군’이라는 말을 내뱉었던 게 생각이 난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서 왜 <코>가 가장 앞에 나왔느냐? 간단하다. <코>가 가장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고골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코>를 대하면 화자가 연신 말하는 것처럼 그저 “전혀 규명하기 힘든,” “하여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일 수밖에 없다. 내가 연극을 이해하지 못한 연유도 그의 세계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인간성을 결여한 관등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고골에게는 돈이나 性보다도 더욱 앞선 욕망이 관등이었다.
“뭐라고요, 성이 도대체 왜 필요합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5등 문관 부인 체흐타료바, 참모 장교 부인 팔라게야 그리고리예브나 (...) 말도 안 돼! 그저 8등관이라고 기재하시면 됩니다. 아니 소령급 인물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고골작품의 인물관계는 인격이라든가 교감 등은 철저히 배제된 채 관등의 높낮이에 따라만 단조롭게 형성된다. 인물군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높은 관등의 사람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사람 혹은 더 높은 관등을 지향하는 탐욕적인 인물이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신은 이 욕망이 궁극으로 치닫다 못해 결국 미쳐버린 인물로 그려진다. 이것은 가히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목하의 한국사회를 보면 200년 전 러시아의 소설가가 포착한 사회의 참상과 다르지 않다. 포프리신은 자신을 스페인왕이라 착각하며 남들이 모두 봐내는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딸을 외교부의 5급에 특별채용했다는 한국의 장관‘이야기’ 역시도 전형적인 고골의 ‘작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포프리신과 한국의 장관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곧 광기이기 때문이다.
이 관등물신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은 <외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뿐이다. 그는 9등관이며 처음부터 9등관의 면모를 가지고 태어난 가히 모태 9등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는 일은 그저 문서를 베끼는 ‘정서’인데, 그는 이 단순한 직무에 자신의 모든 혼을 담아낸다. 심지어 더 고급스러운 일을 시켜줘도 “다시 정서를 시켜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그를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인물을 탐욕스러운 인물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고골은 이 대상의 주위를 그저 서성이는 걸로 만족하는 충동적 인물이 욕망의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해냈다. 결국 아카키 역시도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에 침수되고 만다.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왜 나를 괴롭히십니까?”라고 호소해봤자 욕망의 타자와 관등사회는 아카키의 적요를 그저 관망하지 않는다. 이 <외투>에서 고골의 성취는 단연 괄목할만한 것이어서 후일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는 “고골의 외투자락 속에서 나왔다.”다고 선언하였다.
고골의 소설은 여타 근대소설과 달리 내면이 심층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기에 인물들의 탐욕과 그것의 쟁투로만 이야기가 나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정제된 플롯구조는 자칫 빡빡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곳곳의 유머와 해학을 선용함으로써 고골 특유의 스타일이 주조되다. 직선으로 나아가 결국 파멸 도달하는 그의 소설은 가장 짧은 동선으로 상대방의 폐부를 찌르는 높은 수준의 검술이라 할만하다. 고골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감찰관>의 마지막 ‘침묵의 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한껏 우스운 상황과 관등물신주의를 조롱하고는 마지막 극을 1분 30초 동안 침묵과 동작이 없는 상태를 유지시켰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같이 관객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웃음을 멈추고 상황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관객은 ‘침묵의 장’ 동안 우리의 삶은 개인으로서가 아닌 사회가 부여한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전의 웃음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실제 고골은 연극에서 이 1분 30초가 유지되지 않을 시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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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원형 혹은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저, '외투'를 읽고 고골이라는 작가도, '외투'라는 작품도 모두 도스토옙스키와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작품을 찾아 읽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이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기에,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을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나는 고골이나 '외투'가 궁금했다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에 비친 고골과 '외투'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작품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낯설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진부할 정도로 친숙함이 느껴졌고, 몇 단계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도스토옙스키가 왜 그리도 극찬을 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을 명징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게 되길 내심 바랐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을 잘 몰라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고골이 가지는 의미를 이 작품 하나만으로 느낄 만한 능력이 내겐 없었다.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고골은 1809년생이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생이니 나이도 띠동갑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적어도 고골보다도 10년이나 이른 푸쉬킨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도스토옙스키와는 22년 차이이므로 한 세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띠동갑이면 선후배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같은 세대이다. 그렇다면 '지대한 영향'이란 고골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아닌 그의 작품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외투'를 읽고도 도스토옙스키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성을 발견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 혹은 탁월함으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싶다. 고골이 아닌 저 유명한 푸쉬킨보다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평가이니 고골이나 푸쉬킨 팬들은 노여워하지 마시길. '외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년의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서밖에 할 줄 모르는 오타쿠다. 극빈층에 속한 그의 외투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수선할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수차례 수선을 해줬던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지만 그도 이번엔 단호하게 새 외투를 사라고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돈을 모아 페트로비치로부터 새 외투를 맞춘다. 늘 루저처럼 다니던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하자 직장에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 명명일을 맞이한 직장 상사의 초대에 응하게 되어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그에겐 첫나들이, 첫 사교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평소라면 잠잘 시간도 훌쩍 넘기게 된 그는 도저히 지루함을 참지 못한 채 다시 외투를 입고 먼저 자리를 뜨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긴다. 아카키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취해있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을 찾아 가지만 원하는 해결을 보지 못한 그는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사'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그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아카키는 병이 드는데, 어이없게도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작품이 끝날 법도 한데, 고골은 이 장면 이후 유령을 등장시킨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고위 관료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 고발성 작품에서 다분히 낭만성을 띤 환상소설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유령은,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행인들의 외투를 훔치게 되는데, 결국 그를 죽음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인사'가 걸려들고 그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마 했는데, 그 '중요한 인사'는 유령을 만나 외투를 빼앗긴 이후 부하 직원들에게 질책을 하더라도 자초지종을 다 듣고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과천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골은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장군의 외투가 그 유령에게 꼭 맞는 게 틀림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이 클래식한 상상력이라니~! 이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고 싶다. '고골의 외투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를 '고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를 가뿐히 뛰어넘은 도스토옙스키'라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순서가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엔 '외투' 말고도 다른 단편들도 함께 실려 있다. '코', '광인일기', 그리고 '감찰관'이다. '외투'를 먼저 읽고 읽으려는 게 초기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수정해야 할 듯하다. #펭귄클래식 #김영웅의책과일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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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결정하는 큰 계끼가 되었음으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길래 궁금하여 보게 되었다.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다보니 '코'는 어릴적에 이미 봤던 것 같고... 풍자와 위트에 익숙하지 않고, 작가의 나라는 '테트리스'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터라, 그닥 관심가는 내용은 아니였지만... 담겨 있는 작품들 중에서 '외투'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외투 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외투가 생활에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또 그렇게 생활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서 국가 기관들이 도와주질 못할 망정 무시하기만 했다는... 다소 심플하고, 사실 피식 웃음마저 나오는 이 책을 읽고... 한 동안 그 외투.가 떠올라...더운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빙자하여 코트라도 한 벌 구입하고 싶은...말같지도 않은 생각마저 들었다. 성실하게만 살아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는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이나, 오래전 그 나라의 실정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는듯. 어쩌면...나의 외로움같은...짜증과 분노는..아마 불안하고 개판오분전인 우리 사회 때문일게다. 한동안 기가막힌 뉴스가 나오고 또 나오다보니...막장 드라마마냥 재미있었으나...꽃노래도 삼세번이라고, 강간,살인이 난무하는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요즘은 스트레스 그 자체다. 각설하여,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오늘 읽은 '채식주의자'대비하여...정말 대가의 작품이 이래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 그래봤자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미친년이 되고, 외투의 주인공은 귀신이 되어 버리지만... 시베리아 벌판에 외투를 찾아 헤메는 귀신이 연상되어...그 을씨년스러움이 한국의 지금과 별반 다를바가 없어서..피식 나오던 웃음이...쓸쓸함이 되었다. 나도 돈을 모아서...완전 멋있고 두툼한 코트나 하나 장만하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