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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에서 읽기로 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오랫동안 고민해왔기 때문에 좋은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를 흔히 주인공이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뒤쫓는 형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주인공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반 일리치와 함께 근무하는 항소법원에서 진행 중이던 사건의 심리가 휴정된 가운데 판사들과 검사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던 중에 동료 재판관 이빈 일리치의 부고를 읽게 됩니다. 동료의 죽음을 알게 된 이들은 먼저 자신들의 입장을 계산하기에 급급합니다. 문상을 가서도 체면을 지킬 정도로 예를 갖추고는 이들이 일상적으로 가져온 카드놀이판에 모여듭니다.
모두 열두 개의 꼭지로 나누어진 이야기 가운데 첫 번째 꼭지는 이렇게 이반 일리치가 죽고 추도식이 열리기까지의 정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꼭지부터는 이반 일리치가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합니다.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과거사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한 것이기도 했다.(46쪽)”
이반 일리치의 아버지는 삼등문관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관청들을 옮겨 다니면서 일 없이 한 자리씩을 차지하는 무능한 공무원이었습니다. 이반은 삼형제 가운데 둘째였고, 형은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살았고, 동생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낙오자였습니다. 여동생은 남작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반은 일리치 집안의 자랑거리였다고 합니다.
이반은 법학과를 졸업하고 십등 문관이 되어 지사의 보좌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근면 성실한 모습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예심판사가 되었는데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문서처리는 깔끔했고, 부적절한 사항들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두 번째 임지에서 사교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빛이 나던 아가씨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신혼은 행복했지만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롭고 불쾌하고 점잖지 못하고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무엇인가가, 너무도 느닷없고 어떻게 손써 볼 도리가 없는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55쪽)’ 콩깍지가 떨어진 셈입니다. 아내와의 갈등은 일에 몰입하는 것으로 회피하는 생활이 17년 넘게 이어졌는데, 기대하던 수석판사직이 동료에게 넘어가면서 그의 일상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두 단계나 오른 항소법원의 판사가 되면서 아내와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꼭지에서는 이반의 건강에 이상이 시작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시에 호전되었던 아내와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의사를 만났지만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막연하게 대증적인 치료를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의 병세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는데 발병 삼 개월만에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통증이 심해지고 배변과 배뇨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데, 무슨 병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내와 딸은 병마와 싸우는 이반에게 별반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내는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들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이 작품이 1886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당대의 의학수준이란 것이 특별할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편으로 통증을 관리할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반이 사람들의 냉혹함과 하느님의 잔인함 그리고 하느님의 부재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결국은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깨닫게 됩니다.
병명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희망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없었고, 따라서 치료되지 않는 자신의 병에 대하여 분노하는 단계는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회복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는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생각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의사들이 진료에 임하는 자세도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판에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세 죽음>과 <습격>을 함께 엮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생각하는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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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의 12월 모임은 해를 넘겨 계묘년 1월 7일에 가졌습니다. 이번 달에는 최근에 독서회에 새로 합류하신 나그네의 길님께서 추천해주신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생애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가족들의 죽음을 포함하여 많은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전쟁과 평화>의 집필을 마친 1869년(47세 때) 심각한 중년의 위기에 시달리는데 그해 여름 심취했던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염세적인 쇼펜하우어의 글은 행복한 사람을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 충동을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라고 앤서니 브릭스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서문에 적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881년 톨스토이의 영지에서 멀지 않은 툴라라는 도시에서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라는 판사가 한창 일할 나이에 위암으로 죽은 사연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가 내린 판결로 시베리아에서 오랜 세월 유형 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죄가 사소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데 익숙한 사람이 죽음의 판결을 받게 된 사연이 톨스토이의 흥미를 끌었다고 합니다.
1. 이반 일리치의 주변인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한 행동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얘기해봅시다. 작가는 이반 일리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가진 감정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반의 죽음으로 생길 수 있는 자신들의 자리이동이나 직위 변경을 계산함,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친구가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예의상 도의적 의무를 수행하고,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의를 표명해야 하는 일이 귀찮겠다는 생각 등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표트르 이바노비치의 경우를 보면, 장례식에서 만난 동료 시바르츠가 ‘아무리 이반 일리치의 추도식이라 해도, 그게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를 깨드릴 만한 정당한 사유는 아니야’라는 말에 따라 미망인을 적당히 위로한 뒤에 추도식을 마치고는 일상적인 카드놀이를 하러 갑니다.
고인을 추모하거나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미망인은 장례절차에 들어갈 돈을 걱정하고 국가로부터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가 관심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고인의 삶의 행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이나 주변인물과의 관계에 진심이 담겨있었다면 이런 분위기를 아닐 것 같습니다.
2. 이반 일리치는 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그는 관리의 아들이었고,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현 지사 특별보좌관에서 예심판사를 거쳐 항소법원 판사가 되었고, 귀족 가문의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 동안 계속 불평이 있었으나 일에 집중하며 삶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소설 속 화자는 이러한 삶을 "이반 일리치의 과거는 지극히 '단순 평범한' 한편 대단히 '끔찍'하였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반 일리치는 귀족이나 부자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관리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이 없는 삶을 영유했습니다. 젊어서부터 착실하면서도 유쾌하고 품위 있는 삶을 지켜 ‘참 괜찮은 젊은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지사의 특별보좌관, 판사로 활동하면서도 예의바르고 공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교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빛이 나는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부나 미헬이라는 귀족처녀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결혼을 통하여 그가 기대했던 것은 따뜻한 식사와 집안돌보기와 잠자리였습니다. 3년 뒤에 검사보로 승진하면서 그는 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잇달아 태어나면서 아내의 잔소리가 심해졌습니다. 다시 3년이 지나면서 검사로 승진해서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아내와의 갈등은 심각해졌습니다. 야내와의 갈등이 심각해질수록 일과 동료들과의 일상으로 도피하는 대안을 마련했습니다. ‘인생이란 으레 즐겁고 고상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듯 왜곡된 결혼생활이 17년에 이를 무렵, 기대했던 수석판사 자리를 동료에게 빼앗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건으로 잠시 힘들고 암울한 시기를 겪었지만, 평소에 다져놓았던 인맥의 도움으로 항소법원의 판사가 되면서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임지로 이사를 하면서 아내와의 관계도 개선되었고, 새로운 직장에도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반 일리치의 삶은 단순하고 평범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야기한 이반의 삶 가운데 끔찍한 부분은 갑작스럽게 병이 시작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수개월에 걸친 짧은 기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선은 의사들도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병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병세가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딸은 이반의 병세에는 별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였고, 이반은 병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더하여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상처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이반이 살아온 나날들 가운데 이런 끔찍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3. 이반에게 게라심은 어떤 인물인가요? 게라심은 이반의 장례식 장면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이반의 병세가 기울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유일하게 곁을 지킨 인물입니다. 게라심은 도시생활을 해본 젊은 농부로서 이반의 식사담당 하인입니다. 이반은 러시아식으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도 이반이 처한 역겨운 상황을 불평 없이 처리하는 젊은이입니다. 미안해하는 이반에게 환자이기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말하는 게라심은 이렇습니다. “게라심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이 일을 가볍게, 기꺼운 마음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선량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반 일리치는 그의 착한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건강, 힘, 삶의 활기는 모두 이반 일리치에게 상처가 되었지만 게라심이 가진 힘과 삶의 활기만큼은 이반 일리치를 상심에 빠트리는 대신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4.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나요? 느낀 적이 있다면 왜 죽음이 두려웠나요? 두렵지 않다면 두렵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여러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이반 일리치가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레프 톨스토이가 40대 무렵부터 가졌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에 심취했을 무렵의 어느 날 밤 불면에 시달리면서 갑작스럽게 공포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새벽 두 시였소. 나는 피곤했다오. 자고 싶었고 내 건강은 정말 좋았소. 그런데 갑자기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가 나를 덮쳤소. 그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소.”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죽음에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죽음 뒤에 최후의 심판을 거쳐서 지옥 혹은 연옥에 빠질 수도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살아 돌아온 이가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죽음과 동시에 개체를 이루는 요소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죽음의 형태가 있습니다. 잠을 자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기도 하고,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증, 사고 등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전염병 등으로 며칠 고통을 겪다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암이나 만성질환으로 오래 투병 끝에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5.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이 세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할 건가요? 여기 세 가지 질문은 답이 쉽지 않은 철학적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먼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하는 질문을 생각해봅니다. 지나간 때는 과거로, 지금은 현재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때는 미래라고 이야기합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사실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편의상 구분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파스칼은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수단이며,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이들 세 가지 시점에 대한 명언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현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괴테는 “인간은 현재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모른다. 막연하게 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헛된 과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W.G. 베넘 역시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인 원인이다. 현재 시간을 잃어버리면 모든 시간을 잃어버린다.”라고 했습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시점, 즉 현재일 것 같습니다. 사람이나 일 역시 마찬가지 일 듯합니다.
6.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봅시다.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면 현실에 충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인의 죽음을 포함한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흔히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한다고 말합니다. 삶이란 살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영생이 없는 모든 생명체는 같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우리는 죽음을 행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하여 분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태어난 첫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포가 미래에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세상에서 꼭 해야 할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으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나름으로 세워놓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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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휴식시간에 모인 판사들이 동료였던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읽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불치의 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다 끔찍한 죽음을 맞은 이반 일리치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이반은 "삶이란 반드시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만 한다"는 소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으며 예의바르고 재치있는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손가락질 받을 만한 악한 일이나 추잡한 일에 연루된 일도 없이 자신을 잘 관리했지만 가족들과도 동료들과도 깊고 진실한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의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카드놀이와 사교생활의 소소한 재미로 자신의 인생을 가볍게 즐기며 살았다.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높은 지위와 급여를 받게 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사서 본인의 취향대로 집을 꾸미려다가 그는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갑자기 옆구리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된다. 통증은 점점 심해지지만 의사들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다가오는 죽음앞에 그는 혼자일 뿐이다.
"이게 뭘까? 나는 정말 죽는 걸까?" "그래, 정말이야."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냥 그런 거야. 별 다른 이유는 없어."
누구나 죽는 것이고, 그것은 그냥 그렇게 정해진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라면 끝까지 부정하며 삶에 지독하게 매달리는 것이 사람이다. 의사와 가족들의 입에 발린 말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붙들려 애쓴다. 그러나 삶과 죽음사이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다가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자신의 인생이 산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 앞에서 돌아보니 유년이후 계속 산을 내려가다가 점점 쪼그라들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아픈 깨달음만 남는다. 법정에서 늘 청원인들에게 판결을 내렸던 그가 죽음의 순간 자신의 인생이 거짓이고 기만일 뿐이었다는 판결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친구들은 동료의 죽음앞에서도 머리속으로는 카드게임을 생각하며 그의 자리에 누가 승진할 것인지 살피고, 아내는 남편의 죽음후에 국가로부터 더 많은 연금을 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골몰한다. 그러나 젊고 선량한 하인 게라심은 이반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주고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고통과 다가오는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한다. 하인 게라심과 어린 아들만이 톨스토이가 말하는 진실한 인생이다. 톨스토이는 서서히 진행되지만 점점 고통이 심해지는 죽음의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죽음앞에서만 삶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고 냉정하게 선언한다. 그대는 이반보다 더 나은 삶과 더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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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를 다룬
많은 책들이 이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를 인용한다. 작년 케이티 로이프의 『바이올렛
아워』에서부터 셔윈 눌랜드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폴 칼라티니의 『숨결이 바람될 때』,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를 읽으며 결국엔 읽어야 할 책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책들을
읽기 전에 이미 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를 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거쳐야 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살아온 생을 뒤돌아본다. 삶이 없다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반 일리치는 맹렬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죽음의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과 후의 삶은 전혀 다른 기억과 느낌이다. 죽음은, 아니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런 것이다.
죽음과 가까운 질병을
진단받았을 때 많은 사람이 왜 자신이게 그런 운명이 왔는지 묻는다. 그렇게 잘못 살아온 것 같지 않은
인생인데, 자신보다 훨씬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은 멀쩡하게 살아가는데...
이건 부조리하다, 억울하다. 이반 일리치도 마찬가지다. 삶의 궤적이 어떤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고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일까? 죽음은 살아온 삶의 결과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삶의 목적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지만, 그
죽음이 그 사람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마지막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작품을 읽는다고 죽음의 의미가 선연하게 밝아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건 다시 삶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기분이 나쁜 것은 죽음이 그를 자꾸 죽음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이란 놈은 그에게 무슨 일이든 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은 채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며, 그것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儀式)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그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바로 그 ‘고상함’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생한 하나의 불쾌한 사건으로 꽤나 거북살스러운 일의 수준으로 형편없이 끌어내려지는 것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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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걸 빨아들이고 한 사람의 인생을 소멸 시키는 블랙홀 같기도 하지만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죽음의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고, 죽음의 당사자 주변 인물들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사람을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은 심각한 병을 얻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죽음'을 인식하게 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죽을 것이다.'라는 삶의 진리,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그 진리를 외면하며 살기 쉽다. 개인적으로 '죽음'을 조금 일찍 인식했다. 큰 병을 앓거나 사고를 당했던 건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죽음 이후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젠가 태양도 소멸하고 지구도 소멸할 텐데 그러면 내가 다시 생명체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을 죄여 올 만큼 두려움이 엄습했다. 당시에 6개월 가량 이 질문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어두운 기운으로 혼자만의 사색에 사로잡혀 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십여 년이 지난 후에 비슷한 질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삶이 유한하다면 인간의 존재와,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일까?' 역시 답을 찾기란 불가능이었다. 마찬가지로 1년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사람의 사고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다면 바로 이 질문의 덫에 걸린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음'은 인생을 인식하는 내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톨스토이 역시 이 블랙홀에 빠졌던 것 같다. 그는 41세에 고통, 죽음, 허무라는 덫에 걸려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죽음과 관련된 작품을 세상에 남기게 되었다. 이반일리치가 톨스토이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톨스토이가 이반일리치를 통해 '죽음'과 죽음으로 인해 비춰지는 모든 관계, 내면, 고통, 삶의 가치를 다루려 했던 건 분명하다.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판사라는 높은 지위를 누리며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꾸리는 삶의 외향은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불만이 가득하다.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삶에서 특별한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좀 더 나은(좀 더 많이 누리는) 생활을,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인생이 최고의 삶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꾸려가던 이반 일리치는 우연한 사고로 병을 얻어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서 외향이 지배한 인생이 얼마나 덧 없고 가벼운지, '죽음'과 대조된 가짜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날카로운 바위산의 단면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인생의 의미를 묻고 또 되묻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다양한 인물과 주제로 독자에게 자신이 평생 고민한 그 질문을 되돌려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인생은 유한하니 가치있게 살으라는 말은 너무 투박하다. 사실 어떻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인지 여전히 고민이 된다. 그러나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간에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죽음이 생명을 삼키기 직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하리라 믿는다. 죽음 이후는 인간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왜 사람들은 반성하고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죽음 이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지만 죽음이 분명한 분깃점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왜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졌는지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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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상치되는 걸까. 인류 고전사(사상사)를 새로 쓴 위대한 사색가들은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것임을 일갈해왔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출구에서 볼 때 너무 짧다"라고 했고 헤르만 헤세는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 걸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는 "진실로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삶의 종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게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삶을 강렬히 추구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며 결국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가 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그의 모든 작품이 이 테마를 관통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삶의 예찬보다 죽음의 성찰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톨스토이 문학의 특징이다. 장편만을 보자면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웅대한 걸작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천착한 예술작품이다. 『부활』은 죽음의 의미를 깊이 고뇌하는 후기 톨스토이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기차역에서 객사한 그의 죽음 또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 죽음을 다룬 가장 탁월한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인생 후반부에 쓴 짤막한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병상과 죽음에 관한 소설로는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독자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몰입력을 선사하는데 일단 첫 장을 넘기면 도중에 정지할 수가 없다. 한달음에 달려 소설 말미에 도착한다. 소설의 3인칭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한 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고요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승진과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판사이다.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고 그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으며 상류층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결혼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뭐든 착착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별다른 걱정과 근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찾아든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육체적 질고에 의한 극심한 고통은 그답지 않은 고성과 울부짖음을 통해 밖으로 표출된다. 가족들은 경악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은 진정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덧없고 의심스러웠으며 하루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러한 삶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를 추적해가는 주인공 자신의 독백과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3인칭 서술이 압권이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이 자신과 다른 동료들의 승진이나 인사 발령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계산하느라 바쁘다. 동료의 죽음에 겸허히 슬퍼하기보다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먼저 챙기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악랄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인간 본성의 진실한 민낯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악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소설 속 인물 중 주인공의 하인과 어린 아들은 선한 영혼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두 명만이 올바른 영혼의 소유자인 점은 이채롭다. 인간 됨의 본질과 원형은 부와 지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결말을 먼저 알려준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목에서부터 결론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반전이 있을 리 없고 이야기의 뒤틀림이나 전환도 없다. 한 남자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뻔한 내용이고 결론으로서도 역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중편 분량으로 몰입감 있게 풀어낸다는 게 놀랍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읽을수록 감탄스럽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는 가슴속에 무언가의 싱숭생숭함이 남을 정도다. 가장 큰 여운은 나와 죽음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 때, 아니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 과연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심정은 어떤 색깔일까. 여러 사유가 샘솟는다. 불변의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이다.
독자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가지각색이다. 혹자는 이 소설에 대해 한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평가한다. 이반 일리치는 초반에 출세욕만 가득 찬 인물로 그려지지만 병마와 씨름하면서 점차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현재보다 과거의 삶이 더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깨닫는다. 그가 되새기는 유년의 빛나는 기억은 찬란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산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신의 존재에 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병세가 깊어지며 죽음을 앞두고 성찬식을 치렀음에도 자신의 현재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죽음의 직면에서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객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 유한성의 처연한 한계를 엿본다. 삶이란 그저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문학은 항시 번역의 문제에 봉착한다.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다. 어느 출판사 어떤 역자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서점에서 대략 대여섯 개의 번역본을 훑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읽혔다. 톨스토이의 중·단편은 서사의 힘이 강하고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번역의 변수를 뚫는 힘이 있다. 번역의 질에 따라 작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대개 중·단편은 여러 작품이 함께 실리기 때문에 출판사마다 함께 실린 소설이 다르긴 하지만 번역 자체가 문제 될 만한 번역본은 찾지 못했다. 중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것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죽음에 관한 톨스토이의 혜안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톨스토이의 웅장한 장편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없다. 이제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비록 120쪽 남짓한 작은 분량이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여느 장편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과 죽음에 관한 걸쭉한 사유가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독백(3인칭 서술)만으로 이렇게 웅숭깊고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역시 톨스토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평생 곁에 두고 삶이 무료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죽음의 과정을 다룬 듯 보이지만 실상 삶의 희망을 맹렬히 추적한 소설이다. 고전에도 품격이 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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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현재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뛰어난 심리묘사가 돋보이며 결말을 알고 들어가는데도 읽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네요. 빠른 이야기 전개와 뛰어난 문장력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하구요...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위대한 작가와 고전은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이 있음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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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톨스토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평범한 재료인 보통 사람들이 겪을 만한 갈등과 심적인 고뇌를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평범함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된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하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 "세 죽음", "습격"을 묶어 놓은 일종의 단편선이다. 단편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강렬할 수 있으나 반대로 감동의 지속성은 떨어질 수도 있다. 세펀의 글이지만 "세 죽음"과 "습격"은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들이고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비할바는 아니다. 이반 일리치라는 한 사람이 갑자기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상에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는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는 부고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결말은 이미 알고 시작한다. 알고 시작하는데도 묘한 몰입감을 준다. 이반도 누구나 처럼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아간다. 나름의 절제도 있고, 나름의 원칙도 있고,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있다. 직업에서 절제와 원칙으로 그런대로 잘 풀려나가게 되고, 또한 남들처럼 연애에 빠지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된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겪어본 결혼 생활은 예상했던 결혼 생활과 다르기에 거기에서 갈등이 발생하지만 곧 자신만의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은 일에 대한 몰입이었다. 자식이 생기고 남들이 보는 외견상 그럭저럭 풍요로울 듯 싶으나 본인은 경제적으로 쫓기는 상황에 처하고 또한 직장에서 갑자기 성공의 길이 정체되다보니 일에 대한 회의에도 빠진다. 이반도 느끼는 삶의 행복은 높은 연봉, 경제적인 풍요로움,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부간의 다툼도 신경쓸 새로운 일이 생기면 줄듯이,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꾸밀 집이 생기면서 자츰 줄어들게 되고 이반도 여기에 정성을 다하게 된다. 마치 집이 자신의 분신인 마냥 집을 꾸미는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이 순간 이반은 삶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집에 방이 좀 더 있었으면, 연봉이 좀 더 높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되고 부부간의 다툼도 다시 심화된다. 정말 보편적인 삶의 모습 그 자체라 여겨진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다. 괜찮겠지 했는데 원인을 정확하게 모른체 악화되기만 한다. 처음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병에 걸린 육신은 살아있는 육신들에게는 불쾌한 그 무엇일 뿐이다. 아픈 육신은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건강한 육신에게는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일까? 시한부 환자에 대한 병문안도 결국 남을자들에 대한 위로를 일부 담고 있는건 아닐까? 아프다는 건 개인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며 일면 불가항력적일텐데 아프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삶에서 갑자기 소외가 된다. 특별 대우를 받고 언젠가 꺼질 불꽃 정도의 존재감으로 희석된다. 정작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 것일까? 남을 자들이 먼저 떠날 자를 위로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을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먼저 떠나는 자가 위로를 해야하는 것일까? 육체적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채로 어떤 넝마에 쑤셔 넣어져 그대로는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구멍속으로 강제로 쑤셔넣어 지고 있는데, 몸이 느끼는 고통은 둘째로 치더라도 도무지 그 구멍을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은 떠나야할 삶에 대한 미련이라는 표현은 죽음의 공포를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람이 극한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느끼면 그 육체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던가? 그렇게 보면 육체는 쾌락(행복)을 느낄 때만 효용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걸 머리속으로는 알지만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듯 하다. 그런 죽음은 누구에게나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느낌일 것이다. 아무리 내 자신이 천수를 누린 나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갑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머리속으로는 생각할 수 있으나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어려운 죽음이 나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다면 난 이반처럼 비명을 지르게 될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나도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왜 나인가?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건 알지만 아는것과 직접 체감해야하는 일은 또한 별개 문제일 수도 있다. 죽음은 상당히 철학적인 주제이고 이책 때문에 책의 독서 순서를 바꾸어서 셀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볼 생각이다. 죽음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영원한 철학적 주제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그림자에 "왜 나인가?"를 질문하게 된다지만 한편으론 "왜 내가 태어났는가? 무슨 목적이 있는건가?"를 생각해 보면 출생과 사망 자체에 어떤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에는 없는 것인가? 케이건 교수의 책을 보면서 한번 더 고민해 볼 생각이다. 이와 별개로 단편의 문학작품으로서 죽음에 대한 인간 심리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압권이라고 말하고 싶다. 4/3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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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탄하게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던 이반 일리치. 어느날 사소한 사고로 인해 불치병에 걸리면서 죽음을 앞두게 됩니다. 그러면서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원망과 질투를 느끼면서 절망에 빠지는데...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정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반 일리치의 상황에 처한 다면 어떤 감정들이 들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을 가져 봤습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감정이 들까? 지나온 삶에 대해 후회만 남을까? 아님 그럭저럭 잘 산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죽음앞에서 그래도 행복한 삶이었다는,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기로 결심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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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mori..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