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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평화 혹은 다수의 평화에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어디까지일까? 현재,과거,미래 어디까지일까.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를 당은 어디까지 속박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 아니면 과거만 아니면 미래 모두까지 속박할 수 있을까? 무지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당이 속박을 한다고 하여,신어를 창조하여 과거를 말살하듯,아니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 나간다고 하면 어디까지 지울 수 있는 것일까,과거만 아니 현재까지 미래까지도 그 힘이 이어질 수 있을까. 개인의 모든 것을 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에서 개인의 기억까지 아니 마음까지 모두 구속하고 복종하게 만들 수 있을까.그렇다면 40년대에 84년을 예상하고,아니 미래를 그리며 썼다면 현재는 개인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받는다고 볼 수 있을까. 어디를 가든 누군가 남모르게 훔쳐보듯 개인의 사생활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기록되는 CCTV라는 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회주의가 아니어도 우린 어쩌면 '조지 오웰' 이 상상한 2000년대의 1984년을 살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 책의 겉표지에 있는 무시무시한 '눈' 그 밑에는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빅 브라더가 당신을 보고 있다니, 누군가 나를 통제하거나 24시간을 감시하고 있다면 온전한 '삶' 이 지속될 수 있을까. 텔레스크린,마이크로폰,사상경찰에 의해 심지어 잠꼬대와 성생활까지 지배를 받는다면 그 사회에서 살고 싶을까. '빅 브라더' 라는 가공의 인물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드다. 두툼한 굵기에 빼곡한 글씨, 한숨부터 나온다. 그래도 꾹 참고 읽어나간다. 무얼까 읽어나갈수록 무언가 나 또한 '윈스턴' 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외부당원으로 당이 지배하는 건물에서 텔레스크린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그 앞에서는 개인의 사상이란 있을 수 없다. 일기조차 맘대로 표현하고 남길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고물상에서 구입한 '노트' 에 일기를 쓰기로 한다. 하지만 '신어' 가 계속적으로 나오면서 '과거'는 사라져 자신이 기록하려는 현재가 아니 과거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지금 남기고 있는 과거가 미래에 어떻게 받아 들여질지 궁금하다. 첫 글을 쓰기부터 막막하다. 그렇게 개인적인것도 역사적인 것도 '빅 브라더' 의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도 표현되어질 수도 없다.가물가물한 자신의 과거, 그리고 현재 또한 위태위태하다.그런 가운데도 그는 몰래몰래 일기를 쓴다.당이 알면 반역행위이지만 그는 감행한다.
그리고 우연처럼 그에게 다가오는 한 여자 줄리아, 그녀를 통해 당이 지배하고 막았던,아니 성생활마져 당이 지배를 받아했지만 그녀와는 그런 성생화를 하고 싶지 않다. 자신들의 감정대로 느낌대로 몸을 허락하고 싶다. 그렇게 차츰차츰 윈스턴은 줄리아의 위험한 사랑을 나누지만 그 또한 오래갈 수 없음을 느낀다. 아니 언제까지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과 사상경찰을 피해다닐 수 있을까,그런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낡은 노트를 샀던 골물상의 이층방을 자신들의 아지트처럼 여기며 위험한 만남도 지속하고 성생활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접근해 온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당원을 통해 빅 브라더에 반대하는 '형제단' 에 가입하고 그가 전해주는 책을 그곳에서 읽게 된다. 하지만 텔레스크린이 없다고 여겼던, 맘을 놓고 자신들이 자유를 누렸던 골동품상은 그들을 옭가매는 곳이었던 것. 상점주인인 늙은 채링턴은 변장한 사상경찰이고 그들이 원하던 판화그림이 있던 자리는 텔레스크린이 가려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잡았던 내부당원인 오브라이언은 그를 이용했던 것.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진실이 존재하는 사회이긴 할까.
'과거는 단지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살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윈스턴 그의 과거는 분별력이 없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통 가려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윈스턴의 과거까지 날조된 것일까.언젠까지 신어를 창조하며 과거와 역사를 말살할 수 있을까? 신어 창조자였던 자신의 친구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과거에서 아니 현재에서 '증발' 하고 만다. 증발한 사람들은 진리부에 의해 '거짓으로 존재' 를 할수도 있는 사회가 빅 브라더의 세계이다. 아이가 부모의 잠꼬대를 듣고 부모를 고발할 수 있고 아이들이 상인의 잘못을 트집잡아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으며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가졌는지 아니 어떻게 자랐는지 어떻게 존재했는지 '말' 뿐만이 아니라 '물건' 까지 없어져 모든 것을 날조할 수 있다.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인물인 '빅 브라더' 에 의해 무력한 존재가 되어 사회주의에 복종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빅 브라더의 세상에 살고 있는 윈스턴,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고 반기를 들고 싶었지만 개인이 거대한 당을 향해 돌진한다고 그 바위가 깨지지 않는다. 하나의 계란이 깨질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감시하며 '진실' 이 사라지고 거짓이 충만한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것이 꼭 <1984> 년에만 국한된 사회일까. 우린 지금 2011년을 살고 있지만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지를 모를 것에 지배를 받으며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존재에 복종을 하면서 말이다.
'당에 의해 정립된 이상은 실로 거대하고,가공할 만하고,화려했다. 당이 내세우는 이상의 세계는 철근과 콘크리트,괴물처럼 큰 기계들, 무시무시한 무기들의 세계였다. 이곳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동일한 슬로건을 외치며,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싸우고,승리하고, 서로를 억압하는 3억 명의 같은 모습을 한 전사들과 광신자들의 나라이다.' 쉬지 않고 일하지만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누구를 위해 생산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듯 '면도기' 조차 제대로 쓸 수 없어 찾아 다녀야 한다. 개인의 사상은 철저히 배제된 당을 위한 '하나' 의 생각을 가져야 하지만 윈스턴은 '이중사상' 을 지닌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작가는 위중한 상태에서 그가 본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하여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욱 철저한 소설을 남겼는지 모른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한 '1984' 속 윈스턴의 삶에 작가의 삶이 반영된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해 본다. 비로소 죽음으로 인해 모든것이 끝나는,아니 그 순간 자신이 오브라이언의 고문끝에 이더하기 이는 오를 인정하는 무력한 인간이 되었음을 인정하듯 죽음을 달게 받아 들이는 윈스턴,죽음이야 말로 모든것의 끝임을 소설은 모든 것을 비극으로 마무리를 한다. 사회주의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보기엔 좀더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윈스턴의 삶이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그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잖은 위험 행동은 이제 현명치 못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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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유작인 이 작품은 1948년에 탈고하면서 48의 두자를 꺼꾸로 해서 1984로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조지오웰은 필명이고 본명은 에릭 블레어이다. 이전에 "생각의 함정"에서 버마의 현지 경찰로 "노출불안 (강하게 보이지 않으면 상대가 얕잡아 보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으로 불필요하게 코끼리에게 총을 난사했던 인물로 나오기도 했는데, 그의 인생도 평범하지는 않은 듯 하다. 모든 인간이 시대상에 영향을 받을텐데,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는 더더욱 그러리라 예상된다. 제국 주의, 공산당, 나치가 활동하던 시대를 산 오웰이기에 그에 작품은 전체주의 및 그 안에서의 인간 소외를 밀접하게 다루는 듯 하다. "동물농장"은 상당한 위트가 있는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이에 비해 "1984"는 긴장, 분출할 길 없는 분노, 그리고 체념을 느끼게 한다. 오웰은 이 책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싶었을까? 그 시대를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강 건너 불일 수 밖에 없겠지만, 스토리에서 현실과 자각간의 내적 갈등, 끊임없는 감시에 따른 긴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책에는 세 계층이 나오는데 내부당원, 외부당원, 프롤이 있고, 주인공인 윈스턴은 중간 계급인 외부당원이다. 프롤은 건강한 육체는 있으나 뇌가 거의 비어있는 계급으로 묘사되고, 내부당원은 권력의 유지 자체가 목적인 상위 권력 집단으로 나온다. 당은 체제를 유지함에 있어, 하위 계급인 프롤에게는 차라리 자유를 허용하나 외부당원에 대해서는 생각마저 통제하려 든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인 윈스턴은 뭔가의 모순을 느끼는데 이것이 모순인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인지를 헤갈려 한다. 그러니 무기력하고 작은 일탈을 행하면서도 발각될까하는 불안감에 쌓여있다. 자신은 체제에 반동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사상경찰이나 주위 사람에 의해 발각될 것이라는 초조함은 신경쇠약마저 느끼게 한다. "2분 증오"처럼 집단적인 광기에 합류하지 못하면서 소외되는 느낌, 그러나 주변 시선때문에 동참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집단 광기에 휩쌓이는 모습은 우리의 연약한 인간상이다. 내부당원으로 기득권 세력인 오브라이언과의 접촉은 신비감과 함께 뭔가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준다. 또한 오브라이언은 인간적인 매력은 윈스턴으로 하여금 그를 자신의 유일한 대화상대로서 생각하게 한다. 이 무기력한 생활에 갑작스런 활력소가 생기니 생각지도 않은 이성, 줄리아의 등장이다. 체제의 광신도요 적극적인 고발자일 것으로 생각했던 여인이 알고 보니 가장 반체제적였다. 그러나 그녀의 반체제성은 당의 성적인 억압에 대한 반항이지 사상적인 측면은 아니다. 이 두 사람간의 끝이 보이는 아슬 아슬한 애정 행각. 소설은 어떻게 이 긴장이 폭발될 것인 하는 순간에, 약간은 엉뚱하게 끝이 나는 듯도 하다. 비밀 조직원이라고 생각했던 오브라이언이 알고 보니 결국은 자신을 감시했던 것이고 애정의 행각처로 사용했던 프롤의 고물상 집도 결국은 함정이었고 그는 사상경찰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플롯상으로는 좀 맥빠진다. 뭔가 다른 반전을 원했는데 이야기적인 재미는 여기에서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 이후에는 고문과 굴욕의 인간 개조 작업이 진행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글이지만 인간이란 연역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인간성을 철저히 밟아버리는 과정에서 반항이란 생각조차할 수 없다. 뻔히 죽임을 당할 줄 알면서도 10분후에 어찌될지 모르니 스스로 자살하지 못하는 연약함. 그것이 정녕 인간인가하는 생각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냥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용납할 수 없기에 언제고 죽이긴 하겠지만 당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고나서 죽이겠다는 오브라이언, 그리고 손가락으로 2+2가 왜 5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왜 전체주의가 무서울지, 인간의 인격 말살이 왜 무서울지에 전율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 통제는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통제이고, 한편 통제가 없는 순수 자율에서는 무질서가 있을 뿐이니. 다수의 인간이 모이게 되면 정치가 필요한데 민주주의가 최상의 모습은 맞는 걸까?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로는 그렇게 보이는 듯 하다만 미래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7/9/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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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본다는 것을 안다 -조지 오웰, <1984>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근대 이후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I see는 ‘알겠다’라는 표현이듯이.)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태양을 관측했을 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루이 16세가 기요틴에 목이 잘리자 시민들은 비로소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안다는 것’은 다시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독교에서 구약의 하나님이 그토록 무서운 이유는 ‘전지’하고 ‘전능’하기 때문이다. 전능하기만 하면 신을 피해 도망다니면 될텐데 전지하기까지하니 지구상에 도망칠 구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지한 신의 이름은 과거 여러 형벌에서 자백을 받아내는 중요한 도구로 쓰인다. 이를테면 “신은 네 죄를 다 알고 있다!”라는 식의 협박은 ‘안다는 것’과 권력의 상관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협박은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바로 (그가) ‘본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은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전지전능의 권력은 작동되는 셈이다. 이것을 하나의 구조로 보여준 것이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단어다. 벤담이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이다. 파놉티콘의 작동 역시 수감자들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통제한다. 수감자는 파놉티콘의 감시자가 언제 자신을 감시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긴장상태에 놓인다.
조지오웰의 <1984>의 사회 역시 거대한 파놉티콘에 갇혀있다. 작품 속에서 파놉티콘의 작동은 거리와 집 그리고 도시 곳곳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을 통해서다. 텔레스크린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텔레스크린을 피해 ‘프롤’들의 거리로 도망친다. 만약 텔레스크린이 형벌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들은 감춰져야한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따위의 문구는 오히려 불필요하다. 작품 속 공간에서 텔레스크린을 통해 획득하는 건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로써 개인들은 자기 내면에 파놉티콘을 하나씩 세우고 빅브라더의 지배는 관철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텔레스크린은 CCTV다. 이것 또한 형벌의 목적 보다 감시와 예방의 차원에서 설치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CCTV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설치되어있음’이라는 알림판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 역시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 운저자의 사고를 예방한다. 바로 어제, sns를 통한 선거운동 규제는 헌법을 위반했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정부의 sns 규제 역시 내면의 파놉티콘을 세워 자기검열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텔레스크린’이다. 이런 규제와 감시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나는 꼼수다>에서는 끊임없이 ‘쫄지마!’를 외쳐되고 있는 것이다.¹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뉴캐슬 대학에서 재밌는 실험을 했다. 대학휴게실에 텔레스크린처럼 감시의 눈을 붙여놓고 자유롭게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과는 역시 감시하는 눈이 붙어 있을 때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냈다. 단지 종이로 붙여놓은 눈에 실험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흥미롭다.
[눈사진과 꽃그림을 번갈아가면서 붙였다. 눈사진을 붙인 주가 최대 3배 더 많은 돈을 거뒀다. (출처 : kbs 특별기획 ‘사회적 자본’)]
<1984>의 세상은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오웰이 예견한 1984년 이후 지금까지 적용되는 건, 아직 우리가 ‘본다는 것’의 권력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동을 깨기 위해한 하나의 방법은 모두가 ‘본다는 것’을 알고, 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그들’(빅브라더)에게 다시 ‘보여준다’면 가능할지도.
1) 이와 관련하여 ‘조중동’류의 기사를 보면 흥미롭다. 조선일보 12/30 [전문가들 "SNS 표현자유 보장 좋지만… 흑색선전 막을 장치 필요"] 매일경제 12/30 [헌법재판소, SNS 선거운동 허용 결정…"과열선거 우려"] 조선일보는 ‘전문가’의 이름을 들어 표현의 자유보다 흑색선전을 우려하는데, 진짜 흑색선전의 원조는 누구인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매일경제 역시 그러한데, 과열선거는 sns가 없었어도 언제나 있어왔다. 선거는 늘 과열되어야 한다. 과열되서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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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 맘에들어 구매했다는 리뷰가 몇개 보여 작성합니다. 개인 취향 차이 이긴 하지만 저같은 경우 개인적인 아쉬움이 많이 남는 번역이라고 느껴져서 글을 씁니다. 물론 훌륭한 번역 입니다. 내용도 이해하기 좋고 흥미진진한 소설의 특성을 잘 살렸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만일 이 책을 구매 하실 분들이라면 번거로우 시더라도 다른 출판사 책들을 미리보기 기능을 이용하여 비교후 구매 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출판 사와 비교하였을때 아쉬움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전반적인 책의 내용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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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물농장’과 ‘1984’가 주는 메시지 때문에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조지 오웰’은 사실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평생토록 간직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을 집필하였을까? 아마도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에서 머물며 권력욕으로 부패해가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나라들의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그린 부패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 하의 디스토피아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모순에 눈 떠가는 주인공 ‘윈스턴’이 손에 쥐게 되는 “과두제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체”라는 책에 투영되어 있다. 소설에 명시된 “과두제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체”의 내용 전문을 적어 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고 싶긴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간략히 요약을 해두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세상에는 ‘상’, ‘중’, ‘하’라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고, 엄청난 격변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대변화가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층구조는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그 자리를 어떻게든 남에게 뺏기지 않는 것이고, 이에 반해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자리를 뺏는 것이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사람들 간의 모든 차이를 없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개혁과 혁명을 통해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높은 위치의 사람들은 권력을
잃게 되기도 하지만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역사를 통틀어 자신들의 목표를 단 한순간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목표가 달성되면 다시금 폭정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며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어길
수 없는 삶의 법칙으로 간주하게 하고, 무덤 이후의 상상의 세계에서 보상 받게 될 것이라고 대중을 달랜다.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국민들 아니면 최소한 눈여겨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모든 국민들은
경찰에 의해 24시간 동안 감시를 받게 되고, 아울러 다른
모든 대화 채널이 차단된 상황에서 정부는 자유자재로 국민들을 공식 선전에 노출시키고, 국민들이 정부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고 모든 사안에 있어 획일적인 의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권력의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빅 브라더가 있고, 중간
위치에는 내부당과 외부당이 존재하며, 그 아래 우매한 대중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통상 ‘프롤’로 불리운다. 개혁과 혁명을 통해 높은 위치의 사람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간 위치의 사람들인
내부당원과 외부당원들은 어떤 예고도 없이 또한 본인도 모르게 사상경찰의 감시의 대상이 된다. 감시의
대상들은 앞으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면 숙청, 체포,
고문, 감금, 증발의 대상이 된다. 당원들은 어려서부터 유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논리적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영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어떤 간단한 설명도 이해를 거부하고, 이단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일련의 생각들에 대해 지루함 내지는 혐오감을 느껴 위험한 발상을 하려는 순간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본능에 가까운 능력을 갖도록 세뇌 당한다. 또한, 이중사고를 통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신념을 머릿속에 동시에 간직하고 그것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도록 강요 받는다. 당의 의도적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게 하고, 석연치 않은 사항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그러다가도 다시 필요하다면 그 사항들을 망각에서 끄집어내도록 강요하여 과거의 변조가 가능하게 만들고 과거의
변조를 통해 당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당원들에게 심어 당이 영원토록 집권하게 만드는 기반을 구축한다. 전쟁은 소비될 수 없는 물건의 생산에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다. 기계의 등장으로 총체적인 부가 증가하여 권력 유지의 핵심인 불평등의 양상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대중이 필요한
필수품들의 생산은 줄이고 전쟁에 소비되는 전시물자들의 생산을 늘림으로써 필수품들의 만성적인 부족 현상을 지속시켜 특권층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보잘것없는
특혜도 중요하게 여기게 하여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리고, 대중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무지의 상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아울러
위험을 항상 수반하고 있는 전쟁 중이라는 강박관념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권력을 소수 지배 계층에게 이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여기게 만든다.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에 획일적인 의견을 갖도록 조종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지식인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며, 때가 되면 북풍을
이유 삼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정부는 1984에서 묘사된 빅 브라더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BOOK : 2017-001-0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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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된 원인이야 어쨌든 좋다, 그것보다는 빅 브라더가 행하는 일련의 권력유지 방편들이 ㅡ 우라사와 나오키 作『20세기 소년(20世紀少年)』의 우민당(友民黨)과 매한가지가 아닐까 ㅡ 더 중요한 명제로서 작용하니까. 그 중『1984』가 엄청난 정치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분명 ‘언어통제’일 것이다. 언어가 통제됨으로써 의식의 전환 또한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방통행이며 강압적이다. 오웰의 작품이 쥐고 있는 또 하나의 헤게모니는 이 보편성에 기인한다. 자먀찐의『우리들(We)』ㅡ 오웰의 ‘빅 브라더’가 있다면 자먀찐에게는 ‘은혜로운 분’이 있다 ㅡ 이나 헉슬리의『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그리고 오웰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말소하는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자먀찐의 작품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특정 권력 구조라기보다는 인간이 인간을 압살하는 전반적인 제도 그 자체로 봐야 한다. 그에 비해『1984』는 꽤 구체적이다.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통제의 공포 자체를 공포화한다. 그리고 자먀찐의 소설에서의 D-503은 오웰의 작품으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사람의 이름(윈스턴)’을 갖게 된다……. 우리는 언제든지 또 하나의 윈스턴이 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 윈스턴으로 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위(David Bowie)가 1974년 발매한《Diamond Dogs》는 오웰의『1984』를 모티브로 만든 앨범인데, 수록곡「1984」의 ‘they'll break your pretty cranium and fill it full of air’란 가사가 내일 당장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웰의 소설이 이성과 본능을 허물어버리는 점이란 측면에서 이것은 상당한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자유의 범위는 신축력이 없고 압제의 강도는 역치를 웃돈다. 개인은 영민하지만 집단은 우매하다고 했다. 내가 내 삶을 살 수 없으므로 그것 또한 타당한 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개인은 무력해지고 질식된다. 인간의 말살과 순응은 이러한 통찰력으로 인해 음울하게 시작해서 음울하게 끝나고 만다.
끝으로, 보위의「1984」는 이렇게 시작한다. ‘someday they won't let you, but now you must ag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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