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p.313)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작가 김원영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해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을 ‘실격당한 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장애인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냉철하게 짚어 나가며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기본적인 권리와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도덕성을 지닌 탁월한 인물임을 과시하는데 수단이 되고, 결핍을 지닌 채 태어난 것,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결핍된 부분으로 인해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간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그냥 장애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사고를 당하고 화를 입어 죽어가 자살을 하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장애를 가진 자가 그런 일을 겪은 것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한 개인의 역사를 지닌 사람이 아닌 앞뒤 전후가 잘려나가고 그냥 장애인이라는 것만 부각된다. 신체와 정신의 장애가 있지만 그들도 비장애인처럼 평범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장애인이 가진 특별한 시각과 사고를 하는 매력적인 존재이지만 이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비장애인들만큼 가질 수 없다. 또한 법률과 제도의 수정과 보완으로 예전보다 더 나은 장애인의 인권이 보장되었지만 그 법률과 제도가 오히려 그들의 한계를 정하고 구속하는 경우들을 보면 여전히 그들을 위한 사회적 변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p.71)
작가는 당연히 이 책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를 원했겠지만, 장애인에게도 장애를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당부와 바램도 담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강인함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장애를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특히나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주의 제도 아래 자연스럽게 생기는 계층 중 어느 곳에도 자리 잡을 수 없는 존재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하지만 장애를 가진 작가의 시선에서 전해지는 비장애인 위주로 만들어진 사회가 가진 모순에 맞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때로는 힘겹게 다가오기도 했고, 그들을 진정한 이웃으로 나의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할 수 없어 내가 그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접할 수도 없었겠지만 나의 관심이 그만큼 크지 않았음도 인정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그들이 좀 더 사회에 당당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여러 인간상 중의 하나로 평범한 인물로 인식되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장애아를 키운 부모의 이야기. 형제자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노동을 전담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와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그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과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p.204)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신념, 성향, 몸의 질량과 부피 비율과 신체의 곡선, 색깔과 향기, 목소리를 모두 종합할 것이다.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연예인 뺨칠 정도는 아닐 테지만. (P.285)
책을 읽는 내내 사실 이해가 쉽지 않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던 부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김영하의 북클럽에 선정되지 않았다면 읽다가 포기했을 것이다. 섣불리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장애인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독하며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들을 막연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관조적 자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들을 우리의 삶의 테두리 안에 두고 그들을 내 삶에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준비를 이 책을 통해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
이 책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과 문화 그리고 각종 제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태어날 때부터 '골형성부전증'으로 장애를 안고 살았으며, 성장한 이후에는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야만 했던 장애인이다. 그러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 로스쿨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 자신 장애를 겪은 적이 없으며, 가까운 이들도 역시 비장애인들이 대부분이기에 장애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봤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 의식이 보다 보편적인 의식으로 자리를 잡고 그것을 법과 제도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지만, 저자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현재의 상황이 '품격과 존엄'을 느끼며 살아가기에는 부족하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일컬어 '잘못된 삶'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기에는 이 사회의 제도와 문화가 여전히 갖춰지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장애인과 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투쟁'인가를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일상의 태도와 관념 그리고 제도와 법규법 등에서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가르고 있다고 규정한다.
여러 해 전에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설립된다고 발표되었을 때, 해당 지역의 일부 주민들이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집단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보도가 된 적이 있었다. 반대하는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학교와 같은 '혐오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아파트 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그들의 논리가 얼만큼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아파트 가격이라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장애인들이 교육받을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점에 대해 회의적으로 반응했던 기억이 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만 있었던 장애들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저자는 스스로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처지를 '실격당한 자'로 명명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비장애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제도들이 이제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포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가야 하는 것에 공감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너를 만나서 참 잘된 것 같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장애와 질병, 그리고 각종 소외의 이유들을 뚫고 나가 언젠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전망과 가능성"을 기대하는 저자의 희망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잘못된 삶
잘못된 만남(너무 올드한 예시인가?),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상식..‘잘못된’이라는 부사와 만나는 순간 따뜻함과 설렘을 지닌 만남도, 나의 루틴을 만들어주는 습관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준이 되는 상식도 모두 ‘잘못된’에 삼켜져 버린다. 아예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들이지 말아야 할 습관이었으면 오히려 관계를 흐트러버리는 ‘잘못된’ 것들.
잘못된 삶 wrongful life
그런데 ‘삶’이라는 명사 앞의 ‘잘못된’은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췌 모르겠다.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난 순간 말도 안되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어지는 글들은 나의 이면을 돌아보게 했다. 당신은 이 단어 앞에 얼마나 떳떳한가
특정한 집단을 위한 주택이나 시설이 건립될 때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는가, 반대하지 않는가는 그 집단이 ‘잘못된’ 삶으로 분류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준다. p.10
우리는 히틀러처럼 우생학을 내세워 누군가를 학살하지는 않지만 장애나 질병, 다른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가진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마도 망설일 것이다. 이 모든 일상의 태도, 관념, 지향, 제도와 법규범이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가른다. pp.12-13
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이 되기 쉽다. p.14
누구의 삶도, 어떠한 삶도 ‘잘못된 삶’으로 불려서는 안된다 말을 하지만 나의 행동은 과연 어떠했는지 자꾸만 묻는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저자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잘못된 출산 wrongful birth’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부모가 아이를 낳고 싶긴 했으나 장애아라면 낳지 않으려 했는데 의사가 판단을 잘못해 장애아를 낳은 경우를 ‘잘못된 출산 wrongful birth’ 소송, 의사의 판단이 틀려 부모가 출산한 장애아 스스로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를 ‘잘못된 삶 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부른다. p.97
현실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그 사람과 이별하려는 선택이 없지는 않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과 자신의 이별을 (혹은 처음부터 아예 만나지 않은 것으로 삶을 되돌리는 일을) 감수하고, 상대방에 대한 죄책감조차 감당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과 그 아이가 ‘잘못된 채로’ 태어나 역경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륻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래서 모두 진실일 수 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역경을 돌파하며 장애를 수용하고,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로 성장하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더라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무난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pp.293-294
잘못된 삶, 잘못된 출산,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막막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어느 삶이라도 ‘잘못된’이라는 부사가 붙어서는 안되다고 반론하려하자,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당신의 상황이라면, 당신 앞에 선택이 놓여진다면 과연 어떻게 하겠냐고. 그리고 비겁한 나는 더 이상 대답하기를 멈추고 책을 덮어버렸다.
당신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그런 당신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북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잘못된 삶’도 존엄하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변론’하려는 나는,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p.99
처음 이 책을 읽기 전, 장애를 가진 저자가 이 사회의 불합리와 맞서 당당한 변론을 이어가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며 나는 함께 분노하고,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내며 책장을 넘기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을수록 이런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것이었는지, 마치 우월적인 위치에서 저자에게 응원을 보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해온 장애인 정책은 개인이 가진 장애를 개선하여 그를 ‘비장애인 사회’에 통합하는 데에 방점을 두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도 대부분 그에 가까웠다. 장애인 본인들도 가능한 한 장애를 드러내지 않고,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최대한 유사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의사소통하고 감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장애나 질병은 가능한 한 치료하고, 교정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훈련할 대상이었다. p.119
나 역시 “괜찮아요, 힘내세요”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어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잖아요. 누구의 기준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나와 다르다고,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 더 이상의 관심은 무의미하다고 포기해야할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체성의 수용, 한 사람이 써내려 간, 켜켜이 쌓인 시간을 바라보는 행위에서 관계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볼품없는 어떤 특성, 나이 들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내 자녀의, 친구의, 연인의,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있다. p.145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p.149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중략)..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친숙한 얼굴이라도 구체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상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 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pp.274-275
그리고 잘못된 삶 만큼이나 이 책을 통해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 단어가 있다면 ‘존엄 dignity’이다. 저자는 ‘존엄’을 ‘품격’과 대비해 설명한다.
우리말 ‘품격’은 한 사람의 내면적 가치나 진정한 자기됨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지만, 사람이나 물건의 외형(형식)이 주변 환경과 형편에 부합할 때의 가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p.54
반면 우리가 지금까지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고 사용해온 용어인 ‘존엄 dignity’은 품격과 대비된다..(중략)..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에 대한 근대적인 관념은 철학자 칸트를 경유하며 인간의 근본적 가치로 점차 자리 잡는다. 칸트는 인간(이성적 존재자)은 모두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라고 전제한 후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가치)또는 존엄성을 가지며, 가격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 반면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말한다. 칸트에게 존엄성이란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반드시 목적으로도 존재할 때 부여되는 내적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p.56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p.312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p.313
어렵게 읽은 책이었다. 쉽지 않은 주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을 자꾸만 들여보게 되는 저자의 질문을 만날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지는 책읽기였다. 불합리한 사회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니컬한 유머를 담아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저자의 글이 그 어떤 질책보다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부 관리해야 돼”라 말하는 다정한 친구(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마도 잊지 못한 그 친구)와 ‘예의바른 무관심’을 보여준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나며, 그 누구도 스스로 ‘실격당한’자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깊게 고민한 시간이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귀엽고, 뭉클하고, 놀랍도록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p.313
*나에게 적용하기 누군가에게 "피부관리 해야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이해, 존중(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극(퍼포먼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비극과 희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배역은 성실히 수행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마치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퍼포먼스)이 된다. p.36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성찰적) 시선을 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p.47
나는 추상적인 인권 규범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p.65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중략)..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p.67
누군가에게 연극적인 삶은 위선이겠지만 누군가는 연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p.83
유전자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p.116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p.129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 accept’ 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p.139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p.200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정체성의 인정)은 때로 충돌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고통이나 역경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잘못된 삶’을 아예 살지 않거나 가능하면 그런 삶과 거리를 둔 채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반면 온전하게 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된 삶’이라는 규정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는 더 ‘어려운’ 길(역경)일 수 있다. p.295
당신이 오로지 ‘개인적인’ 세계 안에서 외롭게 굴을 파 내려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조금은 각도를 틀기 위해 애써봐도 좋다. 완전히 수직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단 1도라도 방향을 틀어보라. 어느 순간 당신은 다른 동구로가 만날 텐데, 그곳에 예측하지 못했던 정체성의 서사가 존재할 것이다. p.301
우리가 가진 결함이나 결핍, ‘잘못되고’ ‘실격된’ 인간적 요소들이 정체성으로 선언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더 이상 동굴에 혼자 있지 않다는 믿음,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정체성 집단의 체험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준다. pp.301-302
나는 그동안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가 무한히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살았다. p.308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310
당신이 버스에서 만난 한 장애인에게 보인 작은 존중의 표현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아가 그가 자신의 장애를 수용하는 밑거름이 된다. p.312 |
|
직장에서 사회적 약자를 접할 기회가 가끔 있다. 장애인과 함께 업무를 보러온 이들이 가족이려니 생각했었는데 활동보조인이라는 걸 알았다. 장애인의 활동보조를 전격적으로 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양쪽 목발을 사용하는 분이 계신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현관 유리문을 잡아 드리고 있다. 장애인에게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다. 장애 등급 3급이면 활동지원인 보조의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내 가족에게 장애인이 없다고 얼마나 무관심했는가. 무관심을 넘어 무지에 가깝다.
책을 쓴 이는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변호사 김원영이다. 그 이름이 낯선데 김초엽 작가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를 쓴 작가다. 명쾌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에서 나라면 어떨까, 라는 깊은 고민을 갖게 한다.
만약 나에게 장애가 있는 태아가 있다면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자라는 걸 보고 싶을까. 아마 선택권이 있다면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에서 장애인 가족이 얼마나 힘든지 그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인 아이도, 아이를 돌봐야 할 부모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각종 비속어로 장애아를 놀리는 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 책의 주요 모티프는 ‘잘못된 삶 소송’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으로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와 부모가 어린아이를 대신하여 소를 제기하는 것이다. ‘잘못된 삶’들은 법 앞에서 실격당한 삶이 된다.
다양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 태아 상태일 때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아이를 낳았을까, 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한다.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장애가 손해라는 것과 장애를 수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일 거 같다. 내가 장애인이었어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다고 해도 번민했을 테니 말이다.
노련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나를 관찰했던 시간은 피곤함 그 자체였다. 내 몸은 우아함의 발가락 끝에라도 닿아 있는가? 내 몸에서는 빈곤의 흔적이 나타나는가? 내 다리는 길어 보이는가? 나는 우중충하고 우울한 장애인 같은가? 단 한순간도 성찰의 시각을 거두기 어려웠다. (77페이지)
지금은 공중 편의시설에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필수적으로 설치된다. 우리 사무실도 장애인 특화 건물로 화장실이며 사무실이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공간이 되어 있다. 공중 편의시설이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아가 장애인 이동권 및 권리 보장을 위해 싸웠던 결과물이다. 자유권 침해와 이동권 투쟁을 했던 역사가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다.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위해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활동이 법적 의무화가 되어 실질적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 부여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삼’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존엄의 순간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313페이지)
김영하북클럽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고 그런 까닭에 책이 더디 읽혔다.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장애인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가 월등하게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조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의 권리에 대하여 서로 존중하고 상호 작용으로 서로 순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실격당한자들을위한변론 #김원영 #사계절 #사계절출판사 #책 #책추천 #책리뷰 #도서리뷰 #북리뷰 #김영하북클럽 #김영하북클럽_1월의책 #김영하북클럽_실격당한자들을위한변론 #도서 #리뷰 #서평 #사회적약자 #장애 |
|
김원영이라는 이름은 그가 쓴 책인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SNS에 이 책에 대한 좋은 얘기가 많이 올라와서 책의 제목이 뇌리에 들어왔다. 읽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금 이 책이 변호사 김원영을 만나는 처음이 된다. 책의 제목에서 의미하는 실격당한 자들이란 장애나 질병, 볼품없는 외모, 부족한 재능, 다른 성적 지향을 이유로 세상의 법정에서 실격을 선고당한 이들(책 뒤표지)이다. 책에서는 장애인을 통해 세상이 그들에게 선고한 실격의 실체와 왜 그런 실격 선고가 부당한지 정리해나간다. 책은 잘못된 삶이란 화두로 시작한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부모와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자신의 출생을 막지 않았다고 소송하는 얘기가 나온다. 글쓴이는 그렇다면 장애인은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체 글의 방향은 잘못된 삶이라는 관념과 그에 대한 사회와 사회구성원의 태도에 맞서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책의 내용을 쉽게 정리할 수 없어서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자 한다. (읽고 느낄뿐 이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많은 내용 중 이 한 부분은 남기려고 한다. 장애인에게는 배려가 필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존엄을 인정받고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정당하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나도 사회도 이런 바를 적당히 외면하고 산다. 존엄한 개인으로서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의 소수자를 받아들이는 훈련이 요구된다.
책은 읽기 쉽지 않았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랬다. 하나는 책에 나오는 장애인들의 실생활 모습과 그들의 생각이 내 어리고 여리며 한심한 고정관념―막연한 측은지심의 발휘 수준에 불과한 동정 같은―을 파고들어서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고思考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글자로는 읽히는데 정확히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 때문이었는데 대부분은 각 글의 말미로 가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정치적 올바름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로부터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좋겠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차별 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보여주는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실제로 받아들이고―책을 읽으면 이 받아들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같이 산다는 말과 행위의 실체에 가까이 가야 한다. 책은 그렇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가기를 결심할 수 있는가 |
|
구매버튼을 클릭하게 만든 결정적 단어가 있다. 잘못된 소송. 영어로는Wrongful Life이란다. 라이프 앞에 롱풀 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게 꽤 어색하다. 잘못된 삶 소송이란 내가 태어난게 잘못된거니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소송당사자는 태어난지 채 100일이 안되는 아기들이 된다. 물론 부모가 소송을 대리한다. 잘못된 소송을 상상해보면 이렇다. "엄마,내가 태어난 건 잘못이예요. 소송해주세요" "그래, 엄마가 소송대리해줄께." 혹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잘못된 소송'의 이야기는 프롤로그에 위치해있다.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에게 감히 얘기할수 있다. '잘못된 소송 얘기 때문에 사신거죠?' '잘못된 소송'이 임팩트에 대해 칭찬했지만,사실 이책은 난이도가 좀 있다. 이는 저자의 직업과도 연관된다. 그는 변호사다. (장애인인 사실은 제쳐둔다.) 글에서 소장 냄새가 난다. 단어들이 소장이나 판결문에 나오는 법률용어같다. 딱딱하다. 읽고 소화시키려면 꽤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한. 일반 에세이는 한편 한편 사이에 쉴틈 이라도 있으나, 이 책은 아니다. 보통 에세이들의 한편 한편을 동산으로 친다면, 독자는 마음에 드는 동산만 올라갔다와도 된다. 근데 이책은 '변론'이란 산 정상이 있고, 증거, 사례, 논리란 능선이 빡세게 들어서 있다.산 정상에 오르려면 이 또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그러나 초반을 넘어서면 능선을 하나 통과할 때마다 다음이 기대된다. 무슨 변태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그렇다. 1984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에는 한 장애인의 유서가 실렸다.
불과 몇십년전에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길거리를 가다가 바지에 오줌을 지려야 했다. 불굴의 의지가 정신을 극복하게 해줄진 모를지언정 오줌을 싸게 해주진 않는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오줌을 편하게 쌀수 있는 환경이다. 책에서는 이를 오줌권이라 소개한다. 오줌을 싼다는 건 숨쉬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냥 화장실가서 해결해버리면 된다. 숨은 쉬면 되는거고 오줌은 싸면 되는건데 이걸 권리로 격상시킬 여지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의 차이가 벌어진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들에게는 요구해야 되는 것이다. 오줌권이란 단어 자체가 나는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비장애인들에게 전혀 권리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그 지점에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니 발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카프카의 '책은 도끼여야 한다네.' 편지 속 구절이 생각이 난다. 오줌권이라는 단어, 그리고 이 책은 기꺼이 독자들의 도끼가 된다. 추천드린다 |
|
동정과 연민을 섬세하게 구분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은 간단한 리뷰를 시작할까 한다. '동정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연민은 마음으로 표출된다. 동정보다는 연민 때문에 우리는 더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묶인다. 마음이 묶여버려서 연민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오늘은 입동, 김원영 변호사의 저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었다. 겨울로 향하는 오싹한 한기 때문이 아니라 미처 몰랐던 우리 사회의 냉정함 때문에 나는 꽁꽁 마음이 묶였다. 결핍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묶이는 그런 경험은 스치듯 찰나적이거나, 언제 적 일이었는지도 모르게 아득할 뿐이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의 소개는 이러했다.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으며,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에서만 생활했다.' 나는 이 문장이 주는 무게를 실감했다. 아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언제나 직접 겪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한 뼘쯤 더 확장될 뿐이다. 그게 한계라면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연대는 강고해진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저자는 일상에서 겪는 장애인의 경험으로부터 길고 긴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나 내 가족의 이야기라면 한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힐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활자로 변하여 지면을 채워가는 모습은 뭐랄까, 부족함 없는 내가 우연히 마주한 장애인을 향해 값싼 동정의 손길을 내미는, 지극히 잘 연출된 몸짓인 양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1장 '노련한 장애인'과 2장 '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를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읽었다. 현실과 감정 사이의 불균형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저자 자신이 겪었던 대학 시절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3장.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에서는 일본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단체였던 '푸른잔디회를 소개한다. 그리고 장강명의 소설 <표백>에 등장하는 정세연을 주목한다. '목숨을 끊을 수는 있지만, 장애인이 되는 삶은 단행할 수 없었던' 소설 속 정세연과 병약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신체를 단련하여 건강하고 매력적인 몸을 갖게 된 후 자살로 생을 마친 미시마 유키오를 거론한다. 타인을 대면하지 않는 개별적 독서이지만 나는 저자의 감정이 수시로 격화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완벽할 정도로 발달한 성찰적 자아를 통해 자기 신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배를 가르는 고도의 성찰 능력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타인 지향적 연극을 극복하는 힘. 때로 무력하고 별 볼 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p.91)
저자의 이야기는 이제 장애인의 정체성과 장애인 자신과 부모의 '수용', 그리고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로 확대된다. 4장. '잘못된 삶', 5장 '기꺼운 책임', 6장 '법 앞에서'를 통해 저자는 장애인 누구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삶의 저자가 될 가능성을 엿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장애인의 법적 권리와 비장애인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7장 '권리를 발명하다',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9장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를 통해 저자의 견해가 피력된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는 저자의 강한 맺음말처럼 이 책은 장애인 전체의 바람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인 것인지도 모른다.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p.313)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흔한 문구로 이 사회가 변하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저자 역시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동정이 아닌 연민의 마음으로 이 사회의 변혁을 촉구할 때, 그리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마음으로 묶일 때 이 사회는 비로소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입동, 미세먼지 가득한 탁한 공기를 뚫고 뒷맛 씁쓸한 가을비가 내렸다. |
|
책을 읽고 전장연 시위를 보는 여러 시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헌법에는 '장애자'라고 그 대상이 특정되어 있는 조항이 딱 한 군데가 있는데, 헌법 제34조 5항이다.
⑤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신체장애자가 법률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이유는 아마 같은 34조 1항에 명시된 권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①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10조에도 모든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국가의 보장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간이 존엄과 가치를 갖기 위해서 1차적으로는 생계의 보호가 필요하다. 여러 사정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국가의 의무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충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생계와 안전이 보장되면 더 높은 차원의 욕구를 가지게 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싶어진다. 이는 행복추구권과 맞닿아 있으며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헌법 전문의 정신이 장애인이나 소수자, 약자들에게까지 구체적으로 실행되어야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보장된다고 할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그래서 절실하다. 누가 당신을 문안에 가두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손발을 꽁꽁 묶어 둔다면, 이는 개인의 신체의 자유를 구속한 것이며, 그 자체로 범죄이다. 장애인에게 저상버스, 엘리베이터, 낮은 턱, 경사로가 구비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누군가가 집 안에 가두고 손발을 꽁꽁 묶어둔 것과 같다. 그들을 그렇게 속박한 게 누구인가? 나는 장애인의 충분한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신체를 구속당한 채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몸으로 가로막고 제발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을 우리는 나무랄 수 있는가? 버스 안 승객의 긴급함을 무시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장애인들의 시위가 불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가 반헌법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시민으로서 누구에게나 보장된 헌법적 권리가 미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그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지는 말자.
만약, 장애를 가진 아이란 걸 알았다면... 장애인의 차별에 반대한다. 그들이 배려 받기를 바라고, 헌법적 기본권이 충분히 보장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고통이 덜어졌으면 좋겠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생각들은 장애인을 나와는 다른 존재이며, 동정과 배려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름의 가치가 있고, 존엄성이 부여된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신념으로 믿고 있는가? 그럼 이것은 어떨까?
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다운증후군인 것을 알게 되었다. 또는 뇌성 마비거나 가볍게는 청각장애나 시각장애, 무겁게는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결정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 당장 그런 상황에 빠진다면, 나는 분명히 아이를 낳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이란 걸 알았다면 말이다. 태어난 후에야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다면 나는 아이를 위해서 헌신할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든 세상과의 싸움에서 존엄 받는 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기 전에 혹은 임시 초에 아이의 장애를 판별할 수 있는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해서 어떤 장애, 우열, 장단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면....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런 나의 생각과 관점이 장애인을 보는 시각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
|
전에 책을 구매했었는데, 다른 사람 빌려주고 못받아서 다시 주문했어요. 1급 지체장애인인 변호사 김원영이 생각하고 쓴 책이죠.
변호사 답게 글을 정말 잘 쓰셨고, 사회를 이해하는 태도도 좋았어요. 너무 곧은 것도 아니고 너무 세속적이거나 타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차별과 배제, 수치와 모욕을 노련하게 풀어내고 경험하신 것 같아요.
책의 설명대로 '노련하게 맞받아치고, 우아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아마도 실제 장애인으로 살아오시면서 익힌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한줄한줄 읽어 내려가보려고 합니다~! |
|
세상은 불공정하다. 자원은 한정돼 있고 기회는 평등하지 않다. 수저계급론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여유는 자녀의 삶에 등급을 매겨 삶 전체를 좌우하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이런 불균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적으로 공론화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들은 부의 재분배와 정의실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개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지닌 결핍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 걸까? 한 평생 '잘못 된' 혹은 '실격당한' 삶이라는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해 김원영 작가가 온 몸을 다해 쓴 변론서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그러나 비장애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장애인들이 장애를 삶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것을 말한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가 추진해온 장애인 정책은 개인이 가진 장애를 개선하여 그를 비장애인 사회에 통합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다. 장애나 질병은 가능한 한 치료하고, 교정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훈련할 대상이었다. 그 결과 장애인들은 어설픈 정상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와 욕망과 선호, 개별적 인격성 등은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들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잘못된 삶' 소송을 통해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손해일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의사의 판단이 틀려 부모가 출산한 장애아 스스로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를 '잘못된 삶' 소송이라고 부른다. 당신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그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음을 역설하며 장애를 잘못된 삶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수용의 태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 나는 걸을 수 없고, 키가 작으며, 휠체어를 탔고, 뼈가 자주 부러진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자신을 비정상이나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고유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실천적 태도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고 이 세상에 잘못된 삶은 없다고 변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후반부에는 법과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동안 사회의 제도, 문화, 물리적 구조나 토대가 장애인에 대한 고려 없이 설계되고 실천되다가 그 상태로 고착되는 바람에 장애인들의 이런 존엄과 저자성이 침해당하고 있다. 장애인의 인권 문제는 더 이상 사회복지서비스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문제이며 잘못된 삶이라 불리는 이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작가는 모든 것을 다 변론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더 많은 고통과 절제, 누구보다 더 내적 평온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고난의 과정일 수도 있다. 아름다움이 곧 자원인 이 세상 속에서 장애인들은 더 많은 노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출 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다만 적어도 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서 자기 서사를 충분히 말할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만드는 것만큼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할 부분이다.
한 평생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내가 이 책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섣불리 감상을 적기 어려웠다. 내 편견과 무지를 깨부숴 주는 점에 감사하면서도 그만큼 그 세상에 미처 눈 돌리지 않고 살았던 내 자신을 마주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어제가 제 39회 장애인의 날이었다. 부끄럽지만 뉴스를 통해서 알기 전까지 장애인의 날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었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날에, 이들의 목소리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TV채널 돌리듯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이들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또 364일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자유와 평등이 이들에게는 싸워서 얻어야할 투쟁의 대상인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그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창조해갈 그 삶의 이야기에 우리는 공동저자로서 함께 할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