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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물을 향한 조선 지식인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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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말론하고 지식인들은 새로운 학문과 신문물에 대한 열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학문이나 기술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뉴스까지 차단되던 시대, 새로운 지식은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몇 백년전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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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말론하고 지식인들은 새로운 학문과 신문물에 대한 열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학문이나 기술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뉴스까지 차단되던 시대, 새로운 지식은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몇 백년전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사대부라는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된 이 책 [조선 지식인, 중국을 거닐다]는 명청교체기 중국을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인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새로운 학문이나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중국이나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외교적 사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대외관계는 중국에 대한 정기적인 조공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사대관계와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국가들과의 교린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중 중국에 대한 사행은 세계 각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다양한 서책이나 서화를 유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연히 많은 지식인들이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중국사행은 명나라에 대한 사행이었던 조천사(朝天使)와 청나라에 대한 사행인 연행사(燕行使)로 구분할 수 있다. 조천사는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명의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연행사는 명청교체기 청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없이 사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북경의 명칭인 연경을 따서 연행이라 지칭했다. 조선시대 중국사행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정행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파견하는 별행을 합쳐 매년 평균 6-7차례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행원의 구성은 정사, 부사, 서장관, 종사관 등 약 30명 내외의 규모였고, 개인의 수행원을 포함한 전체인원은 대략 70명에서 250명 내외였다고 한다. 이들의 사행로는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이었던 조선전기에는 해로를 이용하였지만, 명이 북경으로 천도한 1421년 이후로는 대부분 육로를 이용했다. 의주에서 출발하여 북경까지 총 2000리길을 가는데 30일가량 소요되었으며, 조선의 관서지방을 통과하는 노정까지 합하면 40여일이 걸렸다. 그리고 북경관소에서 체류하는 40-60여일을 합하면 한번 사행을 다녀오는 기간은 5개월가량 소요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문인들이 중국사행을 통해 어떤 지식과 문물을 들여왔고 또 관심을 보였는지는 이들 사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 특히 연행사에는 삼사의 자제 중에서 선발한 자제군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사나 부사와는 달리 북경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의 연행록이 이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암연기]를 쓴 이기지, [담헌연기]의 홍대용, [열하일기]의 박지원 등이 모두 군관으로 참여했던 문인들이다.

 

   연행에 나선 사람들은 연행도중에 만나는 상점, 민가, 도교사원, 사찰 등에서 명과, , 청조의 서화들을 접했다. 이들 중에는 간혹 중국 역대의 수준 높은 서화들이 있기도 했지만, 대개는 조악하게 모사된 위작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절단은 중국의 서적과 서화들을 구입하여 조선에 들여오는 임무를 띠기도 했다. 그러나 숙소 밖 통행이 자유롭지 못해 그들이 머무는 관소에서 인맥을 이용하여 서화를 구입해야 했다. 서반은 이런 조선사절단을 상대로 서적, 서화 등을 전문적으로 중개하는 하급관리였다. 이들은 수시로 사절단이 머무는 조선관소에 서화와 서적을 가져와 보여주었다고 한다. 사절단은 이들 중에서 필요한 서책을 구입했고, 간혹 가격이 비싸 살 수 없을 경우에는 베껴 쓰거나, 동행한 화원이 그린 다음 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청의 정국이 안정되는 18세기부터 문금이 완화되자 서책을 구입하려는 조선사절단은 유리창이나 융복사내에 서는 시장과 같이 서화가 직접 매매되는 현장을 찾아가서 구입하기도 했다. 또한 청인과의 만남에 그다지 큰 제약을 받지 않게 되자 청의 문인들과 교유를 맺기 시작했다. 특히 운신이 자유로운 군관들은 깊은 교유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홍대용, 강세황, 박제가, 김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17세기말 이후 연경에 간 조선사신은 천주당을 구경했다. 그곳에서 접한 서양화는 당시 연행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고, 이들이 들여온 서양서적은 조선후기 서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기지, 홍대용, 이덕무, 강세황, 박지원 등은 그들의 연행록에 이들 천주당의 건축양식이나 벽화에 대한 설명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조선사절단과 서양선교사의 교류도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사절단의 목적은 서양의 역법과 산술 등 자연과학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선교사들은 포교에 목적이 있었다. 이런 만남은 1801년 신유사옥 이후 조선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이 금지될 때가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지식인들의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을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는 조선후기를 문예부흥의 시대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영정조 시대가 지나면서 이들의 노력은 서학에 대한 탄압과 함께 스러졌다. 그것은 어쩌면 시대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선후기 이들의 연행록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신문물을 향한 조선 지식인들의 꿈을 엿보고, 그들이 품었던 개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의 거울로 삼기에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역사는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k*****1 2017.08.15.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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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안의 조선, 아직 소통이 끊이지 않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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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 지배계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 아비처럼 섬기던 국가의 멸망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바였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요, 무엇보다도 명을 멸망시킨 세력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힘의 세기를 놓고 본다면 당연 새로운 지배세력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러나 한낱 오랑캐에게 그리 굴 순 없었다. 그리하여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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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 지배계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 아비처럼 섬기던 국가의 멸망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바였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요, 무엇보다도 명을 멸망시킨 세력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힘의 세기를 놓고 본다면 당연 새로운 지배세력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러나 한낱 오랑캐에게 그리 굴 순 없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굴려가며 새로운 사고 체계를 탄생시키고야 말았다. 사라진 명나라를 대신해 우리 스스로가 작은 명나라로 등극키로 했다. 이른바 소중화 사상에 흠뻑 빠진 이들에게 현실 인식 따위를 기대해선 곤란했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너무 거슬러 올라갔고, 일종의 침소봉대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난 그 시절부터, 아닌 그보다 더 이른 시점 어딘가에서부터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고 굳게 믿는다.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는데 우린 스스로 모든 기회를 거부했다. 

나의 단순한 인식과는 별개로 조선과 청 사이에도 교류라 하는 건 존재했으며, 청을 향한 조선의 인식이 마냥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무 자르듯 어느 시점까진 강제였고 그 이후론 자발이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속내가 어떠했건 조선은 청나라에 ‘연행사’라 부르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명나라에 파견한 사절을 대국의 천자인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사절이라는 뜻의 ‘조천사’로 불렀던 것과 달리 청나라 사절은 그저 북경의 당대 지명인 연경을 따 연경사로 칭했다. 명칭에서부터 조선인들의 극명한 인식 차이가 읽혔다. 허나 조선은 1637년부터 1894년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에 무려 477회에 걸쳐 사행 파견을 했다. 의주에서 출발해 북경까지 777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오간 인원은 매번 300명에 육박했다. 5개월 가량의 긴 체류 기간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 싶다. 시작은 억지였을 수도 있으나 청나라는 분명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청을 통하지 않을 경우 결코 접할 수 없었을 서양 문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융성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음엔 아쉬움이 크나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노라 평해선 안 될 것이다. 

향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했음을 잘 알아서일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종교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북경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청도 나중에는 반목을 거듭했으나 당시에는 열린 태도로 이를 하나의 문명처럼 수용했다. 조선 사절 또한 하나의 신학문 차원에서 이를 이해했다. 특히 그들이 눈여겨 본 것은 서양화였던 듯하다. 동양의 그림에서 접하기 힘든 입체감을 서양화는 보였다. 같은 강아지를 그려도 서양 화가들은 마치 그림 속 강아지가 살아 있으며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묘사를 즐겼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입체감을 대하는 조선인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가 궁금하다. 몇몇은 이를 자신의 화풍에 수용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이희영의 <견도>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묘했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그 무엇. 우리 것을 부정하며 남의 것을 좇았으나 결코 남도 되지 못한, 왠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물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사람을 담은 그림들이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피 흘리는 예수를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그림이 너무나 선명했던 탓이 컸다. 아직 하나의 신앙으로 이를 받아들일 상황은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나의 생각이 옳을 것이다. 끄트머리에 살짝 언급된 사진에 관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거울이 있긴 했을 터이나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는 일에 조선인들은 분명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창기 사진은 자연광을 이용해 촬영했는데, 그렇게 남은 사진에는 조선 사신들이 대거 담기기도 했다. 마음에 들었을까.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인줄 모른 채 혼비백산하진 않았을까 싶었거늘, 나의 지나친 상상에 부응하는 사례가 등장하지는 않아 살짝 아쉬웠다. 

‘북학파’로 분류되는 인물 여럿이 보인 교류에 대한 부분도 흐뭇함을 자아냈다. 홍대용, 강세황, 박제가, 김정희. 그들은 중국 문명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게 아니라 조선의 것 또한 중국 문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오늘날에야 국경이 별 의미없다 하나 당시엔 다음을 기약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숱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엇보다 마음을 나눴다. 주학년이 매년 김정희의 생일(6월 2일)마다 생일상을 차리겠노라 언약했다는 이야기는 진정한 우정이 뭔지를 고민케 만든다.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지닌 행렬이었고, 그마저도 어느 순간 끊겨 조선은 결국 ‘은둔의 나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왜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차단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그릇된 세계 인식의 결과로만 해석해선 곤란할 것이다. 우울한 역사로부터 비롯된 혹은 식민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패배주의적 시선이 여전히 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타자와의 교류에 임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이달의 사락 q*****2 2018.01.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