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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이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가. 죽음앞에 서보지 않고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70년대에는 태어나는 아이의 반 이상이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폐결핵 등의 질병이나 출산으로 인한 사망율도 높아서, 사람들은 만연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죽음은 삶이 고안한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처럼 삶의 공허를 견디며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죽음을 결행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모양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서툴지만 러시아 농부처럼 우직하고 균형잡힌 레빈같은 사람까지도 자살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까봐 총이나 끈 등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려했을 정도이니 안나처럼 불같은 열정이 지나간 뒤의 쓰라린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은 어떠했을까?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강의》http://blog.yes24.com/document/6757980에서 "톨스토이의 산문은 우리의 맥박과 같은 속도를 갖는다"고 했듯이 안나가 삶과 죽음을 놓고 고투를 벌일때 우리의 맥박은 사정없이 빨라진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열정적인 구애에 마음이 흔들리며 어두운 사랑의 결과로 잃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아들때문에 괴로워했지만 마침내 브론스키에 대한 정열이 아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이기고 만다. 불륜의 열매인 새 생명을 출산할때 그녀는 산욕열로 죽음의 문앞에 서게 되고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 안의 선한 양심은 카레닌을 감동시켜 얼음같은 그가 안나와 브론스키를 용서하는 기적을 베푼다. 그러나 병에서 회복된 안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카레닌의 사랑과 이해를 비웃듯이 브론스키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버린다. 차라리 아이를 낳다가 안나가 죽었더라면, 카레닌이 안나를 용서했던때 이혼을 성립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안나는 이 운명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 그 이후 브론스키와의 삶은 카레닌과의 결혼생활만큼이나 거짓된 것이니 터지기 직전의 무지개빛 비눗방울처럼 팽팽한 긴장과 불안감의 연속일 뿐이다. 너무나 아름다왔고 너무나 자긍심이 강했던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숨기지 않았듯이 그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신의 전 생애와 어린 아들까지 건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브론스키와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을 벌하고자 했다. 그 짧고도 영원한 죽음의 순간 그녀는 성호를 그었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운명의 힘은 잔인할 정도로 거칠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12장 19절)" 라고 제명을 붙였듯이 안나에 대해 섣부른 심판과 단죄를 내리지 마시기를...
무신론자인 레빈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랑하는 형 니콜라이의 불행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기 전에는 도저히 평화를 누릴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는 결혼하기전 고해성사를 베푸는 신부의 따뜻함, 키티가 죽음을 앞둔 형에게 베풀어주는 위로와 평안을 보고 믿음을 갖고 사는 이들을 다시 보게 된다. 농부들과 함께 노동하며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레빈은 한 농부가 어떤 이는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살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산다는 말을 듣고 깨달음과 함께 자유함을 얻는다. 아내와 어린 아들이 숲 속에 있을때 천둥번개로 나무들이 넘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리는 그의 모습은 무신론자인 그가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살기로 하는 결단을 내렸음을 보여준다. 안나가 두 차례 죽음의 순간 자신안의 가장 선한 존재가 눈을 뜨듯이 레빈도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 삶의 의미를 어느때보다 분명히 깨닫는다. 이 불후의 소설을 끝내고 작가로서의 정점에 있던 톨스토이 본인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종교적 도덕적 수행자의 삶을 살고자 했으니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의 선택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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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는 어떻게 탄생했나. 톨스토이는 1872년 안나라는 여성이 내연남에게 배신당하고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실제 사건에서 가장 큰 영감을 얻었다. 톨스토이의 당시 상황도 가세한다. 『전쟁과 평화』 집필 이후의 공허함, 자신의 세속적 생활에 대한 반성, 죽음 유사 체험과 가족의 죽음, 1870년 그가 읽었던 러시아 영웅 서사시 다닐라 로프차닌의 이야기, 그의 종교적 탐구 등이었다. 이 소설은 레빈과 안나의 비중이 반반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안나에 더 몰입했을 테고 7부 안나의 죽음이 이 소설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8부에서의 레빈의 깨달음은 에필로그쯤으로 여기기 쉽다. 이 소설은 '귀족의 삶, 결혼과 가족의 삶, 도시생활의 모순과 시골생활의 은혜로움, 법·윤리·종교와 개인의 관계, 죽음과 삶의 의미, 이기주의와 사랑, 배신과 용서' 등 많은 문제를 돌아보게 하지만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말은 8부에 담겨 있다. 레빈의 고민이자 톨스토이가 평생 몰두한 화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것이다. * ‘표도르 말이 여인숙 주인 키릴로프는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 산다고 했다. 그러는 것이 이해가 가고 이성적이다. 우리 모두, 이성적인 존재들은 배를 불리는 것 말고 다르게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불현듯 표도르가 말하기를 배를 불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나쁘고 진리를 위해, 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암시를 통해 그를 이해했다! 나는 물론이고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또 지금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 농부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나 이 문제를 생각하고 글을 쓴 현인들 모두 뭔가 분명치 않게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이’ 좋은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한다. 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오직 한 가지, 굳건하고 확실하며 분명한 지식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 지식은 이성을 초월하며 여하한 원인도 결과도 관여치 않는다.’ ‘만약 선(善)에 원인이 있다면 이미 선이 아니다. 그 결과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 역시 선이 아니다. 따라서 선은 인과관계를 초월한다.’ ‘나는 그걸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동안 나는 기적을 찾아 헤매면서 확신을 줄 기적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게 기적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늘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다만 그걸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게 아닌가, 이제 내 고뇌가 끝난 게 아닌가?’ 레빈은 먼지 이는 길을 따라 걸으며, 더위도 피로도 잊은 채, 오랜 고뇌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으며 생각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가슴이 벅차고 더 이상 발을 떼어놓을 힘이 없어서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 사시나무 그늘 아래 풀을 베지 않은 잔디 위에 앉았다. 대표 주인공 안나와 레빈은 '사랑'이라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레빈이 열린 사고와 선을 향한 추구로 삶의 무의미와 자살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안나는 뉘우침 뒤에 재차 감정에 휘둘려 파멸을 자초하고 자살에 이른다. 8부는 소설 외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8부에서 레빈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억압을 받는 세르비아에 보낸 파병을 두고 슬라브인의 동포적 연대감이라는 민족주의는 허구라며 파병을 반대한다. 레빈의 급진적 대화 내용 때문에 잡지의 편집장은 출판을 거부하고 '후일담'으로 줄거리만 간략 게재했다. 톨스토이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작품 전체를 개정하고 8부를 포함한 단행본을 자비로 출판했다. ** 그가 보기에 형과 카타바소프는 설득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기란 더욱더 불가능했다. 그들이 설파하는 이성의 오만함에 그는 질식할 것 같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기에는 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에 몰려든 말 잘하는 의용군 수백 명이 한 말을 근거로 그들과 신문이 민중의 의지와 사상을 표현한다는데, 게다가 그 사상이라는 것이 복수와 살인으로 나타난다니, 그는 동조할 수 없었다. 거기에 찬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민중 속에서 그런 사상의 표현을 본 적이 없고 그 같은 사상을 자기 안에서도 발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그는 스스로를 러시아 민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고, 자신을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또 중요한 것은 그나 민중이나 공공의 복지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지만, 그 공공의 복지는 모두에게 알려진 선의 법칙을 철저히 지킬 때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원해서는 안 되고 어떤 공공 목적을 위해서라 해도 전쟁을 설파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하일리치나 민중과 얘기하곤 했는데 그들은 바랴그인 초대 전설을 통해 자기네 생각을 표현했다. ‘대공으로 와서 우리를 다스려주십시오. 우리는 완전히 복종하겠노라고 기꺼이 약속합니다. 수고와 굴욕, 희생은 모두 우리가 감수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못 합니다.’ 그런데 이제 민중은, 형의 말에 따르면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하고 싶었다. 사회 여론이 완전무결한 판관이라면, 혁명이나 코뮨은 슬라브 족을 위한 행위와 달리 정당화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모든 것은 답이 안 나오는 상념이었다. 단 한 가지만이 확실해 보였다. 논쟁으로 형의 기분이 상했기 때문에 토론을 계속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빈은 입을 다물었다가, 먹구름이 몰려들었으니 비를 피하기 위하려면 집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손님들의 주의를 돌렸다. 톨스토이가 이 소설의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로 지은 것은 잘못을 반복하며 삶을 뜻깊게 영위하지 못하고 마감하는 '안나 카레니나'의 운명이 바로 우리 삶이라는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레빈은 외골수적이기는 하지만 선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며 가정에도 충실하다. 사회를 위해 무엇이 옳은 길인지, 인간으로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내 고민한다. 정치가들이나 협잡꾼처럼 큰소리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표리부동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자기 성찰로 성장해가는 든든한 동반자 키티도 있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가 레빈을 두고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인간의 모범을 제시했지만 그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귀족 지주의 시각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사회활동가로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자기 생활에 안분지족하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극적인 이야기 속으로 돌진해나가는 안나가 우리의 눈길을 더 끈다. 더 바람직한 방향도 있어 보이는데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마는지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따라간다.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택한 그녀의 처음 모습은 순수하고 성숙해 보였다. 인습과 위선적인 사회의 틀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오빠 오블론스키에게 휘둘리며 이혼도 못하는 돌리와 대비된다. 그러나 3권에서는 상황이 역전된다. 브론스키의 영지로 방문한 돌리는 처음엔 안나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안나의 삶이 불안과 기만과 허위로 가득한 생활이라는 걸 깨닫는다. 안나는 고립된 처지 속에 질투와 의심, 집착과 비이성에 휩싸여간다. 아들을 잃겠지만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해 딸을 키우며 새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핑계를 댄다. 카레닌에게 구걸하기 싫다거나 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거나 브론스키와 결혼해 볼품없는 아내로 늙기보다 매력적인 애인으로 살고 싶다는 등의 낭만적 몽상 속에서 자신과 브론스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 “왜요? 생각해 봐요.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임신 상태로 지내는 것, 그러니까 아픈 상태로 지내느냐, 아니면 남편, 어쨌든 남편이죠, 남편의 벗이자 동지로 사느냐.” 안나는 일부러 경솔하고 경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죠, 그래요.” 자신도 생각해 봤던 논쟁거리를 들으며 돌리가 말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나 다른 이들은,” 돌리의 생각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안나가 말했다.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이해해 줘요, 난 아내가 아니에요. 그이는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그이의 사랑을 붙잡아 둘 수 있을까요? 이렇게요?” (중략) 안나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확신시킨 결론을 끝까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불행한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하는 데 이성을 쓰지 않는다면 대체 왜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졌겠어요?” 그녀는 돌리를 쳐다보고 대답을 듣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난 언제나 그 불행한 아이들 앞에 죄지은 심정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불행하진 않죠. 그리고 그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건 다름 아닌 나 한 사람의 잘못이에요.” **** 그의 마음속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악한 기운이 부추겨온 싸움에서 그를 벌하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죽음이 분명하고도 생생히 떠올랐다. 이제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보즈드비젠스코예에 가든 말든, 남편에게서 이혼을 받아내든 말든, 죄다 필요 없는 짓이었다. 필요한 건 단 하나, 그를 벌해야만 했다. 늘상 먹는 만큼의 아편을 따라놓고는 전부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고 여겨졌다. 안나는 이미 늦어버린 후에 그가 겪을 회한과 후회를 생각해 보았다. 또 그가 자신의 애정을 추억하게 되리라 생각하니 왠지 달콤했다. 그녀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거의 다 타들어 간 양초 한 자루의 불빛에 비친 천장의 무늬와 천장까지 뻗친 병풍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 그러니까 그에게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가 느낄 감정을 생생히 그려보았다. ‘그이는 이렇게 말할 거야. 어떻게 내가 안나에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었지? 어떻게 내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설 수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 그녀가 없다. 우리에게서 영원히 떠나버렸다. 그녀는 저세상에 있다······.’ 불현듯 병풍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천장 무늬와 천장 전체를 집어삼켰고 다른 쪽에서 다른 그림자들이 그녀 쪽으로 확 밀려들었다. 그랬다가 한순간 그림자가 물러났는가 했더니 다시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흔들리고 뭉개지더니 사위가 어두워졌다······. ‘죽음!’ 그녀는 퍼뜩 생각했다. 너무나 큰 공포가 덮쳤기에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고 다 타서 꺼져버린 양초를 대신해 새 양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아니다, 그러지 말자. 그저 살아야 한다! 난 그를 사랑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도 나를 사랑하고!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모두 지나가 버릴 거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생명을 되찾은 기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그의 서재로 갔다. 그녀에게 브론스키도 카레닌처럼 혐오스럽고 이기적이며 허영에 찬 속물로 보이기 시작한다. 브론스키의 어머니가 안나를 인정하지 않고 브론스키를 결혼시키려는 맘을 알게 되자 안나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더욱 싸움을 일으키고 서로를 괴롭힌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안나의 죽음이 비관 자살인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마음은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이 책의 1권에 제시된 제사(題詞)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가 된 것이다. 레빈과 달리 안나에게 "사람에게 이성이 주어진 까닭은 그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는 다시 살아볼 삶을 영영 잃는다. 철도역에서 운명의 사랑을 처음 만나 철도역에서 그 사랑의 끝을 닫기까지 고작 3년 몇 개월이었는데 정말 증기기관차처럼 빠르게 내달린 파국이었다. 8부에 브론스키가 세르비아에 자원해 출정할 때 철도역에서 안나의 시신을 떠올리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도 전쟁의 죽음을 택한 걸로 그려진다. 이들을 이렇게 달리게 만든 연료는 우리도 잘 아는 욕망과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감정이다. 톨스토이가 '철도'를 설정한 의미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증기기관차는 당시 근대화의 상징이자 인간을 파멸의 시대로 이끄는 장치였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기존 사회를 지탱하던 신분제도와 가부장제, 경제 원리와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무너지며 가족과 공동체의 위기, 신앙과 공통 이념의 붕괴, 귀족 문화의 파탄 등 사회 변화가 급변하는 시기였다. 톨스토이는 이 모든 걸 안나라는 여성을 통해 그 모든 걸 다 조망했다. 일곱 명의 주요인물(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레빈, 키티, 오블론스키, 돌리)과 함께 군인, 정치가, 귀부인, 변호사, 학자, 신흥 부르주아, 지주, 농민, 하인, 마부, 유모 등 150명 정도의 인물이 나오는 그야말로 당시의 사회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이다. 안나보다 더 못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을 바꿀 생각도 못 하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아내에게 용서를 빈 뒤에도 계속 외도를 하고 향락을 즐기다 쌓인 빚에 비굴하게 눈치 보며 사는 오블론스키, 남들의 기준에 맞춘 세속적 삶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다가 안나와의 사건으로 정치 생활이 끝남과 동시에 사교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사이비적 종교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 카레닌, 클럽에서 술잔치나 도박 등의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방종한 생활을 하는 귀족들, 안나를 헐뜯으면서 남편 이외의 애인들을 거느리며 위선적인 삶을 사는 귀족 부인들, 황제나 지주에 기대 눈앞에 닥친 삶을 살기에 바쁜 농민과 대중들. 당신 삶은 이들 중 어디에 가까운가. 대부분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 작품 해설은 동서문화사 판이 꼼꼼해서 좋았다. 이 소설을 읽어본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