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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를 털면서'는 김준태 시인의 첫 시집으로 1977년 7월에 초판 1쇄를 찍었다. 내가 읽은 시집은 2013년 3월에 초판 7쇄로 발행된 것이다.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김준태 시인은 조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문학지 '시인'지와 '창작과비평'지 등을 통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미발표> 시도 어느 정도 있지만, 대부분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시인'지, 창작과비평'지, '문학과비평'지 등의 문학잡지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이다(등단 전인 1967년에 '주부생활'이란 여성 잡지에 발표했던 시도 한 편 수록돼 있긴 하다.).
이 시집은 79편의 시가 다음과 같이 5부로 나뉘어져 수록돼 있다. 제1부 참깨를 털면서 제2부 카스트라트 제3부 노래집 제4부 반달 제5부 고독한 젊은이는 강하다
각 부의 제목은 수록된 시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3부는 예외) 부를 나눈 기준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창작순이나 발표순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1부는 고향을 노래한 시들을 묶어놓은 것 같다(3부의 일부 시편들도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 사랑은 이 시집 <후기>의 시인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촌놈이다. 전라도 해남 촌놈이다. (중략) 사람들아, 사람들아, 고향을 잊어먹거나 고향을 배반하거나, 고향을 뒷발로 차버리거나, 고향을 올라타고 말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아. 고향! 이제 우리는 고향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고향을 깊이 어루만져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사방팔방으로 입맞추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노래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울어주어야 할 것 같고, 아주 우리가 진짜로 고향이 돼버려야 할 것 같다. (151쪽)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체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 와일드한 느낌을 주는데, 1부에 실린 몇몇 시들은 상대적으로 정제된 느낌을 주었다. '감꽃'과 이 시집의 표제시인 '참깨를 털면서'가 그 예다. '감꽃'에 대해서는 천상병 시인이 호평을 했다며, 발문에서 조태일 시인이 밝히고 있다. 나는 '감꽃'보다 '참깨를 털면서'가 더 좋았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당시에 '시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라는 각성을 하기도 했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감꽃' 전문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시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ㅁ개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악,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참깨를 털면서' 전문
2부에는 현실 혹은 지배 문화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시인의 시적 지향을 보여 주는 시들이 많다. 정약용의 한시 '애절량'을 모티프로 한 시 '카스트라트'도 그렇지만, '신라고분출토에 곡함', '시작을 그렇게 하면 되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말을 꼬불려서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시작을 그렇게 하면 되나 참신하고 어쩌고 떠드는 서울의 친구야 무등산에 틀어박힌 나 먼저 어틀란틱지나 포에트리지를 떠들어 봐도 몇 년 간을 눈알을 부라리고 찾아봐도 네놈의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그럴 듯한 싯귀는 없을 거다 (중략) 개자식 같은 놈아 뉴요크나 시카고에서 뽑아낸 싯귀를 눈깜작할 새에 뒤집으려고 덤비는 놈아 어디 멋들어지게 둔갑시킬 싯귀는 없나 하고 초조히 서두르는 엉큼한 놈아 네놈이 노려야 할 혁신적이고 어쩌고 하는 시는 네놈이 걷어차버린 애인에게 있고 밤중에 떨어진 꽃잎 밑에 있고 이장네 집에서 통닭을 삼키는 면서기의 혓바닥에 있고 어금니로 질근질근 보리밥을 씹어대는 시골 할머니의 흠없는 마음 속에 있고 전봉준이가 육자배기를 부르며 돌아오던 진달래꽃 산 굽이에 희부옇게 있고 아침마다 쓸어내는 방 먼지에 있을 것이다. Auden이 어느 시대 녀석인데 제임스 메릴이 며칠을 두고 커피 마시며 빚었는데 그 자들의 시를 감쪽같이 비틀고 엎어서 좋지? 이 정도면 캐릭티컬하지? 뻐기며 소리치는 병신 새끼야 나의 시는 네놈을 비웃는 곳에서 엉뚱한 임을 얻는다. (하략)
1969년 '시인'지에 발표된 '시작을 그렇게 하면 되나'이다. 비속어가 걸러지지 않은 시어, 직설적이고 야유적인 어조는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정도다. 이 시를 통해 문단에 갓 등단한 시인은 분명하게 시인 자신의 시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분명하게 드러내다 보니 시의 호흡이 길어지고 압축이 되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3부의 시편들은 1부와 통하는 것(고향과 고향 사람을 노래한 시)도 있고, 2부와 통하는 것(현실 비판적인 시)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 가운데는 다음 시처럼 투박해서 저절로 허물없는 웃음을 웃게 만드는 시도 있다.
아시다시피 이한우씨는 잘난 사람이 아니어요 돈이 없으면 학벌이라도 학벌이 없으면 족보라도 그럴싸한 집안이어야 하는 세상에 이한우씨는 그중 하나도 가진 게 없어요 (중략) 아시다시피 이한우씨는 잘나고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밥솥을 때리는 땜쟁이지만 톱과 대패와 망치뿐인 남쪽 경상도 사천땅의 시골 가난한 목수이지만 마누라에겐 밥장사와 술장사도 하게 놓아주는 남정네이지만 아시다시피 이한우씨는 구수하고 텁털한 사람이어요 (중략) 그리고 시인 김준태의 장인어른이어요. - '이한우'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이 시를 쓰고 시인이 시인의 아내와 장모에게 혼나지 않았을까 싶다. 자랑하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장인과 장모 이야기를 세상에 떠벌렸으니까 말이다. 이 시집에 수록하기 전에는 미발표작이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의 주인공인 장인어른은 '구수하고 텁털한 사람'이니까 뭐라고 안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4부에는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의 비극에 주목한 내용의 시들을, 5부는 시인 자신의 월남(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들을 묶어 놓았다. 5부의 시 중에서는 월남전의 실상을 고발한 '고노이섬'이 기억에 남았다.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갈대가 사람의 키를 넘는 고노이섬 갈대가 사람보다도 많이 흔들리는 고노이섬 밤이나 낮이나 굴속에서 붉은 숨을 쉬고 굴속에서 천만리 빗소리를 만나고 굴속에서 젖꼭지를 물려주고 미역국을 마시고 굴속에서 깨어진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배추잎을 씻고 아이녀석의 기저귀를 빨고 그러나 굴속에서 울고 웃던 맨발의 여자베트콩은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어디 어디에 숨어서 피를 흘리나 조니워카와 샴팽과 꼬냑크와 막걸리가 엎질러진 고노이섬 도마뱀이 쇠붙이처럼 녹이 슬은 고노이섬 원주민의 눈알이 모래주머니처럼 쏟아지는 고노이섬 먼 나라서 싸우러 온 새파란 젊은 애숭이들이 지옥보다 캄캄한 민간인의 공동묘지 수억년 석탄이 잠든 무덤구뎅이에서 너도 나도 쭈그려 앉아 수음을 한다지 무덤에 잠복호를 파고 들어가 총칼을 든 채 원숭이처럼 움츠리고서 수음을 한다지 밤마다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모가지를 넣어 도깨비불 같은 비곗덩어릴 깜박깜박거리지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갈대가 사람의 키를 넘는 고노이섬 히히 또 남의 총이 모자란 고노이섬 누군가 판쵸를 뒤집어쓰고 담배를 피우는 고노이섬 어린애의 장난감마저 죽어버린 고노이섬. - 고노이섬' 전문
** 이 시집에 실린 김준태의 시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시어와 감성을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현실(도회지 혹은 지배 문화와 연관된)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으로 고향, 곧 귀소의 장소를 설정하고 그곳에서 가식없는 삶을 살고 싶은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