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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나의 타자'가 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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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서문이나 머릿말을 읽어보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려는 책이 기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이 책을 서평단에 신청하기 전에 책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읽었고, 소개하는 내용은 책을 받은 후 읽어본 역자의 서문과 편집자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대치가 맞은 건 딱 거기까지였다. 본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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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서문이나 머릿말을 읽어보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려는 책이 기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이 책을 서평단에 신청하기 전에 책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읽었고, 소개하는 내용은 책을 받은 후 읽어본 역자의 서문과 편집자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대치가 맞은 건 딱 거기까지였다. 본문을 읽으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뿐 아니라 라깡주의 정신분석이론과 해체론적 비판의 대표 주자 주디스 버틀러의 <권력의 심리적 양상>,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 헤겔의 존재론 등의 비교와 분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는 서문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이야기하며 '사랑하는 연인, 가족, 각별한 친구나 동료를 어느 순간 알아보지 못하는 경험은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종 일어난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이렇게 흔치 않아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낯설음의 경험(프로이트식 표현으로는 낯선 친숙함Uncanny)은 당연한 듯한 서로의 정체 혹은 정체성이 실제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체험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하며 정체성에 대한 화두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정체성은 '나'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성장기를 거치면서 누구나 이 '나'라는 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도록 기대 받는다." 하지만 "정신분석이론을 위시한 현대철학 및 이론은 '나'라는 인식이 어떤 시기를 거치고 나면 깔끔하게 구성되는 의식이나 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 '나'라는 정체성은 타자와 맞서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과정으로서의 시간성을 갖"기 때문이라는 거다. 한마디로 "정체성은 '타자'를 동일자로 만드는 자기동일화의 무한정한 과정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에세이 <동일화>에서 "정신분석에서 동일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유대에 대한 최초의 표현"이라고 했다 한다. 따라서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고 한다. 랭보가 "나는 타자"라고 한 선언은 바로 이런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의 정치 등 미국과 서유럽의 다원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기획이 현실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지젝 등 라깡주의 정신분석이론가들은 단지 차이를 인정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노정된 모순과 역설을 탐색하지 않고는 차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역자는 "우리는 이 책에서 현대정신분석이론의 연구자들이 정체성과 자기 동일성 개념, 또 사회구조에 대항한 주체의 저항가능성 등을 어떻게 이론화하는지를 살펴볼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하며 다음 내용을 언급한다. "정체성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가면과도 같은 것이라면, 주체란 그 가면 뒤의 '나'라는 어떤 실체이며, 그 실체의 본질은 '틈'이다. 이 주체의 틈으로부터 라깡이 이론화하고 지젝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 '윤리적 행위'가 빛을 발하고 나온다. 결국 정신분석이론의 핵심은 상징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자는 다름 아닌 주체라는 점이다. 이 주체의 윤리적 행위를 배신하는 것은 어떤 악행이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윤리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며 자신을 상징질서의 유한한 감옥 안에서 근근이 버티고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위에서 언급한 역자의 말대로 "지젝의 이 발언에 담긴 메시지가 독자에게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되어 첫 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다가 이어지는 다른 저자들의 글이 제공하는 지적 모험을" 내가 "경험'했다면 그것은 나는 "나의 타자"라는 랭보의 역설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 이어지는 여러 저자의 본문을 읽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믿은 바로 그 '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만일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이란 이 책의 부제처럼 이러한 정체성의 역설을 만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면 나는 이 책을 읽은 목적을 무사히 달성한 셈이다.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a*******5 2018.06.29. 신고 공감 8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어, 이건 내가 아닌데..., 내안의 무수한 타자들
"어, 이건 내가 아닌데..., 내안의 무수한 타자들" 내용보기
우리들은 사회라는 거대 구조에 짓눌려 그것이 설정하고 있는 수많은 규칙들과 제도, 혹은 문화라는 관습적 양식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결국 ‘나’ 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 가면과도 같다. 그런데 나라는 실체는 정작 그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주체이기에 이 분열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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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사회라는 거대 구조에 짓눌려 그것이 설정하고 있는 수많은 규칙들과 제도, 혹은 문화라는 관습적 양식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결국 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 가면과도 같다. 그런데 나라는 실체는 정작 그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주체이기에 이 분열된 는 문득 문득 자신이 낯설어지며, 그 간극으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타자라는 이 수상쩍은 책을 읽던 중 정말 우연치곤 기이하게 The Call이라는 가수들의 콜라보(Collaboration) 음악 프로그램에서 태민×비와이가 부르는 피노키오라는 노래 말이 들려왔다. 아마 대충 이런 가사였던 것 같다.

 

너로 향한 내 거짓이 내겐 익숙해, but I wanna be wanna be,

하얀 웃음너머 검은 거짓말들을 꼭 진실인척 진심인척 난 나를 꾸며,

더 깊숙하게 숨어버린 진심, 이러다가 진짜 내 모습마저 사라질 듯 해.....”

 

노래를 부르는 이 젊은 가수의 호소에는 무대에 올라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자신의 꾸밈에 익숙해져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 꾸밈, 가면의 삶이 정작 자신의 실체가 소멸될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 이건 진정한 내가 아닌데, 진짜 나의 삶을 살고 싶어라는 소위 사회구조라는 대타자(大他者)에 저항함으로써 분열된 주체의 통합, 온전한 를 되찾고 싶다는 무의식적 외침의 반영일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결핍을 겪는 주체, 주체 내부의 상처와 마주하기, 미완의 나를 총체적 나로 끊임없이 지향하기, 실패가 불가피한 나를 만나는, 지속적인 진자운동을 통해서 타자(분열되어있는 내 안의 타자들)를 동일자(the same)로 만드는 무한한 과업의 수행을 이야기한다. 정체성으로 가는 여정의 다양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그것들의 철학적 혹은 논리적, 그리고 성적 함의를 살펴보는탐색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 젠더연구, 비교문학, 현대철학를 대표하는 7인의 라깡주의 석학들이 사회구조에 대항한 주체의 저항 가능성 등을 어떻게 이론화하는지에 토대를 두고, 부분적이나마 국내 출간되지 못한 라깡의 여러 세미나의 내용들을 통해 정체성과 동일화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엿볼 수도 있으며, 강박의 망상적 실재를 이해하게도 되고, 혹은 성차에 대한 오랜 논쟁적 논의를 지닌 페미니즘의 이론적 무기를 발견할 수도 있게 해준다.

 

따라서 소개되고 있는 담론의 주제와 관련하여 읽는 이에 따라 그 실천적 관심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서장을 여는 슬라보에 지젝의 대타자의 권위에 복종하려는 열정적 애착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비판으로서 라깡 해석은 그야말로 압권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대타자에 저항하려는 원초적인 복종은 상상계에서 이루어지기에 상징계인 실재에서 무력하며, 그럼으로써 열정적 애착을 봉쇄해버린다. 결국 주체는 사회구조에 대항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젝은 열정적 애착이란 근본적 환상이며, 이것을 가로질러 무화시키고, 주체적 결핍을 겪도록 하는 것, 즉 무력감은 원초적 열정적 애착의 필요를 자극하는 탈애착(dis-attachment)이라는 틈새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으로 해석함으로써 저항의 자유가 가능한 주체를 복원해낸다.

 

이 논의는 진정한 여성’, 그리고 진정한 행위의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이론 기반을 제공하는 부분이 될 것 같다. 고전 느와르와 90년대의 신 느와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형상을 비교함으로써 남성적 정체성이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내재적 위협으로 창조해낸환상에 머물지 않고, 이 환상을 수면으로 끌어내 남성적 게임을 완전히 수용하고 남성을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시키는 대타자 위협의 효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되는 존 달John Dahl의 영화 마지막 유혹 The last seduction의 주인공 린다 피오렌티노의 한 장면 - “피오렌티노는 남자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직접 남자의 바지 지퍼를 열어서 그 안에 손을 넣고 그의 상품을 점검한다. 그녀는 나는 보지 않고는 어떤 물건도 사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후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는 따뜻한 인간적 접촉을 거부한다.” - 은 팜므파탈 역시 남성적 환상의 실현이라는 유령적 아우라를 의도적이며 잔혹하게 떼어버리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행위의 형상으로서 선명하게 각인된다.

    

 

 

한편 페미니스트 기획의 유효성 측면에서 뉴욕주립대() ‘마리나 드 카네리의 논문 일자에 균열내기: 주인, 노예 그리고 아내헤겔주인-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 혹은 찬양에 스며있는 오류 지적을 통해, ‘본질의 단일성을 회피하면서 인간 존재의 총체성을 사유하기 위해 일자(一者)의 균열을 도입하고, 여성을 총체성의 필수적 기능으로, 또한 치유할 수 없는 남성의 불안에 깃든 증상으로 설명해내기도 한다.

 

또한 덴마크 아루스대() ‘커스틴 힐드가르환상으로서의 성과 증상으로서의 성은 일종의 논리 수학을 통해 남성은 여성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만 보편적이 될 수 있다.”는 즉, 성차(性差)는 모순적임을 증명해 내는데, ‘중간 항 배제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직관주의의 논리는 아마 이 책의 신선한 지적 매력을 증폭시키는, 더욱이 라깡의 그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란 없다.”의 남성이 말하는 여성적 본질 없음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아이돌이 부른 노랫말로 회귀하면서 맺어야 할 것 같다. ‘동일화(同一化)’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 주체인 청년이 대타자인 사회대중의 응시에 담긴 거울상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진정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정체성이 강탈되었다는 동일화의 오류임을 자각하는, 불안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일 게다. 이러한 양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 있다.

 

대타자의 응시가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반복됨으로써 변장한 주체는 자신이 붙들려있는

동일화의 자리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포박당했으니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콕 집어낼 수 없어졌다.”

    

아마 태민×비와이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의 처한 상황이 이것일 것이다. 꾸며낸 정체성에 자기 동일화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인식에 이미 자기 존재의 위협에 저항하는 힘이 있음을, 그의 건강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대타자의 욕망이 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직 대타자가 그에게 의미가 되는 상태가 중지되지 않아야 한다. 대타자가 의미를 상실하는 때 그는 새로운 주체에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이 우리네(인간 존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면서 인간적 성장을 해 나갈 터이다.

 

150여 쪽 남짓의 책이지만 읽는 이에게는 1천여 쪽을 읽는 것처럼 인내와 힘겨움을 요구하는 그리 녹록치 않은 글이다. 오늘과 같이 무수한 가면, 증폭되는 내 안의 타자에 몸서리치는 환경에서 어떻게 온전한 나를 축조해 나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해 주는 풍성한 의미로 가득함을 발견하게 된다. 무의식의 주체를 다각적 층위에서 탐사함으로써 개인의 내면을 아우르고 보다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 존재로 발전하는데 귀중한 초석적 사유의 시간이 되어주는 저작이라 하겠다.

리뷰 총점 종이책
[나의 타자] 무한대의 능력을 발견하는 나의 타자
"[나의 타자] 무한대의 능력을 발견하는 나의 타자" 내용보기
1. 여기서만 살짝 밝히지만, 저는 상담심리를 전공했습니다. 어디에서 전공했는지는 여러분의 몸과 마음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밝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상담심리를 전공했다는 것을 밝히는 이유는, 그래야만 이 리뷰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밝히지 않은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그러하였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어디에서 전공을 했는지 궁금하신 분은 쪽지 한 통! 다만,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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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만 살짝 밝히지만, 저는 상담심리를 전공했습니다. 어디에서 전공했는지는 여러분의 몸과 마음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밝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상담심리를 전공했다는 것을 밝히는 이유는, 그래야만 이 리뷰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밝히지 않은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그러하였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어디에서 전공을 했는지 궁금하신 분은 쪽지 한 통! 다만, 답장은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전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타자』는 이렇게 상담심리를 전공한 나의 삶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무색함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나의 타자』가 주는 난해성 때문입니다. 그 난해성을 풀어내는 게 『나의 타자』를 읽는 동안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나, 숙제 하는 거 가능할까?'

 

 

2.

 

내가 『나의 타자』를 읽는데 어려움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글이 써지는 방식이 어렵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저, 지금 제 자랑하려고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저에게 "너, 잘났다!" "혹은 "어, 참, 대단해!" 하고 감탄하거나 혹은 욕을 하고 있다면,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의 타자로서 "신통한 다이어리" 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통한 다이어리"는 당신의 주인으로서, 또는 당신의 노예가 되어 당신을 조종하고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즉, 당신의 내면은 당신의 것이 아닌 "신통한 다이어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복종을 하는 순간 노예는 주인의 타자로서 행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타자성의 상실은 종국에는 주인을 무로 바꾸어 버린다.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는커녕 주인은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노예에 완전히 의존하게 됨으로서 궁극적으로 노예의 일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마저 소외시키게 된다. 다른 한편 노예는 두  주인, 인간과 절대적 주인, 즉 죽음에 복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통해 노예는 이 두주인 너머로 비상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주인의 정체성을 빼앗아서 인간 주인을 넘어서고, 미래의 생산(역사)을 통해 얻어지는 초월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 주인의 정복이라는 오랜 관념은 상호적 인정을 통해 극복된다. 과거의 주인은 노예로부터 주인성의 본질을 인식해야 하고, 이 주인성은 다른 진설에 속한다. 더 이상 동료 존재의 복종을 통해 외부적 타자를 정복하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일을 통한 초월과 변형에 토대를 둔 자기 자신의 정복이다

- p.57

 

 

3.

 

『나의 타자 』는 슬라보예 지적, 마리나 드 카넬, 데이비드 맷츠거, 커스틴 힐드가르, 앤드류 J. 루이스, 조엘 도르, 러셀 그리그 등의 다양한 논의를 다루었지만, 그러나, 결국 주제는 하나입니다. 제목에서처럼 "나의 타자"  즉, 타자와의 동일화, 그리고 그 속에 스며 든 강박, 그렇게 해서 밝혀지는 나의 타자성.

 

"우리 앞에…놓은 것은 어떤 것이 또 하나의 다른 것이 되고 이 타자는 대체로 또 다른 타자가 된다. 그렇게 또 다른 하나와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은 실질적으로 그 하나에 대한 타자이다.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무시된 것과 마찬가이지므로, 그리고 그 둘은 동일한 속성을 갖기 때문에, 말하자면, 타자가 되기 때문에, 타자가 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오직 자신과 결합한다."

- p.54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보게 됩니다.  나의 모습이 보이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며, 동일시된 나는 그 부분은 이미 내 것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무시하고,  또 다른 자신을 찾아 나섭니다.  타자를 찾는 여행은 그렇게 끊임없이 나를 재촉합니다.

 

 

4.

 

저는 상담심리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담은 결국, 사람에게 기대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상담은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아무리 비싼 돈이 들어간다 해도,  나의 비워진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수 상담자는 없습니다. 그 비워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이 있는 곳이면, 생명이 있는 곳이면, 실제 세상에서 모든 것이 효력을 갖는 곳이면 어디든 변증법이 작용한다." 그렇지만 이 변증법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생성은 이중이 아니라 삼중의 속도로 진행한다. 이것은 소위 '악무한'과 '선무한'의 차이이며 왜 존재가 단순한 다양태가 아니라 기독교의 신처럼 하나이지만 삼중인 이유이다. 우리가 생성을 이원적 체계로 개념화해서 한 항목이 다른 항목을 극복하게 한다면, 우리는 유한이 부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무한대의 진행을 얻게 될 것이다." - p.53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성부)과 예수님(성부)와 성령(성령은 기도할 때 내려주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하나라는 것. 즉, 삼위일체를 통해서 나의 능력은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이 내게 주신 능력이고, 그 능력은 어떻게든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나의 타자에 존재하는 개념은 무한대의 연결을 통해서 무한대로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의 삶을 느끼고 배우면서, 끊임없이 나의 타자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즉 『나의 타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대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라는 말을 아주 어렵게 풀어낸,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책입니다. 그 증명이 제대로 되었는지, 그 증명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저의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저에겐 무한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무한대의 능력을 발견해 준 『나의 타자』에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지금 이 순간, <신통한 다이어리> 의 매력에 이끌렸다면, 당신은 무한대의 능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믿으시옵소서! 그리고,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치시옵소서! <신통한 다이어리>의 타자가 <그대>의 타자 속에서 마음껏 춤추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또 원하옵니다!

 

 

이 리뷰는 인간사랑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h******o 2018.06.30.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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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 [나의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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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환상과 역설 [나의 타자]   솔직히 이 책은 이해하기 버겁다.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라깡이니 프로이트니 하는 대가들의 이론을 어느 정도 알아야 아는 척이라도 해볼 텐데...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총서 중 하나인 이 책은 저널 엄브라를 번역한 것이다. 이번 호는 정체성으로 향해가는 여정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각 논의가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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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환상과 역설 [나의 타자]

 

 

 

솔직히 이 책은 이해하기 버겁다.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라깡이니 프로이트니 하는 대가들의 이론을 어느 정도 알아야 아는 척이라도 해볼 텐데...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총서 중 하나인 이 책은 저널 엄브라를 번역한 것이다.

이번 호는 정체성으로 향해가는 여정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각 논의가 제시하고 있는 철학적, 논리적, 성적 함의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저널에 실린 필자의 면면을 살펴 보면 그 무게와 깊이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류블랴나의 거인으로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을 비롯해 러셀 그리그, 조엘 도르, 커스틴 힐드가르 등의 필진이 눈에 들어온다.

필자들의 소논문을 읽는 느낌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는 현대정신분석이론의 연구자들이 정체성과 자기 동일성 개념, 또 사회구조에 대항한 주체의 저항가능성 등을 어떻게 이론화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전문용어와 이론체계 등에 문외한이라 100%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간간이 눈에 띄는 문학작품, 영화 등에 나오는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통해 어렴풋이 소경 코끼리 더듬듯이 실마리를 잡아 가며 읽었다.

 

보통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인문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좀 더 심도있게 파고든다.

정체성, 주체, 실체의 본질 등을 각기 다른 기호를 써 가며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역자 서문에서 밝힌 인상적인 한 문장에 밑줄을 그어 본다.

 

정체성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가면과도 같은 것이라면, 주체란 그 가면 뒤의 '나'라는 어떤 실체이며, 그 실체의 본질은 틈이다.

이 주체의 틈으로부터 라깡이 이론화하고 지젝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 '윤리적 행위'가 빛을 발하고 나온다. 결국 정신분석이론의 행식믄 상징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자는 다름 아닌 주체라는 점이다.-12

 

역자 서문에서 이 책의 지향하고 있는 이론적 분석의 대상을 좀 더 확실히 짚어주고 있는 셈이다.

오리무중인 것처럼 보이던 시야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느낌이랄까.

이 부분을 지침 삼아 더듬더듬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 본다.

 

"정신분석에서 동일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유대헤 대한 최초의 표현" 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랭보의  "나는 타자" 라는 선언은 끝없이 타자의 문제를 제기하는 정체성에 대하여, 나와 타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가 있다는 것에 대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면서 본격적으로 SNS상에 자기를 노출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 요즘, 진짜 나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자기과시욕 때문에 화면 안에서는 멋지게 포장하지만 현실의 자신은 제시되는 프레임만큼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와 실체의 나 사이의 간극은 스스로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다.

정신분석은 바로 이처럼 알아채기 어려운 그 간극을,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노정된 모순과 역설을 탐색하는 것이라 말한다.

분석은 치유의 과정일 뿐이라는 말은 얼핏 냉정해 보인다.내부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툭하면 위로니 힐링이니 하며 기대려 하는 어설픈 과정에 대해 내뱉는 쓴소리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주체의 결핍'을 겪는 것이라 주체 내부의 상처와 마주하기, 미완성의 나, 실패가 불가피한 '나'를 만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한다.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상처입고 실패하게 되어 있다, 라고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있으니 어쭙잖은 다독임을 기대하고 있는 이라면, 마음 단단히 먹고 책장을 넘기시길.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깡의 유명한 문구는 주체의 욕망이 '내 것'이 아니라 대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의 문제, 대타자의 결여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대타자가 수수께끼라면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그가 이렇게 말했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나는 그에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수수께끼는 진술이 없는 발화이다. 따라서 어떤 발화도 수수께끼가 될 수 있다. -88

 

<환상으로서의 성과 증상으로서의 성>이라는 커스틴 힐드라르의 글이 가장 가깝게 느껴졌다.  '미투운동'이 한 때 시끄럽게 사회를 달구었었는데, 도대체 성에 있어 남성과 여성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읽어보면 좋을 내용인 것 같다. 남성적 극이 더 문화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것.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가치를 논리학적으로 차분히 풀어나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해졌기에, 여성은 남성에서 나왔다. 남성은 클리셰이고 여성은 이 형식과 규범에서 파생된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상징계에서 증상으로 변장한 채 갈등을 유발한다. 그러나 환상은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대답한다. 환상은 불가능성에 대한 답이며 결여를 덮어버리고 질문이 계속되기를 막는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성의 모든 표상들은 환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과 여성은 '실재'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대충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 보자면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대립구조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계속적인 수수께끼를 던지면서 우리는 여성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 같다.

 

얇은 책이지만 '나의 타자'라는 제목을 충실히 파고드는 책이다.

비록 용어와 이론에 있어 막히는 부분이 있지만 정체성, 특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이라면 수수께끼를 풀어나갈 해답을 하나쯤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s*******e 2018.07.06.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슬라보예 지젝 외, 『나의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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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환상과 역설- 슬라보예 지젝 외, 『나의 타자』       정체성(identity)이라는 단어는 묘한 말이다. 나를 ‘나’로 만드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친구이다. 어느 기업에 다니는 사원이며, 젊은 나이에 집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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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환상과 역설

- 슬라보예 지젝 외, 『나의 타자』

 

 

 

정체성(identity)이라는 단어는 묘한 말이다. 나를 로 만드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친구이다. 어느 기업에 다니는 사원이며, 젊은 나이에 집을 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에 대한 특징을 열거한다. 열거하는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체성이 뚜렷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거할 내용이 많으면 는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보다 먼저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로 만들게 하는 것일까?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인 나는 왜 꼭 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를 허상이라고 본다. ‘무아(無我)’을 깨달음으로써 허상인 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아는 그럼 정체성에 속하는 것인가, 아닌가? ‘를 부정했으니 정체성 또한 부정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이 책에는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환상은 주체가 대타자와 일치하는 경험을 가리킨다. 대타자는 비어 있는 대상을 가리키므로 이러한 환상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환상을 지니고 현실을 살아간다. ‘에 대한 관념이 없는 상태로 사는 삶을 생각해 보라.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려면 에 대한 관념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타자를 설정하려면 내가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는 어떻게 설정될까?

 

슬라보예 지젝은 열정적 애착으로부터 탈-동일화로라는 글에서 라깡을 비판한 버틀러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라깡은 저항을 상징계구조의 상상계적 오인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이렇게 환원된 저항은 상징계의 완전한 현실화를 방해하기는 해도 상징계 질서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체적 조건을 절합하지 못한 채 저항하는 대상의 조건 안에서만 자기주장을 할 뿐이다.”(18~19) 버틀러는 라깡의 저항이 상징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체제 내적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사용한 열정적 애착은 무의식에 애착을 지닌 주체를 드러내는 말인데, 그는 이러한 무의식적 저항으로는 새로운 생산 권력을 생성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라깡이 여기서 하는 일은 버틀러가 동일하게 사용한 두 가지 용어, 주체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지지하는 근본적 환상과, 환상적 열정적 애착의 트라우마에 대한 상징적 대응으로서의 상징계적 동일시 사이를 구별한 것이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상징계적 정체성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기대고 있는 환상적 열정적 애착을 부인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상징계적 재절합은 근본적 환상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키지 못하는 다양한 변종들가령 아버지가 나를 때려요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 이 변종들의 변증법화 과정과 근본적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다르다. 정신분석 과정의 최종적 목적은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도록 보장하는 궁극적인 열정적 애착을 무화시키고 라깡이 주체적 결핍이라고 부른 것을 쥐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 차원에서 근본적 환상에 대한 원초적 열정적 애착변증(辨證)’할 수 없다. (25~26)

 

주체의 환상은 비어 있는 대타자를 다른 기표로 채우려는 욕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환상에 빠진 존재만이 상징계에서 주체로 호명될 수 있다. 버틀러가 말하는 열정적 애착은 바로 주체가 탄생하는 이와 같은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지젝은 이 또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버틀러가 주체화과정(subjectivation)에의 애착에 논의를 집중한다면, 지젝은 그 너머로 나아간다. 라깡에게 주체는 결핍에서 이루어진다. 주체는 그 무엇을 채운 존재가 아니라 그 무엇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탄생하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채울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주체는 항상 틈새를 내장하고 있다. 지젝은 오직 이 틈새가 여기에 이미 있을 때만 우리는 주체가 근본적 환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28)고 이야기한다.

 

팜므파탈을 예로 들어 주체(여기서는 남성)에 논의해 보자. 고전적 팜므파탈이 자신을 숨기는 신비주의(환상)로 남성을 유혹했다면, 현대의 팜므파탈은 자신을 투명하게 내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수수께끼 인물이 된다. 때로 완전히 솔직하다는 것은 대타자를 속이는 매우 효과적이며 교활한 방법(33)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행동과 행위의 구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행동이 뭔가 환상적 지지대에 의존해있다면, 진정하는 행위는 환상을 교란시키는가로지르는것과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확히 행위는 라깡에게 기표, 발화행위와 반대되는 실재로서의 대상의 차원에 놓인다.”(34) 최근 영화에 나타나는 팜므파탈은 남성 주인공에게 이러한 실재로서 대상의 차원에 놓여 있다. 실재는 상징계를 교란하는 대상이다. 상징계를 지배한다고 착각하는 남성은 실재를 쥐고 있는 팜므파탈의 유혹에 맥없이 넘어간다. 실재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타나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기적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지젝은 이 사건을 “‘신성한차원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마리나 드 카네리는 일자에 균열내기: 주인, 노예 그리고 그의 아내에서 타자성(alterity)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를 인정하고 있지만, 일자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 곧 헤겔은 동일성의 경제를 따라 주인과 노인의 변증법을 이야기한다. 그는 외부를 자기 자신’, 즉 거울상으로서 자신의 대립물이자 동시에 자신을 보충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이를 따르면 여성woman은 남성이 아니다not-man. 이러한 변증법적 사유로부터 탈출하려면 일자에 균열을 내야 한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균열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잔여물, 표지되지 않고 남겨진 채 그리고 바로 정확히 그런 이유로 전체 체계를 지탱하도록 사용되는 찌꺼기를 감추는데 성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57) 총체성이라는 말에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잔여가 내포되어 있다. 일자는 말 그대로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역설이라는 얘기겠다. 여성은 이 균열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점에서 여성성은 늘 남성에게 불안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동일화라는 글에서 조엘 도르는 세 가지 동일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아버지와의 동일화가 있다. 이상(ideal)과의 동일화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이 유형은 아버지의 법을 통해 상징계로 들어서는 주체를 내보이고 있다. ‘주체의 결핍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이 개념에서 생긴다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동일화는 라깡이 단일한 속성과의 동일화라고 명명한 것으로 모든 동일화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종류의 동일화는 히스테리적 동일화이다. 이 동일화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이 욕망은 당연히 채워지지 않는다. 기표들의 유희로 펼쳐지는 이러한 욕망구조는 의미를 끊임없이 뒤로 미룸으로써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를 유지시킨다. 지은이는 주체가 자신이 대타자에게서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을 대타자의 욕망의 가능한 대상으로 느끼는 순간 주체의 욕망은 라깡이 불안의 출현지점으로 규정한 무(nothingness)와 마주하게 된다.”(127)고 이야기한다.

 

주체는 대타자를 욕망하고 있지만, 대타자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른다. 대타자가 응시하는 자리에 포박당한 주체는 그래서 끊임없는 불안에 빠진다. 히스테리에 빠진 주체다. 대타자를 지향하지만 주체는 결코 대타자에 도달할 수 없다. 지향하되 도달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주체로 하여금 대타자를 환상으로 파악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우리는 대타자가 내보이는 한 부분을 절대시하여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가장한다. 지은이는 이 환상을 가로지르는 자리에서 새로운 주체가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환상을 역설로 받아치는 격이라고나 할까? 대타자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상징계 안에 실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정신분석학은 이리 보면 상당히 현실적이다. 정체성의 환상을 깨닫는 순간 정체성의 바깥이 보이는 역설이 정신분석학의 현실성을 제대로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o*****s 2018.07.03.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라깡의 욕망이론, 정체성과 동일화 새롭게 읽기 - 나의 타자
"라깡의 욕망이론, 정체성과 동일화 새롭게 읽기 - 나의 타자" 내용보기
철학에서 주체(S)와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담론은 플라톤 때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은 인간과 사물을 지상의 현실과 천상의 이데아로 나누어 사고했다. 그 인식은 노예제 사회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엘리트 중심의 철인 정치에 치우친 것이었다.수천 년간 계승되어온 플라톤의 사상은 19세기말 프로이트에 의해 일대 변혁을 겪게 됐다. 프로이트는 에고, 무의식과 이드라는 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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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주체(S)와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담론은 플라톤 때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은 인간과 사물을 지상의 현실과 천상의 이데아로 나누어 사고했다. 그 인식은 노예제 사회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엘리트 중심의 철인 정치에 치우친 것이었다.

수천 년간 계승되어온 플라톤의 사상은 19세기말 프로이트에 의해 일대 변혁을 겪게 됐다. 프로이트는 에고, 무의식과 이드라는 독창적인 개념으로 주체와 정체성을 새롭게 바라봤다. 이후 융과 라깡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은 외연을 대폭 확장됐다. 융이 무의식을 원형과 신화(상징) 속에서 파악했다면, 라깡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긴 틈과 그 원인을 찾고자 했다.

이 책의 원서 "Umbr(a)"는 뉴욕주립대(SUNY Buffalo)에 사무실을 둔 The Center for the Study of Psychoanalysis and Culture 주관으로 현대정신분석이론에 관한 논문을 실은 저널이다. 1993년 창간호 이래 매년 한 차례씩 2013년까지 총 18호를 발간했다(홈페이지 http://www.umbrajournal.org)에 가면 저널 원본을 볼 수 있다. 2019년 11월 현재 링크 끊김).

제호 "Umbr(a)"가 던지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프랑스에서 'umbre'는 '삶'을 뜻한다. 여기에 'e'대신 소대상을 뜻하는 '(a)'를 덧붙였다. '(a)'는 욕망의 대상을 뜻한다. 그래서 'umbr(a)'는 '욕망하는 삶'으로 옮길 수 있다.

'욕망'은 라깡의 중심 화두였다. 라깡은 나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나'라는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상상의 나와 실재의 나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다르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를까?

이 책은 '정체성/자기동일화'(Identity/Identification)라는 주제로 1998년에 간행된 "Umbr(a)"를 완역한 것이다. 7명의 연구자가 주제를 중심으로 발표한 글을 실었다. 이전에 다른 곳에 발표한 글을 다시 실은 것도 있고, 새로 쓴 글도 있다.

비록 20년 전에 나온 저널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라깡의 욕망이론과 체계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어 좋다. 편집자 마리나 드 카네리의 다음 글은 이 책의 핵심으로 삼을만하다.

 

"정체성 논쟁에서 정신분석이 기여한 점은 인간의 정체성이 복수성(plurality)뿐 아니라 시간성(temporality)과도 연관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정체성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므로 자기-동일화Identi-fication되는 과정이다. 주체는 시간 속에서 지속적인 진자 운동을 통해서 타자동일자(the same)로 만드는 무한한 과업의 수행과정에서 탄생한다. 그 결과 정체성은 더 이상 일자(oneness)나 완전한 현전(presence)이라는 측면에서만 사유될 수는 없다. 오히려 정체성은 현전과 비-현전, 큰 일자(the One)와 타자 사아의 틈새와 차이로 구성된다. 정체성의 두 극점이 동시에 맞물리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분리에서 무의식이 출현한다." (14쪽)

 

논문 중에서 주디스 버틀러로 대표되는 해체론자들의 논리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반박, 강박신경증을 소재로 욕망의 그래프를 명쾌하게 설명한 데이비드 메츠거(David Metzger)가 쓴 글은 꼼꼼하게 읽어보기를 권해 드린다.

특히 메츠거가 소개한 '욕망의 그래프'(70쪽, 아래)는 라깡의 욕망이론을 한 눈에 알기쉽게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아래 그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깡의 <실재계-상상계-상징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 모델로 적합하기 때문이다(그래프 출처는 『에크리』의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을 볼 것)

 

 

 

욕망의 그래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라깡의 욕망 이론을 알아야 한다. 우선 ($ ◇ a)의 환상 공식을 살펴보자. $는 '주체의 부재(또는 소외)', A는 '대타자', a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소대상)이다. ◇는 대상이 주체의 욕망을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결핍'을 뜻한다.

책에서 조엘 도르가 제시한 그림(131쪽, 아래)을 참고하면 좋다. 설명은 이렇다.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 우리는 결코 대타자에 도달할 수 없다. 대타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A로 구성해주는 결여의 기표에 의해서 항상 표지된다. 나머지는 엄격히 말하면 소대상a이며, 그 논리적 위치는 주체의 옆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소대상a는 환상의 단절을 가로질러 주체와 한 쌍을 이룬다[$ ◇ a]."(131쪽)

 

 

라깡의 욕망이론에는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가 있다. 욕망의 그래프 전체 모습은 실재계에 가깝다.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나뉜다. 대상을 실재로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다. 하지만 그 실재는 허구로 밝혀져 사라지거나 지워진다. 여전히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욕망이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을 아우르는 것이 실재계다.

욕망은 부족하거나 넘침의 대상이다. 주체 혹은 대타자의 욕망과 그 대상과는 거의 언제나 어긋난다.  주체의 욕망과 그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그 정체성이 분리된다. 그렇다면 그 틈과 차이는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삶과 정신은 그 올바른 접점을 위해 매순간 옳은 대상을 골라야하는 기로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우리의 선택을 위한 철학적 사고를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h*******c 2018.06.26.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