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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되고 진실한 문학, 『그리스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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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규의 『그리스 비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다루는 연구서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각 작품의 모티프, 작가의 특징, 사상적 배경, 고대인의 세계관, 그리고 현대적 해석의 지점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특히 각주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 제시된 분석이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신뢰를 주며, 고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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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규의 『그리스 비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다루는 연구서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각 작품의 모티프, 작가의 특징, 사상적 배경, 고대인의 세계관, 그리고 현대적 해석의 지점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특히 각주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 제시된 분석이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신뢰를 주며, 고대 비극이 오늘날의 철학적 논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 섬세하게 짚어준다. 그리스 비극이 지닌 밀도와 깊이를 성실하게 조망하는 책이다.


 처음엔 번역서에 가까운 개론서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줄거리 요약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작품의 의미와 맥락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책이었다. 이를테면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7인의 전사』는 약 30쪽에 걸쳐 다뤄지지만, 줄거리 소개는 그중 2쪽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저주의 원리, 에테오클레스라는 인물의 해석, 자유와 의지의 관계, 아이스퀼로스의 정치적 색채, 그리고 운명과 자유의 충돌 같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이 이어진다. 이 책은 그리스 비극의 문장의 문장들을 통으로 번역한다기보다,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해설 속에 녹여낸다.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다른 책들을 함께 펼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일부분, 『미학의 모든 것』 제23장 ‘비극’, 니체의 『비극의 탄생』 등을 펼쳐보며, 왜 철학자들이 그토록 그리스 비극에 빠져들었는지 체감했다. 비극 속에서 철학자들을 만나고, 또 철학자들의 시선으로 다시 그리스 비극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는 철학적 용어와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플라톤의 『국가』가 각주로 자주 인용되고,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하이데거, 헤겔, 벤야민, 베르낭, 에드워드 사이드까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해석이 등장하며,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곁들여진다. 그럼에도 전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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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상황에서, 플라톤의 법률이 등장한다.


그리스인에게 부모는 “신에 대한 존경과 동일한” 존경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플라톤, 법률 869b, 931a). 절대적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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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자유의지의 대립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성격이 그 운명”이라고 했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은 “그 주인공의 성격, 곧 그의 에토스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의 “특별한 성격 또는 에토스의 논리와 일치해서 나타난다”는 것. 이걸 레스키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주인공의 의지라는 하나의 동기와 그것을 제약하는 초인간적인 존재의 의지라는 또 하나의 동기, 즉 이중의 동기가, 주인공의 의지에 초인간적인 존재의 의지가 겹쳐저 극을 이끌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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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이아스의 적이었던 오뒤세우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아이아스의 매장을 관철시키는 최고의 친구로 변모한다. 신들은 어떤가. 한때 아이아스의 친구였던 신들이 이제 그의 적으로 변한다. 한때 아이아스를 돕고자 했던 아테나가 이제 아이아스의 오만에 분노하고 참혹한 보복을 가한다(770-777행). 이러한 변화 속에서는 소중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고 적에게는 해를 가하라는 영웅시대의 도덕 지침이 더 이상 정의가 될 수 없다. 친구를 적이 되게 하고 적이 친구가 되게 하는,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삶과 운명을 주관하는 재판관인 것이다.(책 240쪽) 아이아스에게 시간은 적이다. 그의 자살은 변화에 대한 도전이자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이라는 적에 대한 도전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존재의 근본원리는 상반된 것들이 상대에게 번갈아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낮이 밤에, 그리고 다시 밤이 낮에 그 자리를 물려주듯, 우주는 동등한 힘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번갈아 출현함으로써 그 균형을 유지한다는 주장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상반된 양쪽 중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다른 쪽을 희생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정이며, 희생당한 쪽이 "필연적"인 반동을 일으켜 양쪽의 균형이 유지된다. 상반된 양쪽 중 한쪽이 적당한 몫 이상을 차지하면 다른 쪽이 "벌을 내리고 보복을 가한다." 양쪽이 균형을 되찾을 때 비로소 그 보복이 완성된다. 이때 시간은 양쪽의 관계가 균형적인가를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상반된 양쪽 중 한쪽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이러한 변화를 유도하는 시간은 재판관과 같다. 시간은 신과 같은 존재다.


이처럼 철학이 단지 인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장면을 해석하는 언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간과 운명, 의지 같은 개념들이 서사 안에서 녹아들며, 플라톤이나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익숙한 이름을 예상치 못한 맥락에서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그리스 비극은 개인의 몰락을 그리는 동시에, 공동체 전체의 상실과 애도를 그리는 장르다.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운명으로 머물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공동체의 균열로 확장된다.이러한 특징은 1장,  『페르시아인』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아이스퀼로스는 승자의 입장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한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비극의 본질을 묻는다.


페르시아의 땅, 아니 어머니 아시아의 땅이 낳고 길러낸 “꽃”(anthos, 59-62행)인 전사들이 전장으로 떠난 뒤 “아시아 전체……가 슬픔에 젖어 그들을 그리워하며, 부모들과 아내들은 그들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자꾸만 늦어지는 귀환에 몸을 떨고 있다.”(58-64행).

그리스에서 죽은 페르시아 전사들이 파도에 찢긴 채 “… 바다의 소리 없는 자식들”인 고기떼들의 밥이 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상실의 슬픔을 전하며, 이 비극에서 파멸하는 것은 크세르크세스 개인이 아니라 ‘아시아’라는 공동체 전체다.

그래서 코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패배가 아닌, 전 아시아의 전사들과 그들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덧없음, 그리고 그 덧없음의 “운명”에 크게 슬퍼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사실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진실”이 아니냐고 말했다.(Sigmund Freud, “On Transience”,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James Strachey 편역(London:Hogarth Pr., 1953~74), 14:305쪽.)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의 덧없음, 덧없음의 운명은 그 자체로 고통이면서 동시에 진실이다. 그러한 고통의 진실에 과연 어떤 도 다른 진실이 개입될 수 있는가.

갈기갈기 찢긴 옷을 걸친 크세르크세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고통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이라고.

지금껏 제국의 주체들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우리에게 크세르크세스의 옷처럼 찢긴 역사, 고통의 역사 외에 무엇을 남겼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통곡뿐인, 죽은 자의 침묵과 산 자의 통곡이 고통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 역사의 현장에서, 아이스퀼로스는 그러한 고통을 애도하는 시선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문체가 이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쉽고, 흥미롭고, 문장이 아름답다. 저자는 서문에서 문학의 역할은, "전쟁 · 폭력 · 억압으로 인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채 죽어간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한낱 포말처럼 사라져간 숱한 존재를 망각의 바다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 역시, 문학에 대한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이를 감성적인 문체로 그려내는 책이다. 읽으면서 비극의 내용 자체에 놀라기도 하고, 이를 해석하는 연구들과 저자의 생각에 감탄하고, 몇몇 문장에 감탄했다.


다만,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담백한 문장들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반복되는 감성적인 문장들이 피로하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문장 사이에 쿨타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명쾌하게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학문에 대한, 그리스 비극에 대한 저자의 깊은 정성과 애정이 드러나는 책임이 느껴졌기에 재미있게 읽었다. 


고대에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시기인 만큼, 그 모호함 속에서 오는 어떤 신비로움이 있다. 우리가 흔히 신화는 많이 읽지만, 비극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죽은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는 사자'로서, 그리스 비극은 가장 오래된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스 비극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에 대한 학술적인 활용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h********5 2025.07.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조맛집, 그리스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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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통해 분노가 극한에 이를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절대추상체가 되어, 분노 자체가 자신이 되고, 복수 자체가 자신이 되고, 저주 자체가 자신이 되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타자가 되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비극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P525   #1.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연극으로 알려진 그리스 비극. 고대 그리스 최대의 행사였던 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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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통해 분노가 극한에 이를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절대추상체가 되어, 분노 자체가 자신이 되고, 복수 자체가 자신이 되고, 저주 자체가 자신이 되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타자가 되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비극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P525

 

#1.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연극으로 알려진 그리스 비극. 고대 그리스 최대의 행사였던 디오니소스 축제 메인 이벤트였던 비극들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또 하나의 장르로 분류되며 현재까지 전해진다. 정확한 시점조차 가늠할 수 없는 수천년 전에 창작된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며 많은 이야기의 원형을 제공하고 있다. 이미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접한 우리에겐 너무도 단순하고 유치하며 식상한 서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 또한 그리스 비극에 최초로 제시한 서사적 모티프들이 후대에서 변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있거나 만들고 싶은 사람,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천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봐야 한다는 상투적인 문장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2.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리스 비극은 읽기가 참 쉽지 않다. 현대극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품이 전개되는 데다가, 신화적 배경 지식을 너무 많이 요한다. 주인공이 처한 운명과 저주들을 둘러싼 신화적 요소들은 당대의 관객들에겐 배경지식이었기에 전혀 설명이 되어있지 않지만, 21세기에 읽는 우리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임철규 교수님은 이 책을 통해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독자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배경지식들을 알차게 담아냈다. 이 책의 분량 자체는 쉬이 도전할 수 없을 만큼 두껍긴 하나, 이 책 한 권 속에 15편의 희곡과 각 희곡에 대한 수많은 석학들의 주석서 수십권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권의 책으로 수십 권을 읽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이 책이 최고의 요약서이자 효율성 끝판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3.
이 책을 읽으며 '역시 그리스 비극은 친절한 해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곱씹었다. 수천년 전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들에 대해 임철규 교수님은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럽게 서술해간다. 특히 '애도'라는 키워드에 매우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우리의 삶을 구성하도록 한 앞선 시간의 누군가를 애도하는 자세가 비극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러한 애도의 마음을 오랜 시간 학습해왔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극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내재화된 것이리라. 오늘날의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의 해피엔딩을 바라고, 새드엔딩이 나오면 불쾌함을 표하면서도 그 엔딩을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것 또한 이것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새드엔딩에 끌리는 알 수 없는 마음이 궁금하다면 <그리스 비극>에 도전해보라.
-
*한길사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d********a 2022.07.2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영혼을 만져주는 글을 쓰시는 분, 임철규!
"영혼을 만져주는 글을 쓰시는 분, 임철규!" 내용보기
이 분 작품을 읽어 본 것은 내 인생 최고의 구원이었다.시도 소설도 아닌 그렇다고 에세이도 아닌, 그저 비평문이었을 뿐인데,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정확하게 또 극명하게 전달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마치 학자이기 이전에 영혼의 치유사 같다. 그래서인지 그 감탄스러운 지력과 글쓰기 능력은 다만
"영혼을 만져주는 글을 쓰시는 분, 임철규!" 내용보기
이 분 작품을 읽어 본 것은 내 인생 최고의 구원이었다.
시도 소설도 아닌 그렇다고 에세이도 아닌, 그저 비평문이었을 뿐인데,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정확하게 또 극명하게 전달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마치 학자이기 이전에 영혼의 치유사 같다. 그래서인지 그 감탄스러운 지력과 글쓰기 능력은 다만 그의 깊은 사유와 통찰을 거들 뿐인 것 같다.

그 분의 글을 읽었던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감히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추천의 바람으로 댓글을 남기는 이유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임철규작가님 생전에 꼬옥 만나뵙고 직접 강의를 듣고 싶다.
b***c 2018.06.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