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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북켄드 캠페인 참여 리뷰1:조선의 공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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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역사에서 패자들이 기록을 남겼다면, 승자들의 기록과 어떻게 달랐을까 하고 말이다. ‘공신을 통해 본 전환기의 조선의 역사- 조선의 공신들(이하 조선의 공신들)’ 은 어떻게 보면 공신이야 말로 조선 역사에서 승자에 속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싶었다. ‘조선의 공신들’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조선 오백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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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역사에서 패자들이 기록을 남겼다면, 승자들의 기록과 어떻게 달랐을까 하고 말이다. ‘공신을 통해 본 전환기의 조선의 역사- 조선의 공신들(이하 조선의 공신들)’ 은 어떻게 보면 공신이야 말로 조선 역사에서 승자에 속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싶었다.

‘조선의 공신들’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조선 오백년 역사를 통틀어 태조 때 개국공신을 시작으로 모두 스물여덟 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쟁이나 반정, 역모 등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는 혼란기에 공신이 배출되는 까닭에 혼란기 공신들의 활약상이나 그 책봉 과정이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극의 절정 부분을 보는 듯했다.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고 난 뒤 논공행상의 명분으로 받는 공신들의 특권은 가문의 영광이라 할 정도로 엄청났다. 명예는 물론이고, 토지나 노비를 받았고,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모반만 아니면 죄를 지어도 감형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 특권은 본인 당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속이 되는 세습특권이었다. 공신의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에 올라 조선왕조의 중심세력으로 활약했다. 또 명문화된 특권 외에도 국가의 요직을 장악하고, 왕실의  혼인이 주로 공신 가문이 대상이 되는 등 다양한 특권을 누리게 됨으로써  공신들이 조선사회 최고의 기득권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조대의 공신들이 훈구세력이 되면서 훗날 사림들과 첨예한 갈등을 빚으며 사화를 일으킨다는 점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런만큼 공신들이 녹훈되는 과정에서나 그 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소한 사건을 역모로 부풀려 보고해 공신이 되려고 한 벼슬아치가 있었을 정도였다. 자손대대로 가문의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공신은 양반들이 탐낼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숙종대 보사공신의 경우에는 서인과 남인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책봉과 삭제가 반복됐고, 경종 때에는 목호룡이란 인물 달랑 1명 그것도 3등 공신으로 녹훈된 경우도 있지만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롭게 했던  목호룡을 역모혐의로 처형하고 만다. 목호룡의 공신 자격이 취소된 건 당연지사였고. 스물여덟 차례 책봉된 공신 중 여섯 차례는 아예 삭제되기도 했는데, 집권 당파가 바뀌거나 왕의 입장이 바뀌는 경우에는 그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공신책봉이 왕권 계승이나 당파 등 정치적 입김에서 인맥에서 자유롭지 못해  이괄의 경우는 2등 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조선시대 공신으로 국가나 왕실이 위기를 넘길 때마다 그 위기를 넘기는데 일조한 사람 중 소수를 책봉하는 것이 지금까지 언급했던 정공신이라면 평화 시에 책봉되는 공신으로는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이 있었다. 왕과 함께 종묘에 모셔지는 공신이 종묘 배향공신이라면, 공자를 모신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공신이 문묘배향공신이었다.

조선시대 통틀어 종묘 배향공신은 세종대의 황희나 효종의  송시열, 김상헌 등 모두 95명에 지나지 않았고 문묘 배향공신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등 모두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공신은 유교적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조선사회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문묘 배향공신은 한국 유학사와 학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공신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니 조선 선비들이 이르고자 했던 최고의 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원히 제사로 받들어지는 불천위의 꿈과 자손대대로 세습되는 특권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니, 공신은  조선 양반들의 욕망을 적극 반영한 포상책이었던 것이다. 공신으로 책봉된 인물 중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운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공을 세웠던 무신은 이 순신 등 몇 명 되지 않는다. 공신의 대부분은 문신이었고, 그것도 왕위 계승이나 역모와 관련해서 공신이 배출되기에 공신이 조선적 가치에 바탕한  대의명분에 입각한  평가라기보다는 정권 다툼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 같아서 어떤 면에선 불편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니 공신들이 격변기에서는 조선정국을 주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백성의 삶에 기여했다거나,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새 질서를 창조하는데 앞장섰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에는 저어하게 된다.  공신들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에 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인색한 평가를 하게 된다. 더욱이  후기로 갈수록  당색에 영향을 받고, 가문의 영광과 기득권을 탐하고 그것에 안주하게 되면서 조선의 몰락을 재촉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순 없어 보인다.


e****0 2009.04.05. 신고 공감 0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