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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입과 진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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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전 『뿌리에게』가 출판됐다. 이 첫 시집에서 나희덕 시인의 관심사는 대개 둘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학교와 사회다. 전자라면 그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국어 교사였다는 사실과 관련 있겠고, 후자라면 그가 교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회인이라는(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연관 있겠다. 그러나 학교도 흔히 말하듯 하나의 사회에 다름 아니라면,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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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전 『뿌리에게』가 출판됐다. 이 첫 시집에서 나희덕 시인의 관심사는 대개 둘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학교와 사회다. 전자라면 그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국어 교사였다는 사실과 관련 있겠고, 후자라면 그가 교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회인이라는(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연관 있겠다. 그러나 학교도 흔히 말하듯 하나의 사회에 다름 아니라면,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이 겪은 슬픈 학교의 모습도, 온갖 ‘억압’ 그 자체였던 사회의 모습도 잘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수렴한다. 바로 ‘80년대’. 이 시집이 발산하는 힘은, 한 시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치열한 방식으로 80년대를 살아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이른바 돌멩이와 최루탄의 시대였던 당시를 시인 나희덕은 어떻게 통과했나. 이 시편들이야말로 80년대의 가장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 중 하나일 터, 그로부터 삼십 년 후의 세대에게 이 시집이 그 무슨 역사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연한 것들이 당시에는 당연하지 않았고, 지금의 당연함은 과거 세대가 당당히 싸워 이긴 결과로 얻어낸 것이므로, 그 ‘승리한 전쟁의 역사’를 한 시인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일도 물론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삼십 년 전 스물 여섯의 한 교사가 제 몸의 안팎으로 겪어 낸 80년대의 역사를 체감하는 일과 다르지 않겠다. 그리고 그 간접 체험은 80년대를 겪어 본 적 없는 (나와 같은) 90년대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특히나 소중하다. 육체적인 것만이 투쟁이 아니다. 당시에 어떤 이들은 해야 할 말을 하는 방식으로도 투쟁했다. 아마도 이 투쟁 속에는 그녀가 지키려 했던 하나의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대부분의 시에서 그 진실은 문학적 기교보다는 온전한 진심을 통해서 전달된다. 잘만 읽는다면, 시 속에 떠다니는 80년대의 진실 하나를, 그리고 그 진실에 들러붙어 있을 시인의 어떤 진심 하나를, 우리가 건져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내가 건져낸 것들이다.

 

 


 

 

1. 진실한 입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두세살부터

영재교실에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

하루 동일 바쁘신 아이들

 

30평은 30평끼리

17평 주공은 17평 주공끼리

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짝을 맞추어 잘 노는 아이들

 

프라이드를 타고 온 친구의 아버지를

비웃을 줄도 아는 콩코드의 아이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 줄 테니 저 공 좀 건져달라고

벌써 유능하게 사람을 부리는 사장님의 아이들

 

뛰놀 만한 언덕 하나 없어

5층 아파트 옥상에서 연을 날리며

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

 

그 위태로운 하늘 끝,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쓸쓸한 어깨 위를 맴돌고 있다

-44~45면, 「어떤 아이들」 전문

 

이 시가 80년대 진실을 보여 주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겨우 말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영재 교육과 각종 학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 잘 사는 아이들은 못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심지어는 못 사는 아이를 “비웃을 줄도 아는”, 그런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늙어버린 아이들일까. 6연의 “연을 날리며/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이란 구절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늙어가는지도 모른 채 동심을 날려 보낸다. 이 연날리기는 그래서 슬프다.

이 쉽고 단순한 시가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분명 이 “아이들”이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내 모습이었거나, 지금 내 아이의 모습일 저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리얼’해서 어떤 우회도 거치지 않고 곧장 달려와 마음에 꽂히는 것이다. 2연의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이라는 문장을 읽는 일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아이들”의 모습은 하나의 폐허다. 그 폐허의 한복판에서, 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교사의 운명은 시인을 또 한 번 쓸쓸하게 만든다. 다른 시를 보자. “팍팍한 땅에 심겨지고자 하는 나무,/그런 네가 돌아오려는 이곳은/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란다.”(「학교로 돌아오려는 제자에게」 중.) 이 “팍팍한 땅”, “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 그저 학교 뿐이겠는가? 세상이 다 그렇다. “네가 태어나 살아갈 세상은/이처럼 험한 돌밭에 눈물바다인데” (「태교」 중.) 뱃속의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혹하다. 이 참혹한 현실을 시인은 아파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쓴다. 왜? 그럼에도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 진실이란, 예컨대 이런 문장들로 붙잡힌다.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70면, 「꽃병의 물을 갈며」 부분

 

강철로 된 듯한 문장들. 이 문장들이 야생동물을 우리에 가두듯 진실을 포획한다. 그녀의 시 쓰기 작업은 아마도 이 외면받는 진실들을 사냥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그녀가 말했듯이, "만물은 녹아내려/고통의 강물이 흐르는데"(「소경의 노래」 중.) 눈 먼 자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없는 말을, 혹은 해서는 안 될 말을 꼭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마침 「소원」이라는 시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교사가 된 아들에게 그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고통과 대면할 용기가 있는 자만이 그 '진실한 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용감했다.

이 진실들은 그러나 과거의 진실만에 그치지 않는다. 저 아픈 진실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이라는 점이, 우리가 곰곰이 곱씹어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위에서 이 시들이 ‘80년대 진실의 한 사례를 보여 줄 것’이라고 썼지만, 사실 의문이다. 이 시들이 보여주는 풍경이 80년대의 현실을 정확히 포착했는지가 의문인 게 아니라, 과연 이 풍경들이 80년대에만 해당될 뿐인지가 의문이다. 삼십 년 전에 쓰인 저 슬픈 진실들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 다름 아니다. 시 속의 그 “아이들”은 지금도 살고 있다.

 

 


 

 

2. 진심의 시

 

진심은, 그것이 진정한 진심이라면, 언제나 기어코 전달되고야 마는 것 같다. 이 시집을 아무리 읽어 봐도 이 시인의 목소리가 꾸며 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참다 참다 못해 끝내 터져 나오는 목소리랄까, 최후의 외침이랄까, 마침내 토해내는 비명 같달까. 한 단어로 써야 한다면 결국 '진심'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엇이 이 시들을 구성한다. 나희덕의 첫 시집에서 그녀의 시들은 그 무엇보다도 진심의 시라고 불릴 만하다. 발문을 쓴 정현종 선생은 "나는 늘, 자기가 쓰는 바를 안팎으로 살아야 좋은 글이 된다는 말을 해 오고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127면)라고 말하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바로 '육화'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자기 스스로 겪은 게 아니라 뉴스나 소문을 듣고 쓴 작품들은 (…) 섬세한 느낌과 육화에 이르지 못하고…", 128면) 이 단어는 정현종 선생뿐 아니라 나희덕 시인의 입에서도 튀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집의 '후기(後記)'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134면) 두 시인(정현종과 나희덕)이 동시에 말하고 있는 저 '육화'란 무엇이기에?

시를 써본 적은 없어도 시 쓰는 일이 '내 얘기'를 하는 일임은 알고 있다. 꼭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이거나 해야만 하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의 시는, 나의 이야기이자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여야 한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백 명의 시인이 시를 쓴다고 하면, 백 가지의 전혀 다른 시가 나와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것이고, 같은 이유로 단 한 사람의 시도 다른 사람의 시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는 시인이 사물을, 타인을, 혹은 세계를 충분히 제 나름으로 '육화'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육화란 바로 그런 것, 즉 시와 삶을 일치시키겠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온 대로 쓰겠다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살아온 것 이상으로는 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 만큼 쓴다"는 말은 시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아닐까. 이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아니 한 줄의 문장조차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태도다.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창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

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곳은

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

이 어둡고 할일 많은 곳에서

師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

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 들고 다시 볼 것인가.

하늘에 대고 마음에 대고 쓴

수많은 사표들이 지금 눈발 되어 내리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

교실문을 가로막는데

나는 차마 종이에 옮겨적을 수가 없다.

붉게 퇴진하는 태양처럼

장렬한 사표 한 장 쓸 수는 없을까.

-54~55면, 「辭表」 전문

 

참 눈물겹도록 진심어리다. 특히 화자가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이라 말하는 구절은 그 심정을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쓸 수 없었을 문장이리라. 화자는 교사이자 어머니이다. 밖으로는 교사가 되어 아이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해야 하겠고, 안으로는 한 명의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교사로서 하는 일과 어머니로서 하는 일이 어딘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 시를 읽고 나면 그 두 일이 현실적인 면에서 어떻게 상충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교실문을 가로막는데"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상충은 교사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나와 같은 독자가 보기에도 지나친 딜레마로 보였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심지어 '교사'와 '어머니'는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딜레마의 한복판에서, 화자의 고민은 진심을 통해 고백된다. 화려한 수사법도 복잡한 비유도 다 필요 없다는 듯 제쳐두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할 뿐인 이 순박한 화법. 여기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진심을 진심어리게 털어놓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을 탈이데올로기적 순수 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순화해서 쓰자면 이렇다. 그녀의 시는 진심의 시다. 그녀가 故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시에서 "우리에게 땅이 없다/그대의 시신을 안고 도망쳐 나왔지만/따뜻하게 묻어줄 땅이 없다"고 말할 때(「그대를 어디에 묻으랴」 중.)에도 그녀는 진심이고,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 "동료가 해직당하고 선배가 잡혀가는 중에도/(중략)/나는 여기에 남아 있구나"(「손톱」 중.)하며 부끄러워할 때도 그녀는 진심이고, "네가 듣지 못하는 노래,/이 노래를 나는 들어도 괜찮은 걸까/네가 말하지 못하는 걸/나는 감히 말해도 괜찮은 걸까"(「手話(수화)」 중.)라며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을 보일 때 역시, 그녀는 진심이다. 늘 진심이다. 자신이 아는 것만 쓰고, 겪은 것만 쓰며, 자신이 '산 만큼' 쓰기 때문에 그렇다. '육화'된 것만 쓰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늘 진심이어야지만 쓸 수 있는 시를, 그녀는 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그런 종류의 진심은 예외 없이 상대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어딘가에 제대로 도달한다.

좋은 시들이 너무나 많은 시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많은 '좋은 시'들 중 한 편을 함께 읽으며 마치자. 위에서도 인용한 바 있던 「소원」의 일부를 옮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

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교사가 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시를 쓰거라,

아버지의 이마 위로 피어오르는 이 소원이

얼마나 멀고도 아픈 길 끝에 나온 것인지

진정으로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저를 가르칩니다.

-103면, 「소원」 부분

 

이 첫 시집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원을 이루셨다.

 

k********n 2022.05.14. 신고 공감 23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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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뿌리에 입을 대고 목청을 기른 시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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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전에 발간된 나희덕 시인의 첫 시집 『뿌리에게』를 지금에야 비로소 읽으며, 나는 내가 386세대임을 오랜만에 상기한다. 나보다는 두 살이 어린 30대 중반의 나희덕 시인 역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 즉 386세대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386세대의 날개이며 동시에 멍에이기도 했던 이념, 즉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뿌리에게』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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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전에 발간된 나희덕 시인의 첫 시집 『뿌리에게』를 지금에야 비로소 읽으며, 나는 내가 386세대임을 오랜만에 상기한다. 나보다는 두 살이 어린 30대 중반의 나희덕 시인 역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 즉 386세대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386세대의 날개이며 동시에 멍에이기도 했던 이념, 즉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뿌리에게』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을 드러내는 그녀의 방식은 386세대의 전형적인 방식인 대자보처럼 선동적이지 않으며 또한 투석전처럼 격렬하지도 않다. 그녀는 슈퍼마켓에서 무심코 미국산 햄 한 덩어리를 사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할 뿐이며(<햄 한 덩어리>), 절구 속에서 하나씩 으스러지는 마늘처럼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운맛으로 한번 톡 쏘아주는 일뿐이라고 생각한다(<마늘을 찧으며>). 이렇듯 그녀가 세상을 향해 쏘는 언어의 화살은 모순과 억압의 현실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즉 다른 많은 시인들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데올로기가 날개가 아니라 멍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발언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시가 ‘미움과 고통이 없이도 활짝 피어나는 헛기침’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기침>). 그녀는 자신의 시가 고여 있는 가래(병들고 추악한 현실)를 폭로하는 기침, ‘단번에 모든 것을 터뜨려주지는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목을 치밀고 올라’와 ‘끈덕진 활화산’처럼 외치는 기침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기침>). 하지만 그 기침은 그녀의 체질과는 맞지 않고 또한 자기소모적인 것이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햇살이 들어박힌 과녁처럼 그을리고 상처난’(<길>) 그녀는 자신의 시를 새롭게 키워낼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 곳은 바로 흙의 세계였다. 깊은 땅 속에서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뿌리에게 영양을 공급해주는 생명의 원천이 되며 동시에 자신의 살을 부스러뜨리고 피를 흘려보냄으로써 키워낸 뿌리는 흙에게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이 된다(<뿌리에게>). 뿌리와 흙의 이러한 주고받음의 세계는 마치 행복하게 엄마의 젖을 빠는 아가와 엄마 사이에 오고가는 따뜻한 눈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정현종 시인은 이것을 ‘모성적 따뜻함’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여러 시편에서 발견되듯이 이는 나희덕 시인의 천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한줄기 빛도 없는 흙 속에서/ 나무뿌리에 입을 대고 목청을 기른 시인’(<매미>)이라는 시구는 온전히 그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 터이다. 그러나 시인의 목청이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섯 해의 긴 침묵을 견딘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매미>). 이렇게 오랜 세월의 인고 끝에 얻은 목청으로 노래할 때 그녀의 시는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밑둥만 남은 그루터기의 나이테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도끼로 찍히고/ 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 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 나이테가 있다’고 시인이 노래할 때(<겨울산에 가면>), 그루터기의 나이테는 돌연, 모든 것을 희생한 후에도 주름 많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늙으신 어머니의 얼굴로 바뀐다. 이 변신의 연금술을 가능케 한 상상력이 교육현장에서 펼쳐질 때,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서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밥그릇에 담긴 밥알들로 변신하는 실로 엉뚱하면서도 진기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시인은 ‘한 그릇의 밥을 푸면서/ 한 알도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사,/ 더러는 발밑에 떨어진 것도 주워담아/ 제 입에 넣고 맛있게 씹을 일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한 그릇의 밥>). 엉뚱해 보였던 이 진기한 변신은 그 변신이 담고 있는 진정성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일상에서 철학을 이끌어 내는 시인의 이러한 솜씨는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 연유함이 분명해 보인다. 시집 말미의 후기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있어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인 것이다. 즉, 그녀는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살고’ 있는 것이다. 꽃의 요란스럽고 드러난 향기에 취하기보다는 과일(열매)의 은은하고 드러나지 않은 향기를 닮고 싶다는 그녀의 시가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오를 때까지’(<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나아가는 것은 그녀의 희망이자 또한 같은 386세대로서 이제 막 그녀의 독자가 된 나의 희망이기도 하다.

[인상깊은구절]
끓어오르는 가래는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단번에 모든 것을 터뜨려주지는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목을 치밀고 올라오면서 끊임없이 가래의 고여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고백이, 기침이다. 사월인데 어디에 가나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도 무더기로 흔들리는 꽃잎 속에도 엎드려 울고 있는 친구의 입김 속에도 그것이 웅크리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염이 되고 감염될 때부터 우리는 끈덕진 활화산처럼 기침을 한다, 오직 더러운 가래를 나누어 가진 까닭에. 그러나 끝내 감염되지 않는 기침도 있다. 끓어오름이 없는 외침, 그것은 미움과 고통이 없이도 활짝 피어나는 헛기침이다.
c*****t 2002.06.0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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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일상에서 느끼는 자연의 위로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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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씨는 1966년생, 나와도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젊은 시인이다. 게다가 이 '뿌리에게'라는 작가의 첫번째 시집은 1991년, 20대 중반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좀 미흡해 보이는 시들도 보였다.(내가 시에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젊다는 데에서 오는 미흡함을 너그럽게 넘긴다면 젊은 사람이 참 잘쓴 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은 몇가지 유형의 시들로 나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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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씨는 1966년생, 나와도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젊은 시인이다. 게다가 이 '뿌리에게'라는 작가의 첫번째 시집은 1991년, 20대 중반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좀 미흡해 보이는 시들도 보였다.(내가 시에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젊다는 데에서 오는 미흡함을 너그럽게 넘긴다면 젊은 사람이 참 잘쓴 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은 몇가지 유형의 시들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자연에서 일상을 투영한 듯한 시와 모성/부성에 관한 시들, 두번째는 교사로서 느끼는 것들에 대한 시, 세번째는 약간 전반적인 사회,이념의 문제에서 나온 시. 난 첫번째 유형의 시들은 좋았다. "아버지에게"는 그녀의 아버지에 얽힌 개인사를 보여주면서도 잔잔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는 시여서 좋았다. 그런데, 그녀의 시어들은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씌여진 듯하다.(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눈물,상처,슬픔,고통,시름,젖은,비,즙,피,울먹이는 / 어두움,검은,음지,썩어감,버려진,석탄가루 / 햇살,흙,뿌리... 또한 약간의 도식이 보였는데, 이러한 유형에 해당하는 시들이 꽤 있었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나" => "자연의 생명력,고통의 인내함을 봄" => "위로와 동시에 도전받음" 교사로서 쓴 시들을 보면서는, 비슷한 연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느끼는 공감이 있었다. "공책검사"라는 시는 특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교육환경속에서도 남아서 지킬 것을 다짐하는 시를 쓰고서도, 작가는 3년간의 교사생활을 끝으로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왜 그만 두었을까? 그만큼 어렵고 여린 양심을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아서? 사회/이념적인 문제의식속에서 나온 시들중 몇은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어거지로 짜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고, 미숙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빈들의 허수아비"라는 시는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을 연상시켰고, "마늘을 찧으며"라는 시도 좋았다. 또 한가지.. 기독교인으로서 배경에서 나오는기독교적인 느낌을 주는 시도 몇편 있었다. 뿌리에게라는 시에서는 "흙(자연)=>어머니(모성)=>그리스도" 와, "뿌리=>자식=>인간"의 대비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특히 '길'이란 시는 마음에 들었다. 그대(그리스도)=>길이 되는 사람들(그리스도인)=>나로 확장되어 가는.. 한번 감상해 보시길~

[인상깊은구절]
길 길 아닌 곳에 이르러 그대는 몸을 눕혀 나의 길이 된다 한 발 디뎌 서면 이미 길이 아니기도 한 신기루, 나는 멀리 달아나 박쥐들이 사는 광야로 바위 밑으로 그대가 날 시험하려는가 보리떡 한 덩이로 저 거친 광야를 푸른 보리밭으로 만들 수 있노라고, 그저 믿고 기다린다면 그 위로 풍성한 새떼를 놓으리라고 희망의 그물 던지며 기다리는데, 땀 흘려도 길은 자꾸 희미해지고 수많은 햇살이 들어박힌 과녁처럼 그을리고 상처난 사람들이 돌아온다, 그들의 고단한 눈썹 위로 어디 길이 보이나 길 없는 곳에 이르러 마침내 그대는 가시밭에 몸을 눕혀 그들의 길이 된다 보리떡 깨물며 부르는 노래 있어 엎드려 길이 되는 사람들 속에 보리밭 푸르러가고, 이제는 내가 길이 된다 광야에서 마을까지 닿아 있는 멀고도 가까운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