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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는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 문병란, 「직녀(織女)에게」
견우가 직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연인을 향해 견우는 “이별이 너무 길다”고, “슬픔이 너무 길다”고 이야기한다. 이별이 너무 길면 슬픔도 너무 깊어지는 법이다. 두 사람은 왜 못 만나는 것일까? 두 사람의 뜻이 아니다. 옥황상제가 명령한 일이다. 옥황상제는 두 사람이 할 일을 등한시하고 사랑에만 빠져 있자 이런 벌을 내린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만날 날을 손꼽으며 일을 한다. 시인은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라고 쓰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오작교가 생기면 두 사람은 은하수를 건너 만날 수 있다. 일 년에 한번이라니!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견딜까? 견우는 직녀에게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야 하는 시기라고 외친다. 스스로 노둣돌을 놓지 않으면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면도날 위를 걸어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시인의 말마따나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이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은 무엇을 했을까? 직녀는 몇 번이고 실을 감고 풀었다. 연인을 향한 그리움으로 직녀는 베를 짰고, 짠 베를 다시 풀어서 또 베를 짰다. 일을 하지 않으면 연인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견우라고 다르지 않다.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라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견우는 일을 하며 직녀를 향한 그리움을 삭여왔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라는 시구가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별은 슬픔을 낳는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것으로 어떻게 그 슬픔을 풀 수 있을까? 슬픔은 다시 이별로 이어지고, 그 이별은 다시 더 큰 슬픔으로 이어진다. 사방을 은하수가 가로막고 있다. 오작교가 생기지 않는 한, 두 사람이 은하수를 건너는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연인이 연인을 행해 손짓을 하고 있다.
은하수를 건너면 다른 세상이다. 이쪽에 있는 연인이 저쪽에 있는 연인을 만나려면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는 상태에서 은하수를 건너면 어떻게 될까?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에 표현된바, 은하수를 건너는 일은 곧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견우와 직녀는 만남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고 그들은 다짐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건너야 하고, 노둣돌이 없어도 건너야 한다. 은하수를 건너는 일은 견우와 직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다. 시인은 왜 이토록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별은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면 이 세상은 한이 맺혀 원망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수밖에 없다.
까치와 까마귀가 오작교를 만들지 않으면 가슴과 가슴을 이어 노둣돌을 놓으면 된다. 노둣돌도 안 되면 맨몸으로 은하수에 뛰어들면 된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은하수를 건널 수 있을까?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라고 시인 또한 쓰고 있지 않은가. 저 멀리서 손짓하는 연인을 향해 견우는 기꺼이 은하수로 뛰어든다. 은하수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다. 경계가 서면 세상은 질서가 잡힌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왜 질서를 중시하겠는가? 누군가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질서는 허물어진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로 뛰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이 은하수를 건너도록 권력이 가만 놔둘 리 없다. 권력은 어떻게든 질서를 지키려고 하고, 경계를 넘은 이들은 어떻게든 그 질서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경계를 지키려는 자와 경계를 넘어서려는 자는 은하수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싸우지 않고 어떻게 목적을 이룰까? 경계를 넘은 이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절실한 사랑이 있다. 절실한 사랑은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개인에 한정되는 사랑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는 자리로 뻗어 나가는 사랑이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죽음이 기다리는 땅으로 몸을 던진다. 목숨을 걸고 이루려는 사랑을 어떻게 개인의 사랑으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면도날 위라고 해도 상관없다. 은하수에 뛰어드는 순간 이미 죽은 몸이 면도날 위라고 머뭇거릴 리 없다. 견우와 직녀는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진 노둣돌을 밟으며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라는 시구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연인들은 만나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야 이 세상을 가로지르는 슬픔이 끝난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수십 년 세월을 보낸 우리 민족의 아픔이 떠오르지 않는가? 견우와 직녀는 오늘도 은하수 이쪽저쪽에 서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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