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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리겠니 - 고재종, 「면면함에 대하여」 ‘면면(綿綿)’은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은 무엇을 이러한 면면함의 상태로 표현한 것일까? 1연에서 시인은 “저 동구 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느티나무의 울음소리는 겨울이라는 삭막한 풍경과 맞닿아 있다.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던 계절에 느티나무는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고 지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한겨울에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느티나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라고 시인은 쓴다. 상처에서 울음소리가 피어난다. 울음으로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새파란 딱지로 내려앉은 상처가 한겨울 삭풍과 맞서는 느티나무의 상황을 에둘러 보여준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느티나무와 더불어 살던 사람들은 이제 하나둘 마을을 떠나고 있다. 농촌 생활이야 뻔하지 않은가. 도시화라는 대세에 밀려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고, 나이 든 이들만 남아 마을을 지킨다. 노인들마저 떠나면 느티나무가 있는 이 마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잔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티나무는 외친다.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치는 느티나무의 애절한 하소연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느티나무는 소리 죽여 흐느낀다. 차가운 바람이 느티나무 가지를 후린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난 자리에는 삭풍을 맞는 느티나무만이 외로이 서 있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지탱하는 삶이 한없이 외로울 법하다.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처럼 느티나무도 결국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4연에서 시인은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이야기하고 있다. 겨울이 가고 새 이파리가 돋는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마을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마을에 남았다. 삭풍을 맞으며 푸르게 울던 느티나무는 새 잎이 돋는 오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가 수많은 이파리로 다시 피어난다. 겨울의 찬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제 몸을 놓아버렸다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내뿜을 수 있을까? 상처 자리마다 이파리가 피어난다. 온몸이 상처였던 느티나무다. 그러니 온몸으로 이파리가 피어난다. 느티나무가 내뿜는 저렇듯 생생한 광휘는 온몸을 뒤덮은 상처로부터 뻗어 나온다. “푸르른 울음소리”로 겨울의 삭풍을 견디던 존재는 이제 온전한 생명으로 생생한 빛깔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앞들에서 모를 낸다. 사람들이 허리를 펴자 느티나무가 내뿜는 빛의 향연이 이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겨울 내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다. 마을을 떠나야 할지, 그냥 눌러 앉아야 할지 거듭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생각에 생각을 잇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계절에 어김없이 순응하는 농부들이니 다시 앞들에서 습관처럼 모를 낸다. 기쁜 마음으로 모를 내는 게 아니다. 봄이 온 걸 기뻐하기에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다. 묵묵하게, 별다른 흥도 없이, 노래도 없이 모를 내다가 무심결에 허리를 편다.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느티나무가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찬란하게 내뿜는다.
한참씩이나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쳐다본다. 묘하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는데, 저 느티나무가 있는 이곳을 어찌 떠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느티나무가 있는 자리가 자신들이 살아야 할 터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느티나무처럼 저 농부들의 마음속에서도 “푸르른 울음소리”가 끝없이 새어나왔으리라. 한겨울 삭풍에 휘말려 억눌렸던 마음이 느티나무가 은근히 내보이는 빛을 따라 서서히 풀리는 것 같다.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라는 구절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북소리는 어디서 울려나오는 것일까? 느티나무일까? 느티나무를 보는 사람들 마음속일까? 겨울을 견딘 생명들이 내뿜는 광휘가 북소리와 어울린다. 생명은 이렇게 다른 생명과 어울려 새로운 세계로 뻗어 나간다. 푸르른 울음소리가 북소리로 이어지는 순간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2. 청솔 한 그루의 희망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 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 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 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 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 고재종,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는 차가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다. 겨울 추위를 견디는 소나무가 이 그림에는 나타난다.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절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그림이 아니던가. 추운 겨울에 제 생명을 뽐내는 소나무만큼 강한 절개=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가을에 피는 국화나 늦겨울(초봄)에 피는 매화도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의 절개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고재종이 지은 「세한도」 또한 이런 소나무(청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인은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에 시안(詩眼)을 집중한다. 꼿꼿이 서 있는 청솔 한 그루는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과 대조를 이룬다. 근대화 물결에 휘말려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그에 따라 마을은 황량하기만 하다. “한때는 엠프 방송 하나로/ 집집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이었지만, 이제 그곳에서는 술에 취한 이장만이 가끔 앰프를 켜고 예전에 유행하던 대중가요나 애절하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마을회관이 기우뚱해지는 시간이 소나무를 피해갔을 리 없다. 소나무 둥치는 터지고 갈라져 마을의 암울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싶다. 마을회관 옆에서 마을의 번영을 본 소나무였다. 이제 마을에서는 예전에 펼쳐졌던 그 활기찬 풍경을 볼 수가 없다. 회관 들창을 거덜 내는 댓바람이 불어오면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청솔만 우는 게 아니다. 천둥산 박달재를 외치는 이장 또한 댓바람 맞은 청솔처럼 슬프게 울고 있다. 사람이 이러니 청솔이야 오죽하겠는가?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생산이 끊겨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을 보며 소나무는 깊이 모를 아픔을 느낀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삶이 곧 소나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나타낸다. 그들이 산업화에 찌든 세상을 노여워하는 만큼이나 소나무 또한 공존이 사라진 세상을 향해 한없이 서러운 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던 몇몇이 청솔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마을과 운명을 같이 해온 나무이다. 나무는 더불어 나이를 먹으며 마을을 지켰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을은 이제 몇몇 사람들이 지키는 빈터가 되어버렸다. 사람들 사이에 정이 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힘들다고 봐야 한다. 고향에 남은 몇몇 사람들마저 떠나면 마을은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마을이 사라지면 소나무는 어찌 되는 것일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소나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혼자 남은 소나무의 삶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걸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청솔은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서러움에 “푸른 숨결을” 풀어낸다. 메마른 사람들의 가슴에 부는 삭바람을 빗질하여 그들 가슴에 맺힌 한을 걸러낸다. 청솔이 사라진 마을을 사람들은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청솔도 마찬가지다. 청솔은 이미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무슨 희망일까? 활기를 잃은 마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희망일까? 그것은 희망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시대는 이미 산업화라는 현실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희망의 노예가 되면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관념으로 변해 현실감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까막까치 얼어 죽는 이 아침에도”에 나타나듯 현실은 죽음과 이어져 있다. 희망을 품는다고 이 죽음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될까? 시인은 까막까치가 얼어 죽는 이 아침을 직시함으로써 세한도 속 청솔에 담긴 희망으로 나아간다. 동녘에서 타오르는 꼭두서니빛은 이로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해가 뜨는 일은 이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변치 않을 일이다. 희망은 바로 일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는 행동에 작으나마 희망이 있다. 추운 겨울을 꼿꼿함으로 견디는 청솔은 이러한 희망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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