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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킴(PUER KIM)을 알게 된 것은 지난 4월 열린 미스틱89 레이블 콘서트에서 였다.
미스틱89는 가수 윤종신이 이끄는 기획사 이며 소속 가수로는 윤종신,하림,조정치(이상 신치림), 박지윤, 투개월 등이 있다.
하림의 목소리를 동경하고 윤종신의 감각을 좋아하는 나는 2012년 가을 열린 신치림의 첫번째 콘서트도 보러 갔었는데, 전체 무대를 지하철로 꾸미고 콘서트에서 뮤지컬과 같은 새로움을 시도하려고 한 이들의 기획을... 성공했다고 볼 순 없지만 존중한다. 조정치는 그 이후 무한도전에서 완전히 떠버렸다.
참고로 신치림 1집앨범 '여행' 괜찮다. 추천한다.
이처럼 뜨기전 신치림 콘서트도 보러간 나였는데, 떠버린(?) 신치림은 물론 매력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인 투개월 김예림(처음엔 투개월이 출연하는 걸로 되있었다.)까지 출연하는 레이블 콘서트를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 감각이 출중한 윤종신 답게 이번 콘서트도 색다르게 진행되었는데, 컨셉은 기획사 미스틱89의 투자 설명회 였다.
윤종신이 대표로써 자신의 회사에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설명하고 중간중간에 소속 아티스트들이 나와 노래를 하는 형식.
그런데 이 기획을 너무나 잘한 나머지, 나는 정말로 미스틱 89에 투자하고 싶어졌다. 그의 세상과 아티스트를 보는 안목,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레이블의 전략에다 소속 아티스트들의 잠재력을 더하면 미스틱89는 정말로 크게 성공할 듯 했다. 적어도 그 콘서트장에서 만큼은 나는 완전히 설득당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예상도 하지 못했던 퓨어킴을 알게되었다. 윤종신 대표는 이 여인이 유튜브에 올린 노래 뮤비를 보고 충격과 함께 영입했다고 하는데,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한 이 여인은 사물을 바라보는 눈 및 그것을 표현해낸 가사가 독특하여 자신에게 많은 자극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들은 이 여인의 노래. 마치 애무를 받으면서 노래를 하는듯 흐느적거리는 몸짓과 흐물흐물 뱉어내는 창법에 현장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한듯 했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 여인에 나는 반했다.
이 여인의 첫번째 앨범 '이응'
이 앨범에 담긴 노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왜 이응인지 알겠지? 그리고 모든 노래는 저 제목에 나오는 음절로 처음을 시작한다.
이 중 오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곡은 '유'다.
<가사> 유기농이 맛있고 좋다해도 그게 산나물이란 말은 아니고 산나물은 그냥 막자란다니? 네가 잘 모르게 나조차 헷갈리게 네 마음 밭에다 내마음 씨앗을 뿌렸는데… 유기농이 맛있고 좋다해도 그게 산나물이란 말은 아니고 산나물은 그냥 막자란다니? 깊기와 좁기가 너에게 맞춤인 이러려고 태어난 내마음 씨앗을 뿌렸는데… 자기 혼잔 알고 있다고 해도 아무말 안해주면 알리가 없고 유기농이 맛있고 좋다해도 그게 산나물이란 말은 아니고 산나물은 그냥 막자란다니? 네가 잘 모르게 나조차 헷깔리게 네 마음 밭에다 내마음 씨앗을 뿌렸는데… ------------------------------------------------------------------------------
이 여인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네가 잘 모르게 나조차 헷갈리게 네 마음 밭에다 내마음 씨앗을 뿌렸는데… 벌레가 먹었나? 바람이 센날 날아갔나?
.. 하면서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그를 보며 안타까워 한다.
씨앗을 뿌려도 흙이 그 씨앗을 품어주지 않으면 싹이 트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이 여인은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 절절한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것도 이 남자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란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깊기와 좁기가 너에게 맞춤인 이러려고 태어난 내마음 씨앗을 뿌렸는데…
자신의 밑구녕의 깊기와 좁기가 딱 이남자에게 맞춤이란다. 그리고 또 이러려고 태어났다면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포기한다.
이 여자는 이 남자에게 딱 맞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남자를 만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받아줄까 안받아 줄까를 내가 맘대로 할 수 없는, 상대방의 자유의지때문에 겁나고 설레고 가슴 떨리는 것인데, 그에게 퓨어킴은 자신의 자유를 완전히 종속시켜 버렸다. 그런데도 몰라주다니... 어쩌면 너무 여자가 자유를 포기하고 밑구녕보이며 나오니 남자는 설렘이 없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에 퓨어킴의 선배가 한명 더있다.
바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다.
---------------------------------------- 차(茶)와 동정(同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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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하다. 정말로... 절절하다 가면이 없다. 이 여인은 진실하다.
이 두여인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최고의 무기인 밑구녁을 사용했다. 둘다 실패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사회적인 잣대, 평가를 신경쓰지 않고 그것을 당당히 밝힌것이다. 남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내가 사라진다. 내가 사라진다는 건, 가면으로 진짜나를 가린 것이거나, 남의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되는 것인데...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가면으로 진짜 나를 가리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전전긍긍하면서 내 인생을 내가 살지 못하고 남의 인생을 대신살아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멋진 예술가가 있어 자신을 살고, 또 그만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덕분에 우리는 이들이 잉태한 새로움에 행복해하며 살아간다.
기존의 관념을 해체하고 그들이 바라보는 사랑과 그것을 당당히 밝힌 이 둘은 위대하다.
모든것은 공하고 상대적이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인데 남들의 평가가 무슨 상관이랴! 이런 위대한 두 여인이 상처받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다.
* 참고로 이응 앨범의 '오'도 무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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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의 발견>에 그녀, 최영미가 나온다기에 그녀의 첫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처음 읽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낯선 여인을 대하듯 바르르 떨었다. 감추지 않아, 감출 것이 없어 너무 처연한 자연이라면 객칠하듯 한 자(字)라도 더 써야 드러낼 수 있지만, 아주 깊이 숨어버린, 걸쳐진 옷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감정은 양파 껍질을 벗기듯 바닥까지 박박 긁어 더이상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서울내기 그녀는 그 치졸한 인간의 감정을 잔인하리만치 그렇게 드러내야만 했을까? 그녀의 시는 비수처럼 아프다. 쓰레기처럼 아름다운 언어가 내 부끄러운 심연, 한 번도 다가가지 못한, 어쩌면 그곳에 가면 허깨비처럼 남은 내 육신이 쓰러질까 두려워 했던, 내 감정의 또는 내 욕망의 근저를 향해 인도한다. 구절구절이 수갑처럼 내 손목을 옭죄고, 몇 번이나 달아나려는 내 시선을 붙들고 꾸역꾸역 이끌고 있다. 그렇게 긴 여행길에, 제 다리마저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위로한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겹겹이 감싼 그 가면을 벗으면, 바람처럼 홀가분한 자유가 있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노래하고 있다. 나의 허물을 먼저 보여줄 때, 너의 가식이 조금씩 벗겨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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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교과서에도 문제집에도 참 많이 수록되어 있는 시다. 읽기도 많이 읽었고 가르치기도 여러번이었지만 오늘 유난히 이 시에 마음이 쓰인다. 학기초에 생판 모르는 아이들을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열기까지는 참 지난한 노력과 시간이 든다. 쉽게 친해지는 애들도 있고 끝까지 데면데면한 아이들도 있지만 헤어질 땐 언제나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헤어질 땐 더 그렇다.
오늘 한 아이가 자퇴를 한다. 이 특성화고 계열과 자신의 적성이 너무나도 맞지 않고, 집안 사정도 너무 어려워서 돈도 벌어야겠고, 전원이 기숙사에서 통제된 생활을 하는 것도 견딜 수가 없단다. 4월부터 해서 두 달 가량을 질질 끌며 설득을 해 봤지만 고집불통이다. 학생의 어머니와 통화를 했을 때 내게 한 첫마디가 "선생님은 그 아이를 설득하실 수 없으실 거에요. 본인이 직접 해보고 납득하지 않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거든요."였다. 오기가 생기기도 했고, 지금까지 자퇴를 한 아이들이 힘들어 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들을 많이 봐서 더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국은 설득에 실패했다. 제 나름대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해서 19세에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당찬 꼬맹이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장밋빛 미래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다. 원래 그럴 나이긴 하지만 어른들에 대해선 근거없는 불신이 가득하면서도 오직 먼저 검정고시를 선택했다는 몇몇 친구의 사례만 가지고서 그토록 고집을 피우는 것이, 지금까지 대체 무엇이 이 아이의 세상과 어른들에 대한 불신을 키워온건지 원망스럽기도 하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내가 멘토가 되어서 (삼성 재단으로부터의)장학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야긴 하겠지만 이 아이를 보며 받는 불편함 또한 계속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참 무겁다. 차라리 잊는 것이 순간이라면 좋겠다. 잊는 것이 영영 한참이리라는 것도 너무 잘 알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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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 제목이 무슨 유행어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서른이 너무나 머나먼 나이로 느껴지던 때고, 아니 실은 서른이란 나이가 나완 아무 상관없이 느껴지던 때었기에 유행하는 시집이라 읽어는 봤었지만 별 감흥 없이 덮었었다. 우연히 서른을 목전에 둔 29살에 문득 다시 집어들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세련되긴 했으나 시 전체를 관통하는 패배감이 싫다. 가볍진 않았으나 밝고 희망차지 않아 싫다. 그래, 남들 다 떠난 잔치상에 누군가 남아 상을 치우고 있다는것이 이제와 무슨 소용이라는 게 싫다. 차라리 누군가 남아 있다는 걸 외면하는 편이 훨씬 편안하다. 서른이 아니라 마흔, 일흔이 되어도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도, 끝내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데, 괜히 한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그 실낱같은 희망을 싹둑 잘라버린 분위기가 아닐런지... 공지영씨 소설을 싫어하던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선거때마다 포스터에 새겨진 무슨무슨 민주화운동경력처럼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혹은 동료의) 80년대의 경험을 세련된 허무주의,냉소주의의 옷을 입혀 시장으로 내다판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글쎄, 그러나 이건 단지 뭣도 아닌 나만의 쪼잔하고 비겁한 생각일뿐. 어쨌건 내 취향은 아니며, 나는 서른에도 잔치를 끝내기 싫다. 일이든 인생이든 잔치는 진행중이다. [인상깊은구절]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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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부터 독자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이 시집은 기존의 시에서 느껴지던 신성성이나 일종의 경건한 위엄 같은 것을 파괴하고 있다. 대신 직설적인 어투의 문장이나, 시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넋두리, 도발적인 상상력이 기존 시의 틀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고 있다. 바로 이런 요소들이 최영미의 시집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하는 특징인 동시에, 많은 질타를 받게 하는 문제요소들이다.
대중문학을 논할 때는 시대의 흐름을 간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진 것도 당시, 시대의 분위기가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집 안에는 몇 가지의 테마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것들의 분위기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는 화자의 모습, 곧 '되돌아보기'이다.
80년대는 이념의 대립으로 학생이든, 노동자든 모든 그룹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열했던 시기이다. 이러한 열기는 90년대에 와서 다소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사회는 달군 후라이팬 같던 지난 시대를 돌아보는 분위기로 흐르기 시작했다.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타고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곧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영향력으로 나서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또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최영미의 시를 읽어보면 거품이 많이 빠진 느낌이다.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내었을 거품, 그것이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시집을 읽으면, 역시 베스트셀러였구나, 하는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직설적인 화법은 강한 인상으로 남아 최영미의 시를 기억하게 하는 특징이 되었다. 우리가 최영미의 시를 두고 도발성을 운운하는 것은 단지 이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화법, 시어 같지 않은 시어를 자유롭게 사용했기 때문일까? 이제는 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최영미 시의 특징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도발적일 수 있는 것은 단지 직설적인 화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직설적 문장 만큼이나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시에 흐르는 작가의 시선이다. 시집 안에는 두 가지 개념이 늘 대립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주체-객체', '봄-가을', '내부-외부', '너-나' 이다. 과거에 뜨거운 봄, 활동적이던 주체, 열기의 중심에서 소리질러 본 적이 있는 시작화자는 이제 가을에 서서 과거를 회상해본다. 과거를 회상하는 화자의 건조한 어투 만큼이나 독자를 놀라게, 또는 허무하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이란 이 두 개념 사이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작가의 냉소적인 표정인 것이다.
나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 이 시는 가장 대표적으로 작가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잔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젊은 날의 사랑이기도 하고, 투쟁가를 높이 불렀던 뜨거운 운동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화자의 젊은 시절, 뜨거운 열기의 행동일 것이다. 서른, 그 뜨겁던 열기는 식고 주인마저 돌아간 자리에 마침내 '그'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대상, 혹은 투쟁가를 부르던 동지, 혹은 운동을 이끌어가던 어떤 열기나 이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시간, 화자는 어떤 누군가가 주인대신 상을 치우고 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옛 잔치를 논하는 것도, 그 시절과 지금의 거리를 따지는 것 자체도 아무런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른, 이미 잔치는 끝난 후라고 말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찌 도발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가 두 개념, 시기를 대비시키는 것은 <속초에서>라는 시에서도 드러난다.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로 시작하는 시는 곧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 두 살이 있었다'로 이어진다.
일곱 살에서 서른 두 살로 뛰어넘은 작가는 같은 바다를 보고 있지만 많은 것이 다름을 느낀다. 처음, 일렁거림을 보는 것으로 그친 소극적인 일곱 살과 대비하여, 서른 둘에 본 파도는 직접 들어가 밀면서 밀리는 것으로 훨씬 적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한 연에서 화자의 허무적 시선은 더 커졌음을 느끼게 된다. 자포자기한 듯도 하고, 체념한 듯도 한 화자의 시선이 드러난다.
작가는 일곱에서 서른 둘 사이의 시절에 대해, 혹은 상처에 대해 시의 지면을 할애하여 회상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봄이 오면/ 손톱을 깎아야지/ 깎아도 깎아도 또 자라나는 기억/ 썩은 살덩이 밀어내/ 봄바람에 날려보내야지/ 내 청춘의 푸른 잔디, 어지러이 밟힌 자리에/ 먼지처럼 일어나는 손거스러미도/ 뿌리채 잘라 없애야지/매끄럽게 다듬어진 마디마디...<대청소> 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봄을 맞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옛 기억을 손톱깎듯 무심히 다루고 있다. 이제 작가에게 더 이상 봄은 봄이 아닌 것이다. 작가는 <다시 찾은="" 봄="">에서 학생회관을 찾지만, '4.19를 맞이해 나는 어떤 노래도 뽑지 않으리/ 나와 관계없이 내 속에 웅크린 기억/.../모두 고개 숙이고 청춘의 뒷문으로 사라지거라' 라고 말하고 있다. <내 속의="" 가을="">처럼 작가는 다시 봄을 찾아도 여전히 가을에 있다. 그것은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에서처럼 '너'가 없기 때문이다. '너'는 어쩌면 잃어버린 '나'의 분신, 과거일지도 모른다.
최영미의 시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의 풍경이 많다는 것이다. 발문에서 김용택 시인이 말하고 있듯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시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많은 시인들이 버린 도시의 황량함에서 최영미는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애를 발견한다. <지하철> 연작이나 <24시 편의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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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열정과 광기의 잔치는 끝났다. 한 때 그것이 내 삶의 전체를 먹어치웠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어질러진 상을 뒤로하고 각자의 신발을 신고 떠났다. 여전히 누군가는 우리가 떠난 자리에서 울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은, 한참이 지나고 난 후이다.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초판과 지금 사이에 나의 '서른'이 언덕처럼 솟아 있었다. 상실의 시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념과 대의를 위해 사랑노래는 한없이 작게 불러야 했던 격변의 시기..가 지나는 때였다. 94년 즈음은 그런 시기였다. 그간 젊음의 혈기를 분출해야 할 곳이라곤 오직 '투쟁'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세대들, 기성세대의 오류를 반드시 그 열정으로 되돌려 놔야 한다는 의기가 가득했던 젊음들, 그런 시절이 막 지나는 참이었다. 어느새 '동지'들은 하나 둘 술자리를 떠났고 이미 셈도 끝난 술자리에 떠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몇몇만이 넋두리를 하며 널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마음 놓고 당당한 연애를 한다거나, 두꺼운 토익책을 허리에 끼고 도서관 빈자리를 찾아도 된다는 꿈이 아니었다. 다만, 다시 그 힘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그것이 바로 어제라도 되는 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꿈이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고 말았다. 우리에게 왜 다시 헤쳐 모이지 않았냐며, 그런 시기가 없었던 것이라며 다그친다면 '그렇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다만 우리는 충분히 현실적이 됐으며, 은근히 계산적이 되었고, 다분히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검 잠깐이라던 '선운사' 시 한 구절에 먹먹해진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이 아프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닐텐데 되읽을수록 그녀의 시는 아프기만 하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은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발칙하게, 삶을 긍정해 버렸네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만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긍정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국 한 평생 핑계거리를 찾아다니는 삶을 살아왔고 살아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누가 그것을 잘못된 삶이라 하겠는가. 누구에게든 그것이 최선일텐데 말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고등어 등처럼 푸르던 빛은 색이 바랬고, 우리는 어느 시장 좌판에 누워 팔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쇠에 구어질 때 '나는 왜 한 때 바닷속을, 대체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헤엄쳐 다녔을까.' (공지영의 고등어 중) 하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열정에 대한 상처가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이 고등어 등처럼 푸를 수 있었을 것인가. 홀로 남아 상을 치우고 있는 동지에게 다시 한번 고맙단 인사를 건네며, 우리는 그래도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my way 에서 처럼 후회는 조금 있겠지만 말할정도는 아니라(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고 당당하게 삶을 긍정하고 싶어진다. 나는 내 삶을 살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잔치는 끝났지만 적어도 우리는 남의 삶을 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다시 꺼내 들고 그러한 긍정의 메시지를 읽어냈다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궤적을 그리며 걸어온 것이다. 고작 이정도의 행복에도 우리는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누가 우리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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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온 최영미님의 시집. 20대인 내가 봐도 초공감되는 글귀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더 어렸을 적 읽었더라면 별 느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술냄새와 담배연기 자욱한 허름한 순대국밥집에서 아저씨들의 술주정 소리를 들으며 체할 것 같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꺼이꺼이 숟가락 가득 밥을 집어넣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공감 글귀]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 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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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편안함보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보다는 조금 당황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시’를 떠올릴때면 아름다움, 편안함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주는 편이라 하는게 더 나을까? 자신의 생각을 시 속에 담은 그녀의 용기와 대담함 필체와 단어들이 시 속에서 힘이 느껴진다. 예쁜 단어로 포장된 시는 없다. 좋은 말로 포장되어 있는 글도 없다. 그저 현실의 삶을 그대로 시로 옮겨적었을 뿐... 운동, 혁명, 섹스, 이념, 삶, 사랑, 상처 등을 가차없이 써내려간 그녀는 시 속에는 어쩌면 우리 모두 마음 속에 담아 놓고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은 듯 하다. 저으기 당황스러웠던 그녀의 시들은 점점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그게 우리네 인생사이기 때문은 아닐런지.. 나는 그녀의 시 속에 글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가 모두 전투적이거나 모두 강렬함만이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상처입은 가려인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꼭꼭 숨겨놓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것에서 나는 박수를 치고 싶다. 그녀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시인이자, 가려린 여인일 뿐이다. 이 작은 책이 누군가에게 바쳐져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바치고 싶다.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밖으로 내놓을지 몰라 한참을 더듬거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썼노라고 하면 이 너절한 시편들에 대한 변명이 될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싸워본 자만이 좌절할 수 있고 절망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대체 내게 그 말을 조금이라도 입에 올릴 건덕지가 있는 건가고 여러 차례 반문해보았다. 125p (저자의 후기 중)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꼬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어침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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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축제와도 같다. 그러나 최영미가 살아야했던 시대의 젊음들은 축제를 누릴 여유도 없이 과도한 폭력 앞에 한 포기 잡초가 되어야 했다. 그러한 시대가 끝날 무렵.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음들은 이제 서른이 되었던 것이다. 서른이 되어보니, 이제는 젊은 날의 축제는, 잔치는 끝나고 만 것이다. 최영미가 내뱉는 듯한 시어들은 그 축제의 시간을, 잔치의 여흥을 빼앗김에 대한 울분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도 모질었던 시대에도 사랑의 꽃은 피어난다. ‘선운사에서’라는 시가 바로 그 꽃이다.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에는 꽃이 있다. 너무나도 애처로운 그 꽃 때문에 선운사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꽃이 지는 모습을 보려고 오는 이는 아마도 몇 안도리 것이다. 대부분은 그 적색의 꽃이 열매인 듯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려고 선운사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은 오히려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아쉬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질러지듯 쉽게 져버리는 모습을 통해서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잊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 모진 눈보라를 이겨내며 어렵게, 어렵게 피보다 더 붉은 꽃을 피워내고는 쉽게도 져버리는 그 꽃처럼 사랑을 할 수는 없을까.’ 쉽게 지는 저 꽃들처럼 지는 기억이 있기를. 선운사의 그 꽃을 닮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최영미는 ‘선운사에서’라는 시를 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서른이 되고 보니 잔치가 끝나버린 현실까지도 잊고자 하는 것은 아닐런지. [인상깊은구절]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 그대가 처음 /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 잊는 것 또한 그렇게 / 순간이면 좋겠네 // 멀리서 웃는 그대여 / 산 넘어 가는 그대여 // 꽃이 / 지는 건 쉬워도 / 잊는 건 한참이더군 / 영영 한참이더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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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지금의 나에겐 아직은 조금 먼 얘기. 그 날이 오긴 올까, 라고 생각할만큼 어리진 않지만. 언젠가 서른이 된다면 지금과는 달리 멋진 모습이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공상을 즐길만큼 어린 나이다. 그런 내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1994)를 선택했다. 서른을 위해 아껴두려다 서점에서 그냥 나오기 아쉬워 집어들고는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꾸벅 졸며 읽었다.
최영미 시인은 말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고. 잔치가 끝나건 그럼에도 누군가 다시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잔치를 하건 무슨 상관이냐고. 그녀는 쿨하게 서른 이전의 삶을 보내고 쿨하게 서른 이후의 삶을 받아들인다. 아니, 올테면 오라고 나는 개의치않는다고 삶에 대든다. [...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라나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서른의 삶은 그러나 고독하다. 지나간 스물만큼 경쾌하지 않다. 힘과 능력은 있지만 사람에게 다가갈 줄 몰라 외롭다. [...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中)] 때론 아는 게 병이 된다. 혼자의 외로움을 알고, 그 고독을 이겨내는 법을 알고, 오늘도 무사히 저녁을 보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기에 끝없이 외로워진다.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혼자라는 건 中)] 그래서 때론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에는 中)]고 고백한다. 다행히 서른에도 [더듬거리며 오늘, 사랑이 내게로 온다 / 주저하는 나보다 먼저, 그것이 내게로 온다 (먼저, 그것이 中)]. 얼마나 다행인지. 한발 물러서서 도망치려해도, 사랑이 나를 찾아와주니.
서른. 충분히 젊고 멋진 나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서른, 그 전과 다른 모습에 낯설어한다. 하지만 서른의 몸은, 시간은 스물과는 다르게 더 강해진다. 이 세상을 살아갈만큼 충분히. [...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구나 ...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 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구나 ...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목욕 中)]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스물 그 언저리에 남고 싶어 발버둥쳐도 서른은 온다. 오지 않길 바라던 것들은 서른 그 전에 미리 와서 자리챙겨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새 죽음이 한발자욱씩 가까이 다가오듯, 서른의 일들도 우리의 준비됨과 달리 서른 그 전부터 우리 곁에 쌓여간다. 그러나 인간이란 적응하는 동물, 서른은 특별한 시간에서 일상의 시간으로 바뀌어간다. [지금 빛나는 이마에 주름 접히지 않아도 밤은 가까이 와 있다 소리없이 기척없이 네 곁에 누워 있다
...
오지 마, 제발 난 아직 준비가 안됐어 싸울 준비가 안됐어 아무리 터지도록 짖어도 ...
칼이 칼집에 익숙해지듯 자기 안의 욕망에 익숙해지듯 네 안의 어둠에 너 또한 익숙해지리라 (어떤 게릴라 中)]
서른의 당황스러움에 때론 지나간 시간을 돌려달라 삶에 떼를 쓸지도 모른다. 당시의 어려움은 모두 잊고 그저 풋풋한 추억으로 남은 스물 그 언저리를 돌려달라고. 지나갔기에 아름다워진 걸 모르고. [... 나의 봄은 원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난한 비유가 아니었다
... 가난은 상처가 되지 않고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리고 싱겁던
나의 봄을 돌려다오 ... (돌려다오 中)]
그러나 결국엔 서른의 무거움도 새로움도 받아들인다. 그동안 매어있던 지난 날의 추억은 바람에 날려버리고. 용기있는 목소리로 밝게 외친다. 이렇게. [봄이 오면 손톱을 깎아야지 깎아도 깎아도 또 자라나는 기억 썩은 살덩이 밀어내 봄바람에 날려 보내야지
... 매끄럽게 다듬어진 마디마디 말갛게 돋아나는 장미빛 투명으로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리라
... (대청소 中)]
솔직하고 담담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혹은 자조적으로. 지난 생과 지금의 삶과 다가올 날을 노래하는 최영미 시인. 그러나 세련된 시와 달리 자신의 시가 구수하길, 누군가에게 울림이 되길 바라는, 어쩌면 따뜻한 마음의 시인.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꼴딱 새우며 몽롱하게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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