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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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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성에 대한 멋진 한방이라고 할까? 페렉이 천착하는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의 허위, 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욕망의 진실을 거대한 탐조등 불빛 아래 훤하게 비추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전시회의 흥행역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알량한 미디어 문화단신의 밋밋한 작품소개 정도로는 주목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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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성에 대한 멋진 한방이라고 할까? 페렉이 천착하는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의 허위, 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욕망의 진실을 거대한 탐조등 불빛 아래 훤하게 비추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전시회의 흥행역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알량한 미디어 문화단신의 밋밋한 작품소개 정도로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필요한 것은 황금! 전시회 돈줄의 영향력, 부자들, 예술계, 그리고 무지한 대중의 욕망을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획! 점잖게, 아주 지적으로, 미술 작품에 대한 순수한 해설과 비평의 표피를 쓰고.

 

전시회 후원자이자 미술 애호가인 거대 양조업자 ‘헤르만 라프케’의 초상화를 그린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란 작품이 소개 된다. 그 작은 방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에는 유럽과 미국의 모든 유파와 장르를 아우르는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그림 속 작품들의 하나에는 바로 이 초상화가 다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다시 재현되고 있는, ‘복제’ 속에 제2복제, 제3복제...가 거울 같은 방식으로 모사되어 있는 독특한 회화라고 한 미술 비평가가 썼다.

 

이 미술작품 해설이 주목을 끈 것은 대부호인 라프케가 유럽을 오가며 수집한 일명‘라프케 컬렉션’에 포함된 걸작들이 모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재현된 그림을 비교하느라 몰려드는 인파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밀려드는 인파로 언론의 집중조명은 물론이고, 마침 헤르만 라프케가 사망하면서 라프케 컬렉션 작품들의 향방이 물질적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욕망들의 소유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복제’란 어휘는‘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예술성의 상실, 상업화의 폐해를 떠올리게 하면서 소위 ‘복제와 재현’의 경계에 대한 진부한 미학적 비평들을 마치 지성의 전유물인양 읊어대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복제의 복제를 반사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볼거리로 제공하도록 운명 지어진 ‘창조자’라는 존재에 대한 조소와 냉소, 향수와 환멸이 서린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계에 몰린, 좌절한“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너무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허위의 지성들, 예술의 모호함, 아니 예술계의 허구성을 생각게 한다. 그리곤 지루하게 반복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회화들에 시시콜콜한 작품 해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실 소설의 거의 절반의 분량에 이르는 이 수작(酬酌)이란 것이 페렉의 다분히 의도적인, 본질을 얼마나 호도할 수 있는지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윽고 진행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경매에 따라, 대상 작품들의 설명을 위한 미술평론가 ‘레스터 노박’의 “하인리히 퀴르츠‘에 대한 평가는 진실의 암시와 사물이 된 미술작품의 실제 폭로라는 이중의 멋진 작업을 소화한다.

 

퀴르츠의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돈벌이를 위해 복제를 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예술가의 자유’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무관”하며,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유산을 화가에게 강요하는 역사비평적 관점도 없어 보인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차이들은 특정한 통합과정 혹은 소유과정을 지시한다.”는 말을 통해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읽어내는 것이고, 급기야는 “타자를 향한 투사나 프로메테우스적 ‘도둑질’을 가리킨다.”면서 이미 사기와 기만이 게재되어 있음을 해독해 낸다.

 

오늘의 사회에서 진정한 미술 작품이란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에서 거래되는 호사가들의 과시와 욕망의 종물일까? 예술이 규정할 수 있는 한계, 순수한 정신적 체계의 논리적 종결과 마침내 조우하게 되면 사실 침묵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닐까? 페렉이 너절하게 깔아놓은 작품 해설을 넋 놓고 따라가다 순간 쾅하고 반전을 당하게 되는데, 슬며시 미소가 도는 것은 정말 제대로다! 라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라는 이 작품의 정의야말로 최고의 극찬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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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서 펼쳐지는 대단한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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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부터 해야겠습니다. 기껏 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소설을 이렇게 힘들게 읽어서야 원~!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란 호칭을 듣는 조르주 페렉, 그의 소설은 소설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도록 건의하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허영에 들뜬 인간들에 대한 냉철하고도 가혹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설은요, 어느 한 부분도 읽기에 녹록한 게 없었습니다. 그의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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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부터 해야겠습니다. 기껏 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소설을 이렇게 힘들게 읽어서야 원~!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란 호칭을 듣는 조르주 페렉, 그의 소설은 소설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도록 건의하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허영에 들뜬 인간들에 대한 냉철하고도 가혹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설은요, 어느 한 부분도 읽기에 녹록한 게 없었습니다. 그의 지적 수준을 조금이라도 향유하려면은요, 짧은 문장 속에서도 지칠 때까지 끌려다녀야만 하거든요. 그렇게 쉼 없이 몰아치는 그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보여줄 게 남아있는 작가의 기가 막힌 반전에 마지막엔 그냥 넋이 빠져버립니다. 광기 어린 얼굴을 책 표지에 당당하게 싣는 조르주 페렉! 그는 그저 천재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당부 말씀을 올리자면요, 그림에 대해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점입니다. 그의 상세, 자세, 섬세한 그림 묘사를 지치지 않고 묵묵히 견디실 수 있는 분들만 읽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ㅋㅋㅋ



호텔 살롱에서 개최된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회화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된 독일계 미국인 화가 하인리히 퀴르츠의 작품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 입소문을 타고 성공을 거두게 되는, 그 그림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요, 제대로 된 문도, 창도 없는 커다란 직사각형 방에 한 남자(라프케)가 관람객을 향해 사분의 삼 정도 등을 돌린 채 앉아 있고, 그 방 안에 누구나 아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100여 점 이상의 또 다른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모여 있으며, 그뿐 아니라 화가는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 또 하나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그려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는 정확성을 유지한 채 첫 번째 복제, 두 번째 복제, 세 번째 복제가 이어지고 있으며, 캔버스 위에 미세한 붓 터치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복제가 반복되고 있다. 요컨대,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단순히 개인 미술관의 평범한 재현이 아니다. 연속되는 반사 유희와 점점 더 세밀해지는 반복이 만드는 마법적인 매력, 완벽하게 몽환적인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작품이다. 이 몽환적 세계 속에서 그림의 유혹은 무한대로 증폭되며, 정점에 이른 회화적 정확성은 그것의 종점을 향해 가기는커녕 오히려 '영원 회귀'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한순간 승화한다."(p.26)


이 독특한 그림 발상부터 예사롭지 않건만, 작가는 이 작품을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엄청난 '성공' 반열에 올려놓고, 주류에 끼어들기 위한 인간들의 허세 가득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입소문을 타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광신적인 관찰자들, 몇 시간을 밖에다 세워놔도 주류에만 합류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결국 그런 광적인 집착이 전시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던 격분한 관람객의 먹물 병 투척으로 막을 내리지만요, 이 기이한 사건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언론으로, 퀴르츠의 그림에 관한 논문으로, 유명세가 이어지는 만큼 인간의 호기심도 꺼지지 않고 증폭하게 되지요. 그로부터 1년 후,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그림 속 주인공 라프케가 죽고, 화가인 퀴르츠조차 갑자기 실종되고, '라프게 컬렉션 경매'가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서 빠르게 진행됩니다. 1차 경매는 맛보기, 그렇게 더 애달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열리는 2차 경매는 훨씬 고가로 시작하지만 엄청난 성과를 거둡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3년부터 1924년 그리고 그 후로 몇 년까지를 담은 건데요, 이슈에 열광하고 앞다투어 그 대열에 끼고자 하는 허세 가득한 인간의 마음은 100년 전이나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토록 그림에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정작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묘사와 서술로만 사건이 진행되는데요, 그럼에도 그 사건들조차도 시원하게 한눈에 파악할 수 없게끔 타이밍 적절하게 작가의 방해 작전이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 나온 100여 점 이상의 그림을 사기 위해 초조하게 몰려든 사람들에게 맛보기를 보여주는 경매나, 어떤 사건이 발생될지 궁금해서 한 장씩 인내를 가지고 넘기고 있는 독자에게나, 작가는 지루함과 고통을 안겨준 후에서야 아니 어쩌면 그걸 견딘 사람들에게만 더 큰 마법과도 같은 한 방! 의 반전을 슬쩍 내놓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내가 허망해지는, 아~ 이 무신 고약스런 취향이란 말입니까!!

"제 2차 세계대전의 광기 속에서 부모를 잃고 유대인 고아로 생을 시작해야 했던 페렉은 무엇으로든 텅 빈 삶을 채워야 했다. 온갖 하찮은 주변 사물들에 대한 건조한 나열과 묘사는 상처로 점철된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공허한 생에 대한 애착을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일상의 사물들과 공간들에 대한 정치한 묘사는 동시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만의특별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 나열과 묘사의 글쓰기에는 생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시간의 폭력에 맞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가능한 한 오래 남겨두고자 하는 그의 소박한 소망이 담겨 있다." (p. 116 역자 후기 중에서)


사기 사건과 복수 그리고 반전이란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가 '명화들에 가려 소리 없이 사라져야 했던 무명의 그림들에 대한 페렉의 애정'으로 절반 이상을 길고도 반복적인 그림 설명과 묘사들이 차지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긴 하지만요, 이 과정을 통해서 '진가를 가늠하는 게 아니라 이슈의 여부에 따라서 값어치를 매기는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에 던지는 허망한 반전'이 비로소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 고약스런 작가의 취향이야말로, 이 지독한 사기극을 이끄는 작가의 진정한 내공이었던 거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던 작가의 열정만큼 대단한 소설입니다.



t****o 2015.02.08. 신고 공감 3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