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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작가 정말 대단하다. 스타일이 매 페이지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저자 이름을 보지않고 책 내용만을 접했다면, 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수십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작품집인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형형색색으로 신경을 쓴 목차 페이지를 본 적 있는가? ![]() 4컷 코믹스도 있고, 한 페이지 짜리 일러스트레이션도 있다. 단편정도 길이의 웹툰 스타일의 작품도 있고, 그냥 현대 회화 작품같은 분위기의 작품도 있다. 다채로움에 관해서는 정말 어느 책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림 스타일만 휙휙 달라지는 게 아니라, 소재나 내용도 산만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이 다채롭다. ![]() 묘한 지점은 이렇게 스타일이 널뛰기하는데도 쭉 보다보면 이 다양한 작품을 한 작가가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점점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개인 고유의 시그니처 스타일이나 개성을 찾지 못하여 방황한 흔적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 다채로움 자체가 ‘나 다움’이라고 항변하는 것 같다. 얼마나 다양한 만화적, 미술적 스타일과 기법을 소화할 수 있는지 과시라고 할만큼 다채로운 형식의 실험을 보여주던 책 초반부와 달리 대략 118 페이지부터는 웹툰 형식의 몇 페이지 분량의 작품들이 주로 나온다. ![]() 풀컬러 채색이라 화려하기도 하지만 컷 별로 묘사에 기울인 정성 정도가 달라보인다. 한 작품 안에서 작가가 공을 들여 묘사하고 색칠하고 한 컷이 있는가하면 거친 만화적 검정 아웃라인으로 낙서같이 대충 묘사한 그림도 있다. 내용은 기발한 발상, B급 병맛 감성이라고 할만한 대사와 말투, 어느 정도 19금을 떠올리는 수위와, 허무 개그라고나 할까 싶은 급격한 엔딩이 특징이다. 내용이 더 진행되리라는 통념의 허를 찔려 늘어지기 전에 딱 마무리되는 상쾌함도 있지만, 간혹 내가 최신 개그 코드를 이해못해서 갑자기 끊기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책으로 옮겨지면서 중간까지만 발췌된 것일까 싶은, 맥락없는 엔딩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작품의 리듬이 생경하게 느껴졌는데, 세 편 정도를 보고 나니 곧바로 그 리듬과 호흡에 익숙해졌다. 씨네 21의 만화잡지 [팝툰]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아놓았다는데, 웃길 의지가 없는 만화를 읽다가 빵 터지는 비참한 경험을 안겨주마! 쓸 데 없이 오버퀄리티! 어떤 컷을 갖다 써도 짤방이 되는 괴력의 압축미! 이 책 소개 문구가 정말 딱인 작품들이다. 한 번 쓱 보고 말 책이 아니라 가끔 펴 보면 또다른 재미가 있을 것같다. 내가 좋아하는 병맛 유머가 한가득인 내용인데, 옛날 기계식 전화기나 밥 로스 아저씨가 등장하는 등 레트로 감성도 있다. 후반부를 보다보니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확실히 내용이나 표현 수위가 성인용 쪽인 것 같다. 나체와 신체훼손(?) 묘사가 좀 등장한다. 앞부분에 있던 몇 점의 샤방샤방하던 파스텔 톤 그림과는 대극점에 있는 스타일이다. 마감일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으로 자면서도 마감에 관한 꿈을 꾸는 작가의 모습을 작품 소재로 승화시킨 것을 보고 나니 한자리에 앉아 후딱 페이지를 넘기는 게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냥 보면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이지만, 고심과 궁리 끝에 주제와 소재를 선정하고 한땀 한땀 원고를 만들고, 그리고, 채색하고, 대사를 집어넣는 노력과 시간을 기울였을지 아는 이상 만화책이나 그래픽 노블은 대여보다는 소장용으로 구입해서 반복해서 보는 편이다. ![]() 저자는 그림으로 자신의 책을 재미없다며 찢어버렸지만, 나는 띠지까지 고스란히 간직하다가, B급 감성이 고플 때마다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