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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에녹(헨리 호퍼)은 낯선 사람의 장례식을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그에게 말을 거는 한 소녀를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애나벨(미아 와시코우스카). 갑작스런 타인의 관심에 놀란 에녹은 그녀로부터 벗어나지만 얼마 후 그들은 다시 마주친다. 애나벨은 암에 걸린 아이들이 있는 병원에서의 자원봉사자라고 소개하지만 그녀는 사실 암에 걸려 3개월이라는 짧은 생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환자다. 매일같이 죽음을 찾아가는 에녹과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애나벨은 서로에게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영화 <레스트리스>는 ‘죽음’과 가까이 하고 있는 소년,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밀크>,<파라노이드 파크>,<엘리펀트>등을 만들었던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레스트리스>를 통해 소년, 소녀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담담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죽음을 대하는 소년, 소녀의 각기 다른 방식에서 드러난다. 에녹이 받아들이는 죽음과 애나벨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비슷하면서도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애나벨에게 죽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정된 죽음앞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 보다 더 차분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체념했으며 그 체념의 끝에서 그녀는 행복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녀에게 죽음에 대한 준비는 죽음보다 오히려 삶을 향하고 있다. 반면에 에녹이 죽음을 태하는 태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완전한 상실의 상태’이다. 그는 부모를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그가 그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5분간 생명이 끊어져 죽음의 순간을 체험해야했던 그에게 죽음은 그야말로 암흑이다. 남은자에게 더 없는 상실감만 안겨주는 텅빈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삶은 곧 죽음이다.
영화는 그렇게 조금은 다른 의미로 죽음이 삶 앞에 던져진 그들의 모습과 우정을 통해 떠난/떠나갈 자와 남겨진/남겨질 자사이의 공백을 드러내고 그 공백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채워짐은 결국 남은 자가 살아야할 삶에서 치유의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애나벨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던 에녹이 그 채워짐으로 인해 그녀의 죽음을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처럼. 분명 그 공백을 에녹과 애나벨이 다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은 자는 결국 그 공백을 채우면서 살아가거나 아니면 있는 그대로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안타깝게도 영화 속의 소년과 소녀가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관객의 실제 삶에 침투하기 보다는 자꾸만 겉으로 맴도는 듯하다.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와 함께 그런 겉도는 듯한 모습은 다소 지루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읽어나간다면 조그마한 울림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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