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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주의종""하나님의 백성"이란 용어를 수월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에 얶메여있는 심령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보혈로 인하여 죄씻음 받게하여 주셔서 죄에서 자유케 하는 은총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런연유로 자유케된 자마다 주님께는 종또는 노예이기에 주의종이라 부를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자유케된 영혼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부각한 나머지 입으로는 주의종이라고 시인하지만 세상살이에서 어떠한 결정할일이 있으면 자기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경우를 흔히 겪게된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그의 저서 "Slave"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주의 뜻하신 바대로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인도하여 내었지만 그러한 사건들속에서 하나님의 종인것이 자명한 사실을 드러낼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애굽의 노예된 삶에서 해방되었지만 주님께는 노예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볼수있는 노예란 신분을 가진자를 호적으로 입양시켜 올릴때 노예에서는 해방되나 입양한자의 자녀가 되는것과 마찬가지다. 이와같은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체험적인 신앙을 통해서도 볼수있다. 어떤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 주님의 사슬에 매여있는 것으로 늘 주님께 붙들린바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일은 흥하던지, 쇠하던지 주인된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기에 주님뜻대로 살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고 있는 대목이다. 종이라고 평상시 표현해왔지만 노예라고 말하는것이 이런점에서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 할수있다. 노예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다. 단지 주인의 의지대로 살아갈뿐이다. 하나님의 노예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삶에 있어서 모든 주권은 주인되신 하나님께 달려있기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만이 당연한 기독인의 삶인것을 깨닫게 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지하는 의식따로, 체험적 삶에 있어서 순종하는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적인 부분을 이책에서는 꼬집어 주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임해야 되는지를 진리안에서 자유할수 있는 주님의 노예라는 경우를 들어 나타내고자 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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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버킷리스트는 요즘 삶에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안주하는 삶이 아닌 나를 단련시키기 위함이 바로 버킷 리스트가 되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결혼 하고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신앙보단 현실에 파뭍혀 살 때가 너무도 많다. 버킷 리스트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한번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어인것 같다.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잘 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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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슬레이브를 통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했다. 맥아더 목사님은 참된 그리스도인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과정속에서 주인, 종, 노예의 개념을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이라는 깊은 존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아무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존 맥아더는 흔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짜 그리스도인을 통해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국제제자훈련원은 우리나라의 제자훈련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을 저술한 곳이다. 옥한흠 목사님을 미치게 했던 제자화는 우리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이르도록 노력한 것이다. 주님의 제자로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갖도록 한 곳이다.
슬레이브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관점을 많이 흔들고 있다. 성서적 해석에 대한 오류와 오역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지만 정확한 이해를 갖는다면 오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용어설정이 제대로 되지 못함에 대한 바로 잡음이라고 할 수 있다.
슬레이브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노예에서 아들로 이르는 복된 자라는 것을 또한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밝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노예만이 아니다. 아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노예의 슬픔 삶에 대해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적 위치는 노예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노예적 존재를 아들로 입양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노예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은혜를 입은 자이다. 은혜를 입은 아들이 노예임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에 자유일까. 조금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죄와 죄책감과 정죄함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순종할 자유,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우리의 창조주가 의도하신 길을 따라 살아갈 자유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존 맥아더의 슬레이브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의 개념에 더욱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존재적인 탈피를 말씀을 통해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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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기계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교회성장의 권위자들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집중한다. 교회 성장학은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번영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램프 속에 갇히 지니(genie)처럼 소개하며 많은 돈을 헌금하는 사람에게 건강과 부와 행복들 제공해 주는 분으로 전락키시고 인간을 주인으로 만든다…”(pp. 76~77).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왜 말씀대로 살지 않고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맥아더 목사님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헬라어 “둘로스”에 집중합니다. 이 단어가 ‘종’(servant)으로 번역되었는데, 더 정확히 ‘노예’(slave)라고 번역해야 한답니다. “종은 고용된 존재이고 노예는 소유된 존재”(p. 23)라는 점에서 분명 구별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과 1세기 노예제도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는데, 노예는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물이며,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주인에게 헌신해야 하며, 전적으로 주인을 의존해야 합니다. 또 노예로서 개인적인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노예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 말씀의 절대 권위에 생명을 건 얀 후스(John Huss)와 그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예로 들어 신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소개해 줍니다. 노예라는 치욕적인 칭호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때 가장 폭악한 죄의 노예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폭군에서 풀러나 자비로운 새 주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속전을 주고 폭군에게서 우리를 사서,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삼으셨다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이제 자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에서 아들로 “입양”하셨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 존 뉴턴(John Newton)이나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George Műller)는 이 은혜의 교리에 대한 삶의 증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칭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치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서도 황제의 노예들은 자신들의 황제의 노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대우와 인정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임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에 언급되었듯이, 십자가나 노예제도 같은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그스도의 노예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화해하고 연합하는 길입니다. 노예가 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개념은 온전한 구원을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p. 219).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이 문장은 저에게 값싼 복음을 버리고 진정한 복음에 반응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라고 도전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slave)다! 언제나 어디서나 이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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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느낌으로 전달되어 지는 책 제목 [슬레이브] 그것은 노예라는 단어로 우리 앞에 다가 왔다.
다소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이 단어 노예가 나는 진정 누구의 노예이고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노예로서의 의미 그것은 복종이고 순종이고 지시를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로 우리는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의 노예는 우리라는 것은 인정하고 순종함에 대해서 지적해 주고 있고 우리가 받아 들이기에 많이 힘들 수도 있는 노예라는 관점을 이 시대 최고의 성경해석가인 존 맥아더는 과감하게 그리고 냉철하게 우리에게 폭로하면서 우리가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 들이고 수긍하기를 원하고 있는 듯 하다.
나의 주인은 누구신가의 질문에 그리스천들은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복종했는지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질문에 얼마나 많은 찔림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는 성경이 알려주는 것대로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명확하고 냉철하게 규정지어 주고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고 그분은 우리의 소유주임에 대해서 생생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마음과 어떤 삶을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온전한 헌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보다 구체적이고 냉철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변화되기를 촉구하고 있으면 결단을 가지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함을 받고 우리의 삶을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에서 알려주고 있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이 책을 공유하면 그 은혜에 결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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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Slave는 우리말로 종 또는 노예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이 책은 엄격히 종과 노예를 구분하고 있다. 종은 영어로 Servant이며 우리말로 봉사자나 종업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계약적인 느낌이 강하다. 왜 신약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노예라는 용어를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것일까 나는 최근에 신약성경 회복역이란 한국복음서원에서 출간한 성경책을 한권 보게 되었다. 회복역은 다시금 번역해 본다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읽어온 성경은 항상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 성경책의 앞부분에서 설명하듯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어로 만든 성경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소개된다. 이후 영어 성경책을 주로 참고하여 번역하게 되었다고 추가 설명이 되어 있다. 원서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의 성경책이 아니다. 그래서 회복역은 미국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을 다시금 직역하는 방법으로 번역한 성경인데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나타난다. 내가 왜 이렇게 긴 말을 하느냐면 이 회복역 성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등의 복음서의 시작에 주님의 노예인 누구누구는 하면서 시작하는 부분이 많다. 정작 우리가 흔히 보는 성경에는 이 노예라는 표현보다는 종이나 형제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이 노예라는 표현이 보통의 성경에는 빠져 있는 것일까 ‘둘로스’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둘로스 선교단이라는 커다란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선교와 봉사를 하는 단체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배에서 선교단은 참으로 허름한 옷들을 입고 세계 곳곳의 기념품과 선교단 자체 제작품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전도용 책자들을 무료로 나눠 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에 ‘둘로스’라는 말을 들어는 보았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음감이 좋은 히브리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둘로스’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노예를 뜻하는 말이다. 이제야 둘로스 선교단이 얼마나 청렴하고 순종적인 단체였던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 사후 로마시대를 거치고 유럽의 천주교는 이러한 노예라는 표현을 대부분 제거하고 다른 표현들로 바꿔 놓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잘못 알게 되었다. 예수님과 같은 촌수의 형제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으로 교회 내에서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노예이다. 그래서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른다. Master와 Slave의 관계이다. 노예라는 단어의 어감으로 인해 우리는 낮고 천해지는 것이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낀다. 그래서 종이라는 표현을 오히려 편하게 느낀다. 왠지 조금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주님께 구속됨을 전적으로 시인하고 받아 들일 때 더욱 강해진다. 우리가 주님의 노예가 아니면 죄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죄 자체인 사탄은 우리에게 인간적 자유를 허락한다. 마음껏 죄짓도록 방치한다. 교만이 그에게는 너무도 요긴한 도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님을 통해 죄 사함 받았기에 주님 안에서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주님이 없이는 종국에는 지옥이다. 마음에 번민과 욕심이 가득해진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유가 너무 많아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자신이 자기의 것이라 판단하여 자신의 목숨도 자기 마음대로 다룬다. 하지만 결코 자유인이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건 스스로의 구속이요. 죄의 노예가 된 모습이다. 이 책은 꽤 읽기가 힘이 든다. 노예라는 주제어에 대한 거부감에서 그런 것일까? 그 보다 구원받고 주께 구속된 우리의 존재를 잘못 인식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한 근거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다소 논문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심지어 후반 50여 페이지는 믿음의 선배들이 스스로 노예라고 고백한 문건들과 참조한 많은 고문헌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오늘부터 나 스스로 ‘둘로스’ 임을 고백해 본다. 주님의 구속이 성령의 감동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구속의 역사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길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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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저자는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라고 선포하고 있다.
나를 포함하여 현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토록 직접적인 찔림이 있는 내용이 그동안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그동안 이 땅에서 일부의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모습,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내용의 설교, 말씀만을 반복적으로 나타냈기에 사람들이 그 짠맛을 잃어버렸을 터이고 그 본래의 밝은 빛이 흐려졌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는 곳곳에서 내 마음이 찔리고 그리하여 달아오르는 것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또 왜곡되이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면 교회가 알라딘의 처럼 본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장소처럼 여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기복신앙의 폐단일 것이다. 책의 저자도 "오늘날 교회(나는 극히 일부교회라고 믿고 싶다.)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이곳에 계시며..." 라고 질타한다.
그는 성경에 충실하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주인이요, 소유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은 왕, 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는 그분으 백성이요, 그분의 부하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분의 노예들이다." 킹제임스 번역본과 그보다 앞선 제네바 성경을 포함한 거의 모든 성경이 노예, 헬라어로 '둘로스'라는 단어를 '노예(Slave)'로 번역하는 대신, '종(Servant)'으로 대체한고 있다. 노예와 종의 핵심적인 차이는 종은 고용된 존재이고 노예는 소유된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또한 예전의 그 성경 저자들이 굳이 종이라는 표현대신 노예라는 단어를 썻는지 그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과 1세기 로마의 노예제도 사이의 다음과 같은 공통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전적인 소유권, ② 무조건적인 복종, ③ 오직 헌신, ④ 전적의존, ⑤ 개인적인 책무 이는 노예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슷한 점이라 하겠다.
전적의존. 나의 쓸 것과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주인이라는 것을 그 당시 노예들은 알 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입으로 시인한 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며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늘 불안해 하고 있는 나의 모습. 나의 것을, 나의 지위를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라며 직장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그러한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저자는 만약 '우리가 노예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상속자이다.'라고 하였다. 책을 중간즈음 읽어 가는 중에 깨달은 바가 있음을 기쁨의 마음으로 아내에게 전하고자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노예라고 하네?"라고 하였더니 "나는 노예가 아니라 자녀인데?"라며 답이 되돌아 왔다. 우리는 노예이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역설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 이는 분명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을 입은 그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소중한 진리를 담아 두었던 나의 마음상자에 먼지가 쌓일 때 마다 위의 책으로 다시 쌓인 먼지를 훔칠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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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것들은 모든 말을 다 동원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처럼 오히려 말이 그 본질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촌철살인(寸鐵殺人)’ 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 한마디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고 복잡한 문제를 간명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맥아더 목사님의 경우 ‘슬레이브(slave)’라는 단어가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에게 ‘슬레이브’라는 단어가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영어 성경에는 대부분 ‘servant’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그 의미상 ‘slave’로 표현되어야 하며, ‘slave’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만약 이 진실이 알려졌다면 굳이 내가 그 많은 책들을 집필할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사실 저자의 그 동안의 저서의 메시지는 ‘slave’가 가지고 있는 함축성을 충분히 설파하고 있다. 아니, 비록 slav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slave의 삶을 살라는 것이 저자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 저자는 slave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축성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의 메시지는 결국 slave라는 단어로 모두 풀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slave가 비록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었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다지 큰 울림을 가지지 못한다. 영어에서는 ‘servant’와 ‘slave’의 차이가 크겠지만, 우리 나라 성격(개역성경기준)에서는 주로 ‘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종’이나 ‘노예’나 거의 같은 단어이다. ‘servant’가 영어권에서는 ‘하인’이나 ‘종업원’을 의미하기에 ‘노예’와는 상당히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 올 수 있지만, 우리말 번역 성경들에서는 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저자의 의도를 살린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주’를 ‘주인님’이라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 그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영어권에서 ‘slave’가 ‘servant’로 왜곡된 인식이 우리 나라에서는 ‘주인님’이 ‘주’라는 단어로 오도되고 있다. 사실 ‘주’라는 단어가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주’ 혹은 ‘주님’ 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오르내리기 때문에 ‘주님’이 ‘주인님’이라는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 ‘주님’에서 ‘주인님’으로 바꾸어서 기도를 한 번 해보라. 우리의 기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말은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하인에게 명령을 시달하듯 자신의 요구사항들을 내뱉는 기도를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주인님’이라고 말한다면 명령하거나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 명령을 들어야 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여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들 것이다. 이것이 사실 이 책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주인님’의 ‘노예’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잊고 살아간다. ‘노예’에게는 주권이 없다. 오직 ‘주인님’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 만이 있다. ‘노예’는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스스로 결정해서도 안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주인님’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그러면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님’께서 그의 ‘노예’의 안전과 모든 쓸 것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렇게 명료하고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수 많은 문제들, 비록 그것이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복잡 미묘한 문제라 할 지라도, 우리가 ‘주인님’의 ‘노예’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주인님’께 물어보고 해결해달라고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점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한 때 열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미적지근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초신자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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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오늘날 많은 성경(영역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를 규정짓는 ‘노예’(그리스어로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이 단어는 slave로 번역하는 것이 옳지만, 많은 번역가들이 servant(종)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원래 성경의 저자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이 약화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책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의 노예됨’에 관해 성경적인 근거를 살피면서 강한 어조로 강조한다. 또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적용점을 주는지를 차분하게 살핀다.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전환되는지에 좀 더 힘을 준다.
2. 감상평 。。。。。。。
책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고, 그 대상은 한 지점에 맞춰져 있다. 교회에서 선언하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말만 기억한 채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헌신도 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은 부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분으로 전락하고, 자기 삶의 주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여겨진다. 책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짓된 자의식을 매우 직접적으로 공격하며 깨뜨리는 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질문 하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은 실제적인 상태와 지위를 가리키는 진술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인가. 책의 전반부는 강경한 어조로 이 설명이 우리의 실제 지위에 관한 설명인 것처럼 강조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다시 ‘아들 됨’으로 강조점이 옮겨진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아들인 동시에 노예일 수 있는가? 책 안에서도 노예가 주인에게 입양되는 즉시 그의 이전 신분은 삭제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저자는 이를 성경이 담고 있는 역설(13장)이라는 개념으로 돌파를 하려 하지만 그게 정말 유효한 방식일까.
사실 성경은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각각의 표현들은 저마다 진리의 한 모습들을 담고 있고. 물론 그 중에서 한 상태, 지위에 관한 설명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게 나머지 모두를 삼켜버리면 미처 예기치 못했던 난점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요컨대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그분에 전적인 ‘주되심’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이 책에서 자세히 풀어 놓고 있는 내용들은 이런 차원에서 성경의 진리를 잘 강조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바로 이 부분이 문제라고 하는 건 과한 부분도 있다. 물론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사람들에겐 꼭 필요한 메시지이겠지만.(아,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편한 기독교’를 믿으면서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과연 이 책을 추천한다고 해서 손에 들 지는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