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은 정녕 불을 훔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시인 랭보...우리는 우리 내면의 언어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불을 발견하고 훔쳐와 사람들에게 따스함과 지혜를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학을 하는 우리 모두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제자들이 아닌가? 언어와 육체를 지닌 존재들을 만나기 위해서 신비속으로, 모험속으로 떠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이 책에서는 불을 훔친 작가들이 나온다. 단테, 아그리파 도비녜, 루이즈 라베, 라신, 셸리, 바리언, 네르발, 위고, 보들레르, 랭보와 베를렌,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기욤 아폴리네르, 횔덜린, 릴케, 브르통, 엘뤼아르, 르네 샤르, 아라공, 로베르 데스노스, 퐁주, 아르토, 디킨즈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의 작가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가 있다. 시의 영역은 세계의 역사만큼이나 광대하다. 왜 글을 쓰고 읽는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나는 정신적인 영양분이 책 속에 들어 있고, 진리와 사랑과 희망이 모두 책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책을 쓴 작가들을 만난다는 것은 불을 얻는 것이다. 인생의 불을 얻는 것이다. 내면과 맞닿은 언어를 발견하고, 불을 훔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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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계의 역사만큼이나 광대하고 위대한 시에 대해 쓴 책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테나 랭보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삶이나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불을 훔치는 사람.' 처음 제목만 봐서는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지?
<내면의 열정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시인에게 지고 있는 주된 빚이다. 시인은 정녕 불을 훔치는 사람..>이라는 책 속의 구절을 보고 난 뒤에라야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영 내용을 모르고 읽게 된 책인데 '시'에 대해서 나오니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잠시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좋은 시를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시를 써보았거나 써보고 싶은 욕구를 느껴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훌륭한 시를 읽고 감동에 젖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그 결말에 이르러 시를 창조해 내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서 '창조해 내는 시'란, 부족한 소양으로 부실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듯 하게 기교를 부려 낸, 어린아이가 끄적인 낙서와 다름없는 창작물들은 배제한, 어느 문화권 안에서라도 예찬될 만한 자격이 있는 시를 이르는 말이다.
나도 어릴 적 '시집'을 좋아해, 시집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어린 꼬마가 시집을 즐겨 읽는 것에 대해 어른들은 기특해하고 신기해 하였다.
나는 그림이 좋았고, 시도 좋았다. 화가가 될지, 시인이 될지 약간 고민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난 시인이나, 화가가 되고 싶어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어른들은 펄쩍 뛰었다.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야! 시나 그림은 취미로만 즐겨!'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자, 어른들은 '화가나 시인은 거지가 되기 십상이지. 성공하기도 어렵고 아무나 되는 것도 아냐. 너는 편한 직업을 가져야 해.'하고 타일렀다.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무섭게 다가오는 '거지'란 어감에 질리고 어른들의 격한 반응에도 놀라 '시인'이나 '화가'에 대한 꿈은 아주 꼭꼭 접어 마음의 가장 어두운 다락방의 상자에 담아두고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입시와 직장구하기라는 난국을 만나 그림과 시를 창조해 낸다는 것은 내게서 아주 멀어졌다. 그리고 친숙하고 따라서 쉽게 느껴지던 시와 그림의 세계가 넘겨다 볼 수도 없는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제 창조하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거장전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며 가끔씩 좋아하던 시인의 시집을 찾아다 아주 가끔씩 읽을 뿐이다.
시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심지어는 사상의 차이까지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시를 창조해 내는 시인들에게는 자아분추이나 내면성장의 수단이 된다. 내면 성장은 시인 뿐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해당된다.
남의 고독이나 자아 성찰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것이 꼭 자신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민감함으로 인해 늘 고통속에서 시를 창조해 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강렬한 고통으로만 가득찬 시만이 위대한 시라고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런 시들이 문학적 가치가 더 뛰어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의 <절망>부분에서 해답을 엿볼 수 있다.
헤겔은 횔덜린이 언어에 대한 정열이 없이 아무것도 아닌 추상적 사상에만 골몰한다고 비난했다. 라고 적고 있는데 바꿔 생각하니 인생의 고통이 없이 깊은 절망과 사색이 없이 씌여진 시는 그야말로 언어에 대한 정열이 없이 씌여진 상징적 문자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부서지도록 치열한 인생의 체험- 그것이 훌륭한 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마치 허리가 휘도록 힘겹게 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돈의 댓가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누구나 고결한 내면 세계를 넘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주위의 환경이 인간 체험의 고통을 찾을 수 없게 너무나 평탄한 길로만 걸어가게 만들어져 있는 사람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빚을 지워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고통을 시로써 승화해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이 보다 더 높은 정신의 세계로 발돋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의 번영을 위해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온다. 그 죄로 인해 그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산에 쇠스랑으로 결박되어 독수리들에게 생살을 뜯기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인 '불을 훔친 사람들'은 유명한 시인 랭보의 '시인은 정녕 불을 훔치는 사람들'에서 따온 것이다.
랭보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러한 구절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여기서 '불을 훔친 사람들'은 뭇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 감내해 특유의 감수성으로 승화해 시를 창조해 내는 '시인'들을, '불'은 그 결과물인 '시'를 상징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은유인가.
예전의 일 뒤로 내가 시인이니 화가니 하는 것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생각한다.
'난 불을 훔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하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분명 어른들은 (이젠 나도 나이로는 어엿한 어른이지만) 벙찐 모습을 하겠지.
그리고 약간 안심도 된다.
시인이 어른들이 말한 것과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그들은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불을 훔치는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