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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무의 일기』는 삼백여 년 동안 프랑스의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배나무 트리스탕의 이야기로써, 나무 자신의 생각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감정상태 등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르고 있다. 또한, 트리스탕은 상대방의 몸이 어떠한 상태인지 마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까지를 꿰뚫어보는 일종의 전지적인 능력을 타고났으며, 현재와 과거만이 아닌 미래까지를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능동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관찰자로서의 나무일 뿐이다.
조르주 란 박사가 돌보는 삼백 여년의 수령을 지닌 배나무 트리스탕은, 작은 돌풍으로 인해 쓰러진다. 오직 자신에게만 얘기하는 이웃집 소녀 마농이 트리스탕의 몸에 조각을 함으로써 그의 의식은 인간들의 의식과 함께하기 시작하고, 나무 비평가 야니스 카라스, 란 박사, 마농에 의해 나무로서의 삶을 묻어주는 파티가 열린다. 그리고, 마농의 부모가 차사고로 죽자 란 박사가 마농을 양녀로 들이고 미술대학에 다니도록 지원하지만 란 박사 부부 역시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는 아름답게 성장해 현대미술계를 장악하는 유명조각가가 된다. 그녀의 애장품을 경매하는 곳에서 15년 만에 야니스와 마농은 재회하고, 그들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든다. 야니스는 마농의 설득에 의해 트리스탕의 일생을 책으로 집필하기 시작하고, 트리스탕은 자신을 처음으로 돌보았던 카트린 부셰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된다.
야니스의 아이를 임신한 마농은 임신 사실을 야니스에게 숨긴 채, 석유회사와 싸우고 있는 아마존 부족을 돕기 위해 떠난다. 그곳에서 아들 토에을 낳은 뒤 아마존 부족에게 맡기고, 나무들을 입양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이지만,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석유회사의 압력(불도저에 깔려)에 의해 사망한다. 마농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야니스가 잠시 집을 비운 상태에서 아랍인 청년 라픽이 트리스탕 조각상을 훔친다. 야니스는 도난 사건을 통해 만난 경찰관이자 유부녀인 오드리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낀다. 파괴된 숲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마농의 아들 토에는 총명하고 지혜롭게 성장하면서, 법정과 미디어에서 능력과 우위를 점하고, 친환경운동가로서 소신을 다한다.
라픽은 TV에서 본 토에를 보면서 조각상을 돌려줄 결심을 하고 트리스탕(마농의 조각상)은 토에에게 우편으로 부쳐진다. 마농 회고전에서, 토에는 야니스와 토에의 존재를 알아본다. 트리스탕을 마주한 야니스는 중단했던 책을 다시 집필하기 시작하고, 탄생에 얽힌 비밀까지를 추적해내고, 트리스탕의 의식은 야니스의 글을 따라 향한다. 루이 15세 때 얀센파와 프랑스 왕가에서 비롯된 카트린 부셰의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해내고, 그 비극적 사건은 트리스탕 자신과, 또다른 배나무 이졸드 두 그루의 나무가 간직한 살인의 추억이었다. 야니스는 백 살 생일 전날 『한 그루 나무가 되다』 책을 완성하고, 트리스탕은 칠십 년 전 어린 마농이 흘린 자신의 씨앗으로 새로운 존재로 움트기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만든 인간들의 감정에 의해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변질되었다. 성모마리아의 나무, 사랑의 배나무, 정의의 나무, 불행의 나무, 위령탑, 오페라 애호가의 알레고리, 사후의 조각..... 과연 나는 누구인가. -P157
인간의 감정의 발로는 결국 잔인한 이기심인가? 이 땅은 결코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한 그루의 나무는 조용히 속삭이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놓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공유하고자 하는 현재 평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일순간 피폐하게 몰락하고 말 것이다. 본문에서 마농이 석유회사와 싸웠듯이, 산업적으로 덩치를 불려가는 오늘날에 인간과 생태계는 서로가 위협받고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해결을 모색해보고 비판하며, 인간만의 혜택이 아닌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체계를 위해 고민하고 실현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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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살던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만나는 나무가 있었다. 한 아름 두번을 안아도 다 못 안을 그런 넓은 통에 빼곡하게 울창한 나뭇잎을 자랑하는 나무였고, 그런 나무는 오래도 살았는지 뭐라고 뭐라고 그 나무에 대한 소개가 적힌 푯말까지 있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계단도 만들어 놓았고. 그래봐야 3계단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우러러 봐야하는 나무에게는 그것도 꽤나 높았다. 그런 나무를 지나칠때면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속이거나 합장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그 나무는 오랜 시간은 신령한 나무로 존엄하게 서 있다. 나는 그런 나무에게 이름도 지었다. 거룩한 나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대를 바꿔가며 빌었을 소망이 고스란히 나무의 주름에 잔뜩 세겨져 있는 거룩한 나무는 내게도 조금은 특별하다. 합장을 하며 기도를 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나무를 은근히 바라보며 가슴속으로 되뇌이고는 한다. ......하소서...부디...
<어느 나무의 일기>는 300년을 산 배나무의 일생을 담고 있는 소설로 나무가 주인공이라는 독특한 시점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나이테를 두르고 있는 나무는 어느날 쓰러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배나무는 그 자체만으로 고통스런 과거의 역사였다. "그래, 넌 불행을 몰고 다니는 나무야! 그들이 한 말이 다 옳았어!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제는 네 연기로 나도 질식시켜 죽일 거야? 조르주와 엘렌을 죽였던 것처럼? 그런 거야? 빌어먹을!" 그러나 나무는 연민이나 회한이 싸이지 않는다.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토막이 나 잘리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그런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배나무는 쓰러져 의식(또는 연대감!)이 희미해지지만 결국은 되돌아 오지 않나. 자연으로.
어느날인가 거룩한 나무가 있는 곳을 산책하다 의자를 발견했다. 나무 밑동만 남은 것을 의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룩한 의자라고나 할까? 그 나무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다. 이렇게...
덧 1. 작가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언노운"의 작가였다.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문체는 여전하지만 장르는 완전히 달랐다. 뭐랄까...우주적인 세계관을 읽었달까? 다만, 좀더 나무의 시점이 직접적이고 깊게 들어갔더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싶다. 나무를 둘러싼 인간들의 역사보다 식물로서의 나무의 역사말이다.(그게 그거라고?-.-)
덧 2. 배나무의 이야기를 좀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 장 마리 펠트의 "자연의 비밀 언어" 조르주 페테르망의 "주목할 만한 나무들의 프랑스" 제레미 나르비의 "자연의 지능"혹은 "라루스 나무 사전" 미셸 탈보의 "우주는 하나의 홀로그램이다." 루이 바질 카레 드 몽주롱의 "기적에 관한 진실" 장 드니 브르댕의 "사건" 장 프랑수아 드니오의 "잊혀진 비밀의 사무실" 피에르 드레퓌스의 "추억과 편지" 를 읽는다면 좀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어쩐지...그 많은 은유를 알아듣기에 내 역사적 지식은 너무 얇았던 거지-_-
프랑스 역사가 바탕이 된 <어느 나무의 일기>는 휠씬 흥미로울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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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래된 나무에는 정령이 깃든다 믿어왔다. 마을 입구 어귀의 구릉 위에는 어김없이 성황당이 서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때마다 작은 돌을 쌓으며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곤 했다. 성황당 나무가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오래된 나무를 베거나 해치는 것을 금기시되어 왔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그런 고목(古木)이 화자인 소설이다. 나무의 이름은 트리스탕. 루이 15세 때 심어진 배나무 트리스탕은 프랑스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역사에서 사라진 왕의 사생아들이 독살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종교 탄압시에는 많은 신부들이 그의 가지에 목매달았다. 수많은 가지들이 마녀의 화형식에 사용되었고, 시인의 자살을 목격했고 총탄이 박히는 수모도 당했다. 오랜세월 묵묵히 인간사를 함께한 트리스탕은 언제부턴가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꺼리낌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트리스탕을 찾아와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슬픔과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고백을 들으며 트리스탕은 자신이 사람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감정과 기억들은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사라져도 트리스탕의 기억으로 남겨진다. 트리스탕이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로 꺼려지게 된 것 또한 그런 기억때문이 아니었을까...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있다는 존재감은 자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트리스탕이 돌풍에 뿌리채 뽑힌 채 넘어지고 만다. 사람들의 노력에도 결국 그는 나무로써의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젊은 작가 야니스와 트리스탕을 보살피던 란 박사 부부, 그리고 자폐증에 걸린 이웃집 소녀 마농이 그를 기리는 모임을 열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의 기억이 이어진다.
트리스탕을 사랑한 마농은 이름을 트리스탄으로 개명하고 트링스탄을 조각품으로 남긴다. 야니스는 트리스탕에 대한 책을 집필하며 크리스탕의 기원을 포함해 많은 기억들이 더해진다. 그러나 트리스탕은 마지막 장에서 그저 죽은 나무로서의 단순한 운명을 되찾고 싶다고 고백한다.
관찰자인 나무의 기억으로 남겨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수많은 음모와 계략, 배신이 가득하다.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모습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뿌리가 뽑힌 트리스탕이 자신의 마지막보다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던 모습과 비교해 더욱 두드러진다. 트리스탕과 같은 고목을 만나보기는 어렵더라도 우리주변에서 많은 나무들을 본다. 우리는 그저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혹은 공기정화와 같이 주로 기능적인 면만을 보기 마련인데.....도시와 길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오랜시간 동안 관찰자로 우리를 바라보았다고 생각하니 나무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나무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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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느 나무의 일기
프랑스 작가가 쓴 이 소설은 교훈적이다. 소설의 재미를 나름 첨가한 것 같지만, 그닥 매력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제목에서 일기라고는 했지만 일기 보다는 여행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1. 나무의 이름은 트리스탕이다. 루이 15세 때 심어진 이 배나무는 프랑스의 역사의 산증인이다. 돌풍에 트리스탕은 뿌리가 뽑혀 나간다. 결국 그는 나무의 생을 마감하지만 그의 의식은 자신의 일부에 남아 있다.
그를 사랑했던 꼬마 숙녀인 마농은 트리스탕을 이용해서 조각품을 만든다.
그녀로부터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된 트리스탕. 또한 마농도 그를 사랑해서 그와 이름이 비슷하게 개명을 한다. 바로 트리스탄으로.
이야기는 트리스탄과 야니스의 불꽃놀이 사랑으로 이어진다. 이 둘의 커플은 나이차가 꽤 나는 것 같다. 야니스가 임신을 하고 나서 아마존으로 떠나는데 솔직히 왜 떠나는지 모르겠다.
문화적 차이인가. 아니면 여자의 심리인가.
세월이 흘려서 트리스탄의 아들 토에는 야니스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중요하게 처리된 장면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 쓰여진 것 같다.
2.
야니스는 트리스탕에 관한 책을 집필하지만 잘 안 된다. 그러다가 그의 장기인 바람을 또 피운다. 야니스는 100살까지 산다. 참, 저렇게 밤낮으로 섹스를 하는데도 오래 사는거 보면 카사노바를 능가하는 정력가인거 같다.
이야기는 그저 나무인 트리스탕이 들려주는 걸로 끝이 난다. 간혹 나무가 인류에게 전해주는 경고 메세지가 뜨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유기적이지 못해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일부 식물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터 방어하는 수단으로 피임약을 상기시키는 양의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론을 꽃가루에 뿌리는 걸로 밝혀졌다.
자연의 반격이 시작되면 우리 이제 끝장이다. 지, 잘 난 맛에 자연을 엉망으로 만들더니 이제 어쩌누.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결국 자연을 훼손하지 말자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부인 것을 인정하며 살자.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동식물들을 그만 죽이자. 그 대가를 누가 받겠는가.
우리가 뭐가 뛰어나다고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가. 인류가 지금보다 손톱만큼이라도 겸손했더라면 지구에 사는 동식물의 멸종을 거의 막았을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저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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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은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에 인간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두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시절에도 나무는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칭송, 사람들의 비난도 모두 들었다. 나무에게 참 몹쓸 짓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나무가 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굵은 몸 안 나이테를 새겨가며 버텨온 지난 세월에 대한 회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무가 지나온 시간의 기록 나이테, 인간이 지나온 시간의 기록 역사. 이 둘이 맞물려 빚어내는 게 아닌 나무의 편에서 지켜볼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작가는 프랑스 문학답게 글자의 아름다운 맛을 살려내려 애썼다. 자칫하면 동화로 치부될 수 있었던 소재에 서정성을 불어넣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덤덤하지만 서정적인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 쏙 마음에 찬다. 또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 초등학교나 중학교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좋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동안 인간이 나무를 바라보며 써 놓은 글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의 생각에 대해 적은 책은 한 권도 찾지 못하였다. 생각의 전환과 같은 이 책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무는 그 누구의 탓을 하더라도 ‘그러지 않았더라면’의 한탄하는 말투가 느껴진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이 세월의 무게를 덤덤히 짊어져 간다. 아마 옆의 나무들이 쓰러져 퇴비로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음이리라. 자신의 몸통 안이 썩어 넘어졌음에도 자신보다 오히려 남자를 걱정하는 나무. 우리는 과연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예전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부나 또 자신을 베어갈 때에도 한 번 싫은 소리 안하던 나무. 이 나무도 그 나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한 사람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고 슬픔을 덜어내는 친구 같은 존재. 다른 이들이 잘라내라 했을 때 나를 지켜준 인간에 대한 고마움. 아마 나무는 그래서 인간, 그를 기억해주고 그를 위로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삭막한 Give&Take가 아닌 따뜻한 Give&Take. 언제쯤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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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최대 연애담이다. 12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켈트인들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이야기인데, 그 사랑과 죽음의 강렬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전 유럽에 보급되고 서구 연애문학의 전형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바그너의 악극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의 저자인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는 1960년 니스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 <편도승차권>이라는 작품으로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콩쿠르 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들은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금지된 삶>, <반 기숙생>, <언노운>, <지미의 복음>, <빛의 집>, <결혼 입회인들> 등 다양하다. 그의 2011년 최신작인 『어느 나무의 일기』는 3백년을 살아온 나무(트리스탕)를 주인공으로 하는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나무의 해’를 선포한 유네스코 프랑스와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등,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에 관한 메시지를 독자와 사회에 전하고 있는 작품이다.
역자인 이재형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명대, 강원대,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프랑스에 머물며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나무’의 이름은 트리스탕이며 삼백년이 다 된 배나무이다. 돌풍에 의해 마침내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조르주 란 박사의 정원에 쓰러지면서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트리스탕의 옆에는 이졸드라는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이졸드의 꼭대기에는 안테나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TV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세상의 문화, 정보, 오락등의 원천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트리스탕은 한 자리에 서서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고, 인간들의 감정을 읽어내며 교감하기도 한다. 역사를 고스란히 읽어내고 겪어낸 것이다. 죽어서야 사랑을 이룬 전설의 연인들인 트리스탕과 이졸드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나무들. 이들의 이야기가 전설적인 연인들의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책의 말미에 나와 있어 아하! 하고 이해의 장을 넓혀준다.
프랑스 궁정에 의해 살해당한 루이 15세의 사생아였던 쌍둥이들의 뱃속에 있던 독이 묻은 배의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어린 두 영혼이 죽음의 씨앗에서 삶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쌍둥이) 지상에 남아 있기 위하여 나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묘한 매력에 빠져 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록 나무의 몸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혀진 것 말이다. 시공을 넘나들며 트리스탕의 의식 속을 여행하는 재미가 역사의 현장에 내가 서 있는 것처럼 실감났던 이유도 그 나무에 숨겨진 그 비밀스런 탄생의 사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공존에 관한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자신의 판단이나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혀 강요하지 않는 트리스탕의 균형적인 의식은 더욱 감동적이었는데, 내가 본받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중세 최고의 연애담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온 인류를 아우르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낯 선 작가의 낯 선 작품을 통해 뜻밖의 보물을 건져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유쾌하다. 소설임에도 픽션같은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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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냉장고를 바꿨다. 깊은 밤, 냉장고가 토해 낸 소리는 불안감을 느낄 만큼 컸다. 우린 이젠 이별해야 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헌 냉장고는 15년 정도 사용했다.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므로 더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버려질 냉장고를 닦고 또 닦았다. 세탁기나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다른 가전제품들과 이별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냉장고엔 발품을 팔아 저렴하고 좋은 재료를 사 음식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였던 당신의 일상과 음식을 먹으며 좋아했던 가족과의 추억 때문에 냉장고를 그대로 보낼 수 없으셨을 것이다. 새해 첫 책을 고르는 일은 힘들었다. 어렵게 고른 책들은 첫 문장부터가 난감했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디디에 반 코벨라르트의『어느 나무의 일기』는 3백 살 정도 된 트랑스탕이란 이름을 가진 배나무의 의식 여행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디디에 반 코벨라르트는 현재 국내 상연 중인 뮤지컬<벽을 뚫는 남자>의 대본을 쓴 작가이다. 트랑스탕은 인간들과 함께했던 과거로 여행을 떠났고 나무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소설 속 야니스는 마농에게 트랑스랑에 관한 이야기, 한 배나무가 보는 삼백 년 동안의 역사, 그의 마음속 일기 같은 소설을 출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완성해 간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야니스가 출간하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로 보인다. 뿌리 내린 땅 밑 깊은 곳에서 나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인간 존재들이 점점 더 큰 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그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청난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거기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199쪽) 어머니의 냉장고에 관한 기억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닌 냉장고와 공유했던 기억일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냉장고에게 기억 따위는 없겠지만 말이다. 트랑스탕이 오랜 시간 살 수 있었던 것은 조르주 란 박사의 사랑 때문이었고(그 사랑이 아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슬픔에서 기원했다 할지라도) 의식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나무들을 사랑했던 나무 비평가 야니스와 <나무의 꿈>조각을 만든 마농 덕분이었다. 나무와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로는 살 수 없는, 공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잊고 있던 명징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옥상에 살구나무가 있다는 글을, 내게 봄을 알리는 꽃은 살구꽃이란 글을 어느 리뷰에서 썼었다. 살구나무는 지금 집으로 이사 와서 만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살구나무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집에 있었을까, 이 집에 세워지긴 전에 왔다면 그전엔 어디에 있었을까, 살구나무는 어떤 기억들을 품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달콤한 살구는 잘도 따 먹었으면서. 나는 참 무심한 인간이었다. 살구나무는 트랑스탕처럼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공유할 순 없더라도 소통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옥상에 올라 살구나무를 바라봤다. 뭔가 내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헌 냉장고는 수리되어 누군가의 집으로 가게 될 것이고 마지막엔 폐기처분 될 것이다. 그다음엔? 다른 모습으로 환생할까? 인간이 아니니 재생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구나무는? 배와 살구엔 씨가 있다. 그 씨들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기억을 쌓을 것이다. 모든 씨들이 뿌리를 내리는 건 아니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외면하고 싶다. 트랑스탕은 마농을 비롯한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살구나무는 세발자전거를 타던 꼬마가 반항(?)하는 초등학생이 된 모습을, 한여름 식탁을 즐겁게 해준 상추와 고추, 겨울의 식량이 되어준 배추나 열무들을 정성스레 가꿨던 내 부모님의 모습을,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 혼자 올라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책 뒤표지에는 어느 프랑스 독자의 ‘우리 세상과 나란히 이어져온 또 하나의 세상!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나무를 예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교훈!’이라는 평이 실려 있다. 나는 이 말에 아주 깊이 공감한다. 언젠가부터 살구는 많이 열리지 않는다. 당연히 꽃도 만발하지 않다. 살구나무 역시 늙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폭염과 폭풍과 폭설과 해충들과 싸울 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다가오는 봄엔 눈처럼 날리는 살구꽃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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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다.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했던 영화 <아바타>처럼, 신비로운 이야기이다. 소설이면서 사실이고, 사실이면서 소설이기도 한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정말이지, '나무'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그것은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경이로움이다. 우리는 나무도 '생명'이라고,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나무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하고 있을까?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듯이, 나무도 자기 생각을 가진 생명체로서 자연 안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망각의 잠을 깨우고,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기억을 깨운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제목처럼 나무가 주인공이고, 일기처럼 적어내려간 나무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한 시골 마을에 인간과 함께 3백 년을 살아온 배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이름은 '트리스탕'이다. 그런데 작은 돌풍 때문에 이 나무가 그만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트리스탕은 자신의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을 궁금해한다. "내가 살아가기를 멈추면, 이 모든 인간의 기억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11).
<어느 나무의 일기>는 이렇게 뿌리가 잘려버린 트리스탕이 장작이 되고, 나무 조각이 되어 인간들과 소통하는 이야기이다. 트리스탕의 현재 주인인 의사 조르주 란 박사 부부, 트리스탕과만 은밀하게 소통하는 옆집 소녀 마농, 프랑스의 '주목할 만한 나무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 야니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트리스탕이 심어진 루이 15세 때로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기도 하고, 트리스랑의 기억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이 재구성 되기도 하고, 아마존 밀림으로 공간을 넘나들기도 한다. 3백 년이라는 트리스탕의 기억 속에서 프랑스 역사를 관통하는 날줄과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환경'이라는 씨줄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엮어간다.
'트리스탕'의 기억에 깃든 인간의 역사와 그 기억을 통해 재해석되는 프랑스 역사도 새롭지만, <어느 나무의 일기>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가 가진 숨겨진 생물학적(?) 힘이었다. 자연을 헤치는 인간의 이기심을 응징하고자 나무가 인간에게 불임을 가져다주는 호르몬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사실일까. '순환'하는 자연 속에서 유독 인간만이 '한 번 살면 그뿐'이라는 자세로 살고 있지 않나 반성도 하게 해준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나무의 기억을 통해 프랑스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 매개 역할을 하는 트리스탕을 통해 자연의 '균형'과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는데, 전반적으로 프랑스 역사보다는 환경문제 쪽으로 (독자의) 무게 중심이 더 기운다.
<어느 나무의 일기>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보다 뭔가 잊고 있는 기억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는 계몽적 소설로 읽힌다. 뿌리에서 분리되어 소멸되어가는 트리스탕을 통해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에 속한 생명체로 살지 못하는 인간의 생활이 얼마나 위험하고 권태로운 것인가 하는 자각도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그리고 독특한 느낌의 소설을 찾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계절은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아무 이유도 없이 바뀌어간다. 무르익어가는 봄을 기켜보는 게 대체 무슨 소용린 말인가. 나는 거기 동참하지도 못하는데. 여름을 느낀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겨울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는 저장물질을 얻어낼 수도 없는데. 가을을 알리는 첫 신호를 포착한들 무슨 소용인가. 붉은 거미가 내 옆의 침엽수를 공격하여 잎이 떨어지고, 내가 뿌리내린 토양을 산성화하고, 그 바람에 더욱 심각해진 살충제 오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식으로 영양을 섭취할 수밖에 없었던, 늘상 겪던 위기감조차 이제는 느끼지 못하는데. 그저 모든 게 권태로울 뿐이다"(171).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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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된 나무가 쓰러졌다.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의식을 갖고 있는 나무의 이야기는 신선함으로 소설을 장악한다. 오랜 기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던 나무가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간 인연들과 회상을 나누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낯익은 여자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 300년 된 두 그루의 나무. 한 나무의 풍성함에 가려 빛이 바랬던 나무는 이제 홀로 태양을 받는다. 풍성했던 나무는 쓰러져 사람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장작으로 쓰일 뿐이다. 그때 집 앞의 한 소녀에 의해 예술품으로 남아 또 다시 미래를 살아가는 나무. 이 소설의 매력은 역사를 현실로 끌어오는 작가의 상상력이다. 역사 속 사건을, 인물을 300년이란 시간을 보낸 나무를 통해 현실로 자연스럽게 끌고 와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인다. 신비한 여자 아이의 정체와 나무의 정체성이 결말에 드러났을 때는 ‘아~’하는 탐복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나의 모자란 역사의식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난 300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이 소설이 더욱 내 뇌리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작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그 동안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서를 읽고 다시금 도전하고 싶다. 그렇다면 결말에 이르러 느낄 수 있는 파동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리라. 물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 소설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구성이나 신선한 소재는 충분히 독자의 눈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아는 사람이 이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예를 든다면 몇 달 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볼 때, 등장인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역사의식을 갖지 않고 보더라도 전혀 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역사 속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의 필체에 놀라게 되는 것. 그럼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색다른 매력을 느끼는 것.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에 얼른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길 바라며 다시금 이 책을 펼쳐보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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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이나 산속엔 수백 년 된 고목이 있다. 특이한 것은 인간들이 고목 주위에 돌탑을 쌓는다거나 새끼줄을 묶어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오며 무던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자라는 것을 인식한 것일까? 제임스 카메룬감독의 최고 히트작 아바타에서도 고목이 등장한다. 지구상의 고목과 다른 점이라면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이며 언제든 원주민들과 교류를 한다는 점이다. 고목에 모여 침략자에 대항하는 의식을 펼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신앙의 표현으로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고목을 세상만물을 통찰하고 관리하는 절대자로 표현한다.
또 하나의 고목이 있다. 이름은 트리스탕, 같은 건물에 인접해있지만 이졸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트리스탕은 간밤의 돌풍에 밀려 뿌리가 뽑힌 채 넘어져 생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면 좋겠지만 뿌리 하나만으로 버텨온 자신도 이제 생이 끝난다는 것을 실감한다. 트리스탕은 삼백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왔다. 자신의 몸속엔 주인인 란박사의 아들을 관통한 총알이 박혀있으며 중세시대로부터 세계대전까지 죽임을 당한 억울한 이들의 원혼들이 기거했었다. 처음엔 알지 못했지만 트리스탕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과 연결된 인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트리스탕에게 저주가 씌워져 있다고 경고했으며 사실 자신도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트리스탕도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트리스탕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 야니스를 기다린다. 그라면 충분히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란박사와 야니스는 그를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트리스탕의 영혼은 마농을 기억한다. 마농은 얼마 전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트리스탕은 어린 소녀의 보호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순전히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트리스탕의 몸에 그녀와 닮은 조각을 새기고 있었다. 야니스는 트리스탕의 일대기를 기록할 예정이었지만 그의 소멸과 함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일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농이 만들어 놓은 조각은 트리스탕과 일체가 되었다. 마농은 트리스탄으로 이름을 바꾸고 뛰어난 조각가로 명성을 날린다. 그녀의 작품은 상당한 고가에 거래가 되었고 작품이 팔릴수록 그녀의 사업은 번창해갔다. 성공한 그녀는 옛 사랑 야니스를 만난다.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빠르게 과거의 일을 잊어간다. 하지만 트리스탄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현재를 존재하게 만든 자연에 대한 순종이다. 그녀는 현실세계에서 이룬 모든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은 발목을 잡았고 그녀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트리스탕과 야니스는 혼란스러웠지만 그녀의 판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트리스탄을 잃은 야니스는 공황에 빠지고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다.
트리스탄에 의해 ‘나무의 꿈’으로 다시 탄생한 트리스탕은 어둠에 갇힌다. 그의 몸 일부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의 신호로 야니스의 소식을 들을 뿐이다. 트리스탄은 거대기업에 맞서다 숲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제 암흑에 갇힌 트리스탕은 과거 자신을 거친 영혼들을 떠올리는 또 하나의 원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트리스탕은 야니스의 품으로 돌아온다. 모든 사실들은 과거의 잔존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트리스탕은 그들을 기억한다. 야니스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격정적이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자신을 쏙 빼닮은 토에가 나타난다. 삼백년을 이어온 트리스탕의 시간은 재연장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기록될 것이다.
자신을 거쳐 간 인간을 기억하는 나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트리스탕에게 수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는 감정전달자로 타인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조차 트리스탕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연결된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 되었든 소망이 되었든 트리스탕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언제나 올바른 길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의 고민과 상처를 전해줄 수 있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에도 영혼이 있는 것일까?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