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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만난 김현의 글은 문학으로 가는 길에 넘어야할 높은 언덕과 같았다. 그 언덕을 넘으면 문학이 보일 줄 알았다. ‘문학과 지성’을 매달 꼬박 꼬박 사 모은 이유도 그의 글을 읽으면 문학을 알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소를 해체하는 발골 기술자의 날렵한 손길처럼 김현은 문학을 발골하는 기술을 가진 존경받는 장인이었다. 그의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결국 김현이란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그들이 가진 무한한 지식은 부럽지만 자신은 그 앞에서 자신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런 느낌이 싫어 평론가의 글을 읽지 못한다.
'문학 평론가 정여울‘ 이라는 이름을 몇 년 전부터 들었지만 섣불리 그녀의 책에 접근하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평론가라는 이름이 주는 무거움 때문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그녀가 쓴 말랑말랑한 책을 발견했다.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저자는 평론가라는 이름 때문에 주눅 들어있는 독자들을 꼬드기며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보물섬을 탐험하기 위한 가이드북 휴대용 지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좋긴 하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독자들에게, 문학이 좋지 않지만 왠지 모른 척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문학과 친구가 되는 법, 문학과 연애하는 법을 알려주는 다정한 멘토가 되기를 바란다.‘ (서문) 특히 ‘문학과 연애하는 법’을 알려준 다정한 멘토라는 말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제발 좀 부탁이니까 저의 멘토가 돼 주세요…….ㅠㅠㅠ”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과 데이트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평론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녀도 어렵고 존재감이 있는 단어로 기죽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책은 쉽고 문체는 감각적이다. 요즘 트렌드의 하나가 자신이 전공한 전문분야를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최재천, 정재승, 이주헌, 정민과 같은 작가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서 독자들의 눈높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정여울이란 이름도 이 작가군에 포함시키고 싶은 것은 그녀의 글은 쉽게 핵심을 찔러주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를 발골하는 기술자의 날렵한 손길에 의해 부위별로 고기가 분리되어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정여울은 문학을 해체해서 18개의 부위로 정리해 놓았다. 데이트 하는 연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서 둘만이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이다. 조금 친숙한 사이로 발전했다면 괜히 음식을 먹여준다는 명분으로 수작을 걸며 은근 사랑의 행위를 연출한다. 정여울이 그와 같다. 다정한 연인처럼 다가와 자신이 해체한 부위를 소개하며 그 맛을 자랑한다.
1) 패러디의 마법, 2) 시점의 마술, 3) 의인화, 혹은 우화적 상상력, 4) 창조의 도구, 은유와 직유, 5) 상징의 신비로운 힘, 6) 아이러니, 반대로 말하기, 혹은 뜻대로 되지 않기, 7) 다르게 말하기, 알레고리의 힘 8) 트릭스터(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난꾸러기, 또는 어릿광대처럼,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의 유쾌한 반란 9) 악당, 악마, 악녀 10) 기억상실증 –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모험 11) 욕망을 창조하는 공간의 힘 12) 생명과 생존에 대한 강력한 은유, 음식 13) 문학속 환상, 14) 트라우마 위대한 유산 15) 과도한 시련 – 알을 깨는 통과의례 16) 가출 –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여정 17) 문학속의 대재앙 18) 문학의 영원한 테마. 러브 스토리
이렇게 그녀는 문학을 18가지의 테마로 분류해 놓았다. 어떤 문학이든지 이 테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이 테마를 적용시킨다면 지성은 저자의 숨겨진 뜻을 발견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일 것이고 감성은 주인공들이 겪는 삶의 다양함들을 만나며 숙연해 질 것이다.
‘문학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스승이자 친구이다. 우리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사는 오지에 가지 않고도 모든 문명의 이기와 결별할 수 있다. 바로 문학이라는 멋진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문학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이다.‘ (40쪽) 정여울의 문학관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책을 읽은 근본적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지하철을 타면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얼굴을 대하는 것이 뻘쭘해 어디로 눈길을 돌릴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스마트폰과 놀기 때문이다. 그 작은 화면으로 연속극을 보는 아가씨, 게임에 빠져 정신이 없는 청년, 인터넷 검색에 열심인 아저씨등 대부분의 승객들에게 스마트폰은 절친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친구와 함께 있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 시대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자아의 새로운 발견이 아닐까?
한 권의 책을 읽고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은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다. 유명한 여행지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온 것이 여행의 목적이 아닌 것처럼 책도 읽었다는 행위보다 책을 통해 내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목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를 둘러싼 다양한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기와 만날 수 있는 계기는 어떻게 형성될까? 그 과정에서 내 안의 멘토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교양’이다. 교양은 타인의 삶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길이기도 하다.‘ (224쪽) “교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양은 자신의 내면이 인정하는 것이다.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사용될 때 가치가 있다. “자신을 교양하기 위하여 문학을 읽습니다.”
이 한 마디를 자신에게 할 수 있다면 저자 정여울이 기뻐하며 소중한 멘티로 기억해줄 것 같다. 문득 크라잉넛의 경쾌한 노래 ‘넌 내게 반했어!’가 떠오른다. ‘솔직하게 말을 해봐
도도한 눈빛으로 제압하려해도 난 그런 속임수에 속지 않아‘ 정여울이 속삭이며 부르는 노래다.
“그래! 나 네게 반했다.” 오그라지지만 정여울의 글은 그만큼 매력적이다.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좋은 친구로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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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언어로 표현되어진 예술을 뜻한다.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의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재미만으로 읽기도 하겠고 어떤 이는 심심풀이용으로 읽기도 하겠지만, 문학은 우리 생활의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익숙한 생활문화로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문학평론가가 쓴 문학멘토링은 낯설다. 왜냐하면 문학자체가 즐기기 위함이지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정여울의 문학멘토링>>을 읽으면서 무엇이든지 전문가가 볼 수 있는 시각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높은 연봉을 둘러싸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서울시립교향단 상임작곡가가 "진정한 의미의 지휘자, 즉 한 작품에 대한 총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미세한 손짓 하나에도 음악적 메시지를 담아 연주자들에게 전달해 그들로부터 음악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극도로 드물며 " 지휘자 정명훈은 세계 최정상급의 지휘자로서 마땅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전문가가 풀어내는 예술의 세계와 일반인이 느끼는 예술의 세계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문학 읽기는 독서 주체인 ‘자아’와 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경험공간’ 으로 세계 해석에서 주관적 감수성을 고유하게 인정해주는 공간이 문학 읽기의 공간이다. 문학 읽기는 세계를 향하여 우리의 자아를 조절하고 동화해 나가는 공간이다. ‘세계’에 대해 자아는 본질적으로 대립하기 마련인데 문학 읽기 속에서 우리는 자아의 존재와 의식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여기서 문학의 역할은 '사랑'을 배우는 풍요로운 학습의 장으로서 ,자기만의 마음의 안식처를 상상하며 세월의 풍파를 견디게 해주며,'나'를 찾아떠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문학의 이런 여정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는 이러한 문학의 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이룩할 수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2부에서는 문학의 기법으로 패러디가 필요한 이유, 시점이 주는 문학의 매력, 인간과 동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의인화, 은유와 직유로 새로 피어나는 빛깔과 향기로 인해 얻어지는 삶의 아름다움을, 문학에서 보여주는 '상징'이 마법으로 변하게 되는 순간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 때문에 오히려 더 심각한 가난에 빠져 들게 되는 주인공들을 통해 아이러니한 모습들이 오히려 독자에게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선사한다는 것을 문학작품을 통해 들려준다. 저자는 이런 문학의 기법들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아이러니들을 작품 속에 기꺼이 끌어안게 해주며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숨김없이 드러내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주변의 질시와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을 만날 때 비로서 우리는 문학이 주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감동을 맛볼 수 있다.
3부 문학의 내용에서는 문학에 항상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분석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에서의 역할에 대한 설명들이다. 방자, 골룸, 동키, 큐피드들은 문학의 트릭스터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각종 경계와 규칙과 제도들의 불합리성을 고발하는 존재이다. 또한 문학작품 어디에나 등장하는 악당, 악마, 악녀는 우리 마음의 한계를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로서 역할을 해주고 , 문학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은 우리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배경은 욕망을 창조하는 공간의 힘으로, 음식은 생명과 생존의 은유로서 활용되어진다.
이렇게 문학의 역할과 문학에 쓰여지는 기법과 내용을 이해하고 문학을 읽게 된다면 문학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문학이 비록 허구일지 모르나 , 문학이 주는 메세지는 허구가 아니다. 문학이 삶에서 주려고 하는 의미는 오로지 더 나은 세계의 추구라 생각한다. 문학 속에서 사랑을 , 문학 속에서 실패를, 문학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된다면 어느 순간 삶의 지혜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가 나를 기다릴 것 같다. 쉽고도 재미있는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은 매혹적인 문학읽기이다. 저자가 주는 18가지의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쥔다면 문학이 주는 궁극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문학도 이제 제대로 알고 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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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책) 뭐 하러 그렇게 읽어대는지 도통 모르겠구만.’ 언니와 동생은 늘 책을 데리고 다녔다. 나나 데리고 다니지, 걔들이 뭐가 좋다고 저래 시시때때로 훑어쌓는 것인지, 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데리고 다닌 녀석은 고작해야 시집 몇 권. 시가 뭔지도 모르는 열네 살 소녀의 손에 들린 것은 알 수 없는 ‘동경’과 어떤 ‘낭만’이었다. 그 시절 시집을 제외한 책은 나에겐 읽을 필요가 없는,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는 ‘삶’의 대체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금은 조숙했던 탓일까. 아무튼 나의 학창시절 문학이란 것은 한겨울 따듯한 이불에 데워질 지치고 병든 심신을 위해 긴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뭇매는 정확히 일상 그 자체였다. 애늙은이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항상 ‘왜?’라는 물음을 달고 살았다. 왜 나만.. 왜... 왜...... 그 수많은 ‘왜’에 대한 질문 속에서도 나를 향해 방긋대는 것들이 있었다. 종이만 있으면 휘갈겨대곤 했던 활자들의 조용한 두런거림. 못 다 쓰고 버려야하는 공책이 있으면 안 되는 형편에도 내 주변엔 새 것 같은 헌 공책이 많았다. 거기에 볼을 흘러내리는 눈물줄기에도 낭만연지를 발라 주었던 나는 쓰고 또 썼다. 보여 지는 형식이 시라고 해서 감동의 된서리를 맞은 듯한 표정의 선생님은 내 낙서를 보고 ‘그건 시야, 정말 잘 썼네.’하곤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시라 불리던 내 낙서가 어느 날엔 시화라는 이름을 달기도 하고 분량이 많아지니 시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닐곱 권쯤 되는 내 어린 날의 시집은 잦은 이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난 그것들을 보관해야 된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무래도 또 쓰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지나왔던 주변상황과 세상은 온통 향기로운 슬픔의 독毒 같았다. 또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게 읽지도 않은 소설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 와중에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 중간에 끼인 차녀로서의 줄기찬 고독, 또래집단에서의 부적응, 어른 같잖은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 언행- 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나는 누구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프고 더 많이 눈물지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꼭 그렇게 했다. 누구에게도 장담하지 않은 혼자만의 다짐이었건만, 그건 마음에 달린 손가락을 걸어가며 꼭 지켜야만 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시집인지 일기인지 낙서인지 모를 내 장쾌한 슬픔의 기록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가슴으로 주절거리는 용량이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 문학의 힘은 발휘된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많은 걸 알지 못해도 모르면 모른 채로 알면 또 아는 만큼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문학과 벗 삼아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나 조건이 필요 없다. 아무리 난해해도 내가 이해하는 만큼만 수용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더불어 문학은 100%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자괴감과 부족한 지식에의 갈구가 주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네 병든 영혼까지도 달래준다. 조각조각 찢어진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시려 터지도록 아픈 고통에 공감해주고, 아슬아슬한 고독이란 외줄타기 생에 균형이란 친구가 되어주고,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우릴 타임머신에 태워 이상국에도 데려다 놓는다. 달나라에도, 외계인이 산다는 우주에도, 조선시대에도, 과자마을에도- 어느 때時, 어디라도 가지 못할 곳이 없다. 시공간을 초월한 문학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이렇듯 문학은 자격요건과 제한을 두지 않은 영원불멸한 우리 모두의 벗이다.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은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니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맘껏 누리라고. 뭐든 다 받아줄 테니 걱정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무작정 쏟아내고 미치고 날뛰어라. 포용하고 안아주고 입맞춰주고 필요하다면 함께 펑펑 울어주겠다는 문학의 그 든든함을 믿어라. 누가 이름 붙여주었는지, 이 ‘문학’이란 아련함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잡힐 듯 말 듯한 문학의 아련함은 언제나 신선하고 활기차다. 또 애달프다. 나도 네 살 된 남동생을 병으로 잃었다. 정지용 시인의 아들을 잃은 ‘슬픔’에 공감 비를 뿌리며 이 글을 마친다.
유리창(p202)
정 지 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러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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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문학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시험지의 지문으로 나오는 “이 글에서 말하는 그것에 해당하는 말의 뜻이나, 내용 풀이” 없이 그냥.. 내 마음으로 내 가슴으로 받아들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문학을 국어 공부라는 이름으로, 대학 입시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책 서문에도 이런 말이 있다. 문학을 즐길 수도 있고, 문학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어떻게 공부한다는 말인지 의아했다.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셨다. 야리야리한 몸과 아름다운 얼굴로 선생님이 문학을 이야기할 때, 나는 문학을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다. 앞집 오빠... 멋들어지게 잘 생긴 그 오빠를 생각하며 옆구리에 데미안을, 죄와 벌을, 제인 에어를 무슨 보물인 양 안고 다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문학을 아니 국어를 공부하라고 한다. 대학을 가기 위해 문학을 가슴으로 느끼지 않고 4지선다, 5지선다 형식으로 답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문학이 싫어졌던 것 같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사생대회에 가면 제일 쉽게(?) 끝나는 시를 짓는다. 무조건 짧은 은율로 끄적거리고는 친구들이랑 놀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시를 쓰라고 하면 돌아버린다. 나에게 가까웠던 문학은 어느 순간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렵고 먼 당신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웃님들이 좋다고 평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지난번에 읽었던 “명작에게 길을 묻다” 에서는 문학 작품 하나하나를 친절하지만 감수성 있게 소개해 준다. 간단한 줄거리와 그 책에서 알고 읽어야 할 팁 혹은 작가가 명작을 읽으면서 느끼는 책의 느낌. 그 안에는 또 다른 시가 있고, 또 다른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명작에게 시리즈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문학의 역할, 문학의 기법, 문학의 내용을 문학 작품과 함께 재미있게 소개해 준다. 내가 좋았던 부분은 “고전은 왜 끊임없이 패러디 되는가?”의 패러디의 마법 부분이었다. 모든 창조에는 원칙적으로 모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없는 것'을 발견해 내는 모방과 해석의 에너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패러디는 단지 고전을 모방하고 싶은 특정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글쓰기의 충동 속에 본능적으로 녹아 있는 모방과 극복의 에너지가 아닐까? (60쪽)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다만 기존에 있는 것을 비틀어 생각해 재미있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원작의 뿌리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시선을 비틀고, 자유롭게 이야기 한다. 문학은 자유로운 시선의 한 가운데서 생각의 가지를 널리 퍼지도록 이끌고 있다. 문학의 든든한 뿌리와 기둥은 자유로운 사고를 더욱 튼튼하고 강하게 만든다. 문학 안에는 타인의 슬픔을 같이 공감할 수도 있고, 아픔을 치유할 수도 있고, 영혼이 쉴 수도 있으며, 금기를 넘는 욕망을 가슴으로 안을 수도 있다. 문학 안에는 패러디 뿐 아니라 시점의 마술도, 의인화 혹은 우화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은유와 직유를 할 수 있고, 반대로 말하는 마법도 있고 다르게 말하는 힘도 있다. 문학의 내용 안에는 악녀도 있고, 모험도 있고, 창조의 공간이 있고, 환상이 있고,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고, 대 재앙을 만날 수도 있고, 운명적인 사랑도 있다. 우린 그래서 문학을 읽는 모양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온전히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제 3자의 인생이 되어 책 속에 빠져든다. 그래서 문학은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 설렘을 간직한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나의 습관을 이젠 문학적 코드를 가미해서 읽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 책은 시점 중심인지, 모험인지,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코드인지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문학을 읽는 재미가 더욱 높아질 것 같다. 문학을 읽는 내 마음 자세를 새롭게 해준 이 책. 정말 고맙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이 것처럼. 이 시가 생각나는 오늘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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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만 해도 문학=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소설에만 몰두해서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소설을 꽤 읽고 있지만 말이다. 그땐 감상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읽긴 했으되 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다만, 흔히들 말하는 감명을 받은 작품도 있었고 슬프기도 했고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밌는 작품을 만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배우는 문학은 꽤나 딱딱했다. 시를 배울 때도 소설을 배울 때도 재밌기 보단 작중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이 어째서 그러한가?를 생각해야했고 이른바 교육부에서 혹은 여러 매체에서 권장하는 '한국단편소설'이라는 책을 즐겁게 읽을 수도 있었지만 시험과 연관지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직유,은유 등의 문학안의 비유법도 재밌기는 커녕 외워야할 대상이니 이게 직유인지 은유인지, 아님 환유인지 마냥 헷갈리기만 하고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시험 문제는 싫었지만 소설 내용이 축약된 혹은 일부 게재된 긴 '지문'은 싫지 않았기에 '문학'은 배워야할 과목 중에서도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알고 싶은 분야는 일부러라도 하게 마련이니 한창 공부를 해야할 시기에 살짝 소설이라는 옆길로 빠진 적도 있다.
그만큼 문학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는데, 사실 '시'와는 그닥 친하지 못했고 지금도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한 자 한 자 운율이 주는 느낌과 시 안에 담긴 함축된 시어와 지극한 반어법은 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텐데도...왠지 접근이 쉽지 않다.
암튼 쉽고 재밌을 것 같지만 동시에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학의 문을 이 책은 열여덟개의 열쇠로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 중 의미는 대충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들어보지 못한 몇몇 낯선 용어들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시와 여러 소설을 통해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는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문학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놀랍고 재밌었다. 앞으로 문학을, 소설을 조금 더 이해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문학을 즐겨 읽고 혹 배우고 있는 중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문학에 있어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아마 지금 보다 더 많이, 어쩜 정말 꽤 많이 문학과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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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있어 글쓰기는, 책읽기와 마찬가지로 힘들 때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즐거울 때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나의 작은 쉼터가 되었다. 그러나 근 이십여 년 간의 학창시절 동안 읽기와 쓰기를 배웠음에도 정작 나는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업무 관련 문서와 서평을 쓰면서 글쓰기를 익혀가는 느낌이다. 단순한 건조체와 개조식 문장들의 나열일지라도, 나의 글들은 글자 하나하나에 나의 손때가 묻어 사랑스럽고 애처로우며 가끔은 부끄러운 분신과도 같다. 업무 문서의 멘토가 직장 상사와 동료라면, 서평의 멘토는 바로 지금 이 글을 읽는 이웃 여러분들이다. 많은 멘토를 가지고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한 폭의 유화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표지에 감싸인 새로운 문학의 멘토, 정여울 님을 만났다. '소설 읽는 시간' 에 이어 두 번째로 내 품에 들어온 이 책은 3부에 걸쳐 문학의 역할, 기법, 내용을 각각 다루고 있다. 소설과 시 등의 문학작품 속으로 파고들어가 숨어 있는 배경그림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내용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본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은유와 직유, 상징 등의 수사법과 표현 기법이 아닌, 문학을 즐기기 위한 법칙을 살펴본다고 해도 좋을 듯싶다. 특히 문학을 입시공부로만 접하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지,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지 안내해주는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문학이 다른 이들의 삶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는 통로로서 기능한다고 할 때, 개인의 경험치와 학습량에 따라 그 길은 좁을 수도, 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멘토의 자상한 속삭임으로 문학의 길을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책읽기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인생선배의 조언을 듣는 일 만큼이나 소중하고 가슴 벅찬 일이다.
우리는 국어시간에 소설의 3요소, 소설 구성의 3요소와 같은 문학의 기본 개념과 여러 문학 작품의 주제, 배경, 시점을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아니 자주 시험을 위해 그런 내용들을 외우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약간은 강요되다시피 이루어졌던 학창시절의 공부를 위한 공부는 나에게 무척 고된 일이었다. 문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생 경험의 부재로 인해 그런 고통이 더욱 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 때의 나는 아니다. 정여울 님은 내가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새롭고 비밀스럽기까지 한 마법의 열쇠들로 문학 작품들을 낱낱이 해부하여 조감도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학의 18가지 열쇠는 다음과 같다. 패러디, 시점, 의인화, 은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 트릭스터, 안타고니스트, 시간, 공간, 음식, 판타지, 트라우마, 통과의례, 정체성, 대재앙, 사랑.
어미새가 이제 막 품어주기 시작하는 새알처럼, 나는 아직 햇병아리도 아니고 깨어나기 한참 전의 새의 씨앗과 같은 새내기 블로거이다. 따뜻한 책과, 이웃의 온기, 그리고 여러 명의 멘토가 필요한 블로거. 이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언급하기 어려운 이유, 그리고 한 달여에 걸쳐 여러번에 나누어 쓴 감상문을 짧게 마무리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으로 문학의 멘토, 글쓰기의 멘토를 소개해주고 만나게 해주신 어느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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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멘토링! 왠지 낯설다. 자기 계발에 관한 이런 저런 멘토에 귀가 닳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실용성을 찾기 힘들다는 편견 때문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명성에 걸맞게 낯설다는 장벽을 아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에서 문학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풀고 있다. 어렵지 않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읽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이 책은 문학 참고서도 아니며 문학 이론서도 아니다. 오히려 문학 참고서와 문학 이론서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에서 문학과 친구가 되는 법을 유려한 필치로 멘토링하고 있다.
저자에게 문학이 영혼의 피난처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힘’ 이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덩어리이며 삶을 보다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무한경쟁의 시대에 문학은 살아남기 위한 스킬, 스펙도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 흑백(黑白)이 분명해야 한다. 흑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예/ 아니오’를 요구한다. 이러한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정답’(正答)이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흑백이라는 단색(單色)이 아니다. 행복은 자유라는 다채로움에 있다. 문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밀 일기가 되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진실을 잘 보여주는 덕분이다.
우리는 문학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문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것은 문학과 ‘1대 1’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우리가 영혼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정신적 비타민’이다. 그래서 만남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문학 속에 숨겨진 각종 ‘코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며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기법이나 내용에 관한 것을 아는 것은 친구가 되기 좋은 방법이다.
가령, 문학의 기법에 있어 패러디를 ‘모방’이라는 ‘보수적 충동’과 ‘차이’라는 ‘변화의 충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모든 창조에는 원칙적으로 모방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즉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없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기법으로서의 패러디가 예술 작품의 창조적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패러디를 위한 패러디’가 아니라 ‘패러디를 통해 무엇을 창조하는가.’에 있다는 것이 궁극적이다.
또한, 시점의 문제에 있어 창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것, 창조의 도구에 있어 은유가 ‘언어의 비료’라고 한다면 상징은 ‘문학의 보물 창고’라는 것, 반어법(verbal irony), 즉 아이러니는 단지 말 꾸밈이나 기교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무한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것, 은밀한 풍자 혹은 우화라고 하는 알레고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문학의 마술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문학의 내용에 있어서는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인 트릭스터(trickster)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로운 생의 가치가 존재함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 문학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착한 주인공)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악한 주인공)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한계를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라는 것,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자기 정체성의 표현 도구를 넘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윤리적 이정표라는 것,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 자체의 강력한 은유인 음식은 우리에게 사랑이자 사람, 그리고 삶 그 자체라는 것, 외부세계에서는 허구지만 마음속에는 진실인 환상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며, ‘얼마나 재미있는 환상을 창조할 것인가’ 보다는 그 환상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어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통과의례를 겪어 낸 영웅의 제 1요건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험은 ‘~하지 마라'(Don't)가 아니라 ‘한 번 해보자'(Let' do it!)라는 것, 오만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징벌쯤으로 여기는 대재앙이 사실은 현재의 소중함,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라는 것,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은 희망이나 보답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부신 기적을 느낄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저자의 섬세한 통찰력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문학 작품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은 세상의 모든 생물, 세상의 모든 사물과 교감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백과사전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문학이 이 정도로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문학의 힘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문학은 최고의 멘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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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은 문학의 의미와 이론을 재미있게 풀어 쓴 책이다. 이 책은 문학의 역할과 기법, 내용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1부에 소개된 문학의 역할 편을 보면, 문학의 역할에 따른 작가 나름의 의미가 피력되어 있다. 작가에 따르면 문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밀 일기’(17쪽) 이다. 문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비밀 일기일 것이다. 읽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비밀이지만, 그 비밀은 세상과 독자를 향해 열려 있다. 문학은 사랑을 배우는 풍요로운 학습의 장이다.(20쪽) 문학의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테마가 ‘사랑’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문학은 한 작가의 내밀한 사랑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작가로서는 세상의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기에 그렇다. 문학은 고난을 바다를 헤엄쳐가는 상상의 열쇠(22쪽). 그리하여 문학은 지난한 삶에 겨운 인간을 구원하기도 한다. 상상은 고난을 환타지로 바꾸어주고, 고난을 충격으로부터 심신을 보호하해 주는 쿠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저자는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를 사례로 주인공 소녀가 고난의 바다에서 상상력으로 헤쳐가는 통과의례의 장면을 보여준다. 문학은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한 소녀에게도 비타민이 되어 영혼의 키를 성장시켜 주는 것이다. 문학은 한 특정한 개인이 자각한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작품으로 승화되는 순간, 그것은 온 인류 공통의 문제가 된다. 예술적 소통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는 매개로서의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피력했다. 패러디, 시점, 의인화, 아리러니, 알레고리, 트릭스터, 안타고니스트, 판타지 등은 문학작품을 풀어가는 열쇠들이다. 운전을 하려면 기본적인 주행법과 규칙을 알아야 하듯 여기 실린 18가지의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면 문학을 좀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렇듯 문학이 가진 수많은 역할과 의미에 대해 쉽고 편안한 문장으로 작품 사례를 통해 얘기해 준다. 이 책은 청소년은 물론 문학에 대해 개념정리가 필요한 입문자에게도 도움을 줄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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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논술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보니 '문학'을 배우미들에게 가르칠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참으로 많다. 다름 아니라 '문학'은 뭐라해도 먼저 즐기기부터 해야 하고,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네 교육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늘 실패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글머리를 읽으면서부터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맞아맞아!'를 연거푸 외치게 되었다. 글머리에 '문학'은 가르치기에 앞서 재밌게 즐길 방법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정말 공감한다.
예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시인 박목월이 가르치미들이 내놓은 문제를 손수 풀게 해본 일이 있었단다. 시험문제는 각자 자신이 쓴 소설과 시에서 출제를 하였고, 각각 10문제씩 풀게 하였단다. 그런데 누가 30점을 맞고, 40점을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가 그렇단다. 글쓴이는 '느낌' 충만하게 썼을 뿐인데, 출제자는 오로지 '분석'만 하여서 원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으니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뿐이다.
이처럼 '문학'을 감상할 때와 문제 풀 때의 간극은 참으로 멀게만 느껴진다. 시험을 대비해서 읽은 시와 소설로는 원작에 담긴 감동을 크게 느끼기 힘들고, 그냥 문학으로 접근하여 정말 즐겁게 읽은 시와 소설로는 높은 시험점수를 받기 힘들뿐이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분명 교과서에서도 '문학 읽기'를 통해서 교훈과 함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그런 목적으로 '문학'을 읽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문학'은 즐기기보다는 교훈 따위를 달달 암기하고, 무엇을 상징하였는지 외우고, 왜 그렇게 표현하였는지 따분한 분석을 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문학'을 해부학 실습하듯 배워서 어따 써먹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분명 '문학'을 시험으로 치루는데 문제가 있긴 하다. 그렇다면 '문학'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해야 할까? '문학'을 뺀 국어시험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니 쉽사리 빼서 따로 평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 오지선다식 평가방법에서 벗어나 '문학'은 각자 나름대로 느낀 점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여서 평가하는 방법을 도입할까? 물론 방법을 달리 한다고 해서 단박에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왜냐 하면, '문학'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즐겁게 읽었지만, 그는 저렇게 이해해서 재미없었다고 한들, 그 때문에 나는 맞고, 그는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학'이란게 원래 그렇다. 그래서 '문학' 문제에는 늘 단서 조항이 달린다. 이를 테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낼 때는 꼭 '단서 조항'을 달아야 정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배경'을 단서로 달았다면, 님은 '조국'일테다. 그러나 한용운이 불가에 귀의한 몸이라는 단서를 달면, 님은 '부처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대배경과 글쓴이의 출신배경을 모른 채 읽었을 때, 님은 '사랑하는 님'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문학'을 시험공부할 때는 시나 소설 자체를 잘 감상하기보다는 출제된 문제 속의 '단서 조항'을 잘 찾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건'이 문학을 즐겁게 읽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꼼꼼히 분석하고 해부한 '문학'이 아름다울리 없다. 해부학 실습을 마친 사람의 몸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아니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해부학 실습을 마친 몸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까지 포용해야 할 것이다. 단지 '그로테스크'하다는 점이 가미되었을 뿐, 역시 맞다, 틀리다로 이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자, 또 서론이 길었다. 각설하고, '문학'은 감상도 잘 해야 하고, 시험점수도 높게 받아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하고팠을 따름이다. 문학을 즐길 줄도 알고, 그 속에서 삶의 교훈도 얻으며, 시험문제로 출제하면 그에 맞게 '단서 조항'을 잘 살펴 좋은 점수를 맞아야 한다는 말씀!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감상과 점수는 서로 어울리지 않고, 꽤나 상반된 성격 때문에 종종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이 문제다.
이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이니, 적절한 파해법이 있을 리 만무할 따름이다. 그래서 정여울 씨는 '차선책'을 선택하였다. 완벽한 해법을 찾을 수 없으니 '격차'를 줄이는 방법으로 말이다. 즉, 문학감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시험문제에 출제하는 경향에 따라서 문학을 감상하는 방법을 소개했단 말이다. 이런 방법이라면 두 마리 토끼를 온전히 잡을 수는 없지만, 피자 한 판을 사서 두 가지를 맛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나온 방법 가운데서는 가장 솔깃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방법이다. 딴에는 피자 두 판을 모두 챙기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한 판 먹기도 배부른데, 괜히 욕심부리다간 배탈나서 그간 먹은 것까지 토할 수도 있으니 가장 현명한 해결방법일 것이다.
난 참 즐겁고 재미나게 읽었다. '문학'을 감상하는 색다른 방법을 익히기도 하였고, 또 시험공부를 대비해야 할 배우미들에게 적절하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익힐 수도 있었으니, 내 딴에는 두 마리 이상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또 '문학'에 대한 교양을 쌓으려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고, 내신과 논술을 모두 대비해야 하는 배우미들에게도 딱 좋은 지침서라고 여겨진다. 이래저래 유익하고 즐거운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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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우선, 나는 이 책을 온전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저자가 '정여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군가! 그녀, 한겨레에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코너를 연재하는 문학평론가이다. 나는 그것을 꼬박꼬박 읽는 독자로서, 뭣보다 이 코너가 주는 '망치 한 방, 전구 반짝'을 좋아한다. 말인즉슨, 그 글은 자주 세상의 진실과 마주대하게 만들고, 나를 성찰하게 한다. 그녀의 글은 또한 미려하며, 번뜩인다. 가령, 몇 주 전에 봤던, 앞뒤 맥락없이 제시하지만, 이런 글 앞에 나는, '형님!'했다. 그리고, '사랑'을 다시 생각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청소년인문학>의 업그레이드판이다.
2주에 한 번 그녀의 글을 보는 것, 감질났는데, 이런 축복이 있나. :)
정여울은 "우리의 다채로운 삶을 담아내는, 크기도 문학도 일정하지 않은 그릇"인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건다. 문학의 역할부터 문학의 기법, 문학의 내용 등 문학과 친구가 되고, 연애를 하는 법을 알려 준다. 콘셉트, 한마디로 이렇다. "문학아, 놀자~"
아~ 좋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에 대한 나의 소감이다. 책 덕분에 문학이랑 더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문학이랑 아삼육처럼 지낸 사이는 아니다만, 이전부터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고, 이 책을 통해 그 힘을 확인한 셈이랄까.
뭣보다, 슬픔에 대처하는 문학의 자세. 얼마 전, 나는 거듭 언급했었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본명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그녀, 우리가 영화로 더 익숙한, 영화의 원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썼다.
이 책, 디네센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영화 내용처럼 그녀는 커피 농장을 일구다 말아먹었고, 사랑을 잃었다. 그런 '슬픔' 앞, 그녀는 이야기를 썼고, 이렇게 말했다.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정여울의 말처럼, "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박물관이다. 또한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치료법이 숨겨진 지혜의 보물 창고다." (p.201)
그러기에, 문학은 쓴 사람은 물론이요, 그것을 읽는 사람에까지 치유의 권능(!)을 발휘한다. 상처는 문학을 통해 치유의 길을 걷는다. 물론 그것이 완전하진 않아도,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문학은 인간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의 눈물과 피를 먹고 자라나는 영혼의 원시림이다." (p.203)
정여울은 더 나아가, 문학의 '사회성'까지 언급한다. 문학에 드러난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로,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공감하게 만든다고.
맞다. 프랑스혁명의 지적 동력은 루소 등이 쓴 찐~한, 당대로선 포르노소설에 가까웠다고 일컬어지는 '연애소설'이었다. 당대의 인민들은 그 연애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처한 현실에 '공감'했고, 그것이 혁명에까지 이르는 동력 중의 하나가 됐다. (by.《인권의 발명》)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공감의 촉매가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문학이 지닌 강력한 힘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문학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타인의 아픔을 자발적으로 느낄 줄 아는' '공감의 능력'을 키우게 한다.
"우리는 그렇게 문학을 통해 ‘나의 상처’를 넘어 ‘세상의 상처’와 교신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pp.208~209) 나 역시 문학 덕분에 위로 받고, 조금씩 슬픔의 늪에서 나를 건져올렸다. 많은 경우, 이별한 직후였다. 한 없이 아래로 침잠하던 나는 詩를 붙잡고 견디고 버텼다. 책과 함께 했다. 문학은 어떻게든 개별의 인간을 놓지 않는다. 손을 내민다. 눈을 맞춘다. 어깨를 빌려준다. 문학은 그래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당연하게도 책은, 개별의 슬픔에 공명하는 문학의 힘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보물창고”로서 문학이 문명을 어떻게 지탱했는지도 언급하고, 일상 속에서 기적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문학을 통해 어떻게 배우는지도 알려준다. 문학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면,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정여울은 문학 속 '악역'의 진짜 매력은 '얼마나 잔인한가'가 아니요, '주인공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로 결정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곧, 우리는 문학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됨을 의미한다. 혹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물론 문학이 답을 줄리는 없다. 문학의 역할은 딱 그것까지다. 질문하기. 그것으로 족하다. 답까지 준다면, 그건 참고서(문제집)지, 문학이 아니다. 좀 과장하겠다. 우리는 문학이 있어서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즉에, 인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어야 했으나, 문학이 그 시간을 늦추고 있다. 정여울은 그것을 18가지 지도로 설명을 했다. 당신도 읽어보면 좋겠다. 문학이 좀 더 가깝고 진득한 친구이자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엔 포기하지 않은 꿈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의 잡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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