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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양이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시인은 다음 세상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털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 시인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다시 태어나는 건 죽음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고양이로 태어나는 일은 사람으로서 생을 마치는 과정을 동반한다는 얘기다. 당연한 듯싶은 이 일에는 사실 미묘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시인은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다음 세상에서 이루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자리에서 고양이가 된 시인이 탄생한다. ‘동물-되기’라는 말로 이 상황을 표현해도 상관없다. 고양이가 되려면 시인은 무엇보다 ‘사람’이라는 존재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근대인을 가리킨다. 근대인은 이성을 신봉한다. 시인은 이러한 이성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고양이는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처럼 보인다. 공처럼 제 몸을 둥글리며 마음껏 놀 줄도 안다. 시인은 툇마루에서 조는 고양이를 꿈꾸는 게 아니다. 사기그릇에 있는 우유를 맥없이 핥는 고양이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시인은 가시덤불을 지나 저 너른 벌판으로 달려 나가는 고양이를 꿈꾼다.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과학문명을 이룩했다. 고양이가 너른 벌판을 휘달릴 때, 인간은 문명을 세워 너른 벌판에 수많은 벽을 세웠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고양이처럼 너른 벌판을 휘달리는 야성을 잃었다. 이제 인간은 야성조차도 문명으로 바꾸려고 한다. 너른 들판을 달리던 고양이는 툇마루에서 졸거나, 아니면 사기그릇에 담긴 우유 한 방울이라도 더 핥으려고 아양을 떤다. 문명화되지 않은 야성은 말 그대로 벌판으로 내쫓긴다. 동물원에 갇혀 야성을 잃은 저 숱한 야생 동물들을 생각해 보라.
고양이가 되려는 시인은 어찌 보면 문명화된 인간이 잃은 이 야성을 다시 찾으려는 열망에 들떠 있는지도 모른다. 야성을 찾는 일을 원시 시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원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의 야성을 그리워할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야성을 표현하는 일을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인다. 고양이가 된 시인이 너른 들판으로 달려 나가 무엇을 하는지 들여다보자. 들쥐와 뛰어놀다가 배가 고프면 고양이는 살금살금 참새떼를 향해 다가간다.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라는 진술에 표현된 대로, 시인은 너른 들판을 한바탕 재밌는 놀이가 펼쳐지는 광장으로 상상한다. 혹시나 제대로 날지 못하는 꼬마 참새가 있을라치면 고양이는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톡 건드려/ 놀래주기만” 한다. 실제 자연을 표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어차피 고양이가 되는 상상을 펼치고 있을 따름이다.
해가 기울면 너른 들판에는 스산한 바람이 분다. 들쥐도 참새도 사라진 어두운 들판에 고양이만 홀로 남아 있다. 고양이가 된 시인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라고 선언한다. 해가 기울면 인간은 집으로 돌아간다. 외부와 차단된 집으로 돌아가 인간은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잔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삶을 너른 들판으로 나간 고양이가 답습할 리는 없다. 고양이는 짙은 어둠을 혀로 핥으며 몸을 누일 낟가리를 찾는다. 짚단 냄새로 훈훈한 낟가리를 찾은 고양이는 그 위로 훌쩍 뛰어올라 제 몸을 깊이 웅크린다. 낟가리 속은 아늑하다. 달빛을 받은 낟가리는 은은하게 빛난다. 물론 거센 바람이 벌판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밤새 찬비가 내려 고양이 몸을 적실 수도 있다. 사방이 막힌 방안이 아니지 않은가. 고양이로 살려면 거센 바람과 찬비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이라고 시인은 단언한다. 상상이다. 상상 속에서는 그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
고양이가 되는 상상을 함으로써 시인은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마음껏 내닫는 꿈을 꾼다. 시인이 상상하는 고양이는 너른 벌판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동물이다. 인간이 주는 먹이에 집착하여 문명 주변을 맴도는 ‘길들여진 고양이’에게 시인은 전혀 관심이 없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고양이를 통해 문명 너머에 있는 세계를 꿈꾼다.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는 꿈은 문명의 바깥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꿈과 같다. 지금 우리 삶을 지배하는 문명을 벗어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시인은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는 꿈으로 표현한다. 문명은 이제 우리 인간의 목숨을 틀어쥐고 있다. 문명을 벗어난 삶을 한번 생각해 보라. 너른 벌판에 홀로 동떨어진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온몸을 휩싸는 두려움에 빠진다. 문명에 길들여진 이 몸을 내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고양이처럼 너른 벌판을 달릴 수 없다.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시인의 소망은 이리 보면 참으로 서글픈 상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유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라는 시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새는 하늘을 난다. 하늘이 있어야 새는 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리 보면 새를 풀어놓은 건 하늘이지 새가 아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새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고 쓴다. 새는 어떻게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것일까? 시인은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라고 표현한다. 어디를 가나 하늘이 있다. 하늘을 보고 싶으면 고개만 들면 된다. 하늘은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하늘은 하늘이다. 구름이 떠도 하늘은 하늘이고, 비가 내려도 하늘은 하늘이다. 구름 뒤로 하늘은 제 몸을 숨기지 않는다. 구름이 끼면 구름이 곧 하늘을 이룬다. 모든 곳에 있는 하늘을 그 누가 엿보겠는가? 하늘은 언제나 당당하게 자기를 드러낸다. 돌려 말하면 자기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제 모습을 내보이는 존재만이 하늘을 자유로이 날 수 있다.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새라고 다르지 않다. 새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당한 하늘만큼이나 새 또한 당당하게 하늘과 맞설 준비를 한다. 시인은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라는 문장으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새는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하늘로 솟아오른 새는 거리낌 없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늘은 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몸을 텅 비운다. 파란색으로 분칠한 하늘이 제 몸을 비워 온몸으로 솟아오른 새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으로 장쾌하지 않은가? 새는 하늘 끝까지 오르고 싶다. 하늘 끝까지 올라 하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새는 젖 먹던 힘까지 모아 하늘로 치솟는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자유의 섬뜩한 덫”을 이야기한다. “자유”라는 시어가 “섬뜩한 덫”이라는 시구와 어울리고 있다. 자유는 왜 섬뜩한 덫에 매여 있는 것일까?
아무리 높이 날아도 새는 하늘을 벗어날 수 없다. 하늘 너머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다.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하늘을 나는 새는 중력에 묶여 있다. 중력에 묶인 새는 하늘로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큰 중력에 시달린다. 자기를 짓누르는 중력을 이겨내고 하늘 너머로 나아가면 모를까, 중력에 갇힌 새는 비상의 한계 지점에 곧바로 이를 수밖에 없다. 함성을 지르며 하늘로 솟아오른 새는 중력이라는 “자유의 섬뜩한 덫”에 치여 이내 한계에 부닥친다. 그 덫이 섬뜩한 이유는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공기보다 가벼운 존재만이 중력을 넘어설 수 있다. 살아있는 새는 결코 공기보다 가벼워질 수 없다. 중력을 넘어서는 순간 새는 죽음에 직면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하늘에서 새가 누리는 자유는 ‘하늘’이라는 한계공간에서만 펼쳐진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게 아니라, 새는 철저히 하늘에 갇힌 존재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처한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시인은 왜 새가 하늘을 풀어놓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시퍼런 용수철처럼 튕겨 오른 새를 하늘은 온몸으로 품어 안는다. 새는 하늘로 솟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에게 비상은 자연이다. 날지 못하는 새는 새가 될 수 없다. 새는 자기 한계를 알면서도 자꾸만 더 높이 솟아오르려는 욕망을 내려놓지 못한다. 더 높이 솟으려는 욕망을 새의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비상은 새가 자연스레 내보이는 욕망이다. 새는 하늘을 지배하기 위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새는 다만 자유로이 날 뿐이다. 새를 맞이하는 하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늘은 스스로 새가 자유로이 날개를 펴는 공간을 만든다. 하늘이 비어 있지 않으면 새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힘을 얻는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이 자신을 텅 비운 자리에서 새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하늘이 왜 굳이 이렇게 하느냐고? 새가 아니면 하늘은 비상의 기쁨에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따라 하늘 또한 비상을 한다. 새가 날지 않는 하늘을 상상해 보라. 구름이 끼지 않는 하늘을 상상해 보라. 하늘은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다른 존재들이 들어설 자리를 기꺼이 마련한다. 새는 하늘을 풀어놓고, 하늘은 새를 풀어놓는다. 구름은 하늘을 풀어놓고, 하늘은 구름을 풀어놓는다. 하늘과 구름과 새는 셋이면서 하나이다. 텅 빈 하늘이 아니라면 구름이 흐를 리 없고, 새가 날 리 없다. 시퍼런 용수철처럼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새의 자유가 피어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가 되는 어떤 순간을 시인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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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이 시집을 쓸 때 나이가 서른 즈음이다. 서른이라는 미묘한 나이가 시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비상을 꿈꾼다. 여러 갈래 길 사이에서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시인은 나아가야 하는 지 되돌아가야 하는 지 망설이고 있다. 나무가 되어, 시인의 작품에는 많은 나무가 등장한다.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동시에 비와 새가 되어 어딘가에 떨어지고 날아가고 싶어한다. 비록 하늘에 발목이 잡힌 새라 할지라도. 시인의 갈팡질팡은 그 나이를 겪는 모든 사람과 동일하다. 이십대에서 삼십대가 된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이십대처럼 젊지도 않고 사십대처럼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도 같으면서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인생의 죄책감을 짊어지게 되는 한 지점... 그 지점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누구도 명확한 마침표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1988년에 발표된 이 시집에서는 다른 시집에서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불안과 초조, 혼란을 느낀다.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정체 없는 그란 누구란 말인가. 그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시인이 인정받고 싶은 존재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아닐 수도 있다. 시 <잠자는 숲>에는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아, 나는 은사시나무숲으로 가고 싶죠. 내 나이가 이리저리 기울 때면. <믿지 못하여>에서는 이런 구절이 눈에 띤다. 믿지 못하여 나는 만족하지 못하여 나는 안경을 썼다 이 두 구절만으로 시인의 시를 내가 감히 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시인의 심정도. 하지만 나는 내 입장에서 그 시절 내가 그러했기 때문에 공감한다. 나이가 주는 외로움을 시인도 겪었구나 하는 생각에 시가 친근히 다가오는 것을 어쩌랴. 시인도 나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하게 내버려두시라. 나는 시를 평하거나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려는 것이므로... |
| 황인숙의 시집은 언어의 경쾌함을 보여준다. 언어와 언어가 마주치면서 나는 소리들이 그의 시의 골격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주침은 그녀의 시어들이 가지는 힘들이 아니다. 가볍고 평범한 시어들은 다만 자유로운 브라운 운동을 할 뿐이다. 황인숙은 그 시어들을 잘 담아 그 시어들 속에서 긴장을 구성한다. 시어들이 긴장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운다. 나는 그 모양들이 재미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읽는이로 하여금 항상 주목하도록 만든다. 계속 주목하고 싶다. 황인숙 시인이 좀 더 먼 곳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더 큰 긴장을 맛보고 싶다. 마치 나른한 오후, 침대 속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상큼한. 혹은 그 상상이 상상임을 알고 있는 무료함. 허망함. 그 속에서 있는 그녀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