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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동안 노무현 정부는 많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양극화로 분열시켰다. 소득 5분위 배분율의 1분위와 5분위가 5년 전에 비해 5배나 증가한 경제적 양극화는 물론이요, 행정수도 이전과 부동산 문제로 인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적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와 위치에서 국민들을 갈라놓았다. 이러한 적지 않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결과물들 중에 '이념'이란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소위 '보수'와 '진보'로 분리된 정치 이념 논쟁은 헌정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극적인 논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보수이며 무엇이 진보란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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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책들은 요즘 나오는 복잡한 책들과는 다르다. 무슨 무슨 철학가의 이름도 잘 없고 다른 사람의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집을 세우지도 않는다. 물론 모두 자신이 한 생각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요즘 나오는 글들과는 기반의 근원이 다르다. 자신이 만들어낸 근원은 자세하지도 않고 사유의 부족함과 두루뭉술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강의 근원이 되는 샘은 원래 크지도 않고 깊지도 않다. 다만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소로우의 글들은 가끔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고집불통의 글들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편협하다거나 아집에 빠져 있는 것과는 다르다. 소로우의 글들은 소로우가 살았던 19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약 200년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시민의 불복종이란 글은 그리 길지 않다. 6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나머지는 소로우의 일상과 감상을 담은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글들의 중요성을 제쳐두고서라도 이 시민의 불복종이란 글은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200년동안 충분히 논의 되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인두세를 내지 않은 소로우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는 데 국가에 대한 의무와 국가가 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국가는 개인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하고 이것은 국가에 의한 간섭을 최소화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는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은 무리를 짓고 살았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노동력의 분배와 상대적으로 평등한 자원의 배분으로 균형을 잡고 살았다. 무리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살았으며 분쟁이나 전쟁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자손을 번성하기 위해서 소규모로 일어났었다. 그 때 국가란 가족이었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였으며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생산보다는 소비를 많이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평등하지 않으며 국가에 의한 통제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대에 와서 이 글의 의미는 20세기 중반 세계 각국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던 시기와는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다. 20 세기 중반에 민주화와 억압에서의 해제를 논의 되게 했다면 지금은 국민에 대한 적극성과 참여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국가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먼 미래 이상적인 미래는 먼 과거 이상적이었던 과거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고 시간을 멈추어 이상적인 형태를 지속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더 커지고 있고 사회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고려해야 할 것은 많고 법은 보수적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해결책은 국가에 의해 제시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간다. 우리가 선거 때만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에 속한 시민의 아니라 시민에 의한 국가 주체로서의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아직까지 성공적인 방법은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주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며 다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태를 보여야 한다. 국가가 할 일은 이 다툼을 조정하고 중재하며 타협하게 해야하는 것 이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국가 언젠가는 올 것이다. 이런 논의가 오래 지속된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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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소로우였다. 원제는 <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 ;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Civil Disobedience;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48년 맥시코 전쟁 전비를 대기 위한 세금 지불을 거부한 그는 감옥에 갇혔었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복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1950~60년대에 미국의 반전시민운동에 쓰여지면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사용되어서 더 유명세를 탄 것 같다.
소로우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 나아가서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p9)였다. 이 말만 본다면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이 말은 지나친 국가의 간섭은 필요없다라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이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지만, 국민이 그것을 통해 행동을 하기도 전에 정부 자체가 남용되거나 악용되기 쉬운 것이다.(p10)
정부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그 수단에 국민들이 휘둘릴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p26)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이다(p16)
정부의 부당한 요구나 제도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나도 찬성한다. 어떤 방법으로 저항해야하는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소로우가 말하는 불복종의 판단기준은 개개인의 도덕적 양심에 따른다. 양심은 언제나 법에 대한 일반적인 복종의무보다 우선권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법에 대한 일반적인 복종의무가 사라지는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시민불복종이라는 말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게된다. 가끔은 '대체 저게 어딜봐서 불복종이야?' 하는 생각이 드는 어이없는 것들에 갖다붙이는 만행(?)을 저질러서 안타깝다. 예전에 사학재단과 관련해서 한참 tv가 시끄러울 때, 인터뷰 중 불복종하겠다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나오는걸 보면서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하던지.
다른것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친 일반화는 안될 듯 싶다.
'저항'과 '불복종'이라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니깐.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의 특정 정책에 반기를 드는 어떤 집단들에게 불복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불복종에 대한 실례다.
시민불복종에 대한 논의는 부당한 법이나 제도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점에 있다. 유의할 점은 불복종이 합법적이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복종은 그 자체로는 불법이다.
그럼 난 불법을 부추기는(?) 글을 왜 읽었을까?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듯 그리 읽었다. 이 글이 쓰여졌던 19세기 미국에선 무언가 혁명적인 글이었을지도 모르지만,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에겐 그저 빛 바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p13)
이 구절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과연 거대해진 정부의 권력에 맞설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의 불복종>에 대한 이야기는 전체 200페이지 중 60페이지 정도고 나머진 간단한 수필 형식의 글이 5개 정도 실려있다. 개인적으론 뒤에 실려있는 글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월든>을 읽어봐야겠다.
2007. 12.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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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1846년 미국 정부가 부과한 인두세를 몇 년 간 납부하지 않았던 소로우는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소식을 들은 그의 고모가 대신 세금을 납부해 겨우 하루 동안 유치장 안에서 지냈을 뿐이지만, 이 경험은 그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나보다.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거절했던 그는, 시민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가 다시 시민들의 자유를 정당치 않은 이유로 제한하려 한다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는 논지로 이 소책자를 쓴다.
책의 후편에는 자연주의자로서의 소로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주변의 자연 환경들에 대한 민감하고 예민한 감수성들을 보여주어, 앞의 글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2. 감상평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라는 조직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다. 때문에 국가라는 인위적인 권력의 정당성이나 그 권력행사의 당위성에 관한 의문을 갖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그것이 심각하게 우리의 생활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지금으로부터 190년 전 살았던 소로우는 상대적으로 오늘의 우리보다는 국가에 대해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은 시민들의 피를 통해 얻어진 (영국으로부터의) 자유 위에 건설된 나라였으니까. 남의 손에 의해 독립을 얻고 그 ‘남’에 의해 독립 이전의 사회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강제 받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배경이었고, 그래서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나 힘도 없는 한 개인이었을 뿐인 소로우와 같은 인물이 홀로 국가권력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뭐 배경과 역사가 어떻든, 정당함의 문제는 어디에서든 적용되어야 하는 거니까.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뿐’이며, ‘엄정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외침은 너무나 당연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지만,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적절한 반항이다. 그의 시대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요한 외침이라는 게 좀 슬픈 현실이지만.
책의 후반부에 실린 에세이들은 전반부의 좀 더 정치적인 글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는 국가라는 제도에 태생적으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국가가 행하는 모든 종류의 일에 거부의사를 표하는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도로와 교량 건설과 같은 일에 쓰이는 세금은 얼마든지 납부할 의시가 있다고 한다)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싸워왔던 많은 사람들(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에게 영향력을 준 책이라고 한다. 단지 선거철에만 사용되는 선거용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삶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이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이런 책이 더 이상 현실적 필요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자료로서의 의미만 가지게 될 그 날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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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면서 점차 고사하고 있는 동네 서점들이 많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의 힘이 곧 권력이니,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은 쪽이 먼저 사라지는 건, 마치 자연의 법칙을 보는 듯합니다. 살고 있는 동네 근처에 큰 서점이 없어서 -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나마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서점이 하나 있습니다. 제법 입소문도 나 있어서 멀리서도 책을 사러 사람들이 온다고 합니다. 그 서점에 중고책을 사고 파는 창고같은 곳이 있습니다. 주로 애들 책을 사서 읽히곤 하는데, 어느 날은 시간을 두고 둘러 보다가 소로우의 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월든'이라는 책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톨스토이나 간디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고 하니 그의 철학이 주는 의미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입니다. 내가 낸 세금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쓰이고, 노예제도를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여 오랫동안 세금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정부에 불복종하던 그는, 악법을 폐지하기 위해 악법이 개선되거나 폐지될 때까지 복종할 것이 아니라 당장 불복종함으로써 법의 폐지를 앞당기는 게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같이 실린 몇 개의 수필에서는 그의 풍자적인 표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악법이라고 해도 일단 지켜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왔고,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악법을 없애기 위해서는 불복종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양심과 사상에 대해 고백하기를 강요하고, 그 생각이 사회에 맞지 않는다하여 처벌하는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법,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 숨쉬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되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미 몸에 배어 내 머릿속에 가진 생각들이 정권이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거나 반하는 것이라 의심이 되면 처벌이 가능한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 불의에 항거할 의지를 접었음을, 예전에 가졌던 공포의 자리에 불편함이 자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복종함으로써 받게 되는 처벌보다, 나를 귀찮게 할 수도 있는 그 불편함이 보안법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자본과 권력이 보안법의 유지가 좀 더 생산적이고 체제를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일 테고, 역으로 보안법 폐지가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판정이 나는 경우에 스스로 입장을 바꿀 가능성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우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지금 당장 없어져야 할 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소로우가 살아서 이 땅에 살고 있다면, 당장 그 법을 어기고 철창에 갇히는 쪽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를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불복종의 길에 선다면, 악법의 폐지는 좀 더 빨리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그 법에 맞서 '불복종'할 수 있을런지, 다른 이에게 묻기 전에 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
| 별 다섯개는 커녕 10개라도 주고 싶다.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한사람의 사상과 그가 남긴 글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우선 시민의 불복종. 이렇게 짧은 글로 자신의 평생의 신념을 남길 수 있다는 것으로도 그의 깊은 사색과 담담한 심정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느껴지는 소로우의 담담한 필체와는 달리, 시민의 불복종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평소 아나키즘에 관심을 두던 내가 왜 지금에서야 이 글을 보게 되었을까 싶다. 글을 읽으면서 흘러드는 깊은 감명. 소로우와 같은 사람이 이토록 드물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 글을 읽고 한숨을 쉬어본다. 그가 원하던 세상이 오기는 커녕 개인들은 더욱 정부와 보이지 않는 권력체제에 억눌려 살고 있지 않은가. 복잡한 현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저항을 해야 할까? 소로우의 시대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지금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조그만 저항에도 당장에 도저히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을테니 말이다. 거기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 함석헌이 시민의 불복종을 보고 소로우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던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니 비단 우리나라 뿐이겠는가. 정의를 위한 폭격과 살인을 감행하는 세계적인 상황도 소로우가 생각한 이상사회와는 너무 멀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저항보다 순응에 길들여져 가고 있으니... 나는 소설이나 에세이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소로우의 에세이는 정말 탁월하다. 특히 야생사과 이야기는 짧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21세기의 환경의식을 가지고 19세기에 태어난 소로우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19세기 사람이 가졌던 환경의식의 반만큼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소로우가 150년 후의 지금의 세상을 보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그는 자신의 환경적인 시선을 일상적인 일들을 묘사한 글들에서 담담하고 유려하게 나타냄으로서 오히려 글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이 작은 책, 결코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로지 정부를 위해, 국가를 위해 살아가려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
소로우는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부와 명성을 쫓는 화려한 생활을 따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특히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2년간의 경험을 기록한 <월든>은 19에기에 씌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수감되었던 사건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의미를 깊이 성찰한 <시민의 불복종="">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책'으로 꼽히고 있지요. 요즘에 와서는 '19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적인 환경의식'을 지녔던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는 <월든>을 통해 먼저 소로우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의심조차하지 못하는 삶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내는 그의 모습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월든에 대해서는 조만간 소개를 하도록 하죠. <시민의 불복종="">은 간디가 이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그 유명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하지요. 구해볼려고 노력했는 데 그동안 찾을 수 없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되지 않았나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이 글을 읽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요. <시민의 불복종="">은 멕시코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씌여졌습니다. 미국은 이 부도덕한 전쟁으로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양도받았지요. 이 전쟁을 지지한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과 노예제도 지지자들 이었으며, 따라서 소로우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의 반대와 그것의 실천으로 인두세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투옥되었고 하루동안 감옥에 갇혔으나 친지가 인두세를 대납해주는 바람에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글이 <시민의 불복종="">입니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경구로 시작하는 이 글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가라는 체제에 통렬한 비판을 가합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너무나 익숙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는 수많은 제도들이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최초의 공포는 고등학교때 '제2국민역'신고를 하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입니다. 모든 국민을 등록하여 관리하고 나이가 차자 여지없이 통지를 보내는 것이죠. 이 때 막연하지만 제 등뒤에 서있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어렴풋이 느겼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에는 고분고분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장치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때가 되면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생각되는 '학교'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국민학교'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저는 그당시 생각으로 학교에 결석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거의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서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근상이 더 빛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유를 알고나면 이것처럼 대단한 '사기'도 없습니다. 푸코의 저작에 따르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당연히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대부분 하층 농민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그러나 이들은 농민으로 한번도 얽매여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농사일에는 정해진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고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으니까요) 1시간 일하고 10분을 쉬는 공장의 체제에 적응하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이런 '자유로운' 사람들은 부려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자본가들이 제일 먼저 깨닭았겠죠. 그래서 근대교육이라는 것을 시작합니다. 7살이 되자마자 학교로 보내져서 다루기 쉬운 '벽돌'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욕구와 활발한 창의성을 그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가지치기를 하여 부려먹기 쉬운 '국민'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선생님이라는 권력에 고분고분해지는 연습을 통해서 국가권력에 고분고분해지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새는 '의무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제도권교육을 거부할 권리조차 없습니다. 내 자식을 당신들이 원하는 벽돌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과거에 교육수준이 엄청낮았을 때에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제는 거부할 권리도 인정해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난 어버이날에 아이들이 제게 선물로 팬티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검은색으로 상당히 야한 디자인의 팬티였죠.(와이프가 이렇게 야한 팬티를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팬티만 입고 잠을 자면 물이 빠져서 흰 요에 검은 색이 물드는 겁니다. 황당했지만 몇번 빨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어가려는데 주부투사인 와이프가 고집을 부리며 항의전화를 해야한다면서 그 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전 당연히 별다른 반응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얼마후 정중한 사과편지와 함께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 주었습니다. 작은 경우 지만 역시 시민의 권리는 절대로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나 고분고분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생각없이 살다보니 부패한 정치인들, 썩은 언론을 보아도 너그럽게 넘어가는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수백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수백만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어도 이제는 분노할 능력조차 없어진 걸어 다니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차라리 '뇌사자'가 되어버린 지도 모르죠. 전 소로우의 글을 읽으며 죽어버린 뇌의 한쪽이 서서히 깨어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소로우가 제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너의 고분고분한 삶에 침을 뱉아라!"시민의>시민의>시민의>월든>시민의>월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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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책을 꺼내드니 이 책도 누렇게 바래가고 있다. 집안에서 세월을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책은 어김없이 세월만큼 색깔을 달리한다.
매주 한권씩 책을 선정해서 아이와 토론을 벌인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건 최근에 읽은 책이건 관계없이 내용은 모호하므로 가능하면 다시 읽는다. 꼼꼼하게.^^ 당연히 나는 아이보다 몇권씩 순서가 앞서나간다. 영화도 미리 봐두고 분석까지 끝내 놓는다. 핑게는 아이의 지적 수준을 좀 끌어 올려 주자는 것이지만 사실은 내가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시민의 불복종을 읽은 아이는 처음에는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눈치였는데 나중에는 침대에 드러누워 줄기차게 읽어 나갔다. 어렵긴 하지만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다 읽고 나서 무슨 내용이더냐고 슬쩍 물어 보았더니 설명은 못하겠지만 하여간에 무슨 말을 하자는건지는 알겠단다. 그걸로 만족이다. 이 책을 읽었다는 것만 해도.
인두세를 내지 않아 하룻밤 감옥에 갇힌 소로우는 사회에 속한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소로우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존재를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부를 비롯하여 개인의 권리를 끊임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각종 제도나 권력, 통칭하여 정부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개인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는 감정적인 물음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내면적인 양심의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를 가지지만 외면적인 자유 실행에 있어서는 제한을 가해도 좋다고 법해석을 내린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행위를 하는 정부라면 당연히 인두세를 내어야 하겠지만 멕시코를 불법적으로 침략하고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정부에는 인두세를 내지 않음으로 저항하는 시민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소로우는, 지식인들이 말로는 그것의 비정당성을 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보다 감옥에 가두는 것이 사회적인 반향이 클 것이므로 감옥에 갇힌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소로우는 감옥에서 사고의 자유를 누린다. 세상에서 시를 쓸만한 유일한 곳은 감옥이라고 말하며.
국가가 우선인가, 개인이 우선인가 라는 문제는 2004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 최 모씨의 기소로 우리나라에도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이다. 국가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지만 집총하는 병역의무는 이행하지 않겠다며 감옥행을 감행함으로써 촉발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아직도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범죄인 취급을 받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왜 융통성 있는 정책을 내어 놓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연 600여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 대체복무를 허용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클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자의 생존을 위하여 소수자의 인권은 보호될 수 없다는 인식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사회규범에 얽매여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교육의 무서움(효과)도 실감한다. 전시중인 이스라엘마저 인정하고 있는 대체복무를 우리나라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권후진국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앞서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사회문제는 결국 개인의 인식의 문제이므로 각 개인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해결을 위한 접근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개인은 양심상의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형벌을 받아 들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지만 국가는 양심의 자유와 병역의 의무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의무와 더불어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한 국가가 의무를 회피하고 권한을 무시하는 것은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법을 만듬으로써 부딪혀야 하는 사회의 비난 때문이다. 사회의 비난은 직접선거로 이어지는 민주사회에서 자신의 권력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누구나 쉽게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각 사회는 필연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배적인 다수의 윤리관을 반영하고 있는 법을 최고의 선의 가치에 올려 놓고 이 사회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형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일부 공군조종사들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대한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공격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혀 파문이 일어난 적이 있다. 객관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생각할때 그들의 선택은 양심에 따른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아스라엘의 군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부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의 문제가 되었을때 우리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앞선다.
인두세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주민세를 꼬박꼬박 별 생각없이 내고 있었는데 주민세가 인두세라는 생각은 처음 했다. 전국민이 균등하게 내는 주민세와 소득과 비례해서 내는 주민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냥 부과하는 세금이니까 낸다는 식으로 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부할 생각도 없다. 비대해진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금은 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것까지 일일이 자로 재고 따지는 피곤함을 감수하기가 싫다. 그러나 소로우가 있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권리는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살 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미국민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 왜 당신네 미국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군인들 말만 듣고 소로우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요?" 이 말은 우리 사회에도 해당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본문 중에서- |
| 그의 글은 당시의 독일이나 영국의 사상적 전통이나 사고와 구별되는 19세기 미국정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그 자신이 교회에 나가길 거부하긴 했지만 그의 뿌리에는 미국의 건국이념과 올바른 신정국가에 대한 기본이념이 깔려있다. 시민정부에 대한 관점에서 루소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루소는 로마에 미치지 못하는 프랑스의 엉뚱한 군주정치에 대안으로서 시민정부를 생각했다면, 소로우에게 시민정부의 잘못은 존엄한 피조물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의 허접함에 있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점에는 닮았으나, 로마적 모델이 아닌 성경적 모델에서 그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뉴잉글랜드의 숨쉬는 공기와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둘째, 개인주의적 정치관이다. 집단은 오로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가치는 청교도 정치관의 전형이며 이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 미국적 침례교 전통의 핵심이기도 하다. 청교도에게 미국적 정치란 영국으로부터의 단절이며 또한 국가지배적 종교와 사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개인의 존재는 오직 신 앞에만 의미가 있으며 국가,단체, 교회는 오직 이들의 모임체로만 존재할 뿐, 그들은 헤겔과 같은 살아있는 절대정신의 국가도, 지상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변자인 교권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뿌리에서 소로우의 정치관은 신적 기준으로 현실의 정부에 냉엄한 판단을 가한다. 개인에게 의미없는 정부란 없는 것과 같다. 세째, 그래서 이런 높은 기준은 근본주의적 미국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옳다면 소수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며 분리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예제도에 반대한다면 나라를 깨서라도 서로 결별하거나, 하나로 남으려면 결말은 전쟁이다. 남북전쟁... 끝은 결국 하나됨이다. 그들의 역사는 옳음이 정복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승리는 신적 명분을 보여줄 것이다. 그의 북부정신은 분명 전쟁을 불사했다. 그는 권력의 승리를 거두지 못해 존경받을 인물로 남았지만, 이런 정신이 권력의 승리를 거두었다면 혹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명분 없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 운동과 명분을 갖는 전쟁에 주저하지 않음. 이 둘은 모두 미국정신의 양면이다. 네째, 삶의 실제적 강령으로서의 사변이다. 미국정신은 거대한 사고체계의 완성이 아닌 실제로 되느냐(Does it work?)의 입증에 있다. 소로우의 강점 또한 자신의 신념을 살아낸데 있다. 그는 말하지 않고 살아냈다. 그의 폐결핵 또한 걸어서 숲속을 헤매지 않았다면 걸리지 않았을 그의 삶살이의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그에게 영향 받은 수많은 사람 또한 그의 이런 실제적 행동에 따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작은 듯 보여도 한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는 힘이 있고 분명 살아있는 진실로 남아있다. 당시의 유럽국가의 분위기와 사뭇다른 이런 뉴잉글랜드적 사고는 19세기초 신생 주변국 미국의 상황에선 존경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간디와 함선생님의 감탄도 이런 [정신적 힘의 우월에 대한 명확함]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