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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이제야 읽었다. 그전엔 한번도 읽어볼 생각을 못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작품을 읽고 감명받아 『태엽감는 새』를 썼다 했다. 그만큼 그에게 좋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있는 작가를 설문조사 했을때 그의 작품이 1,2를 했고, 100위안에 그의 작품은 7개의 작품이나 들어갔다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작가이자 작품이란 뜻일 것이다.
1910년도에 쓰여진 책. 굉장히 오래된 소설이라 여겨지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100년전에 썼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우리를 내면의 침잠으로 이끈다.
소스케에게 '문'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기 내면의 '문'을 이야기한다.
도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생활은 궁핍하고, 아내 오요네와 함께 평온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해 집에와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는 단조로운 삶. 다만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위험스럽고 조마조마한 느낌을 주고 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절벽 아래를 개조한 집. 절벽은 절대 무너질리 없다고 하지만 그 집에 살고 있는 소스케와 오요네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왠지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든다. 절벽아래 위험을 안고 사는 그들의 위태위태한 삶이 슬쩍 보인다.
단조롭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지만 중반부에서부터 소스케에게도 숨겨진 삶이 있었다는게 드러난다. 대학교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던 사실,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던 사실을 속삭이듯이 알려준다. 불안한 마음에 그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종교에 도움을 얻고자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열고자 하는 문을 열수가 없다.
그는 깨달음이라는 미명에 속아서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험을 시도해보려고 꾀했던 것이다. 그 모험이 만약 성공한다면, 지금의 불안하고 흔들리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덧없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241 페이지 중에서)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 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264 페이지 중에서)
문이 열리길, 문을 열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돌아오는건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 라는 메아리뿐.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뿐이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내면의 문을 열어야 열린다는 진리. 잠겨있는 문 앞에 있는 그의 모습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소스케와 오요네의 소소한 일상들을 담담한 필체로 우리에게 소곤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듯이, 나도 내면의 '문'을 두드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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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해서는 안 됩니다. 도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마음을 닦으며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p238).
소세키 폭풍몰이를 시작한 건 [도련님]에서였다. 그때 난 도련님이란 말에 왜 하필 우리의 고전 [사랑방손님과 어머니]가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객기와 순응, 드러냄과 감춤, 출렁이는 다툼과 조용한 평화, 과격함과 부드러움... 내 잠재의식 속에 일본엔 온갖 부정적 이미지를, 우리에겐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찰싹 붙여놓고 무던히도 일본을 적대시하고 있었던가보다. 일본이라는 말보다는 꼭 '놈'이나 '새끼'를 나란히 붙여 불러야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일본은 나에겐 영원한 적국일 뿐이었던 고로 그들의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건 매국노로서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치부했었다.
종결 어미가 지나치게 과거형이라는 것, 어떤 의미인지 벌써들 짐작한 것처럼 저열한 근성으로 똘똘 뭉쳤다고 생각했던 나라, 일본문학에 나는 서서히 솔깃해지고 있다. 손 편지와 찐 계란으로 연정을 주고받았던 우리네 문학적 정서가 일본에 밀린 듯한 그 죄책감을 뒤로 하고 나는 소세키 작가의 두 번째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거쳐 순식간에 [문]을 읽어버렸고 [행인]은 읽기 직전에 있으며 바로 엊그젠 [그 후]라는 작품까지 구매했다. [산시로]를 빠트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가뜩이나 비루한 내 서고 칸칸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소세키. 서양 작가로는 폴 오스터, 우리 작가로는 박 모, 김 모 작가 이후 네 번째다. 이쯤 되면 서론이 왜 이렇게 길어, 얼른 본론 결론으로 들어가시지 라며 머리끝에 슬슬 김 서리는 성질 급한 양반들 꼭 있다. 하하. 참을 인 자 세 개를 들이대기엔 우리네 삶도 꽤 각박해졌기에 적당히 이해하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련다.
[도련님]이 번번이 냉소와 빈정거림으로 사회에 정면승부를 걸었다면, [문]은 건건히 감칠맛은 없지만 결과적으론 뭔가 조금은 짠 듯한 일침을 가한달까. 심히 까칠한 도련님이 나고양이에 가면 괴팍 고리타분한 서생으로 변질됐다가 문에 오면 우유부단물에 포옥 빠져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면서도 금슬만은 지독하리만치 좋은 행복한 소심남으로 나온다. 금슬이 좋은 데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부부 쌍방의 노력여하를 전제하므로 다음에 부칠 이야기는... 소스케의 부인 오요네와의 인연. 그것은 '열쇠'가 만들어준 거였다. 내 가족 챙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웃과 담쌓고 지내는 요즘에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격언 처럼 하나있는 이웃도 먼저 의심하고 보자 식이지만, 20세기 전후만 해도 전 한 장을 부쳐도 옆집뒷집 위아래 집 할 것 없이 나눠먹는 즐거움과 동시에 아주 작은 사건도 뻥튀기처럼 부풀려져 급속도로 일파만파 소문이 퍼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외간남자인 소스케와 여동생 오요네를 한방에 둔 채 뒷집에 열쇠를 맡기고 외출해버린 친구의 실수가 없었다면 어쩌면 소스케의 일생은 또 다른 모습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지리 궁상떨거나 최하 걸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 정도로 소스케가 가진 건 달랑달랑한 직장에 어울릴법한 딱 고만큼의 집, 것도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절벽 아래 위치한 위태위태한 집과, 언제 공무원 월급이 인상되는지 눈이 빠져라 뉴스를 챙겨보고 신문을 들추는 자질구레한 일, 그리고 오늘내일 뽑아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썩은 이뿐이었다.
시련의 크기를 잴 수 있는 거라면... 하고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일랑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아무도 각자 자신의 시련 외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소스케에게 동생의 고민이 관심 밖이었던 것처럼, 매사에 물렁물렁한 형은 동생 고로쿠에게도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아우 같은 형, 형 같은 아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생애 첫 울음은 그렇게 자격 순이 아니라 무조건 태어난 순서에 복종해야 하는 운명의 선전포고였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이 엄마를 연상시키는 오요네는 소스케와 결혼한 이래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 잔소리는커녕 조용히 바느질이나 하며 남편 소스케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마다 희망적인 조언을 들려주고,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현모양처의 전형이다. 소스케 역시 그녀가 유산을 하고 자식이 없는 이유가 다 자신이 무능하고 가난한 탓이라 자책하며 오요네에게 온 마음을 바쳐 헌신 봉사한다. 한편 소스케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얼마의 돈과 땅문서를 하나뿐인 동생과 함께 재산에 대한 월권을 모두 포기한 채 작은아버지 부부에게 위임해버린다. 허나 남편이 죽자 아버지가 맡겼던 돈은 동생의 양육비며 학비로 모두 탕진한지 오래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작은 어머니가 더 이상 동생을 거둘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소스케 부부는 첫 번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로써 부인 오요네보다도 못한 동생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소스케는 작은 어머니를 속이 시커멓고 늙은 여우라는 푸념으로 전전긍긍하다 결국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동생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던 중 다소 삐딱한 시동생과의 갑작스런 더부살이로 시름시름 앓는 오요네를 소스케는 못내 안타까워하고, 와중에 도둑을 몰아내고 찾아준 문서함에 대한 보답과 배려로 주인집 서생으로 동생을 보내게 된다. 혹덩어리였던 동생을 떨구어냄으로써 이제 소스케 부부는 예전처럼 가난하지만 다시 고생 끝 잔잔한 행복이 시작될 것만 같다.
삶은 항상 불행의 전조로 인연의 대가를 치룬다. 병 주고 약 주고. 어찌됐건 허름한 집이라도 찾아주는 벗과 객의 기운은 약방에 감초처럼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을 더해준다. 적당히 호들갑에 합류하면서 함께 놓여 진 상황에 빠져 잠시라도 한숨 돌리는 여유를 만끽하는 것. 문門의 다의적 함축성은 인간의 '삶'과 '관계'하고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소스케 부부 주변에 사는 이웃들은 문을 사이에 두고 들락날락한다. 그리고 집주인 사카이와 왕래하면서 대화중에 친구 야스이에게서 오요네를 낚아채 결혼한 소스케는 갑자기 그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근친상간이나 친구의 배우자를 탐하거나 빼앗는 행위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심하게는 죽어 마땅한 비열한 짓이었으므로 소스케는 친구의 근황에 대한 얘길 듣는 순간부터 그나마 있는 작은 평화마저도 위협을 당하고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렇게 불안하기만 하던 나날이 흘러흘러 가을을 불러들이던 어느 날, 그는 동료의 지인으로부터 받은 소개장에 적힌, 도쿄의 휴양지 가마쿠라로 일주일 휴가를 떠나고 거기서 젊은 스님 기도와 입산한지 이 년 된 거사, 마지막으로 만난 큰스님이 던진 화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매달리지만 끝내 아무런 승산(깨우침)도 없이 도쿄로 돌아오고 만다. 그러다 소스케는 천만 다행스럽게도 감원대상에서 제외되고 적지만 인상된 월급으로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되찾은 평화에 안심한다.
소소한 일상의 허무에서 탈피하기보다 그 속에 안주하는데서 더 평온함을 느끼는 소스케. 좀스럽고 비굴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라치면 아내는 늘 매화꽃처럼 속삭인다. 굳이 속삭이지 않아도 어쩌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나의 하루를 더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람. 이렇듯 소세키는 안전장치 하나를 숨겨두고 내내 빈정거리는 투로 일갈하다 막판엔 독자에게 그 히든카드를 찾아내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물어왔다. 문은 항상 열려 있었는데, 혹 당신 마음의 문만 닫혀 있었던 건 아니냐고.
-시궁창 같은 좁은 도로에는 초봄만 되면 개구리 떼가 무수히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개구리들이 밀고 밀리고 울고 울리며 생장하는 동안 몇백 몇천 쌍의 사랑이 시궁창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사랑으로 살아가는 개구리들이 시미즈타니에서 벤케이 다리까지 사이좋게 둘이 몸을 겹치고 떠 있으면 지나가던 장난꾸러기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돌을 집어던지는데, 그리하여 무참하게 죽어가는 개구리 부부가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p272).
- 그런 걸 생각하면 당신이나 나는 실로 행복한 거예요.적어도 부부가 되어 있는 게 밉살스럽다고 돌로 머리를 얻어맞는 공포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쌍방이 모두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안전하다면 그거야말로 경사스러운 일이 틀림없지요(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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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910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작 <그 후>의 연재가 끝난 후 신문사가 예고를 위해서 다음 작품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재촉하자, 제자에게 아무거나 좋으니 제목을 붙여달라고 했고 고미야 도요다카의 책상위에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었고, 아무데나 펼쳐보니, ‘문’이란 단어가 눈에 띄어 그것으로 정해 신문사에 알렸다고 한다. 이렇게 남이 붙여준 제목으로 이 작품은 탄생되었다.
‘그 문을 열면 처마에 닿을 듯 깎아지른 절벽이 툇마루 끝에 버티고 있어서 아침나절은 비쳐도 좋을 한 줄기 햇살마저 쉽게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한다. 잡초가 무성했다. 밑에서 돌로 쌓아 올린 게 아니므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험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여태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한다.’(p10)
소스케와 오요네가 살고 있는 집의 모습이다. 소세키의 작품 중 부부 중심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림자 드리워진 삶, 불안에 휩싸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물처럼 옅고 담담한’(p188) 그저 친밀감을 표시하는 간략한 말을 주고받다가 가까워진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되돌릴 수없는 상황임을 알았다. 소세키의 작품 중 유일하게 금슬 좋은 부부상을 그렸다. 금슬이 좋아보이기는 하나 그 둘 사이에는 체념과 인내 같은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미래나 희망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금슬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좋지만 자식에 관해서는 보통 사람보다도 불행했다.’(p161) 아이를 가졌으나, 세 번이나 잃었다. 달을 못 채우거나, 채우고 낳았어도 울음소리 없는 차디찬 ‘살덩이’뿐이었다. 연거푸 아이를 갖는데 실패하자 점쟁이를 찾았는데, 폐부를 찌르는 듯한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자식을 못 가져.” “왜죠?” “당신 어떤 사람한테 몹쓸 짓을 했군. 그 귀신에 씌어 죽어도 자식을 못 가져”(p169)
사회활동에서 접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를 스스로 차단했다. 삶은 점점 단조로워졌다. 그럴수록 둘의 존재는 절대적이 되어 갔다.
‘외부를 향해서 성장할 여지를 찾지 못한 두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더 깊어져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하지 않은 대신 육 년의 세월에 걸쳐서 서로의 가슴을 파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p172)
현재 상황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지만, 그는 한 때 상당한 재산이 있는 부모를 두었고, 쾌활한 성격에 복장이며 얼굴에서 빛이 났었다. 친구라면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소스케에게 모여들곤 했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벼랑 위의 주인집 남자 사카이와 점점 친해졌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날 자꾸 놀러오라고 청한다. 세상 사는 이야기며, 골동품 이야기도 하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던 소스케는 그의 세상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동생 고로쿠를 자신의 서생으로 삼고 중단했던 공부를 시키는 건 어떠냐는 사카이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한다. 거기까지 듣고 인사를 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천천히 더 놀다가라는 만류로 앉아 있다가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던 그 이름을 듣고야 말았다. 대학 친구 야스이.
추측은 맞아 떨어졌다. 속 썩이던 동생이 조만간 몽골에서 야스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오기로 했고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꼭 오라고. 소스케는 사색이 되어서 주인집을 나와야 했다. 친구 야스이를 배신했던 소스케. 학교도 중단하고, 친구도, 부모도 친척도 모두 버렸다. 아니 버림을 받았다. 세상도 등져야 했다. 그 어두운 과거 때문에 다시 벼랑 위에 선 심정이 된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산문(山門)을 찾는다. 마음의 구원을 받고자 찾은 절에서조차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고 ‘초상집 개’ 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p264)
소스케는 야스이와의 만남을 피했다가 돌아왔지만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주인집 사카이를 찾았다가 이런 말을 듣는다. 초봄만 되면 개구리 부부가 장난꾸러기들의 돌에 맞아 죽은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서, “그런 걸 생각하면 당신이나 나는 실로 행복한 거예요. 적어도 부부가 되어 있는 게 밉살스럽다고 돌로 머리를 얻어맞는 공포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쌍방이 모두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안전하다면 그거야말로 경사스러운 일이 틀림없지요.”(p272~273) 사교에 익숙한 사카이의 농담 섞인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마음속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애와 끔찍함이 떠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을 수 없다. 어찌하다보니 그런 지경에 이르렀고, 죄책감이 똘똘 뭉친 마음으로 체념하고 인내하며 오로지 자연의 혜택인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믿고 삭이면서 살아간다. 통속소설처럼 화끈하고 행복하게 살지도 못하고 어두운 과거로 인해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봄이 왔다고 좋아하는 오요네에게 다시 겨울이 올 거라는 소스케의 대응에서 끝없이 순환되는 자연과 삶의 희로애락이 겹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아 <태엽 감는 새>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뿐인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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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한 마디로 툇마루의 소설이다. 소설 자체가 툇마루에서 시작되어 툇마루로 끝난다. 그래서 마치 소설이 가지는 전 우주가 오로지 툇마루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툇마루란 어떤 공간인가? 완전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바깥도 아닌... 경계의 공간이다. 소세키의 소설 '문'은 마치 그 위에 걸쳐 앉은 듯한 소설이다.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나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로... 소세키는 결단을 주지 않는다. 마치 그 툇마루가 전부인 양 애써 그 곳에 그저 머무르려 할 뿐이다. 연못 속의 겨울잠을 자는 잉어들 처럼 한없이 낮고 조용하게... 그는 왜 이런 식의 문학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계의 공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적 이유 다른 하나는 시대적 이유이다.
먼저, 개인적 이유. 소설 '문'이 연재되던 당시 1910년. 그 전에 한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보고와서(초반의 이토 히로부미 이야기는 이 여행의 체험이 은연중 배여난 것이기도 하다.) 새로이 연재를 시작하려던 그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가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었다. 그는 두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고 결국 그 해 8월 슈젠지 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거기엔 슈젠사란 절이 있는데 바로 이 절이 소설 '문'에서 소스케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최후로 찾았던 산문의 모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사실 '문'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많이 반영된 소설인 것이다. 바로 이 병으로 쓰러진 일과 슈젠지에서의 요양이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느낀 것을 소세키는 하나는 에세이로 다른 하나는 소설로 나타내었는데 그 에세이가 바로 '회상'이며 소설은 '문'이다. '회상'을 읽어보면 그 때의 체험이 얼마나 소세키로 하여금 인생을 달리 보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가 그 치료중에 숨진 일이다. 소세키는 그 에세이에서 치료를 하던 이는 죽고 정작 치료를 받던 자신은 더 오래 살게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한다. 묘하게도 의사가 숨졌을 때 또 하나 소세키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바로 소세키 자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유명한 게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이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몸에다 빛을 준 사람이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의식에 빛을 준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빛을 주었던 사람들은 죽고 그 빛을 받았던 자신은 살았다고... 그 아이러니할 정도의 삶이 가진 예측불가성 앞에서 소세키는 하루 하루 그 때 그 때의 일을 기억할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에세이 '회상'이 되었고 '문'에서의 인상적인 그 마지막 대사 장면으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지배적인 시각이 되어 결국 '문'을 지배하는 조용하고 낮게 웅크린 삶으로 형상화 되었다.
소스케는 튓마루로 나가 앉아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며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거야"라고 대답하고 머리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P. 277)
삶의 예측불가성은 소세키에게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최상의 삶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슈젠지에서의 요양을 그 가장 행복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별 뜻없이 그냥 한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을 경우 가장 불만스런 부분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소스케일 것이다. 소스케는 현대인이 보기에 정말 한심할 정도로 무르다. 매사에 적극성이 없고 그 어떤 곤란한 사건을 만나도 그저 알아서 지나가 주기만을 바란다. 그저 드러나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모토이기도 하다. 늘 '적극적이 되라' '자기 것을 잘 챙겨라'하는 말만을 들어온 우리들로서는 이 같은 심해의 아귀 처럼 웅크린 소스케의 삶이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어떤 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소스케가 왜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알고보니 젊은 시절의 소스케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앞길을 착실히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절친한 친구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현재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소설만 읽으면 이것은 그저 문학적 형상화 같지만 당시의 소세키의 삶을 알고 읽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요양중인 소세키를 그대로 담아낸 모습이 된다. 상상해보라. 병을 가지고 있는 자의 일상이 어떨지? 소세키의 병이 바로 소스케에 있어서는 죄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 때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은 속세인들이 삶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경험이 가져다 준 적극성의 무용함에 대한 인식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의미있는 삶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소설 '문'에서 한 편으론 낯설게도 느껴지는 조용한 은둔의 삶은 그야말로 소세키의 이상적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텅 빈 방에 누워서 잠자코 큰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변함 없네 종일토록 그 자세로 하루를 보냈네
(당시 소세키가 적은 시, 에세이'회상'에서 인용)
하지만 소세키가 그러한 삶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세키의 문학은 '사소설'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지만 소세키 자신은 문학을 개인적 영역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당시 근대에 의해 소생된 소설이 다 그랬듯이 소세키에게 있어서도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시대와 교감하는 장(FIELD)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소설이 그랬듯이 근대화된 일본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영국에서의 체류 덕분이었다. 그 때 영국에 머무르면서 소세키는 근대화가 가져오는 장점만큼 단점 역시도 보게되었으며 가장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 속도였다. 교통기관의 빠른 속도, 놀라운 변화의 속도 그리고 한없는 분주함. 바로 그런 것들이 소세키에겐 염려의 근거였고 과연 이런 것들이 일본에게 긍정적인 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비판의 씨앗이었다. 때문에 소세키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을 정반대의 삶을 하나의 모델로서 내어놓는 것이다. 왜 서구의 근대는 마치 소스케가 사는 집 툇마루 앞에 우뚝 선 절벽과 같아서 언제 파묻힐지 모르는 위험을 간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회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실제 그런 집에 살고 있던 사촌이 절벽이 무너져 죽었음을 밝힌다. 그런 면에서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서구 근대의 외침은 소세키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예측불가능성 앞에서 그러한 장밋빛 미래란 의미없는 공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완성된 삶이며 무엇보다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한적함이야 말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목적이든 일단 그것이 개입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로 소세키는 소스케가 외부로 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문'을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정형화 되어버린 서구 자본주의적 일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시각으로써 말이다. 그러니까 소설 '문'은 이제는 우리가 그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아비투스화 되어버린 이 일상이 과연 제대로 된 일상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참조점인 것이다. 말하자면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인간형의 하나로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낸 것과 똑같은 일을 소세키는 소설 '문'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 병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체득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바로 그 한계지워진 삶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삶이 아무런 한계를 가지지 않는 것 보다는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삶엔 더 낫다고 본다. 소스케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그 한계의 상징과도 같다. 바로 그 한계 덕분에 소스케 역시도 소설 마지막 대사 처럼 삶에 대해 더 깊이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소세키는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완전한 바깥도 아닌 툇마루라는 경계에 기꺼이 머무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경계라는 한계에 일부러 거주하면서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한 마디로 소설 '문'이 자리잡은 '툇마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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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대단한 점의 하나는, 하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매번 다른 단어와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점인데, 나츠메 소세키 또한 작품마다 등장인물이나 내용에 따라 매우 다른 문장, 표현과 분위기를 보여준다. 전기 삼부작중 처음 [산시로 (20세기초 일본과 20대초반의 연애심리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수작)]에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쿠슈에서 토쿄로 상경한 학생인터라 그 어떤것도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못해 답답한 와중에 시종일관 객관적인 묘사와 서술로 ,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선 여주인공이 선사하는 강력한 이미지와 여운을 선사했다면, [그 후 (Awesome and admirable in writing and philosopy)]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우수한 인재였으며 끊임없이 독서와 문화예술에 대한 연구, 연마 등을 통해 매우 논리적인 문장으로 내면의 흐름을 보여준다. [문]에선 어떤 일로 인해 대학을 중퇴하여 일종의 지적인 기반은 있지만, 생존, 생활이 먼저인 남자주인공이터라 소박하며,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묘하게 안정된 이미지가 전달된다.
1905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6년 [도련님] 뒤에 1908년 [산시로]가 4개월간 <아사히신문>연재된다. 그리고 1909년 6월부터 10월까지 도쿄와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그 후]가 연재된다. 그리고, 다음 작품의 제목은 뭐냐는 질문에, 나츠메 소세키의 부탁을 받은 이가 니체의 [짜라투르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펼쳐진 페이지에서 선택된 단어, '문(門)'으로 먼저 정한 뒤에 이 작품이 나왔다. 글쎄, 내 생각엔 제목이 먼저 정한뒤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기보다는 [산시로], [그 후] 뒤의 이야기를 더 하고싶은 미진한 마음이 작가에게 남아있어 결국 '문'의 메타포가 결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아마도, 문, 즉 moon이었어도 분명 작가는 이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쓸쓸한 달로. 이 작품은 1910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다. 근데, 신문, 잡지연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한 찰스 디킨즈의 경우를 보더라도 미스터리를 가미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다음호의 이야기를 기다려서 신문을 사서 읽게만들었다. 그런면에선, 이 작품 또한 상품소개의 간략줄거리가 스포일러인지라, 작품의 중반부가 되어서야 이 부부의 자발적 고립, 묘한 죄책감의 미스테리를 알게 된다. 그 과정이 무언가 서늘하다.
...부부는 매일밤 화로를 사이하고 마주앉아 식후 한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거리는 대개 그들의 생활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월말까지 쌀값을 물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구차스러운 살림이야기는 한번도 부부의 입에 오르는 적이 없었다...그들은 그다지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데 이미 그런 말을 나눌 때를 지나 하루하루 그저 밋밋하게 보애며 늙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또는 처름 부터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극히 톡송적인 인가들이 습관적인 부부관계를 맺기위해 만난 것처럼도 보였다...p.37 (작품이 시작되면 보여지는 아내와 남편의 툇마루 풍경이 유명하다. 책뒤표지엔 소설가 고지마 노부오가 그 장면이 행복한 부부를 보여준다고 하지만, 글쎄 바로 연이은 문장 속의 느낌이 쓸쓸해서 그런지, 권태도 아닌 뭔가 회피한다는 느낌이 들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지못했다. 잠깐 풍랑이 지연된 폭풍전이란 느낌)
..."우리는 그런 좋은 일을 기대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잖아"...자기들이 만든 과거라는 어둡고 깊은 구멍으로 시나브로 빠져들고 마는...자업자득으로 그들의 미래를 지워버렸다...미래같은 희망은 있을수 없다고...그저 손을 마주 잡고같이 걸을 뿐이다...p.44
...부부는 여느때처럼 램프아래에서 얼굴을 마주댔다. 넓은 세상에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만이 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밝은 그늘에서 소스케는 오요네만을, 오요네는 소스케만을 의식하며 램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사회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기들의 생명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p.76
...일반사회에 흥미를 잃어버려서가 아니었다. 사회쪽에서 그들 두 사람을 소외시켜서...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본다면 여전히 두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두사람이 볼 적에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채였다...큰 수반에 떨어진 두방울의 기름..물에 튕겨지는 힘으로 동그랗게 하나로 붙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게...그들은 이 포옹속에 보통 부부들이 찾아낼 수 없는 친화와 포만과 거기에 따르는 권태를 함꼐 지니고 있었다...불안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이들이었다. 단지 그 채찍질 끝에는 모든 것을 치유해주는 달디단 꿀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p.172~173
지금은 토쿄의 하급공무원인 노나카 소스케. 그닥 체력이 강하지 않은 아내 오요네와 함께 결혼 6년째이다. 사카이라는 사람이 사는 절벽 아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집에서 나와 언덕길을 올라가면 사카이의 집이 나온다), 내년엔 연봉이 오르는지 어쩜 잘리는 것은 아닌지 쌀값등 외상값은 잘 갚는지, 넥타이는 사는게 좋은지 뭐 그닥 필요가 없는 건지 하는 등 소박하지만 아늑한 생활이다. 하지만, 작품의 앞에선 말하지 못하는 이유로 교코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도쿄에 돌아오지못하는 와중에 부유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에게 집과 재산의 처리, 그리고 남동생 고로쿠의 학업을 맡긴채 히로시마와 후쿠오카에서 힘들게 보내다가 동창의 도움으로 도쿄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작은아버지의 사망후, 이젠 고로쿠의 학업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다는 작은어머니의 말로 인해 고로쿠는 소스케더러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말하지만, 소스케는 적극적이지않고 그저 어떻게 되겠지 기다릴 뿐이며, 오요네 또한 작은댁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소스케의 성격인가,
...무슨일이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성질로, 한번 마음먹은 건 끝장을 봐야 물러나는게 학생시절의 소스케와 많이 닮아..그대신 갑자기 마음이 변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자약했다....p.37
하는 듯 하였지만 암시만 되는 듯 감춰진, 이 부부의 과거.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고 말해도 좋을만큼 담백했던 것을..그처럼 투명했던 목소리가 두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그렇게 새빨갛게 칠할 수 있었는지...빨간색이 세월을 지나 옛날의 선명함을 잃어버리고..서로를 불태운 불길은 자연히 변색이 되어 검어졌다. 소스케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일의 경과를 거꾸로 반추해서는 그 담백한 대화가 어떻게 자기들의 역사를 진하게 물들였는지 가슴속에서 물리도록 맛보며, 평범한 사건을 중대하게 변화시키는 운명의 힘을 두려워했다...p.188
도둑이 든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이름만 알고있던 절벽위 집주인 사카이와 친하게 되고 그러던 어느날 소스케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이름을 듣게되고 질문을 찾아 떠난다.
... 화들짝 꿈에서 깨어났다. 오요네가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밝은 해가 깜깜한 세상을 벌써 어딘가로 쫓아보내고 있었다...p.230
...툇마루에 나가 높다란 처마를 올려다보니 가지런히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검은 기와 너머로, 조용한 하늘이 푸른빛을 바닥으로 가라앉히며 엷어져가고 있었다...p.247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 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p.265
"정말로 기뻐요. 이제 봄이 되어서."..."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 거야."...p.277
결연히 잊어버리지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에 자신에게 닥쳐진 세번의 커다란 불행을 고스란히 감싸앉은 이 부부. 그들의 과거를 탓하여 소외시켜버리기엔 너무나도 안쓰럽게 마음이 쓰인다 (어휴, 이 세상엔 지가 나쁜짓을 하고도 모른체 잊어버리고 잘만 사는 인간도 많더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에게 칼을 휘두르지않은 인간이기에 이 둘은 오롯이 둘만으로도 하나가 된, 불안하지만 안정적이고 더 무언가 필요하지 않은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그게 아마 이 둘이 죄책감을 버리지않은 가여움에 대한 하나님의 댓가일까.
매일 어딘가를 드나들기 위해 여닫는 문, 타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두껍게 만들고 잠그는 그 문. 물리적인 그 문에는 열쇠가 있어 통행의 가능성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의 마음에 가둔 그 문에는 열쇠가 없어 깨달음을 얻기전엔 절대 나갈 수 없다. 언제나처럼 시련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봄, 여름,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하지만, 행복하다가 시련을 만나면 그 떨어지는 폭이 더욱 커 힘드니까 평생을 이에 대비하며 찾아온 행복을 맘껏 느끼지못하고 앞날의 시련을 준비한다면야, 더욱 그 문은 열기 힘들어지지않을까. 열리지않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아예 잊어버리고 죄책감없이 사는 것보다는 더 훌륭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을 읽고 감동하여 [태엽감는 새]를 썼다고 하지만, 난 역시 여전히 [그 후]가 가장 남는다. 소스케와는 다른, 직업에 대한 다른 원칙이 있던 다이스케가 겪을 생활은 소스케의 소박한 행 복보다는 엄청난 시련일듯 싶어 소스케에 대한 글을 읽고있다가도 다이스케가 떠올랐다. 국가, 사회의 대세와는 다른 운명을 사는 주인공이들이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자기들의 삶을 살지만, 그러기에도 완전한 구원은 이뤄지지않음에 부조리함을 느낀다.
다음엔 그의 후기 삼부작은, [피안이 지날때까지], [행인], [마음]을 읽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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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형서점들과 인터넷 서점 장르 소설 - 추리, 판타지, SF 등 - 코너를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 장르 소설 열풍이 거세지만, 일본 문학계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두 명 -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 “오엔 겐자부로(1994)” - 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순문학(純文學)” 분야에서도 그 성취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일본 순문학 작품들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그나마도 “무라카미 하루키”, “아사다 지로” 등 현대에 활동하고 있는 작가 작품들 정도일 뿐 일본 근현대 문학계를 이끌어온 유명 작가 작품들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어 늘 아쉬움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멋진 작품을 만났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원제 門(1910) / 비채 / 2012년 1월)>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제는 고전(古典)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작품이지만 100 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와 공간에 대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작품이었다.
책은 1910년 어느 일요일 한가로운 일상에서 시작한다. 도쿄 시내에 있는 관청에 다니고 있는 하급 공무원인 “소스케”는 매사에 심드렁한 그런 사람이다. 선친의 유산인 집과 골동품 처리를 숙부에게 일임하면서 동생인 “고로쿠”를 맡겼지만, 숙부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다는 숙모와 동생 학비와 거취 문제, 그리고 숙부의 석연치 않은 유산 처리 문제를 매듭지어야 하지만 미적대며 그저 편지만 보내고는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유유자적하며 보낸다. 아내인 “오요네”도 그런 그에게 몇 번 숙부네로 가보라고 말을 건네긴 하지만 재촉하지는 않는, 말 그대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인 그런 아내이다. 고로쿠는 그런 형 내외가 못내 답답하기만 하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6년 동안 한 번도 반나절 이상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고,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은 더욱 없었던 금실이 좋은 부부다. 둘에게 사회는 그저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는 곳 이상이 아닌 그런 곳으로,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뿐이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한,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산속에 살고 있는 듯한 심정으로 살고 있는 부부다. 한때 그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던 소스케가 이렇게 사회와 동떨어져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숨겨둔 사연이 있었다. 아내인 오요네는 사실 교토대학 재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인 “야스이”의 부인 - 책에서는 야스이와 요오네가 동거 생활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 부부였는지 아니면 애인이었는지 명확하게 언급하진 않는다 - 이었는데 그만 친구였던 소스케와 사랑에 빠져 버리면서 야스이를 버리고 그를 따라나서 버린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숨어 살다시피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기에 행복했지만 그 행복 이면에는 세 번에 걸친 임신 실패라는 커다란 아픔과 슬픔 또한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일하게 서로의 집을 왕래할 정도로 친해진 집주인 남자에게서 옛 친구인 야스이의 소식과 함께 그와 만나는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된다.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이지만 결코 만나서는 안되는 사이였기에 소스케는 야스이를 피하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산사(山寺)로 도피해 버린다. 그곳에서 소스케는 참선(參禪)으로 자신의 번민을 잊어 보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다. 다행히 야스이는 자신이 없는 동안 다녀가는 바람에 다시금 평온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하다. 새봄이 왔다고 좋아하는 오요네에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라고 불퉁거리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면 말이다.
이 책, 중반까지는 참 평온한 느낌이었다. 갈등이라고는 숙부와 얽힌 유산 문제가 있지만 자꾸만 피하려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 때문이지 그다지 긴장감이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중반 이후 소스케 부부의 숨겨진 사연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고개를 든다. 특히 세 번에 걸친 유산의 아픔과 두려움에 눈물 흘리는 오요네와 자신도 가슴 아프지만 그런 아내에게 내색하지 못하는 - 심지어 건강이 나빠진 아내에게 임신한 것이 아니냐며 반색하기까지 한다 - 소스케의 모습에 짠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종반에 이르러 두 부부를 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 - 물론 두 부부가 가해자이고 야스이는 피해자이니 장본인이라고 지칭하면 억울해할 것 같지만 -이자 결코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인 옛 친구 야스이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긴장감은 극에 달하게 되고, 일견 소스케와 야스이가 만나서 파국(破局)으로 치닫거나 또는 화해(和解)를 하는 결말을 기대해보기도 했지만, 숨어 버리고 마는 소스케의 소심한 모습에서 오히려 작위적이지 않은 현실감을 느껴볼 수 있었고, 나또한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처럼 도망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어 버렸다. 결국 다시 찾은 평온,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던 아내는 봄이 온다고 기뻐하지만 마음 고생을 단단히 했던 소스케가 겨울이 올 거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기에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과연 100 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시대를 알 수 있는 몇 몇 단어 - 이토 히로부미, 조선총독부 등 - 만 고친다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부부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글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1910년대 격변기의 시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았던 어느 소시민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렇기에 당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도 이 부부에게는 그저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만 떠들어 대는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선거철을 맞아 쇄신에 통합에 요란 법석을 떠는 정치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 시대 소설 특유의 과장되거나 또는 격정적인 필치가 아니라 밋밋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두 부부를 곁에서 직접 관찰하면서 글을 썼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세한 면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또한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진 슬픔과 아픔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도 역시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끄집어내어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그렇기에 작가의 글솜씨에 취해 책을 읽노라면 어느새 주인공이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바로 우리들 이야기라는 느낌을 들게 만들어 버리는, 제대로 감정이입이 되어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오고 안타까워하며, 다시 찾은 평온함에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게 만든다. 이처럼 100년 전 이야기이지만 전혀 옛날이야기 같지 않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도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이라는 어느 일본 소설가의 평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여기서 제목이기도 한 <문>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 해설에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기 내면의 '문”을 의미한다고 말하는데 좀 어렵다. 또한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는데 역시 어렵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은 소스케가 산사(山寺)를 찾아갔을 때 듣게 되는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 오너라" 라는 대목인데, 열어 달라고 소리쳐도 결코 열리지 않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직접 열어야 만하는 그런 문이다. 소스케에게 그 “문”은 사회와 단절하게 만든 야스이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도 없는, 오직 소스케 스스로가 해결해야 되는 그런 문이지만 소스케는 결국 그 문을 열어 제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다보지만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어 다시 가로막고 서 있는 육중한 문짝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렇다고 날이 저문다고 해서 결코 열리지 않을 문을 바라보고만 서 있는 “불행한” 사람이 바로 주인공 소스케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꼭 불행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문 앞 계단에 앉아서도 편하지는 않겠지만 쉴 수 있을 그런 사람 같아서 말이다. 열어 제치고 들어가는 것도, 여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도, 미련이 남아 계속 머뭇거리는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결국 작가는 “문”이라는 존재를 반드시 부수거나 통과해야만 하는 장애(障碍)가 아니라, 때로는 멈춰 서게 하고, 때로는 쉴 수 있게 하며 때로는 뒤를 돌아보게 하는 다중(多重)적인 의미로써의 “문”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란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전개나 반전, 충격적인 결말은 없었지만 읽은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묘한 여운이 가슴 속에 느껴지는 그런 책이었다. 처음에는 욕설을 연상케 하는 그의 이름 때문에 잊혀지지 않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말끔하게 가셔준 담백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이 책 때문이라도 오래 기억될 그런 작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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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방이 오밀조밀 기능으로 분리된 소박한 일본의 전형적 가옥과 그 안에는 세상과는 얼마만큼 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부부가 보인다. 도쿄 외곽의 한적한 셋집, 번화한 시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적막함마저 감도는 그런 외진 공간. 대화는 없지만 아내는 뜨개질을 하고 남편은 길게 누워있는 어느 일요일의 장면은 밋밋하고 무료함 그 자체임에도 그 어떤 강렬한 모습보다도 마음 깊숙한 무엇을 자극한다. 소설은 이러한 일상적 흐름을 통해 삶의 원형들, 존재의 의미들, 생의 가치를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산사(山寺)길을 걷는 나그네의 모습처럼 그렇게 낮게 타박타박 그리고 있다.
교토(京都)의 대학생,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던 청년, 절친한 친구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이 윤리적 불륜은 세상의 질시를 받으며 인생을 시작하게 한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무의식에 뿌리내린 죄의식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잊힐 것이라 여겨지지만 단지 잠복하고 있을 뿐, 남자의 삶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한 걸음 물러난 초연(超然)함으로 가려진 채 마치 체념처럼 일상이 흐른다. 그리고 유산과 사산으로 연이은 불운은 남자의 아내조차 세상과 단절된 듯한 변두리의 작은 그들의 둥지가 지닌 의미를 강화한다.
남편의 일과 행동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 아내, 아내의 그러함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남편, 그래서 이들 부부가“서로 부둥켜안고 둥근 원을 그리고”,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지만 그것은“쓸쓸한 안정”이란 표현에 가 닿는다. 아내의 병약함, 그런 아내가 작은 셋집에서 시동생까지 뒷바라지 해야하는 상황에 애처로워 하는 남편, 남편의 우유부단과 자기 격리조차에도 배려와 격려를 하는 아내,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심연에 원죄의 의식처럼 침잠해 있는 무엇이 강한 유대와 고립, 불안의 배경처럼 그들의 삶을 쥐어틀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급관리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온통 자기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남자, ‘소스케’는 그러나 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생의 길, 자기 존재성에 대한 가능성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어서, 대인관계가 거의 없는 그가 생활의 여유와 다양한 인간관계, 삶에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주인집 남자‘사카이’에게 호의와 동경을 보인다. 자신의 인생행로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사카이와 같은 삶의 행복을 가지지 않았을까하는 동일시의 기대에서 그것은 더욱 명료해진다.
급기야 주인집 남자로부터 우연히 튀어나온 자신과 아내가 배신한‘야스이’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삶에서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불안의 존재를 각성하게 한다. 상처 받을지도 모를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남자는 막다른 길, 삶의 장벽에 막혀버린 듯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종교, 불교의 참선의 장, 자기 존재, 삶의 행로에 대한 문(門)의 물음으로 달려가기에 이른다. “마음을 다스려 집중하면 일체의 감각과 지각이 끊어지고, 육신이 철봉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만큼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선불교의 좌선의 행위처럼 “혼자의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존재에 대한 힘겨운 물음에 인내하지 못한다. 결국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남자가 하는 행동은 집에 돌아와 혹 아내가 야스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불안만을 확인한다.
세상의 시선과 닿지 않은 도시 속 시골과 같은 공간, 그리고 극히 자기표현이 억제된 부부의 소박한 평온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 잠재하고 있는 쓸쓸함의 본질을 탐색하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쫓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에 뭉쳐졌던 무엇이 떠올라 하~아~하는 탄식이 뱉어진다. 닫혀져 있는 문 앞에서 나 역시 항상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왔던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어쩌면 끝내 소스케처럼, 또는 오요네처럼 인생의 문, 내 존재의 문을 열고 저 쪽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을 포기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본래 열지 말아야 하는 것일지도, 인생이란 그 모름의 불안과 고적함, 무력할 수밖에 없는 무엇일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인적 끊긴 산사의 눈길을 마냥 걷고 싶도록 하는 소설이다...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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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친구들에게 '여름 눈 송아지(나쓰=여름, 메=눈, 소세키는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의 의미)'씨로 불리던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문학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일본 가서 생활할 때 필요한 말은 스미마셍, 도우모, 도우조+나쓰메 소세키야' 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이 여름 눈 송아지씨는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할 말이 없어지면 나쓰메 소세키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의 운을 띄워 보라고, 그럼 그 일본 사람이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길 거라던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대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길래-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직결되었다.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일본작가 중 대다수가 자신의 문학적 영혼의 근거로 들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대학 때는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행간의 여운까지도 곱씹었었는데, 맙소사! 그게 대체 몇 년 전이람!
[그 후], [산시로]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이라 불리는 [문]은 임용고시 문제에도 출제된다 하여, 기계적으로 열심히 외웠었다. 하지만 직접 작품을 만나 볼 기회도 없었고 어쩐지 시험 문제용 작품같아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참에 이렇게 접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 그지 없다 할까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름 눈 송아지씨의 작품을 몇 편 읽어본 경험으로는 꽤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약간 기대를 했는데, 그 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큰 재미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굴곡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또한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소스케. 아내와 함께 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남자다. 큰 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쉬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며 휴일에는 뒹굴뒹굴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으로 휴일을 즐기는 별 특징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의 아내 오요네도 조용한 여인으로 때 되면 밥 하고 집안일하고 직장 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인 평범한 주부. 그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스케의 동생 고로쿠다. 사실 고로쿠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으로 그가 상상했던 삶과 실제로 지내는 삶의 간극이 너무 커서 방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무리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동생인 그의 눈에도 소스케는 참으로 우유부단하고 생기없는 남자인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노부부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데다,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아이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삶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저 고요할 뿐이다. 초반을 거쳐 중반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계속되는 그런 분위기에 슬쩍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런 분위기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의 관계가 불륜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부인이었던 오요네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소스케의 가정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을 업보라 여기며 소스케와 오요네는 조용한 삶을 자청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소스케에게 '문'이란 소스케 내면의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오요네를 얻은 대가로 자신의 죄를 늘 의식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그 문은 결코 그냥 통과할 수도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없이 오롯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표식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도 친구의 신의를 배신한 주인공을 내세워 그것을 인간의 존재와 결부시켜 표현했었는데 [문]을 읽고보니 작가는 그런 인간의 비겁한 마음들을 소재로 한 번의 잘못된 선택들이 그 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작품은 소박하게 끝이 난다. 오요네가 봄의 기운을 느끼고 기뻐하자 소스케는 금방 또 겨울이 올 거라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예전 배신했던 야스이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한 번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목소리같기도 하다. 결국 자신과 오요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보여져왔으며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생의 굴곡에 걸맞지 않게 단조롭게 쓰여진 작품이라 -재미있다-고 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여운이 느껴지고, 그 여운에 자꾸만 빠져들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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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래도 역시 그 수식어의 주인공이 심상치 않음을 뜻하는 것일 게다. 이 사람 역시 자신의 소명 앞에 '국민'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으니 바로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인 것이다. 지금은 밀려났으나 일본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등장시켰다니 오호라, 모든 작품은 다 읽지 않았다 한들 전국민이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렷다. 그러나 나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에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도전했다 나가떨어진 주변의 수많은 고뇌를 지켜본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일단 그의 '대표'로 꼽힌 작품이 그렇게 힘이 든다는데,라고나 할까.(게다가 동생 역시 <산시로>에 도전했다 포기. 주변에 나쓰메 소세키에 도전했다 나가떨어진 사람이 내 주변엔 너무 많았다.)
그러다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을 읽게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세계를 처음 만난 것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겁을 먹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굉장히 재미가 있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부부로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고 이웃과의 교류가 활발한 것도 아니지만, 서로가 있어 나름대로 행복하고 평화롭다. 그런 부부 생활에 어린 시절 숙부댁에서 자라온 소스케의 동생 고로쿠의 거취를 새로 결정하면서 동생과 함께 살게 되고, 주인집에 도둑이 들면서 그와 친분이 생기기도 한다. 별다른 극적인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이 진행되어 갈수록 그 젊은 부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과거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사히 신문에서 <그 후>에 이어 다음 차기 연재작을 결정해야 했을 때, 나쓰메 소세키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구상하고는 있었으나 마땅한 제목을 짓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부탁한 것이 자신의 제자에게 제목을 지어달라고 한 것인데, 그렇게 '우연히' 탄생하게 된 것이 <문>이라는 제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지어진 제목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그 제목의 상징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게 작품의 탄생 비화를 어느 정도 듣고 난 뒤에 <문>이라는 작품을 풀어나간 나쓰메 소세키의 작가적인 역량에 감탄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실 그 이야기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에피소드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그야말로 20세기 초반 도쿄에서 살아가고 있는 부부의 일상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일요일에 방 한가운데에 누워 빈둥거리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아내의 대화에서 시작해 '고로쿠'라는 인물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스리슬쩍 비집고 들어오고, 집 주인과의 끈이 연결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부부가 품고 있는 사연이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 역시 언제 가을에서 겨울, 그리고 또 다시 봄이 다가오고 있나 싶을 정도로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 자연스럽고 고요하면서도 그들이 안고 있는 사연이 차츰 드러나면서 그 재미에 푹 빠져 정말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에, '국민작가'라는 칭호에 납득하고도 남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문>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부부의 일상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그 둘을 강하게 감싸고 있는 연대감과 애정,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과거사가 살짝 드러나는 과정─그리고 이것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과 마지막 소스케가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짧은 수행을 떠나 그 곳에서 발견한, 앞을 가로막는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장면이다. 특히 결말 부분의 '문'은 그로 인해 이 소설이 <문>인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그리고 물론 그러려고 연재 중 작가가 구현해 낸 것이겠지만) 강렬하다.
비록 일본 근대 문학 속의 등장인물이지만 소스케라는 캐릭터는 '그 당시 사회 속을 살아가는 이는 이랬구나'가 아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인물상이다. 나는 소설 속 그의 성정을 비난하고 배척하기는 커녕 그는 나와 참 많이도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몫을 해 내는 인간이 되고 싶으면서도 과거 어디엔가 얽매여 마음 속에서 죄의식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스케를 온전히 야단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문 앞에 섰으나 그 문을 열지 못한 채 일상으로 되돌아간 소스케를 누가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소스케와 오요네는 그렇게 여전히 또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다만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감에도 둘의 모습은 나름대로 아름다워서, 그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자업자득으로 그들의 미래를 지워버렸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걸어가는 앞에는 미래 같은 희망은 있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둘은 그저 손을 마주 잡고 같이 걸을 뿐이었다._p.44 그렇긴 해도 하루에 한 번쯤은 고로쿠의 모습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고, 그때만은 소스케에게도 그 녀석의 장래 문제를 어떻게든 생각해봐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금방, 뭐 그렇게까지 서두를 것까지는 없지, 라고 스스로 지워버리고 마는 게 예사였다._p.63 부부는 여느 때처럼 램프 아래에서 얼굴을 마주 댔다. 넓은 세상에 자기들이 앉아 있는 곳만이 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밝은 그늘에서 소스케는 오요네만을, 오요네는 소스케만을 의식하며 램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사회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기들의 생명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_p.75~76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본다면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볼 적에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두 사람의 정신을 조립하고 있는 신경줄은 마지막 섬유질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부둥켜안게 돼 있었다._p.172 서로 부둥켜안고 둥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은 쓸쓸한 대로 안정되어갔다. 그 쓸쓸한 안정 속에서 일종의 달콤한 비애를 맛보았다._p.218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는 앞을 바라다보았다.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_p.264~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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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거창한 질문인가. 생각해 보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향하는 쪽의 끝에는 행복과 구원이 있다. 오롯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이에게 세상과 다른 사람의 삶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족, 이웃, 사회와 적당히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 사는 건 이렇게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에 등장하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가 바라는 삶도 그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지만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동네를 산책하는 일만으로 충분했다. 바느질하는 아내와 한가롭게 누워 잡지를 읽는 남편의 모습. 비 오는 출근길엔 남편 소스케의 구멍 난 구두를 보며 하나 장만해야 한다고 거드는 아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소스케의 일상은 단조롭다. 출근과 퇴근 후 오요네와 저녁 식사와 짧은 대화. 부족한 게 없는 듯 보이지만 허전함이 느껴진다. 주인집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허전함의 원인이 바로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 소설 초반에 아이에 대한 계획이나 언급이 없어 혼자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복선처럼 깔리는 작은 집과의 문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소스케의 태도는 『산시로』와 『태풍』 속 등장인물과 비슷하다. 어떤 다급함이나 간절함은 찾기가 어렵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다르게 흘러가는 게 삶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고요한 풍경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부부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소스케의 남동생 고로쿠의 거처였다. 고로쿠는 아버지의 죽음 후 숙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과 유산을 숙부가 관리했고 소스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숙부가 죽었고 숙모는 더 이상 고로쿠의 학비를 지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고로쿠는 형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기를 바랐지만 소스케는 차일피일 작은집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고로쿠가 자신처럼 대학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딱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오요네도 다르지 않았다. 소스케를 채근하는 대신 남편의 의견에 동조할 뿐이다.
고로쿠는 오요네가 화장대를 놓고 쓰는 방으로 옮겼고 당분간 숙모가 학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자신의 공간이 사라졌지만 오요네는 불만을 말할 수 없다. 고로쿠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결석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일이 잦다. 그런 고로쿠에게 형과 형수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모습은 뭐랄까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하다 정도는 아니지만 평탄하게 흐르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주인집에 든 도둑이 소스케의 집 뒤꼍에 서류함을 버리고 간 것이다. 물건을 돌려주는 일을 계기로 주인인 사카이와 교류가 잦아진다.
풍족한 삶,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모습과 소스케와 오요네의 단출함을 비교하면서 그들 부부의 과거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부유한 대학생이었던 소스케, 친구의 누이로 만난 오요네. 둘은 점차 친밀해지고 친구가 병을 얻어 요양을 떠난 곳까지 소스케는 찾아간다. 그 이후 소스케는 친구를 배신하고 학교에서 퇴출당하고 부모를 버렸다. 짐작했겠지만 오요네는 누이가 아닌 아내였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유산과 아기의 죽음. 오요네는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 믿었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더 깊어져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하지 않은 대신 육 년의 세월에 걸쳐서 서로의 가슴을 파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본다면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볼 적에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172쪽)
육 년이라는 시간을 둘만을 바라보며 하나로 살아온 그들에게 고로쿠의 미래와 사카이와의 교류는 뿌리를 흔들 정도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사카이의 입에서 몽골에서 온 동생과 동생의 친구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친구는 바로 오요네의 전 남편이자 소스케의 친구였다. 그들을 소개해 준다는 사카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스케는 전전긍긍한다. 관청 일도 집중할 수 없고 오요네에게 말할 수도 없다. 소스케는 병가를 내고 산사로 도망친다. 소스케의 행동은 비겁하다. 소세키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삶의 위기는 가능하다면 모면하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소스케가 얻은 건 무엇이고 깨달은 건 무엇일까.
제목인 『문』이 의미하는 건 내면의 ‘문’이었다. 저마다 하나씩 간직한 자신만의 문. 그 문을 열 용기와 힘은 결국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누군가 문을 열고 지나갈 것이고 누군가 문을 외면할 수도 있다. 소스케처럼 처량하게 그 옆을 지킬 수도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264쪽)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짝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265쪽)
『산시로』와 『태풍』보다는 좋았던 소설이다. 담담하고 슴슴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가을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문』은 가을에 읽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어 새해를 맞이하고 봄을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 인생이라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로 기뻐요. 이제 봄이 되어서”란 오요네의 말에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대답하는 소스케의 말은 묘한 여운을 안겨준다. |